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는 문 쪽으로 난감한 시선을 던졌다....... 아니, 그 문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갈수 없었다. 설령 애꿎은 비둘기가 그 사이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화장실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 P22
전에는 그런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백색에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그릇마저 씻는 용도로 사용해 온 세면기에 오줌을 누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P23
일을 다 마치고도 한참 동안 계속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다음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행위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 두지 않으려고 액체 세제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딱 한 번 그랬으니까 괜찮아.」 세면대와 방과 자기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P23
시계를 보았다. 방금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때 7시 15분이면 면도를 끝내고, 침대도 정리를 끝내 놓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뒤처진 것은 부득이 어쩔 수 없이 아침 식사를 거르면빠듯하게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중요한 것은 그가 8시 5분에 방을 나서야 8시 15분까지 은행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대책이 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아직 45분이라는 유예된 시간이남아 있었다. - P24
면도를 하는 동안 그는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으며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나단 노엘, 넌 2년 동안 인도차이나에서 군복무를 했고, 또 그곳에서 온갖 힘겨운 상황들을 잘 견뎌냈었지. 너의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하고,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행운이 따라 준다면 넌 이 방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어.」 - P25
직장으로 출근하고, 낮 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오늘 저녁이 되면 어디로 가야 되지? 밤은 또 어디에서 보내고? 기왕에 도망치는 마당에 비둘기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중략). 그렇다면 면도기와 칫솔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가야지. 그런 것들말고도 개인 수표책도 챙기고, 혹시 모르니까 저금 통장도 가지고 가야겠어. 수표로 끊는 통장 구좌에는 1천2백 프랑이 들어 있다. 그 정도라면 2주일은 버틸 수 있어. 물론 방을 싼 것으로 얻는다는 전제를 한다면 그렇지. (후략). ) - P26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금화가 다섯 개 있다는 것이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올랐다. 하나에 6백 프랑의값어치는 충분히 될 다섯 개의 나폴레옹 금화들은 알제리가 전쟁 중이던 1958년에 인플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두었던 것들이었다. - P27
( (전략), 아주 근검절약한 생활을 한다면연말까지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더라도 8천 프랑을 라살 부인에게 낼 수 있을 거야.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내년 1월부터는 방이 내 것이니까 방삯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어서 사정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거야. (후략). ) - P27
옷장 아래에는 더러운 옷들을 모아 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세탁소로 가져 가기 위해 빨랫감을 보관하는 낡은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속을 비운다음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그가 1942년 샤랭통에서 카바용으로 갈 때 들었던 가방이고, 1954년파리로 올 때 썼던 것이기도 했다. - P28
짐을 다 챙기고 나니 8시 15분 전이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먼저 평상시에 입던 유니폼을 입었다. 회색 바지, 파란색 셔츠, 가죽 잠바, 권총집이 달려 있는 가죽벨트, 회색 모자. 그런 다음 비둘기와 마주칠 경우를대비하여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 P28
모자를 벗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 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자를 다시 머리 위에 얹고 이마까지푹 눌러쓴 다음, 가방을 문가로 들어다 놓았다. 오른쪽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산을 손목에 걸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잡았다. 빗장을 여니 문이 조금 열렸다. 밖을 살짝 훔쳐보았다. - P29
당장 문을 도로 닫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의 가장 솔직한 심정은 바깥의 그 혐오스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안전한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다. - P30
. 만약에 새똥이 하나만 있고 깃털도 하나뿐이었다면 그는 필경 뒷걸음질 치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영원히 열지 못했을것이다. 그러나 비둘기가 전체 복도를 오물로 더럽힌이상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용기가 생겨났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제야 비로소 비둘기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1.5미터쯤 떨어진 복도 맨 끝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 P30
아예 그것을 보지 않을 수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전에 언젠가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에 관한 책을 보았을 때 어떤 동물들, 예를 들어 오랑우탄 같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면 공격한다는 것을 읽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비둘기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 P31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는 하였어도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쳐댔고, 장갑을 낀 손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때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덜덜덜 떨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우산을 놓칠 뻔해서 어깨와 뺨 사이에 그것을 꼭 끼워 넣으려고 오른쪽 손으로 잡다가 그만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똥 바로 옆자리였다. - P31
층계가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겨우 잠시 멈춰 서서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접었고, 잠깐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침 햇살의 투명한 빛줄기가 창문을 통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고, 복도의 후미진 응달에 한 다발의 날카로운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 P32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린 다음 그는 층계를 내려갔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P33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진정되었다. 3층 계단 입구에 이르자 갑자기 몸이 후끈거리며 더웠다. 겨울 외투에 목도리를 두르고, 가죽 장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 P33
그의 옷차림에 맞을 성싶은 변명은 쉽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아 보았자 그를 미쳤다고 볼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가 정말로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P34
「안녕하세요, 노엘 씨」 의도적으로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곁을 지나치려는 조나단에게 로카르 부인이 그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시오, 로카르 부인.」 기어 들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로 그가 인사에 답했다. 그것뿐 더 이상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오랜 시간을 로카르 부인이 그집에 살아왔지만 그는 고작 아침 저녁으로 <안녕하세요, 부인>이란 말을 하거나, 우편물을 받으면 <고맙습니다. 부인> 따위의 말만 해왔을 뿐이었다. - P35
로카르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게 두는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 P36
일찍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로카르부인처럼 조나단의 행동거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사실 친구도 없었다. 또 은행에서의 그의 존재는 한낱 업무상 비치해 둔 물품 같은 신세라고 말할 수 있었다. - P37
(전략). 그런 연유로 해서 그의 신상에 생기는 작은 변화들은 로카르 부인에게 여지없이 발각되었다. 이를테면어떤 옷을 입고 있다든지, 1주일에 셔츠를 몇 번 갈아입는다든지, 머리를 감았다든지, 저녁식사용으로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왔다든지, 편지를 받았는지와 또 받았다면 누구로부터 받았다든지 하는 따위들이었다. - P37
(빌어먹을, 도대체 나를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감시를 받아야 되는 거지? 이제는 제발 못 본 척해 주어서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둘수는 없는 거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을 못살게 하는 거지?) - P38
로카르 부인에게로 걸어가면서도 조나단은 막상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다만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할말도해야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는 그 여자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가슴속에 여전히이글거렸고, 용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 P39
. 로카르 부인의 핏기 없는 허연 얼굴을 조나단은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이한 번도 없었다. - P39
「부인! 할말이 있습니다.」(그 순간에도 그는 도대체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일이죠, 노엘 씨?」 (중략). 「부인, 한 가지 할말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직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만한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렇게 말끝을 맺고 있는 것을 들으며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내 방 앞에 새가 한 마리 있어요. 부인」 - P40
「도대체 어디서 비둘기가 들어왔죠. 노엘 씨?」 「나도 모르겠습니다.」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아마 복도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게지요. 창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그 창문은 꼭 닫아 놔야만 합니다. 주택 관리 규정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열어 놓은 모양이네요. 날씨가 더워서요.」 - P41
「비둘기를 다시 내쫓고, 창문도 닫아 놓아야지요.」 로카르 부인은 이 세상에서 그처럼 쉬운 일이 없고, 그렇게만 하면 다시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나단은 아무 말도 안 했다. - P42
「그러니까, 새똥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시푸르뎅뎅한 똥이요. 깃털도 있고요. 복도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니까요. 그게 제일 큰 문젭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노엘 씨」 로카르 부인이 말을 이었다. 「물론 복도도 깨끗하게 청소해야 되지요. 그렇지만우선 먼저 누군가가 비둘기를 내쫓아야겠네요.」 「그렇습니다.」 - P43
그는 자기가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말을 얼버무렸던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거짓말이 그에게는 명백하게 드러나 보였고, 또 그것은 그가 감추고자 했던 유일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가 절대로, 결코비둘기를 몰아낼 수 없으며, 그 반대로 오히려 비둘기가 오래 전에 그를 내쫓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P44
로카르 부인은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시 정말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노엘 씨. 틈나는 대로 내가처리할게요.」 - P45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꼭 그 여자가 그 일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인데. 층계와 복도에 비질을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공동변소를 청소하라는 책임은 있지만 비둘기를 내쫓을 의무는 없잖아? 오후에 술을 마시면 아무리 늦어도 그때쯤엔 모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거야.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잊지 않았다면.......> - P45
그의 업무라는 것은 지난 30년 전부터 아침에는 9시에서부터 오후 1시까지, 오후에는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초소에 차려 자세를 하고 서 있거나, 맨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서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9시 30분 경과 4시 30분부터5시 30분 사이에 지점장 뢰델 씨의 검은색 승용차가 들어오거나 나가게 되면 보초를 잠시 중단하곤 했다. - P47
그는 자기가 정년 퇴직까지 총 7만 5천 시간을 그 세개의 대리석 계단 위에 서서 보내게 된다는 계산을 해본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파리 전체에서는 물론이거니와-프랑스 전체에서도-같은 장소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5만 5천 시간을 이미 그곳에서 보냈으니 벌써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 P48
경비원이 근무를 같은 장소에서 너무 오래 계속하다 보면 주의력을 차츰상실한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둔감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점점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게 되어 직책상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로변하게 된다는 거였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다 쓸데없는 헛소리였다! - P49
마치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에서 스핑크스에 관한 것을 언젠가 한 번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이었다. - P49
물론 조나단은 스핑크스가 경비원보다 더 위협적인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신이 복수할 것이라는 말을 경비원이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도굴범이 경고에 개의치 않는 행동을했다고 하더라도, 스핑크스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 P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스핑크스와 경비원이 서로 권위를 어떤 도구로 나타내지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고 느꼈다. 그로 하여금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만드는 그런 상징적인 권위에 대한 자각만이 어떤 주의집중력이나, 무기나 방탄 유리보다도 더한 힘과 인내를 부여해 주었고, 그것만으로 조나단 노엘은 무려 30년도 넘는 시간을 은행 앞 대리석 계단 위에서 아무런두려움도 없고, 좌절감도 없고, 추호의 불만도 없고, 오늘 그 순간까지 찌뿌둥한 얼굴 한 번 하지도 않고 버틸 수 있었다. - P51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오늘만큼은 조나단도 스핑크스적인 평화를 얻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 P51
그래서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가슴 쪽으로 확 뿜어도 보고, 등을 굽혔다가 다시 펴기도 해보고,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도 해보면서 그런 식으로 입고 있는 옷을 들썩거려 옷으로 몸을 문질렀다. 그렇게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들썩거리는 동안 조금씩 옆걸음을 치며잡으려고 했던 몸무게 중심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 P52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시선을 두 번째 계단의 가장자리에 붙들어매고, 수레바퀴처럼 궤도 위의 일정한 구간을 왔다갔다함으로써, 계단 디딤돌의 모서리에 잡히는 단순하고 매번 똑같은 형상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하여, 몸이 무겁게느껴지는 것과 살갗이 가려운 것과 육신과 정신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고 하였고,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 P53
오늘은 마치 가장 뜨거운 7월 오후에나 느껴 볼 수 있음직한 더위로 대기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투명한막 같은 것이 시야를 가렸다. 집과 지붕의 선과 용마루의 윤곽들이 눈이 부시도록 날카롭게 잡혀 오면서도, 동시에 끄트머리가 풀어헤쳐진 것처럼 희끄무레하게보이기도 했다. - P54
시력 때문일 거라고 조나단은 생각했다. 밤 사이에근시안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안경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주 어렸을 때 안경을 써본 적이 있었다. 도수가 아주 높았던 것은 아니고, 좌우가 마이너스 0.75디옵터였다. 이제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든 마당에 시력이다시 근시안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 P55
그런 몹쓸 사념에 너무나 몰두해 있던 나머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여러 번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듣지 못했다. 겨우 네댓 번째가 되어서야-경음기가 한참 울고 있을 때 - 비로소 그것을 듣고, 그에따른 반응으로 고개를 들었다. 뢰델 씨의 승용차가 어느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경적소리가 울렸고,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 P55
뛰었다기보다는-너무나 서두르다가 넘어질 뻔하면서-정신없이 돌진해 가서 철제문을 따고, 옆으로 민 다음, 경례를 한 채 그것을 통과시켰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쳐댔고, 모자챙에 붙인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문을 닫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뢰델 씨의 차가 오는것을 보지 못했어.> - P56
어깨를 반듯하게 추스릴 수가 없었고, 팔은 바지옆 봉제선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그런 자기 자신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우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염없는 시름에 빠진 채 그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길 건너 카페를 쳐다보았다. - P57
(전략). 그 근방에서 그도 조나단처럼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조나단은30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에 찬 질투심이 기억났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었다. - P58
조나단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목숨까지 바치면서 은행을 지킴으로써 생활비를 피땀 흘려 벌어들인 반면, 그 작자는 뭇사람들의 동정심과 적선에 빌붙어서, 그들이 모자에 던져 주는 동전을 거둬들이는 것말고는 다른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살았다. - P59
(전략).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조나단이 거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부러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문이나 가끔씩 열어 주거나 지점장의 차를 향해 경례를 하는 등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휴가도 조금받고, 월급도 쥐꼬리만큼 받으면서도, 월급의 대부분은 세금이니, 임대료니, 사회 보장 보험 분담금 등으로흔적도 없이 뺏기며 인생의 3분의 1을 은행 앞에 서서허송하는 일로 지내는 노릇이 도대체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회의를 종종 품기도 했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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