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tler's Scientists: Science, War, and the Devil's Pact (Paperback)
존 콘웰 지음 / Penguin Group USA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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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부역했던 폰 브라운과 하이젠베르크의 예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과연 내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그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누구도 장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판단을 내려서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하는 것이 역사가가 할 일이다. 이 둘이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히틀러를 적극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그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눈감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저자는 피력한다.


궁극적 질문은 이것이다. 과학은 가치 중립적인가. 과학자는 연구 결과가 어떻게 쓰일지 생각하지 않고 연구만 하면 되는가. 결국 과학자도 사회 속에 존재하므로, 그의 연구 결과가 어떻게, 누구의 이익을 위해 쓰일지 항상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숙고해야 한다. 양심에 비추어 올바르지 않다면 연구를 그만 두어야 한다. 모범으로는, 독일의 원자폭탄 연구가 걱정했던 것처럼 진전되지 않아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연합국의 맨해튼 계획에서 사임한 조지프 로트블랫Joseph Rotblat의 예가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나치 치하의 독일처럼 박해나 처형의 위협이 없더라도 당장 연구비가 끊어지거나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다면, 과연 양심에 비추어 올바른 일이 아닐 때 그 연구를 그만 둘 수 있을까. 무기 관련 연구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연구가 책에서 예로 거론되는데, 상업적 이익을 낼 수 있는지에 연구의 초점이 많이 맞추어져 있는 요즘의 세태에 비추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독립적 과학자 그룹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개인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노력할 수 있느냐에 있다. 과학뿐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그만 두어도 용인될 수 있는 사회, 우리가 그런 사회를 가꾸어 가기를 희망한다.


  The greatest pressures on the integrity of scientists are exerted at the interface between the professional practice of science and the demands of the fund-awarding patrons. At every stage of this narrative, from Fritz Haber’s decision to promote poison gas to Max Planck’s decision to raise his arm in a Nazi salute, to Paul Harteck’s acceptance of a chair made vacant by a dismissed Jew, to Heisenberg’s decision to accept Hans Frank’s hospitality in Cracow, to Wernher von Braun’s use of slave labor, we have seen the pressures of hubris, loyalty, competition and dependence leading to compromise. In the final analysis the temptation was a preparedness to a deal with the Devil in order to continue doing science. 

  The Faustian bargains lurk within routine grant applications, the pressures to publish for the sake of tenure and the department’s budget, the treatment of knowledge and discovery as a commodity that can be owned, bought and sold. Handling these pressures and realities is inseparable from the difficult task of being a good scientist today. (p. 462)

  Will scientists today, in an increasingly crisis-ridden world, in which they are ever more dependent on payments to pursue their vocations, behave like the fellow travelers under Hitler – the Heisenberg, Weizsäckers and the von Braun – taking benefits from the government and the military, while claiming that as individuals they are aloof from society and politics? Will they argue that they are not in any way responsible for the uses to which their knowledge and discoveries are put? Or will they take part in bringing down the barriers that insulate defence research from public scrutiny, criticism and influence?

  There is an urgent need today for scientists who are not only skilled practitioners in their disciplines but who possess a highly developed grasp of politics and ethics, who are prepared to question, probe, expose and criticize the trends of military-dominated science. Under Hitler, the dissident scientists risked imprisonment and death; but at least, in the early days of the regime, it was possible to emigrate in the hope of doing science under more benign political auspices. Today the dissident does not risk imprisonment or death, but in the globalized domains of science and technology there are no oases of irresponsible purity into which a scientist can retreat. The best defence against the prostitution and abuse of science is for scientists to unite in small and large unofficial constituencies, to create communicating communities of scientists who, in Joseph Rotblat’s words, are ‘human beings first and scientists second’. These constituencies could provide the pluralist checks and balances that alert the public to irresponsible exploitation of science that poses threats not just to the American ‘homelands’, but to societies and peoples everywhere; to the environment, to peace, to human rights and to nature itself. (pp. 466-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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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20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치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단 생각에, 그들을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blueyonder 2022-05-21 08:26   좋아요 0 | URL
지금 이런 사회에 사는 것도 모두 선열들의 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감사합니다~
 
빛의 양자컴퓨터
후루사와 아키라 지음, 채은미 옮김 / 동아시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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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이용한 양자컴퓨터에 관한 소개서이다. 일본인인 저자는 본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발전시켜온 '광 양자컴퓨터'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소개하고 있다. <퀀텀의 세계>에서는 듣지 못했던, 빛을 이용하여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방법은 기존의 원자나 이온, 초전도체, 스핀을 이용한 방법과 비교하여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시간영역다중'이라고 이름 붙인 방법을 통해 100만 개의 큐비트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다른 방법이 100 큐비트 규모인데 비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기존의 양자컴퓨터가 공간적으로 큐비트를 구현했다면 광 양자컴퓨터는 시간적으로 큐비트를 구현했다는 점이 다르다(시간영역다중의 의미). <퀀텀의 세계>를 보완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퀀텀의 세계>보다 얇고 설명도 간략하지만, 광 양자컴퓨터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저자의 연구에 대한 태도를 다음에 인용한다.


...나는 청개구리 같은 성격으로 언제나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왔다고 생각한다. 유행은 반드시 언젠가는 끝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언제나 과도한 경쟁에 휘말린다. 호흡이 긴 일을 하고 싶다면 유행을 쫓지 말고, 나만의 길을 걷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에 따라서는 고독이나 불안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마음 깊숙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몰입해서 즐기고 있다면 고독이나 불안에 시달릴 일은 없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커다란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185~18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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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의 세계 - 세상을 뒤바꿀 기술, 양자컴퓨터의 모든 것
이순칠 지음 / 해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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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와 양자컴퓨터, 양자암호통신에 대한 소개서이다. 양자물리학 소개 부분은 일반인 대상으로도 손색 없는데, 양자컴퓨터의 원리나 제작 방법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도 어려운 부분은 그냥 건너 뛰어도 괜찮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의 백미는 역시 저자의 전공분야인 양자컴퓨터의 원리와 제작 방법에 대한 소개이다. 더불어 양자암호통신에 대한 설명도 좋다. 사용하는 모든 개념을 다 설명해서 물리나 공학 전공자는 차근차근 따라 갈 수 있도록 했다. 얽혀 있는 상태를 사교춤을 추는 남과 여로 비유한 것은 매우 신선했다.


양자컴퓨터와 양자암호통신, 그리고 이들의 현 상황에 대한 좋은 소개서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물리학자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섹션을 넣어, 물리학계에 대한 일화 등을 풀어 놓았다. 썰렁할 때도 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별 하나를 뺀 이유는 일반적 내용(역사 일화 등)에서 부정확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리에서야 전문가가 기술한 것에 토를 달 것은 없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양자컴퓨터는 초전도소자를 이용하여 만든 70큐비트 정도의 CPU가 현재 최고 기록이고, 아직 진정한 양자컴퓨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상용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양자암호통신은 이미 상용화됐다고 한다. 양자암호통신은 모든 정보를 양자채널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암호 키(key) 만을 양자채널로 보내는 것이다.


책 속 몇 구절:

... 양자컴퓨터가 계산을 빨리할 수 있는 이유는 병렬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고전컴퓨터도 병렬처리를 할 수 있다면 양자컴퓨터가 특별할 것이 뭐냐,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양자컴퓨터는 병렬처리를 하기 위해 CPU가 더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예를 들어 10큐빗짜리 양자컴퓨터 한 대가 있으면 2^10인 1024개의 데이터를 병렬처리할 수 있는 반면, 10비트짜리 고전컴퓨터는 똑같은 병렬처리를 하기 위해 컴퓨터가 1024대나 필요하다. 비트 수가 40비트만 되어도 양자컴퓨터는 약 1조 개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므로 고전컴퓨터로는 도저히 흉내낼 방법이 없다. 양자컴퓨터의 병렬처리 능력은 기본적으로 양자계의 중첩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양자알고리즘에서 쓸 만한 것들은 계산 도중에 얽힌 상태가 꼭 나타나기 때문에, 양자연산이 혁신적으로 빠른 이유는 단순히 중첩이 아니라 중첩 중에서도 얽힘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233~235 페이지)

... 양자 컴퓨터는 아무 연산이나 잘하지는 않는다. 덧셈을 할 줄 알긴 하지만 고전컴퓨터보다 더 나을 게 없다. 그래서 양자알고리즘 중에서 쓸 만한 것은 아직 많지 않다. 쓸 만한 알고리즘을 만들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지금 사용 가능한 알고리즘을 돌릴 하드웨어도 없는 판이라 더 좋은 알고리즘을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공허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60 페이지)

... 양자 소인수분해 알고리즘이 고전 소인수분해 알고리즘보다 비약적으로 빠를 수 있는 이유는 측정이라는 행위로 등차수열이 한 번에 걸러진다는 점과 한 번의 연산으로 푸리에변환을 할 수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즉, 양자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중첩과 측정에 의한 붕괴, 이 두 가지 성질 때문이다. 중첩된 양자 상태의 이점은 모든 연산이 중첩된 상태에 독립적으로 가해진다는 자연계의 성질에서 비롯된다. (2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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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기록해 놓고 싶은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를 이용해서 어떤 것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추론해 보는 것이다. 4장 '리만 제타 가설과 소수素數의 웃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찌기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중심설을 통해 인간이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도는 행성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태양도 우리 은하의 변방에 있는 그저 그런 별임이 밝혀졌으며, 우리 은하조차 수많은 은하 중에서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은하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인간의 위치는 결국 우주의 중심에서 변방의 변방의 변방으로 격하됐다.


리처드 고트J. Richard Gott III는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를 시간에도 적용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보고 있다면 그 사건(사물)이 그 전체 수명의 최초 2.5%이거나 최후 2.5% 내에 있을 확률은 5% 밖에 되지 않으므로, 우리가 보는 사건이 전체 수명의 최초 2.5% 이후거나 최후 2.5% 이전일 가능성이 95%이다. 이것은 현재의 시간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면, 현재 사건이 언제 끝날지 최소와 최대 기대값을 구할 수 있다. 최소 기대값은 지금이 전체 수명의 97.5% 순간이라고 가정해서, 최대 기대값은 지금이 전체 수명의 2.5% 순간이라고 가정해서 구한다. 비교적 간단한 계산을 거치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알고 있는 수명을 39로 나누거나 39를 곱하는 것이 최소와 최대 기대값을 구하는 방법임을 알게 된다.


이 논리를 적용한 예가 인류가 언제까지 존재할지에 대한 추론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적어도 20만 년 전부터 있었으므로, 앞의 논리를 적용하면 앞으로 최소 5,100년(=20만 년/39)은 존재하겠지만 780만 년(=20만 년x39) 후에는 사라리지라고 95% 확신할 수 있다. 앞의 5,100년에 기뻐해야할까, 슬퍼해야할까. 또는 뒤의 780만 년에 기뻐해야할까, 슬퍼해야할까.


문득 드는 생각은 '개인에게도 위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이다. 인류 대신 개인을 생각해 보자. 나이가 50이면 앞으로 최소 1.3년(=50/39)은 더 살아있겠지만 1,950년(=50x39) 후에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고 95% 확신할 수 있다. 개인에게는 시간 범위가 너무 넓다. 하지만 최소 기대값 1.3년은 어떤 느낌을 주는가? 2.5%의 확률로, 1.3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을 수 있다. 확률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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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7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별의 소멸, 블랙홀과 같은 운명, 인간의 숙명 ㅜ.ㅜ 블루 욘더님 남은 12월 건강하고 따숩게 ! 보내세요 ^^

blueyonder 2021-12-17 22:02   좋아요 1 | URL
모든 사물은 필멸의 존재이겠지요. 멸하는 순서만 차이가 있습니다. ^^
scott님, 남은 12월 잘 마무리하시고, 건강하고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 양자역학, 창발하는 우주, 생명, 의미
박권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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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박권의 세계관, 인생관. 학부 물리학 전공자나, 물리에 관심 있는 공학 전공자가 읽으면 좋을 수준의 수학을 포함하고 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제목을 보고 '창발emergence'에 대한 얘기인가 했는데, 책 자체는 양자역학에 대한 전반적 소개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전자기학에 통계역학까지 나온다. 


그는 대학 시절 베르그송의 철학을 인상 깊게 배웠다고 고백한다. 책에 나와 있는 베르그송의 철학 구절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261 페이지)


저자는 '운명'을 여러 번 언급한다. 운명에 대한 저자의 구절 중 하나:


운명이란 단순히 결정론이나 자유의지가 아니라, 우연과 필연의 절묘한 교차점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324 페이지)


책 뒤 표지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긴 논증"


이라고 나오는데, 이 말이 맞다면 물리학 전공자는 모두 인생의 비밀을 꿰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족. 물리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만 수식이 부담스러운 이에게는 <물리학은 처음입니다만>을 추천한다. 좀 더 '진지한' 독자에게는 (더 두껍고 어렵지만 물리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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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11-06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정론이 필연을 가장한 우연은 아닐런지요? 아무튼 저자도 자유의지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blueyonder 2021-11-07 09:31   좋아요 1 | URL
물리법칙은 필연이고 초기조건은 우연입니다. 특히 양자역학은 물리법칙에도 우연의 요소를 도입했지요.
저는 필연이라는 말보다는 우연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크게 봤을 때 이 세상-우주가 이렇게 된 것에는 필연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에는 우연이 연속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조건이 달랐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1-11-07 18:19   좋아요 1 | URL
필연과 우연은 정말 어려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뉴턴의 역학 법칙 포함해서 모든 물리 법칙은 임시적이고 언젠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전 필연을 믿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