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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평점 :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의 과학 에세이 모음이다. 물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물리 제국주의’로 오인할 수도 있을 확신이 넘치는 편이라는 게 한 조각 걱정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여 모든 무생물, 나아가 우주의 모든 ‘것’에 통용되는 언어는 물리이다. 물리를 통해 우주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7페이지)”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하지만 세상사와 영화, 사회 이슈에서 물리와 연결하며 통찰을 끄집어내는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놀랍고도 즐겁다. 예를 들어 “사과의 물리학”이라는 글에서, 선악과에서 시작해서 뉴턴의 ‘사과’를 거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부족한 ‘사과’를 연결지어 글을 매듭 짓는 솜씨 등에서 그의 재기를 엿볼 수 있다.
“부재의 실재”라는 글은 읽으면서 감탄이 나왔다. 김연아의 ‘존재’를 자랑하는 고대생에게 MB의 ‘부재’를 내세우는 연대생의 유머로 글은 시작한다. ‘부재’가 ‘존재’만큼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무언가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153페이지)” 우리가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물고기는 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꽉 채운 무언가의 존재를 실감할 때는 그것이 ‘없을 때’이다. “물의 부재로 만들어진 거품은 이제 그 자체로 존재가 되어 마치 실재인 듯 물속을 움직이고 다닌다. (154페이지)”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폴 디랙의 ‘전자로 꽉 찬 진공’이라는 아이디어를 설명한다. 양전자란 전자로 가득 찬 진공의 ‘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반도체에서 전류의 흐름을 설명한다. “반도체 내부는 전자로 가득 차 있다. 가득 찬 전자는 그 자체로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여분의 전자가 생기면 움직일 수 있는 전자가 생기는 셈이다. 이 여분의 전자가 움직이며 전류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전자를 약간 없애도 전류가 흐를 수 있는데, 이때는 홀hole이라 불리는 전자의 부재가 전류를 만든다. 마치 물속에 생긴 거품과 비슷한 것이다. 전자가 흐르는 반도체를 ‘n형 반도체’, 전자의 부재인 홀이 흐르는 반도체를 ‘p형 반도체’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는 이 n형, p형 반도체를 이어붙인 접합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다음에는?
부재는 그 자체로 실체이다. 어둠이란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빛이 부재한 것이다. 불의不義는 말 그대로 단지 의義가 없는 것이다. 잘못된 일을 보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가 없는 상태, 즉 불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의의 부재’는 실체가 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20세기 초 독일의 나치 정권하에서 침묵했던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시이다. 독일 사람들은 나치가 벌인 온갖 만행을 히틀러만의 책임이라고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라.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자료에 따르면 반유대주의는 20세기 초 이미 유럽에 많은 나라에 만연한 풍조였다. 암묵적인 동의 없이 600만 명의 사람을 조직적으로 죽이는 것이 가능할까?
요즘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잘못된 사회에서 비판과 행동의 부재는 그 자체로 독재와 억압이라는 실체가 된다. 때로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이다. (156~157 페이지)
어떤가? 이만한 글발을 지닌 과학자는 흔치 않다. (김상욱 교수도 혹시 블랙 리스트에 있었을까?)
상대성 이론은 시공간의 무대가 무용수에 의해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자역학은 관객이 무용수의 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모두 고려하면 무대, 무용수, 관객이 모두 뗄레야 뗄 수 없이 하나로 묶인 유기체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복합체의 모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물리학자도 알지 못한다. 아직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는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261~262 페이지)
시는 대개 최소한의 언어로 표현된다. 우주를 기술하는 물리법칙도 최소한의 수학으로 표현되는 것이 원칙이다. 건조하게 말하면 오컴의 면도날 때문이고, 비과학적으로 말한자면 우주가 단순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물리학자의 미학적 관점이 깔려 있다. 최소한의 수학을 사용하기 위해 상실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것은 의도적인 상실이라기보다 필연적인 상실이다. 물리법칙으로의 압축은 모든 가능한 현상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줄이는 과정이 아니다. 현상의 핵심이라 믿어지는 사실을 하나의 문장으로 그냥 쓰는 것이다. 여기서는 상실될 것을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핵심만을 집어내는 감각에 창조성이 있다고 하겠다. (28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