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발전 시기를 다룬 책은 여러 권이 있는데 나름 장단점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데이비드 린들리의 <불확정성>이다. 짧지만 핵심을 잘 짚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좀 두껍고 다루는 시기도 훨씬 뒤까지인 짐 배것의 <퀀텀 스토리>도 있다. 물리적인 내용이 좀 더 자세하다. 그 다음 떠오르는 고전은 가모프의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이다. 코펜하겐에서 직접 보어와 함께 일했던 물리학자로서 당시의 일화와 양자역학의 발전 상황을 잘 그리고 있다. 
















최근 나온 <불확실성의 시대>는 당시의 시대상을 현재형으로 서술하여 좀 더 몰입할 수 있게 하는데, 비슷한 형식으로 서술된 책으로는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이 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과 종종 나오는 짧은 챕터들은 에릭 라슨의 <폭격기의 달이 뜨면>을 떠오르게 한다. 
















양자역학의 역사와 핵심을 빨리 알고 싶은 분에게는 우선 <불확정성>을 추천하겠다. 만약 물리학자들의 인간적 면모와 당시 상황을 좀 더 느긋하게 자세히 알고 싶은 분에게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추천한다. <퀀텀 스토리>에도 당시의 상황이 잘 나오긴 하는데 좀 더 전문적이다. 대신 1945년 이후의 양자물리학 발전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은 그야말로 고전이다. <불확실성의 시대>는 여러 책들의 장점을 취한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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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1-05 0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을 펴낸 출판사가 오래전에 나온 책을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책을 출간하는 악습이 있어서 그쪽 출판사의 책은 되도록 안 사는 편이에요. ^^;;

blueyonder 2024-01-05 09:09   좋아요 1 | URL
전파과학사가 오래된 출판사이지요. 예전에 과학관련 책이 별로 없을 때부터 나름 좋은 책들을 많이 냈습니다. 하지만 이후 큰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불확실성의 시대 -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토비아스 휘터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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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이다. 매우 적확하다. 1900년 플랑크의 양자가설부터 시작해서 양자역학이 만들어지는 1920년대까지는 엄청난 지적 격동기였다. 여러 천재들의 노력으로 탄생한 양자역학은 자연에 대해 상상할 수 없던 기이한 그림을 우리에게 안겨줬다. 인류의 지적 역사에 있어 정말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진정 '찬란하다'. 하지만 이렇게 밝혀진 원자의 신비가 결국 인류에게 원자폭탄이라는 재앙을 선사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어둡다'. 이 시기에 걸친 두 번의 세계대전은 물리학자들을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게 만들었으며 결국 괴물을 낳게 만들었다. 20세기는 진정 물리학의 세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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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번역이 괜찮은 편이지만, 한 단어의 잘못된 번역이 지속적으로 나와 글을 적는다. 역자는 영어로 "stationary state"라고 하는 것을 "정지 상태"로 계속 번역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서 "stationary state"는 에너지 고유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에너지 고유상태는 외부 자극 없이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상태에 남아있는 성질을 지니며, 이에 따라 "stationary"란 말을 갖게 됐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의 의미이다. 이 단어를 "정지"로 번역하는 것은 의미의 왜곡을 가져온다. 물리학계에서 사용하는 번역어는 "정상定常"이다. 일상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이공계에서는 많이 보는 단어이다.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는 양자역학을 주로 다루며 여기서 "정상 상태"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은 단어임에도 지속적으로 "정지 상태"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원자의 "정지 상태"가 '움직이지 않는 원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오해의 여지를 준다. 책 속 여러 곳에 이 단어가 나오는데, 두 군데만 다음에 옮겨 놓는다. 먼저 보어의 논문을 인용한 부분이다.  


"우리는 특정 정지 상태의 원자가, 고전이론에 따라 원자를 다른 정지 상태로 다양하게 전달하는 가상의 조화 진동자가 발생시키는 가상의 복사장과 거의 동등한 가상의 시공간 메커니즘을 통해, 다른 원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54 페이지)


역시 보어의 말은 모호하고 어렵다. ^^ 다음은 코펜하겐으로 보어를 방문한 슈뢰딩거가 하는 말이다. 


"보어 교수님, 양자 도약에 대한 모든 상상은 난센스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양자 도약 주장에 따르면, 원자의 정지 상태에서 전자는 우선 빛의 방사 없이 한 궤도에서 주기적으로 순환합니다. 그러나 전자가 왜 빛을 방사하면 안 되는지 해명하지 않습니다. (267 페이지)


한 해 동안 누추한 서재를 방문하여 격려해 주신 알라딘 친구분들께 감사드린다. 새해에도 더욱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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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하지만 맥락이 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인 "steady state"도 정상 상태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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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12-31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즐건 일만 가득하세요. ^^

blueyonder 2023-12-31 17:26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 님,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시작. 쿤데라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의미. 영원회귀하지 않는 우리의 일생은 '가볍다'. 그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


The idea of eternal return is a mysterious one, and Nietzsche has often perplexed other philosophers with it; to think that everything recurs as we once experienced it, and that the recurrence itself recurs ad infinitum! What does this mad myth signify? 

  Putting it negatively, the myth of eternal return states that a life which dissappears once and for all, which does not return, is like a shadow, without weight, dead in advance, and whether it was horrible, beautiful, or sublime, its horror, sublimity, and beauty mean nothing. We need to take no more note of it than of a war between two African kingdoms in the fourteenth century, a war that altered nothing in the destiny of the world, even if a hundred thousand blacks perished in excruciating torment. 

...

  If the French Revolution were to recur eternally, French historians would be less proud of Robespierre. But because they deal with something that will not return, the bloody years of the Revolution have turned into mere words, theories, and discussions, have become lighter than feathers, frightening no one. There is an infinite difference between a Robespierre who occurs only once in history and a Robespierre who eternally returns, chopping off French heads. 

  Let us therefore agree that the idea of eternal return implies a perspective from which things appear other than as we know them: they appear without the mitigating circumstance of their transitory nature. This mitigating circumstance prevents us from coming to a verdict. For how can we condemn something that is ephemeral, in transit? In the sunset of dissolution, everything is illuminated by the aura of nostalgia, even the guillotine. (pp. 3-4)


"영원회귀라는 생각은 신비롭다. 니체는 이 생각으로 다른 철학자들을 종종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우리가 한 번 경험한 그대로 반복되며 이 반복이 무한 번 계속된다니! 이 말도 안되는 신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반대로 생각하면, 영원회귀의 신화란 한 번 사라지면 끝이며 다시 반복되지 않는 일생이 무게도 없으며 처음부터 죽어있는 그림자와 같음을 말해준다. 일생이 끔찍하거나 아름답거나 숭고할지라도, 이 끔찍함, 아름다움, 숭고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4세기 두 아프리카 왕국 간의 전쟁, 수십 만이 잔혹한 고통 속에서 죽었음에도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이 전쟁을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만약 프랑스대혁명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프랑스 역사가들은 로베스피에르를 덜 자랑스워할 거라고 얘기할 수 있다.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대혁명의 피로 물든 세월이 단지 말과 이론과 논의로 바뀌어 깃털보다 가벼워지고 누구에게도 공포를 선사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에 단 한 번 나타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반복해서 나타나 프랑스인들의 목을 베는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라는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게 사물이 보이게 하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해두자. 덧없음이라는 정상참작 없이 사물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덧없음이란 정상참작으로 인해 우리는 선고를 유예하게 된다. 금새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는가? 사라짐의 황혼 속에서는 모든 것이 향수鄕愁란 빛에 휩싸이게 되는 법이다. 단두대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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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는 흥미롭고 좋은 책이다. 많이 알려진 양자역학의 역사를 당시의 시대상과 대비하며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풀어내고 있다. 양자역학은 기존의 뉴턴역학과는 좀 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했는데, '과연 이 이론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이냐'였다.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이가 닐스 보어였다. 닐스 보어는 당시의 여러 젊은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는데 이후 양자역학의 본격적 발전에 후견인 역할을 한다. 


책에는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처음 만나서 산책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하이젠베르크의 회상록인 <부분과 전체>에도 나와 있다. 


  두 물리학자는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론스Rhons'라는 카페에서 잠시 쉬며 기운을 차린다. 하이젠베르크가 묻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자를 올바르게 이해할 전망은 전혀 없습니까?" "당연히 있어요.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배우게 될 것입니다." (131~132 페이지)


이때는 1922년 6월로, 하이젠베르크가 헬골란트 섬에서 행렬역학을 착상하기 3년 전이다. 로벨리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Helgoland>에서 헬골란트 섬에 간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낸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불가해성을 라바투트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소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양자역학이라는 불가해한 도구를 손에 쥐고 라바투트가 묘사한 것처럼 이 세상의 이해를 포기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앞서 나온 보어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우리는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묘한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의 '이해'는 거시세계에 기반한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서를 말한다. 비록 거시세계에 기반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미시세계가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활용해서 반도체 메모리를 비롯한 여러 장치를 만들어 쓰고 있다. 우리가 미시세계를 정녕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종종 언급되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의 말이 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I think I can safely say that nobody understands quantum mechanics." 이 말은 여러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파인먼은 양자역학의 도사master이다. 그가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의 '이해'는 거시세계에 기반한 우리 상식에 비춘 이해이다. 예컨대 전자는 입자라고 하지만 우리가 친숙히 알고 있는 입자인 당구공이나 구슬과는 다르다. 전자를 당구공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전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자는 기묘한 성질을 갖는 '전자'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전자를 이해하고 있다. 보어가 말했듯이 양자역학은 우리가 지닌 언어 자체까지도 되새겨 보며 그 한계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더불어 과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요즘 들어 보어가 더욱 위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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