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새 번역이 나왔다. 김용준 교수님이 번역한 지식산업사 판은 이제 절판되었으니, 좋으나 싫으나 새 번역을 읽어야 한다. 옛 번역이 안 좋다는 의견이 많다는 데에 사실 놀랐다.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으면서 10대, 20대 젊은이들이 이렇게 수준 높은 과학과 철학 논쟁을 하는 것을 보고 경탄과 함께 그들의 학문적 전통을 부러워했던 것 같다.
새 책의 깔끔한 표지와 고급 인쇄용 종이가, 김용준 역이 나온 이후에 흐른 30년 가까운 세월을 실감하게 한다. 다른 리뷰가 지적했듯이, 예전 번역은 당시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딱딱한 문체에 대화도 문어체에 가깝다. 새 번역을 한 챕터 읽고 예전 번역을 읽어보니 옛날 문체이긴 하지만 잘못 번역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없고, 오히려 더 정확하거나 읽는 맛이 있기도 했다. 이건 내가 그만큼 옛날 사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적확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책도 예전 말투 번역(개역한글)과 요즘 말투로 한 번역(현대인의 성경)이 있지 않나? 읽기에는 현대인의 성경이 편하지만 그래도 개역한글판을 읽는 사람들은 뭔가 옛스러운 맛과 전통을 느끼는 것처럼...
<부분과 전체>가 과연 고전의 반열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얘기도 있던데, 이건 고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과학의 고전을 따진다면 꼭 들어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마찬가지로 <부분과 전체>도 그 반열에 들어가리라 나는 생각한다. 과학이 단순히 경험의 총화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철학적, 종교적, 언어적 함의가 있다는 것을 <부분과 전체>만큼 생생히 보여주는 책도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양자역학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원자의 세계에 대한 것인 만큼,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성질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심지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직도 완벽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양자역학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이런 고민을 거쳐 탄생했다. 영역본이 없다는, 그래서 정말 고전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나는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고전의 반열에 들어간 것은 정말 행운이며, 김용준 교수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겠다.
물리(특히 원자물리, 양자역학)가 어떤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양자역학이 만들어질 당시 물리학자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이면을 엿보고 싶은 사람에게 나는 아직도 <부분과 전체>를 권한다. 이제 새 번역이 나왔으니 좀 더 현대적 문체로 이러한 논의를 맛볼 수 있겠다. 하지만 구세대인 나는, 아직도 가지고 있는 김용준 역을 때때로 펴볼 것 같다. 마치 딱딱한 독일어 원전을 읽는다는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