<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마지막 주제는 ‘신이 존재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Can we ever know if God exists?’이다. 종교의 문제로 서로 죽고 죽인 역사의 현장에 직접 가본다면 아마 종교를 믿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 정말 한 종교는 맞고 다른 종교는 틀린 것일까?
과학은 이제 신이 진화의 부산물로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도킨스의 책 제목을 보라). 인지적 부산물 가설은 인간의 뇌가 종교적 믿음을 갖도록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현상에서 원인을 찾는 성향이 이득이라는 것이다. 부스럭거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맹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 도망갈 때 커다란 이득을 준다. 오늘날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종종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존재 증거는 과연 있을까? 예전의 많은 형이상학적 증명은 더 이상 타당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유신론자들은 자연의 미묘한 복잡성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이 주장의 현대판이 지적설계론이다). 하지만 과학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이제 현대의 유신론적 철학자들은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신의 존재는 어떠한 정당화나 증거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이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신의 개념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전지전능한 신은 과연 자신이 알 수 없는 비밀을 창조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객관적) 증거는 없다. 많은 이들은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 결론은 아니다.
여전히 종교는 ‘결단’의 영역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적 종교는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점점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 도킨스가 공격하는 신도 아브라함적 신이다. 특히 아직도 미국 개신교의 강고한 영향 아래 빅뱅 우주론이나 진화론을 성경의 창세기와 양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 개신교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사가 얘기하듯이, 불가지론만이 논리적, 이성적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캄캄한 밤하늘, 쏟아지는 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종교적 감정이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우주라는 관점을 통해 내가 나를 벗어나는 것, 초월, 존재의 본질을 봄, … 이러한 것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다음에 옮긴 칼 세이건의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우주Cosmos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사고력은 극히 빈약하지만 우주를 생각하노라면 우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는 달뜨며 먼 옛날을 회상하는 것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흥분한다. (코스모스, 서광운 역)
칼 세이건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회의주의가 인류의 소중한 가치라고 주장했다. 그 두 가지가 오늘날의 인간과 문명을 만들었다는 데에 (이과생인 나는) 동의한다. 개인적 결론은, 인간은 원래 종교적이며 종교적 감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현대의 종교는(특히 한국 개신교는) 시대에 뒤처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