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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다윈의 동행 -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
신재식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개신교의 대부분은 진화론을 절대 배격하며 창조과학을 옹호한다. 이 책은 갈릴레오, 뉴턴 등을 통해 근대의 합리적 세계관을 개괄하고, 이 세상의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진화론에 대해 설명한다. 이를 통해 '진화론적인 유신론'이 가능함을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풍토에서 이러한 노력은 정말 인정 받아야 하며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단점은 '진화론적 유신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매우 짧게만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러 여정을 통해 결승점에 도달했는데, 그 결승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보다 결승점까지 가는 과정에 치중한 느낌이 든다. 아마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들어보려면 다음 책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 개신교계는 지구가 둥근지도 모르던 2000~3000년 전의 세계관에 기반한 성경을 과학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과학을 과학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의 비과학적 진술은 비유나 은유로 받아들이면 성경의 모든 구절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는가.
과학이 만능이 아니라면서(즉 진화론은 틀렸다면서), 창조론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을 동원하는 창조과학 옹호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자기모순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창조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동원하는 (불가능한) 과학만능주의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사는 것을 깨달아, 나만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결국 나의 이득이 됨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보다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화론적 유신론은 그리스도교가 다윈 이전이 아니라 다윈 이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화하는 우주는 전통적인 신학이 다뤄 온 세계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습니다. 진화 신학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며 태초의 창조, 계속 창조,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신, 세계 속에서 구현되는 신적 창조성, 악과 고통의 현존, 심지어는 궁극적 창조인 종말까지 새롭게 바라보려 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에 근거한 신학은 진화를 그리스도교 신학이 변증해야 하는 도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신 이해를 위한 가장 중요한 맥락으로 삼으려 합니다. - 410페이지
종교과 과학은 우리가 생명 세계를 여행하면서 각기 다른 관점에 따라 다르게 만든 두 개의 지도와 같습니다. 실측 지도와 문화 지도가 동일한 대상을 나타내지만 그 표현이 다르듯이, 종교와 과학도 생명 세계라는 같은 대상을 목적에 따라 달리 만든 두 개의 지도입니다. 과학은 사실성과 객관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지도이며, 종교는 의미와 주관성이라는 문화적 측면을 강조한 지도입니다. - 418페이지
호트는 하나의 독법만으로, 즉 오직 한 가지 차원에서 우주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문자주의적 독법"이라고 규정합니다. 문자주의적 독법의 특징은 다른 독법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까닭은, 양쪽 모두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오직 한 차원에서만, 즉 자기 수준에서만 이해하려는 ‘문자주의적 독법‘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424 페이지
호트는 창조-진화 논쟁도 바로 이 독법의 문제를 둘러싼 두 문자주의의 대립 때문으로 봅니다. 이 논쟁의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라는 ‘성서적 문자주의‘와, 과학적 환원주의 같은 유물론적 과학자의 ‘우주적 문자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두 문자주의는 모두 우주와 생명의 모든 것을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1차원적 독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 모두는 각기 ‘교리주의적 환원‘과 ‘물리주의적 환원‘을 그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의 동행들에서 교리주의적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법을 ‘종교적 문자주의‘로, 물리주의적 환원을 속성으로 하는 독법을 ‘과학적 문자주의‘로 불러 왔습니다. - 424페이지
저는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비지성주의와 반과학주의가,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춘, 전부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 43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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