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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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과학은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고 자연의 ‘진상’을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과학 이론, 과학하는 방법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여러 경쟁하는 이론--‘실천체계system of practice’--가 서로 보완하는 과학적 다양성, ‘과학의 다원주의pluralism’이다. 그가 과학의 다원주의의 예, 특히 지적 분업의 예로 드는 것은 로켓을 쏘는 데 유용한 뉴튼역학, 미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양자역학, 태양계보다 훨씬 큰 것들을 논할 때 쓰는 일반상대성 이론이다. 각각 유용한 범위에서 잘 쓰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에 무슨 유용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끈이론 하는 물리학자들이 들으면 분명 기함할 이야기이다. 그가 ‘진리’ 추구를 하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과학’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딱히 어떻게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약간 포커스는 다르지만 리 스몰린의 <The Trouble with Physics>에서 끈이론 연구자들이 다른 접근 방법을 어떻게 배척하는지 읽은 터라 과학의 다원주의에 동의하지 않기가 어렵다.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일반인이나 과학 전공자 누구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책 속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 현대 과학철학 논의에서 실재론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중요한 직감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은 너무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데, 그 과학이론에 진실성이 없다면 그런 성공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퍼트넘Hilary Putnam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는 철학은 실재론뿐이다.” 핵폭탄을 맞고도 핵물리학의 진리를 의심할 것인가? 몇 메가헤르츠MHz 주파수를 맞춰서 FM 라디오를 들으면서 맥스웰과 헤르츠Heinrich Hertz의 전자기학 이론을 부정할 것인가? (158 페이지)
  실재론자들의 직감에 대해 반프라센은 멋진 ‘진화론적’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반프라센은 캐나다 사람인데 미국에서 쭉 활동했고, 현재 전 세계에서 반실재론 철학자 중 제1인자로 꼽힙니다. 과학이 성공적이므로 실재론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면서, 반프라센은 과학의 성공은 생물이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과 같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경험적으로 엄격히 시험해서 그중에 성공적인 것만 놓아두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립니다. 그러니 살아남은 것은 당연히 성공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 결과만 보고 과학이 어떻게 이렇게 성공적인 이론만 만드느냐며 탄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습니다… 성공했다는 말 자체가 살아남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은 것은 다 성공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성공적이라고 해서 실재론을 믿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159 페이지)

  저는 인간이 진리를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열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특히 일신교인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였던 유럽인들이 과학을 처음으로 제대로 발전시켰을 때 가지고 있던 관념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유럽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 기준으로 보면 광신자들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유럽여행을 가본 독자들은 느꼈을 것이고, 안 가본 독자들도 사진만으로도 느꼈을 겁니다.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대성당들, 기가 막히게 조립한 그 거대한 석조 건물들을 트럭도 없고 크레인도 없을 때 엄청난 비용을 들여 지었습니다. 그들은 짓다가 사고가 나서 죽어가면서도 몇 백 년씩 걸려서 대성당을 올려낸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 권력도 교회가 좌지우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전을 한답시고 중동까지 말 타고 가서 난동을 부리고, 기독교끼리도 종교전쟁을 해서 서로 죽이고, 종교재판을 해서 이단자를 고문하고 처형하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유럽의 과학적 문명이 더없이 훌륭하고 그렇기 때문에 저도 거기서 살고 있지만, 그 역사를 보면 엄청나게 경건하고 광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과학자들도 많은 경우 그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뉴튼도 천문학이나 물리학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섭리를 알아내고자 했고, 신학 연구 자체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물리적 운동량이 보존된다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주장 역시 신이 창조한 것이니 더 이상 늘지도 않고 파괴될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인슈타인도 물리학의 기본원리는 신이 정해주신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순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을 확률적으로 이해하는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할 때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학생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인슈타인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신이 뭘 하고 노는지 그가 어떻게 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보어는 왜 신과 연락이 안 되고 자신은 된다고 하는지, 굉장히 교만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아인슈타인을 정말 존경하면서 자랐는데 ‘이 사람이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배반감을 느꼈습니다. 아인슈타인 이후에도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은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y 등을 추구하며 우주를 움직이는 기본적 원리는 궁극적 진리를 표현하는 단 한 가지 이론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일신교의 종교적 태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과학이 실행되는 형태를 보면, 이런 진리의 추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옛날 과학자의 영웅담만 듣지 말고, 현재 과학이나 공학을 연구하는 보통으로 훌륭한 동료나 친구 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매일 무엇을 하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 수많은 과학자들 중 초끈이론이나 우주론 같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 빼고 ‘진리’ 같은 것은 걱정 안 하고 세세한 내용의 ‘모델링’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를 꿈꾸던 시절, 저는 그런 실태를 알고 나서 그런 식의 과학은 공학에 불과하다고 천시했습니다. 또 1장에서 얘기했던 대로 문제나 풀라는 식의 과학교육에 강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진리의 후보라도 될 수 있는 이론적 원리를 기반으로 해야 자연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해를 저버린 채 데이터 수집이나 문제 풀기나 기술적 응용에만 신경을 쓰는 과학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포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철학용어를 몰랐지만 실재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패기가 없어져서 그런지, 어떤 형태가 되었건 지식의 추구는 다 존중하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는 사실을 배우고, 밝혀낸 사실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넘는 ‘진리’를 꿈꾸는 것은 주제넘고, ‘진리’가 정말 궁극적인 것이라면 과학이 다루기 힘겨운 일 아닌가 생각합니다. (163~166 페이지)

… ‘참’에는 적어도 … 세 가지의 중요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그 의미를 어느 정도라도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상, 진실, 진리라는 세 가지의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전부 한문 ‘참 진(眞)’ 자를 앞에 둔 후 어떤 참이냐를 구분해 주는데, 참 훌륭합니다. 영어에는 이렇게 세분된 단어가 없고 다 뭉뚱그려서 ‘truth’라고 합니다. 영어권의 법정에서 증인들은 ‘truth’를 이야기하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그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법정에서 증인이 나와서 ‘진리’를 말하겠다고 하면 아마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아니라면 정신병자일 것입니다(예수나 부처일 확률은 적고, 정신병자이겠지요).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필요한 개념분화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어권 철학에서는 실재론을 버리기가 참 힘듭니다. 우리말로는 ‘진리에 집착하지 말고 진상을 밝히는 데 집중하자’고 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영어로 ‘truth’를 포기하자면 진상도 밝히지 말자는 이야기로 이해되어버리기 때문에 큰 반대에 부딪힙니다. 그러면 한국어가 영어보다 철학적으로 더 훌륭한가요?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싫습니다. 우리말에서도 뭉뚱그려진 ‘참’이라는 개념은 영어의 ‘truth’라는 개념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하는 철학논의를 봐도 ‘참’의 개념이 그리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언어적 우월감을 느끼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경우에 있어서 영어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되는 철학의 어려움을 우리가 그대로 이어받지는 말자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언어마다 각각 개념적 장단점이 있고 그 때문에 다국어를 알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167~168 페이지)

  제가 볼 때 과학적 실재론은 실재에 대한 것을 최대한 배운다는 우리 자신과의 약속 또는 결심commitment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일종의 이념, 이데올로기입니다. 과학을 추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맥락에서 ‘실재론’이라는 표현이 별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론(論)’은 무엇이 어떻게 생겼다는 ‘이론’과 같은 어감이 강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이데올로기 등을 지칭하는 ‘주의’라는 단어를 써서 ‘실재주의’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규범성을 내포한 말입니다. ‘과학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과학을 이렇게 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진 실재주의의 입장은 능동적인 것으로, 과학은 가능한 한 실재에 대해 최대로 연구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실재주의에 의하면, 과학은 실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길을 우리 능력이 닿는 대로 추구하면서, 그 과정에 도움이 된다면 서로 상충하는 이론체계들도 동시에 허용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171~172 페이지)

… 진리의 대응론은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고, 정합론은 이해는 되지만 이론과 실재의 관계를 잘 이야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이론과 실재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말로 하기가 어려워서 일단 그림으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잔잔한 연못 위에 비친 그 집의 모습이 너무 멋져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보통 실재론자들이 생각하는 이론과 실재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사진의 윗부분에 명확히 나타난 건물이 실재의 모습입니다. 그 실재가 우리의 과학이론을 통해 표상되는 것이 물에 비친 모습입니다. 물에 비친 모습은 실재의 모습과 비슷하기는 한데 실재를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물결이 일어서 가장자리는 본래 모습과 달라진 데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수면에 반사된 모습은 약간 흐릿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표상하는 이론들을 더 잘 발전시켜서 실재와 가능한 한 똑같이 하느냐’가 실재론적 과학의 목표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거꾸로 보자고 제안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복잡하고 간결하지 못한 것이 실재의 모습이고, 실재를 표현하고 기술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이론은 깨끗하고 단정하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재의 모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만드는 이론은 노력해서 깨끗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만들어놓은 이론은 관측내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기 쉽고, 또 실재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인간의 사고와 이해를 돕기 때문에 무척 유용합니다. 또, 아름다운 이론을 세워놓고 그것에 감탄하다 보면, 일종의 경건한 마음까지도 듭니다. 

  과학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쓰고, 우리가 잘 다루는 수학으로 풀고, 여러 가지 현상을 이상적으로 단순화하기도 하는 식으로 아주 깨끗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은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하고 좀 이해하기도 힘들고 참 오묘하게도 복잡합니다. 즉, 여러 가지 실험이나 관측을 해보면 결과는 그렇게 단순하고 깨끗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전통적 실재론적 입장에서는 실험기구가 부정확하거나 혼선을 일으키는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우리가 관측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서 관측결과가 깔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실재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단순하고 깨끗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그것 또한 일신론적인 종교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왜 자연을 그렇게 지저분하게 창조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이 어떤 마음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는지 인간이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제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카트라잇Nancy Cartwright 교수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카트라잇은 과학이론에 나오는 자연의 법칙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현상적 법칙phenomenological law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아낸 자연의 진상을 가능한 한 그대로 표현합니다. 그 내용은 굉장히 복잡하고, 특정한 상황의 세세한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반면, 기초이론 또는 기본적 법칙fundamental law은 그 복잡하고 지저분한 현상적 법칙들을 단순화하고 통합해서 표현합니다. 기본적 법칙들은 사실 관측 데이터와 정확히 맞아들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해를 돕고 설명력이 있습니다. 간단한 모양으로 만들어낸 기본적 법칙들이 이렇게 이해와 응용을 돕기 때문에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은 진상을 밝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 법칙이 그려주는 그림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모양으로 표현한 것이 꼭 실재의 모습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제넘고 어리석은 일 아니겠습니까? (175~178 페이지)

  지식과 확실성의 동일시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근대 서양철학 전통의 큰 결함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만이 지식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데,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실체를 냉정하게 보면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하지만 지식은 있습니다… 확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나면 ‘어떻게 지식을 좀 더 쌓고 좀 더 개량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더 자유롭고 유연하게 해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 확실한 것을 찾다 보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성에 관해서 굉장히 고민했던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이 있습니다… 그가 남겨놓고 죽은 원고를 제자들이 모아서 펴낸 <확실성에 관하여On Certainty>라는 조그만 책자가 있습니다. 그 책은 지식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생각은 실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끝없는 거북 이야기에서 나왔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정당화가 잘된 믿음의 토대에는 정당화가 안 된 믿음이 놓여있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처럼 뭔가 확실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식을 쌓으려는 시도를 떠나서, 인간이 실제로 태어나서 어떻게 지식을 얻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가 회의적인 질문을 하나요? 아닙니다.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그러니 않으면 언어조차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확실한 증거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참 많습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지 않는 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인식행위 자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정당화한 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집 짓은 비유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지구에 태어났으니까 지구에 집을 짓는 것이지 지구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 우주에서 제일 훌륭해서 여기다 짓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성을 포기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지식을 미래의 지식을 쌓아올리는 토대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200~201 페이지)

  헤시[Mary Hesse, 필자가 가지고 있는 교수직의 전, 전, 전임자라고 한다]와 비슷하게 과학에서 은유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으로 홀튼Genrald Holton[필자의 박사후 연구원 당시 지도교수라고 한다]을 들 수 있습니다. 홀튼은 ‘은유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유일한 다리’라고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과학연구를 하면서 전혀 새로운 현상에 부딪혔을 때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서술할 적합한 개념조차 없기 때문에,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을 은유적으로 사용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이나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체계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갑자기 정말 전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직유도 아니고 은유가 필요한 이유는 직유적으로 표현하려면 A가 가진 성질 a는 B가 가진 성질 b와 비슷하다고 명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홀튼이 말하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B가 무엇이고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자를 생각할 때 아주 작은 당구공으로 여기고, 소리나 빛을 생각할 때 물결로 이해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보어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그에게는 원자의 구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없었는데, 이것을 태양계에 비유함으로써 기본적 서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유가 어느 정도까지 적합할지는 몰랐고, 거기서 헤시가 말하는 중립적 비유가 발동되어 연구를 계속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370~371 페이지)


다음은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실제로 해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가 생겼을 때 저절로 발휘됩니다. 저는 이것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생활하면서, 또는 일하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혔는데 남이 해결해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고자 할 때 진정한 창의력을 발휘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창의성을 길러주고 싶다면, 우선은 그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실제 상황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다 돌봐주고 아무 어려움 없도록 뒷받침해줄 테니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은 창의성을 죽이는 지름길입니다. 딴짓하지 말고 빨리 창의력 학원이나 열심히 다니라는 말이 나올까 두렵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풀어야 할 크고 작은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학생들도 그런 데 도전해본다면, 성과를 크게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경험과 훈련은 될 것입니다. 학생들도 진짜 사회와 과학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생의 진짜 문제들과 부딪히게 해주고, 크게 다치지만 않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는 창의력을 위에서 찍어 누르고 옆에서 잡아 앉혀서 소멸되게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 자생적인 창의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더 잘 발휘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을까요? 여기서 쿤이 짤막하게 내놓은 유용한 관찰결과가 있습니다.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 많은 경우에 핵심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젊은이거나 아니면 다른 과학을 하다가 분야를 옮겨 새로 들어온 사람인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쿤이 든 예는 아니지만, 왓슨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은 크릭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물리학을 연구하다가 분자생물학으로 넘어가서 생물학자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에 강하게 구애받지 않는 연구를 했습니다. 

  더 광범위하게 해석해보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험과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저변에 깔려 있어야 혁명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진짜로 정상과학만 배워가지고는 아주 특출한 사람이 아닐 경우 깊은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들 것입니다. 창의성이 솟아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만들려면 각각 서로 다른 다양한 경험을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창의력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획일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375~376 페이지)


과학의 다원주의에 관하여:

… 과학의 다원주의가 왜 유리하며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좀 더 체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다원주의의 이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관용의 이득’과 ‘상호작용의 이득’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관용이란 한 과학 분야를 한 실천체계가 독점하지 않고 다른 실천체계도 공존할 수 있게끔 학문을 추구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이후 설명되는 관용의 이득 요약: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비하는 보험, 지적 분업 가능, 한 가지 목적도 여러 방식으로 달성 가능,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줌] 

  수준 높은 다원주의를 실행하려면 관용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관용이 가져다주는 이득과는 또 달리, 서로 다른 실천체계 간에 교류하면서 얻는 상호작용의 이득도 중요합니다. [상호작용의 방법 요약: 다른 실천체계를 융합, 다른 체계의 유용한 면 채택, 체계 사이의 경쟁] (389~400 페이지)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 과학이 한 가지로 통일되지 않으면 세상이 난장판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다들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것을 믿고 자기 마음대로 방향을 정해서 연구한다면 과학이 완전히 혼란상태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이런 걱정은 잘 생각해보면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가 아니고, 상대주의relativism에 대한 경계입니다.

… 상대주의란 판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너도 좋고, 네 말도 맞고, 난 상관없어’ 하는 태도인데, 다원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가 표방하는 것은 한 가지만 하지 말자는 것이지, 아무거나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의 체계를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이점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하는 것이지, 모든 체계를 다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체계를 원하는 입장이지만, 여 개라 해도 현실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체계의 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해서 가장 훌륭하고 전망 있는 체계들을 골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다원주의 자체가 그 판단의 기준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 기준의 문제는 다원주의자나 일원주의자 모두가 풀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401~402 페이지)


과학의 겸허에 대해:

  과학의 초창기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패기만만한 야심을 보였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인식론적 판단으로 모든 지식의 토대를 세우겠다고 한 것이나, 뉴튼이 온 우주에 적용되는 중력법칙을 세웠다고 한 것이나,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통해 생명의 모든 비밀이 풀리리라 생각한 것과 같은 꿈은 과학의 청년기에 적당한 것이었습니다… 과학의 행태는 자신만만한 젊은이의 오만함이 점점 없어지는 방향으로 형성될 것입니다. 현대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과학자들이 겸허하게 과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주제 하나를 잡아서 연구하여 뭔가를 좀 배워보겠다는 것이지, 영원한 진리를 들먹이면서 ‘내가 혁명을 일으켜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 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었습니다. (406 페이지)

… 화학혁명의 영예로운 패배자로 등장했던 프리스틀리는 이 맥락[인간이 갖는 자연에 대한 지식은 ‘단면적’일 수밖에 없음]에서 아주 좋은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는 뭔가 하나를 발견할 때 그로써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있게 된다고 한 것은, 알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무엇을 모르는지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그걸 모른다는 것도 몰랐던 내용들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프리스틀리는 이를 멋진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동그랗게 비쳐진 면적이 클수록, 그 환한 부분을 둘러싼 어두운 경계선의 길이도 늘어난다.” …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더 늘어나는데 더 알아서 무엇 하느냐? 그러나 프리스틀리의 태도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빛을 더 얻게 될 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르는 것을 보고 연구하는 만족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신의 창조물은 무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끝없이 탐구하며 진보할 수 있다. 이것을 정말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전망이다.”

… 과학은 무슨 진리를 알아내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 배울수록 연구할 내용이 더 늘어나는 사업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겸허함은 다원주의의 기초가 됩니다. 이렇게 넓고 무궁무진한 것을 배우는데 자기가 뭐 그리 잘나서 본인이 추구하는 특정한 방향에서 모든 답이 나오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은 오만하고 유치합니다. (408~410 페이지)


별을 4개만 준 이유: 나는 아직 완전히 실재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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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중력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게 됐어요.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확인하다가 뉴턴의 고전역학이 궁금해졌어요. 정말로 과학은 공부할수록 공부해야 할 내용이 늘어나는 학문인 것 같아요. ^^

blueyonder 2017-11-07 14:38   좋아요 0 | URL
중력파 검출은 정말 노벨물리학상을 받을만한 업적인 것 같습니다. 검출된 중력파로부터 충돌한 물질의 질량을 거꾸로 계산하는 것도 정말 대단합니다.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도 늘어난다는 건 정말 적확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