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는 문 쪽으로 난감한 시선을 던졌다....... 아니, 그 문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갈수 없었다. 설령 애꿎은 비둘기가 그 사이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화장실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 P22

전에는 그런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백색에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그릇마저 씻는 용도로 사용해 온 세면기에 오줌을 누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P23

일을 다 마치고도 한참 동안 계속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다음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행위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 두지 않으려고 액체 세제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딱 한 번 그랬으니까 괜찮아.」
세면대와 방과 자기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P23

 시계를 보았다. 방금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때 7시 15분이면 면도를 끝내고, 침대도 정리를 끝내 놓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뒤처진 것은 부득이 어쩔 수 없이 아침 식사를 거르면빠듯하게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중요한 것은 그가 8시 5분에 방을 나서야 8시 15분까지 은행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대책이 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아직 45분이라는 유예된 시간이남아 있었다. - P24

면도를 하는 동안 그는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으며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나단 노엘, 넌 2년 동안 인도차이나에서 군복무를 했고, 또 그곳에서 온갖 힘겨운 상황들을 잘 견뎌냈었지. 너의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하고,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행운이 따라 준다면 넌 이 방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어.」 - P25

직장으로 출근하고, 낮 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오늘 저녁이 되면 어디로 가야 되지? 밤은 또 어디에서 보내고? 기왕에 도망치는 마당에 비둘기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중략).
 그렇다면 면도기와 칫솔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가야지. 그런 것들말고도 개인 수표책도 챙기고, 혹시 모르니까 저금 통장도 가지고 가야겠어. 수표로 끊는 통장 구좌에는 1천2백 프랑이 들어 있다. 그 정도라면 2주일은 버틸 수 있어. 물론 방을 싼 것으로 얻는다는 전제를 한다면 그렇지.
(후략).
) - P26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금화가 다섯 개 있다는 것이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올랐다. 하나에 6백 프랑의값어치는 충분히 될 다섯 개의 나폴레옹 금화들은 알제리가 전쟁 중이던 1958년에 인플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두었던 것들이었다. - P27

(
(전략), 아주 근검절약한 생활을 한다면연말까지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더라도 8천 프랑을 라살 부인에게 낼 수 있을 거야.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내년 1월부터는 방이 내 것이니까 방삯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어서 사정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거야.
(후략).
) - P27

옷장 아래에는 더러운 옷들을 모아 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세탁소로 가져 가기 위해 빨랫감을 보관하는 낡은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속을 비운다음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그가 1942년 샤랭통에서 카바용으로 갈 때 들었던 가방이고, 1954년파리로 올 때 썼던 것이기도 했다. - P28

짐을 다 챙기고 나니 8시 15분 전이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먼저 평상시에 입던 유니폼을 입었다. 회색 바지, 파란색 셔츠, 가죽 잠바, 권총집이 달려 있는 가죽벨트, 회색 모자. 그런 다음 비둘기와 마주칠 경우를대비하여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 P28

모자를 벗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 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자를 다시 머리 위에 얹고 이마까지푹 눌러쓴 다음, 가방을 문가로 들어다 놓았다. 오른쪽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산을 손목에 걸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잡았다. 빗장을 여니 문이 조금 열렸다. 밖을 살짝 훔쳐보았다. - P29

 당장 문을 도로 닫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의 가장 솔직한 심정은 바깥의 그 혐오스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안전한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다. - P30

. 만약에 새똥이 하나만 있고 깃털도 하나뿐이었다면 그는 필경 뒷걸음질 치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영원히 열지 못했을것이다. 그러나 비둘기가 전체 복도를 오물로 더럽힌이상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용기가 생겨났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제야 비로소 비둘기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1.5미터쯤 떨어진 복도 맨 끝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 P30

 아예 그것을 보지 않을 수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전에 언젠가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에 관한 책을 보았을 때 어떤 동물들, 예를 들어 오랑우탄 같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면 공격한다는 것을 읽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비둘기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 P31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는 하였어도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쳐댔고, 장갑을 낀 손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때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덜덜덜 떨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우산을 놓칠 뻔해서 어깨와 뺨 사이에 그것을 꼭 끼워 넣으려고 오른쪽 손으로 잡다가 그만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똥 바로 옆자리였다. - P31

층계가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겨우 잠시 멈춰 서서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접었고, 잠깐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침 햇살의 투명한 빛줄기가 창문을 통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고, 복도의 후미진 응달에 한 다발의 날카로운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 P32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린 다음 그는 층계를 내려갔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P33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진정되었다. 3층 계단 입구에 이르자 갑자기 몸이 후끈거리며 더웠다. 겨울 외투에 목도리를 두르고, 가죽 장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 P33

그의 옷차림에 맞을 성싶은 변명은 쉽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아 보았자 그를 미쳤다고 볼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가 정말로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P34

「안녕하세요, 노엘 씨」
의도적으로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곁을 지나치려는 조나단에게 로카르 부인이 그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시오, 로카르 부인.」
기어 들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로 그가 인사에 답했다. 그것뿐 더 이상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오랜 시간을 로카르 부인이 그집에 살아왔지만 그는 고작 아침 저녁으로 <안녕하세요, 부인>이란 말을 하거나, 우편물을 받으면 <고맙습니다. 부인> 따위의 말만 해왔을 뿐이었다. - P35

로카르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게 두는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 P36

 일찍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로카르부인처럼 조나단의 행동거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사실 친구도 없었다. 또 은행에서의 그의 존재는 한낱 업무상 비치해 둔 물품 같은 신세라고 말할 수 있었다. - P37

(전략). 그런 연유로 해서 그의 신상에 생기는 작은 변화들은 로카르 부인에게 여지없이 발각되었다. 이를테면어떤 옷을 입고 있다든지, 1주일에 셔츠를 몇 번 갈아입는다든지, 머리를 감았다든지, 저녁식사용으로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왔다든지, 편지를 받았는지와 또 받았다면 누구로부터 받았다든지 하는 따위들이었다. - P37

(빌어먹을, 도대체 나를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감시를 받아야 되는 거지?
이제는 제발 못 본 척해 주어서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둘수는 없는 거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을 못살게 하는 거지?) - P38

로카르 부인에게로 걸어가면서도 조나단은 막상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다만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할말도해야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는 그 여자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가슴속에 여전히이글거렸고, 용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 P39

. 로카르 부인의 핏기 없는 허연 얼굴을 조나단은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이한 번도 없었다. - P39

「부인! 할말이 있습니다.」(그 순간에도 그는 도대체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일이죠, 노엘 씨?」
(중략).
「부인, 한 가지 할말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직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만한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렇게 말끝을 맺고 있는 것을 들으며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내 방 앞에 새가 한 마리 있어요. 부인」 - P40

「도대체 어디서 비둘기가 들어왔죠. 노엘 씨?」
「나도 모르겠습니다.」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아마 복도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게지요.
창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그 창문은 꼭 닫아 놔야만 합니다. 주택 관리 규정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열어 놓은 모양이네요. 날씨가 더워서요.」 - P41

「비둘기를 다시 내쫓고, 창문도 닫아 놓아야지요.」
로카르 부인은 이 세상에서 그처럼 쉬운 일이 없고,
그렇게만 하면 다시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나단은 아무 말도 안 했다. - P42

「그러니까, 새똥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시푸르뎅뎅한 똥이요. 깃털도 있고요. 복도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니까요. 그게 제일 큰 문젭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노엘 씨」
로카르 부인이 말을 이었다.
「물론 복도도 깨끗하게 청소해야 되지요. 그렇지만우선 먼저 누군가가 비둘기를 내쫓아야겠네요.」
「그렇습니다.」 - P43

그는 자기가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말을 얼버무렸던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거짓말이 그에게는 명백하게 드러나 보였고, 또 그것은 그가 감추고자 했던 유일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가 절대로, 결코비둘기를 몰아낼 수 없으며, 그 반대로 오히려 비둘기가 오래 전에 그를 내쫓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P44

로카르 부인은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시 정말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노엘 씨. 틈나는 대로 내가처리할게요.」 - P45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꼭 그 여자가 그 일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인데. 층계와 복도에 비질을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공동변소를 청소하라는 책임은 있지만 비둘기를 내쫓을 의무는 없잖아? 오후에 술을 마시면 아무리 늦어도 그때쯤엔 모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거야.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잊지 않았다면.......> - P45

그의 업무라는 것은 지난 30년 전부터 아침에는 9시에서부터 오후 1시까지, 오후에는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초소에 차려 자세를 하고 서 있거나, 맨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서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9시 30분 경과 4시 30분부터5시 30분 사이에 지점장 뢰델 씨의 검은색 승용차가 들어오거나 나가게 되면 보초를 잠시 중단하곤 했다. - P47

그는 자기가 정년 퇴직까지 총 7만 5천 시간을 그 세개의 대리석 계단 위에 서서 보내게 된다는 계산을 해본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파리 전체에서는 물론이거니와-프랑스 전체에서도-같은 장소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5만 5천 시간을 이미 그곳에서 보냈으니 벌써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 P48

경비원이 근무를 같은 장소에서 너무 오래 계속하다 보면 주의력을 차츰상실한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둔감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점점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게 되어 직책상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로변하게 된다는 거였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다 쓸데없는 헛소리였다!  - P49

마치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에서 스핑크스에 관한 것을 언젠가 한 번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이었다. - P49

물론 조나단은 스핑크스가 경비원보다 더 위협적인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신이 복수할 것이라는 말을 경비원이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도굴범이 경고에 개의치 않는 행동을했다고 하더라도, 스핑크스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 P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스핑크스와 경비원이 서로 권위를 어떤 도구로 나타내지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고 느꼈다. 그로 하여금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만드는 그런 상징적인 권위에 대한 자각만이 어떤 주의집중력이나, 무기나 방탄 유리보다도 더한 힘과 인내를 부여해 주었고, 그것만으로 조나단 노엘은 무려 30년도 넘는 시간을 은행 앞 대리석 계단 위에서 아무런두려움도 없고, 좌절감도 없고, 추호의 불만도 없고,
오늘 그 순간까지 찌뿌둥한 얼굴 한 번 하지도 않고 버틸 수 있었다. - P51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오늘만큼은 조나단도 스핑크스적인 평화를 얻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 P51

그래서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가슴 쪽으로 확 뿜어도 보고, 등을 굽혔다가 다시 펴기도 해보고,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도 해보면서 그런 식으로 입고 있는 옷을 들썩거려 옷으로 몸을 문질렀다. 그렇게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들썩거리는 동안 조금씩 옆걸음을 치며잡으려고 했던 몸무게 중심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 P52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시선을 두 번째 계단의 가장자리에 붙들어매고, 수레바퀴처럼 궤도 위의 일정한 구간을 왔다갔다함으로써, 계단 디딤돌의 모서리에 잡히는 단순하고 매번 똑같은 형상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하여, 몸이 무겁게느껴지는 것과 살갗이 가려운 것과 육신과 정신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고 하였고,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 P53

오늘은 마치 가장 뜨거운 7월 오후에나 느껴 볼 수 있음직한 더위로 대기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투명한막 같은 것이 시야를 가렸다. 집과 지붕의 선과 용마루의 윤곽들이 눈이 부시도록 날카롭게 잡혀 오면서도,
동시에 끄트머리가 풀어헤쳐진 것처럼 희끄무레하게보이기도 했다. - P54

시력 때문일 거라고 조나단은 생각했다. 밤 사이에근시안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안경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주 어렸을 때 안경을 써본 적이 있었다. 도수가 아주 높았던 것은 아니고, 좌우가 마이너스 0.75디옵터였다. 이제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든 마당에 시력이다시 근시안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 P55

그런 몹쓸 사념에 너무나 몰두해 있던 나머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여러 번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듣지 못했다. 겨우 네댓 번째가 되어서야-경음기가 한참 울고 있을 때 - 비로소 그것을 듣고, 그에따른 반응으로 고개를 들었다. 뢰델 씨의 승용차가 어느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경적소리가 울렸고,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 P55

뛰었다기보다는-너무나 서두르다가 넘어질 뻔하면서-정신없이 돌진해 가서 철제문을 따고, 옆으로 민 다음, 경례를 한 채 그것을 통과시켰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쳐댔고, 모자챙에 붙인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문을 닫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뢰델 씨의 차가 오는것을 보지 못했어.> - P56

 어깨를 반듯하게 추스릴 수가 없었고, 팔은 바지옆 봉제선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그런 자기 자신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우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염없는 시름에 빠진 채 그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길 건너 카페를 쳐다보았다. - P57

(전략). 그 근방에서 그도 조나단처럼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조나단은30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에 찬 질투심이 기억났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었다. - P58

 조나단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목숨까지 바치면서 은행을 지킴으로써 생활비를 피땀 흘려 벌어들인 반면, 그 작자는 뭇사람들의 동정심과 적선에 빌붙어서, 그들이 모자에 던져 주는 동전을 거둬들이는 것말고는 다른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살았다. - P59

(전략).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조나단이 거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부러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문이나 가끔씩 열어 주거나 지점장의 차를 향해 경례를 하는 등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휴가도 조금받고, 월급도 쥐꼬리만큼 받으면서도, 월급의 대부분은 세금이니, 임대료니, 사회 보장 보험 분담금 등으로흔적도 없이 뺏기며 인생의 3분의 1을 은행 앞에 서서허송하는 일로 지내는 노릇이 도대체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회의를 종종 품기도 했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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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기계가 인간을 위해 노래할 때


 인공지능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별할 수 없는 세상이 온다

인간처럼 학습하고 생각하는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류는 인간의 지능이 인공지능보다 뛰어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어려운 문제의 정답을 실수 없이 맞히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감정이 없고 공감도 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의 단점 탓에 영화나 드라마 속 그들의 모든 시도는 늘 인간에 의해 좌절된다. - P16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을 ‘계산 기계‘라 부르면서 애써 무시했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없기에, 단지 인간 사고력의 범위를 넓혀주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 P16

계산은 주어진 식을 연산의 법칙에 따라 풀어내어 답을 구하는 일이다. 쉽게 말해, 문제를 푸는 게 바로 계산이다.
하지만 직접 푸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알고리즘algorithm과는 차이가 있다. - P17

소프트웨어가 받는 다양한유형의 입력 정보에 대한 출력을 정의하는 특정한 규칙들의 모음을 ‘프로그램program‘이라고 하는데, 인공지능은 받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걸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율적으로 규칙 시스템을 구축해서 사람에게 의존했던 작업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 P19

결정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

영리한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노력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알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 P19

하지만 컴퓨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우주라면 어떨까? 우주의 미래도 전부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누구도 이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 여행은 불가능할 것이라는추측은 둘째 치고, 미래는 나만의 자유의지로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P20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건 어찌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일정한 축을 중심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진자를 보자. 여기에 진자를 2개더 연결하면 삼중 진자가 되는데, 진자가 하나일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게 운동한다. 초기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운동하는 것이다. - P21

그럼 미래를 예측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고, 사고의 영역을 줄여야 한다.
우주가 결정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차치하더라도, 우리는대화하는 상대방이 다음에 어떤 말을 할지 조차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다. - P22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별하는 법

미래 예측의 가능성으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를 알기 힘들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바로 ‘튜링 테스트‘다. - P22

하지만 과학자들의 관점은 다르다. 중국어 방에서 완벽한 중국어 문답이 가능하다면, 그 과정이 어떻든 방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완성된 시스템은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유한 전자기기로 빠른 인터넷 검색을 통해 질문의 답을 찾아내는 것은 지식의 확장이며, 번역 기능이 있는 안경을 쓰는 것도 역시 언어 영역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 P23

회원 가입을 하거나 인증할 때 종종 나오는 도로표지판찾기와 같은 자동 튜링 테스트는 이제 인공지능이 더 잘 맞히기도 한다. - P23

. 인공지능을 개발한 회사로부터 지능을 탈중앙화시키기 위해 블록체인 blockchain이라는 기술을 접목한 한국의 신생기업도 등장했다. 최근에 등장한 증강 인공지능은 사람이 개입해서 추가로 검토해야하는 상황조차 스스로 검토해 추론을 통해 최종 검증한다.
반드시 사람이 마무리해야 했던 일조차 이제 인공지능이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다. - P24

기계 학습

알파고는 지난 대국을복기하지 않는다

아직 스카이넷이 되지 못한 인공지능


‘인공지능‘이라는 표현 자체가 식상한 시대다. 상용화된인공지능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고민 없이이것저것 사용해 본다. - P25

(전략).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한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일 것이다. (중략). 비록 가상의 공간이었지만 인공지능 캐릭터들은 흡사 사람처럼 생각하고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그는 의문이 들었다. 인공지능과 인간 지능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 P26

창의성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으로 자리를 옮긴 허사비스는 본격적으로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 P26

2007년, 그는6쪽짜리 짧은 논문을 발표한다. 결론은 매우 놀라웠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는 새로운 경험이나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전략).
이 논문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Science》의 세계 10대 과학성과로 선정되었고, 훗날 수십만 장의 기보를 집어넣은 알파고는 저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우 창의적인 수를 두게 되었다. - P27

가속화되는 인공지능의 진화

(전략).
이를 위해 먼저 기계가 스스로 학습할 필요가 있었다.
‘기계 학습‘이라는 용어는 1959년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아서 새뮤얼 Arthur Samuel이 만들었다. 보편적인 기계 학습의모델은 인공 신경망으로, 생물의 신경망에서 착안한 방법이다. - P29

인공지능이 계속 학습하다 보면 불필요한 선입견이쌓이며 새로운 사실을 추론하는 능력이 현저히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결국 인간이 의미없는 정보를 망각하듯이 인공 신경망을 무작위로죽이는 방법으로 추론 능력을 개선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딥러닝이다. - P30

여기에서 알파고는 몬테카를로트리 탐색Monte Carlo tree search이라는 방법을 활용했다.
갑자기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고 하자. 여행 경비와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지고,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있다. 이제 세계지도를 펼쳐 목적지를 골라야 하겠지만, 솔직히 모든 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아도 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 대표적인 관광지 몇 개만 뽑아 그중 하나로 정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여행지는 적당히 마음에 들 것이다.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이 바로 이런 원리다. - P31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에게 길을 묻다

알파고와의 첫 번째 대국에서 대부분의 해설가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계속되는 알파고의 과감한 수를 놓고, 프로바둑기사들은 터무니없는 수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두 번째 대국부터는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 P32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동기는 인간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창조주의 교만함이 아니다.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 인간보다 잘하는 것을 계속 찾아내는 일은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다. - P32

인공지능 없는 삶은 조만간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넘어선,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무언가가 끊임없이 개발된다고 해도 결국 최종 목적지는인간이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기위해 존재한다. - P32

이세돌의 가장 큰 승리는 알파고로부터 따낸 1승이 아니라, 네 번의 패배마다 홀로 복기를 시도했다는 인간성에있다. 알파고를 뛰어넘는 또 다른 인공지능과 대국을 해도이세돌 9단은 복기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인류가 갖는 가장 위대한 차별점이다. - P33

2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시간

 어릴 적 지루했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를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것이정말 있다면, 바로 시간일 것이다. 물론 허투루 사용하다가는 혹독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시간이야말로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라고 외치는, 가장올바른 재판관이 아닐까 싶다. - P64

(전략).
어쨌든 시간은 상대적이다. 관찰자의 기준으로 빠르게날아가는 로켓 안의 시간은 관찰자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며,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시간은 지구 표면에 붙어 있는 사람보다 빠르게 흐른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 P66

즉, 매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시간이 거의 동일하게 흐른다고 봐도 좋겠다.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 - P68

시간은 정말 흐르고 있을까

첫눈에 반할 만한 이상형을 만났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당연히 시간이 멈췄을 리는 없다. 누구나 시간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정말 흐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기는 어렵다. - P68

시간의 방향과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도, 왜 흐르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가 대답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엔트로피 entropy다.
엔트로피는 쉽게 말해 무질서한 정도를 뜻한다. - P69

시간의 속도를 다르게 느끼는 이유


미녀와 함께 있으면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지만, 뜨거운난로 위에서는 1분이 1시간보다 길게 느껴진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대답한 이러한 비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물리학보다는 뇌과학과 관련 있다. - P70

미국의 신경학자 피터 망간 Peter Mangan 박사는 청년, 중년, 노년으로 세 가지 그룹을 만들어 각자 마음속으로 3분을 세게 한 뒤 실제 흘러간 시간과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청년 참가자 대부분은 정확한 시간 길이를 맞혔지만, 60대 이상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더 긴 시간을3분으로 느꼈다. 체감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다는 것이다. - P71

(전략). 쉽게 말해서 외부 자극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인데, 많은 생각들이 정신 없이생겨나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도파민의 분비가 줄어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특별한 자극도 점점 줄어들어,
예전처럼 뇌는 세상을 새롭게 느끼지 못하고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 비슷하게 살아간다. 인지하는세월은 그렇게 빨라진다. - P72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늘 새로운 생각을 해보자. 낯선 기억이 시냅스에 저장되는 과정에서 도파민이 대량 분비되기에, 시간은 점점 느려질 것이며 하루를 이틀처럼 보내게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남들의 100세 인생보다 긴, 200세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 P72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부여된
꿈이라는 축복


우리가 매일 충분히 잠을 자야 하는 이유

졸리면 꼭 잠을 자야 할까?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도 살아 있을 수 있을까? - P88

과학자들은 계속 잠을 자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궁금한 나머지, 쥐를 대상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잠들려고 하면 전기 충격을 주거나 물에 빠지도록 해서, 쥐가 늘각성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수면을 제외한 물과 음식물 등 모든 생존 수단이 제공되었음에도 결과는 참혹했다. 실험에 강제로 동원된 쥐들은 점점 말라가더니 결국 14일 만에 죽었다. - P81

이제 잠을 자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왜 자야 하는걸까? 일반적으로 소중한 수명의 3분의 1을 죽은 듯이 누운 상태로 소비해야 하는데, 80세까지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는 무려 26년이 넘는 세월이다. - P81

사실 잠자는 시간은 정말 위험하다.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래를 약속한 내 반쪽이다른 경쟁자에게 한눈팔아도 눈치채지 못한다. 생존과 더불어 번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도 목숨과 자손을 걸고도 늘 자고 싶고 또 자야 하는데, 바로 뇌 때문이다. - P82

물론 잠을 자는 이유는 매우 다양해서 오직 두뇌 청소만을 위한 행위라고 보긴 어렵다. 특히 잠과 밀접한 관련이있는 뇌의 기능은 바로 기억이다. 연구진들은 쥐가 수면을통해 전날 배운 내용을 잘 기억날 수 있도록 저장하고, 쓸데없는 기억은 정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82

그럴듯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수면의 단계

(전략).
우리가 밤에 경험할 수 있는 수면 상태에는 두 가지가 있다. 렘 REM 수면과 비렘 non-REM 수면이다. 뇌의 신경세포렘REM가 분비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에 따라 두 수면 주기는 바뀌는데, 렘수면을 활성화하는 화학물질이 분비되면 렘수면에 진입하고, 렘수면을 억제하는 화학물질이 분비되면 비렘수면 상태가 된다. - P84

깊은 잠에 빠진 후 다시 잠시 얕은 잠 단계로 되돌아 갔다가 드디어 꿈을 꾸는 렘수면 상태로 간다. ‘급속 안구 운동rapid eye movement‘이라는 이름을 가진 렘수면 단계에서는 실제로 자면서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렘수면 중에는 기억의 연상 작용을 활발하게 하는 아세틸콜린이라는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기 때문에, 이때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 P85

꿈의 내용을 잘 되새겨 보면,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소,
목적 등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인과관계를 찾아내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인데, 이런 문제는 기억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조합하는 전전두엽이 꿈을 꾸는 도중에는 거의 작동하지 않기에 발생한다.  - P85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는 꿈의 뇌과학


지난 수십 년 동안 꿈꾸는 행위는 주로 렘수면 단계에서 대부분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쉽게도 나이가 들수록 전체 수면 시간 중에서 렘수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아서 어릴 때보다 꿈꾸는 횟수가 줄어든다는말도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비렘수면 단계에서도 꿈꿀 때 발생하는 신호가 포착되는 정황이 나타났다.
렘수면 단계에서만 꿈을 꾸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 P86

단순히 어떤 수면 단계에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뇌의 후두부에 있는 ‘핫 존hot zone‘이 활성화되면 꿈을 꾼다는 주장이었다. 연구진은 잠든 사람의 고밀도 뇌파검사결과를 분석해서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예측했다. - P87

꿈의 뇌과학은 아직 밝혀진 부분이 많지 않지만, 모든이에게 공통으로 흥미로운 분야다. (중략). 자면서 꾸는 꿈 자체도 충분히 가치가있다.  - P87

 노화

 인공장기는 인간 수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유전자가 인간에게 허락한 최대의 수명

(전략).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인간은 언제까지 살아숨 쉴 수 있을까?‘ 어떻게든 적당한 범위만 알아내면, 결국내 수명도 그 안에 속할 테니까 말이다. - P89

(전략).
그렇다면 무시무시한 죽음에 언제쯤 도달할지를 미리 알 수도 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정보가 적힌 곳이 있다. 모든사람은 서로 다른 외모, 성격, 지능 등을 갖고 태어나는데,
그 이유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정보 기반의 설계도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이걸 우리는 ‘DNA‘라고 부른다. - P89

여기서 나온 작용기 중 하나를 ‘메틸기 methyl group‘라고 부른다. 이게 DNA에 달라붙으면 DNA 메틸화라는 현상이일어나는데, 염기서열 부위에 달라붙으면 유전자 발현을억제한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메틸화 현상을 분석하면 포유류의 노화 정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 P90

(전략).
하지만 2019년에 미국 과학자들은 DNA 메틸화를 적용해새로운 나이 환산법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개는 어릴 때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천천히 늙는 것으로 밝혀졌다. 개가 세 살이면 이미 40대 후반이지만, 열두 살이라고 해도 인간으로 치면 70세 정도라는것이다. - P90

환경이 개선되고 의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기대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과거 원시인들은 자연 수명대로 사망했으나, 21세기 인간의 기대수명은 80세를 그리어렵지 않게 넘는다. 2016년, 미국 알베르트아인슈타인의과대학의 과학자들은 기록상 보고된 최고령 사망 나이에관한 정보를 토대로 최대치에 도달한 인간 수명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 P91

인공장기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아주 오래된 SF에서부터 수없이 다루어진 이야기겠지만,
해답은 새로운 몸일 것이다. 유전자가 정해놓은 자연 수명을 훌쩍 뛰어넘어 영혼까지 끌어올려 살아도 125세라는데,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더 고쳐 쓰는 건 무리수에 가깝다. - P91

쉽게 생각하면, 인간의 장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건 쉽지 않고 여러 가지 심각한 윤리적 문제도 있으니,
인간이 아닌 동물의 장기를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동물의 장기나 가져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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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원작‘인데, 원작이 어떤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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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무사가 내뱉는 욕설 사이사이로 킬킬대는 웃음이 아주 멀리서 잡힌 소리처럼 뒤쪽에서 낮게 들렸다. 미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이크에 들어와서 녹음이 됐다는 건 실제로 듣기엔 꽤 큰 소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24

(전략), 그냥 세월이 흘러 테이프가 낡으면서 아무 상관없는 주변 소음이 왜곡되었다고 믿기로 했다. - P124

이렇게 일관성 없고 쓸모도 없는 데다 앞뒤도 안 맞는 환자 기록은 생전 처음이었다. 진단명과 처방 약이 오락가락 갑작스럽게 바뀌다보니 조가 각종 부작용 때문에 서서히 미쳐버린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화 치료 시간을 포함해 조를 결박하거나 심지어 재갈을 물렸다는 언급도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완전 역효과를 낼 것 같았다. - P125

 초반에 로즈는 조의 증상을 대수롭지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전략). 조를 자기 수준보다 떨어지는 환자라고 여기고 기를 쓰고 환자를 재배정 받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 P126

조가 최종 치료에 잘 반응함. 일주일 후 다시 점검할예정 경과 확인이 그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음.


글쎄, 로즈가 말한 ‘최종 치료‘가 뭐였든 간에 당연히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나왔다. 
(중략).

본인은 내일부로 코네티컷 주립 정신병원에서 사직합니다. 저는 환자와 동료의 기대를 저버렸고, 저 자신에게도 실망했습니다. 이를 만회할 길은 없습니다. 마지막 월급은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받을 자격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함께 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실망시켜 대단히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로즈


두말할 나위 없이 수상쩍어 보였다. - P127

자료를 모두 확인하고 나니 더욱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조를 한 달간 관찰하겠다는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가엾은 한 남자가 비윤리적이고 잔혹한 병원에 의해 얼마만큼 학대를 당했는지 의학계 상급 기관에 입증하려면뭐가 필요할까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 P128

그러고 보면 내가 조를 환자로 맡겠다고 했을 때 브루스가 이를 갈 만도 했다. (중략). 병원에 하나밖에 없는 확실한 수입원을 지키는 교도관 역할을 하라고 맡긴 거였다. - P128

더욱이 모든 일이 네시의 자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비추었다. 다정하고 나이 지긋한 그녀는 병원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가 아이일 때부터 담당 간호사였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 P129

언제나 그렇듯, 괴물보다 무서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서류를 덮으며 만약 로즈가 진짜괴물이라면,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 그녀의 심장에 손수 말뚝을 박아주리라 맹세했다. - P130

Part 5

녹음테이프를 듣고 잔 다음날 나는 곧장 두 번째 면담을 위해 조의 병실로 갔다.

(중략).

나는 방 한가운데로 의자를 끌어와 조를 보고 편하게앉았다.
"어젯밤 당신의 서류를 전부 읽어봤어요."
"아, 그래?"
조가 눈썹을 치켜떴다. - P13

"솔직히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임자들이 의학의힘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건 인정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꽤 있어요."
"그래? 나는 남는 게 시간이라네, 선생."
조가 차분히 말하더니 카드 더미마다 패를 옮기며 게임을 계속했다.
"얼마든지 물어봐." - P136

카드 더미 사이로 다시 패를 옮기던 조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중략).
"나한테 관심이 있다면 왜 날 찾아오지 않지?"
(중략).
"조, 이 병원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소리를 듣고 지내요. 의사조차 말이죠. 당신 부모님도 그런 소문을 진짜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P137

(전략).
"당신 말을 믿어요."
그러자 조의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변하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안도감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조가 고양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보인 구체적인 묘사와 진솔한 감정은 망상이라기엔 너무나 명확했다. - P141

사실 연민이란 감정은 내가 의사라는 직업과 인연을 맺는 데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한때는 내 어머니 같은 환자를 구하고자 막연하게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기를 결심했었다면, 지금은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나는 조가 제정신이라고 거의 확신하며, 그를 구원하는 것이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조는 내가 필요하다. - P141

의심이 확신이 되자, 병원에 출근하는길은 생각보다 더 긴장됐다. 다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취직한 사실상 첫 직장에서 대놓고 병원장의 명령을 거스르기로 마음먹고 나니, 일상적이던 것들이 갑자기 모종의 음모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P142

병원 내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자 어느 정도 패턴이 눈에 보였다. 무엇보다 병원에서 알아주는 거구인 조무사 두 명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게 확실해졌다. - P142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조를 지켜보기로 했으므로, 그동안 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환자 기록에 적힌 조의 ‘불가사의한 정신병‘을 치료할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른 문제들은 다룰 수 있었다. - P143

(전략). 이제는 대부분 날조된 것처럼 보이기는하지만, 누가 작성했든 몇 가지 사항은 굳이 숨기려 하지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P143

 다음 만남에서 나는 이 얘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왜 그냥 병원을 나가지 않는 거죠?"
나는 2주차 치료 기간 중 병실에서 조와 카드 게임을 하면서 물었다.
"부모님께서 당신이 어디 있는지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냥 떠나버리면 되잖아요? 범죄자로 수용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성인이니 의사의 소견과 상관없이 퇴원해버릴 수 있을 텐데요." - P144

"네시가 매일 밤 약을 줄 때 나는 내가 곧 나가게 될 줄알았어."
"네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네시가 무슨 상관이 있죠?"
조가 애처로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시를 아는군." - P145

(전략).
"혹시 말하려는 게...."
"병원에서 그것 때문에 네시를 죽였느냐고?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 싶어도 증명할 방법이 없잖아. 그래도 덕분에여기서 나간다는 환상 따윈 깨끗이 사라졌어. 내가 나가려고 하면 또 누군가가 희생될 거야."
정신과 의사로서 내 소견은 조가 오랜 고립 생활로 인해병원을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 망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종의 편집증을 앓고 있다고 판단됐다. - P146

게다가 만약 이 모든 것이 망상에 불과하다면, 네시의죽음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나는 네시가 죽기 전 아주잠깐 그녀를 만났었다. 피곤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보여도, 그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 P147

항의의 표시로 사직서를 낸다 해도, 그건 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조를 평범한 환자처럼 계속 치료하고 네시가 그랬듯 친절하게 대하면서 가능한 한 즐겁게수용 생활을 하게끔 최선을 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극적으로 관여하기엔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얼 - P148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조를 몰래 도망치게 할 방법을찾아내는 것. 속으로 나는 계획이 실패했을 때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 P148

일을 벌이기에 앞서 나는 조슬린과 상의했다. 혹시 잘못되면 내 인생 전체가 영향을 받을 테고, 이는 내 약혼녀에게도 파급을 미칠 거라는 소리였다. (중략)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면, 환자든 동료든 아니면나든 간에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요?" - P149

어느 정신병원에서든 환자를 탈출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중략).
사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직원들은 누가 병실이나병동 열쇠를 가졌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 P150

구체적인 계획은 이랬다. 먼저 실수인척 조의 병실에 병실 열쇠가 들어 있는 내 의사 가운을 두고 온 뒤, 화재경보기를 울려 직원 대부분이 병원 밖으로 대피하면 조가 탈출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이었다. - P150

"선생은 나보다 더 미쳤군."
조가 특유의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획대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질게." - P151

자, 이제 남은 일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었다. 실행에 옮기기에 완벽한 타이밍이 3주 후에 찾아왔다. 나는복도를 따라 조의 병실로 걸어갔다. - P152

조의 병실 앞에 서자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서 보니 조무사 행크가 침대보를 한 아름 안고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중략).
나는 숨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불안해 보이는 건 도움이 안 됐다. 태연한 척 열쇠를 돌리고 조의 병실로 들어가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 P153

"왜요, 조?"
"고마워."
조가 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내가 필요한 게 바로 이거야."
표현이 다소 이상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요." - P154

"알아, 병원장도 네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했거든. 미안,
애송이. 그럴 순 없어."
실패에 따른 엄청난 압박감이 한꺼번에 나를 짓눌렀다.
안 그래도 이미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는 불안감에 극도로흥분한 상태였다. 그때, 뭔가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조의 방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조는 아니었고, 그럴 리도 없었다. 그건 절대로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대신 음산하고 축축한 목소리로 킥킥대는 웃음이 꼭 썩어가는 목구멍에서 나는 것 같았다 - P156

Part 6

브루스는 꼭대기 층에 있는 병원장실로 가는 내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중략).
농담이 아니라 병원장실까지 가는 십여 분 동안 브루스는 한숨도 쉬지 않고 지껄였다. - P161

 나는 잠시 몸을 가눈 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래, ‘사람들‘이다. 거기엔 당연히 병원장인 로즈가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썩어가는 동물의 사체를 주시하며 먹을 가치가있을지 생각하는 한 마리의 매 같았다. - P162

로즈가 몸을 돌려 행크와 브루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다들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죠."
두 사람이 떠나자 로즈는 발걸음을 옮겨 조용히 문을닫았다.
"이 친구가 새로 들어온 의사인가 보군, 로즈?"
노인은 헛기침을 한 뒤 중부 대서양 억양이 섞인 귀족적인 말투로 말했다. 어디 말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왠지 이상하게 낯익은 목소리였다. - P163

"파커!"
로즈의 불같은 목소리가 방 안을 휩쓸자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입을 닫았다. 책상 뒤에서 노인이 쿡쿡 웃었다.
"혈기 왕성한 친구군. 누구 생각이 나는 걸, 로즈."
그가 말했다. 로즈의 짜증스러운 표정에 순간 나는 용기를 조금 얻었다. - P164

 로즈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자, 그 전에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합시다.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행동이 지나치긴 했지만 해고하지도 않을 거예요." - P165

나는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그녀가 재빨리 손을 들어 제지하는 바람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우선 당신은 첫 치료에서 남들보다 두 배 정도 오래 조의 병실에 있었어요. 둘째, 조를 만나고 나온 뒤에 당신은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라 뭔가 역겹고 불확실한 듯한 표정을 보였는데, 이건 지금까지 그의 담당의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반응이었어요. 실제로 당신을 감시할수록 남들 같지 않더군요. 장시간 치료를 계속하려고 한 데다, 가끔 병실에서 나올 때 기분 좋거나 속이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조무사들이나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래서 다른의사의 소견을 들어보기로 한 거예요." - P166

노인은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네, 파커, 로즈에게 자네 얘기를 듣고 모처럼 기대를 했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 실망인걸. 지금껏 조를담당했던 의사들보다 나은 것도 모르겠고 말이야. 아니, 오히려 일을 저지르려다 잡혀왔으니 최악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쓰라리게 들렸다. 인간미 없이 매정하게 내뱉은 가혹한 말이었다. - P167

(전략).
그는 로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걸 몰랐다고 나무라는 건 아니네, 로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자네도 비슷한 술수에 당했었지."
로즈가 얼굴을 붉히자 노인은 못마땅한 듯 눈동자를굴렸다.
"그래, 나도 아네. 자네도 여기 이 친구만큼이나 지적받는 걸 싫어하지. 그때는 어렸어. 나이 들어서 그러지는 않잖아." - P168

"그만하셔도 되겠어요, 토머스."
로즈가 말했다.
"아직은 여기 이 딱한 친구가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이러다가 지레 겁먹고 관둬버리면 곤란하잖아요. 그리고 선생님이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긴 했지만, 그것도 지레짐작이었고요. 파커도 우리가 오늘밤 계획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게 되면 좀 정신을 차리겠지요."
토머스는 알았으니 계속 하라는 듯 신경질적으로 손을휘저었다. - P169

나는 너무나 얼떨떨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잘못을 덮어주려는 로즈에게 고마움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좋아요, 파커, 당신을 여기 데려온 이유는 조무사 중 한명이 당신이 병원에서 조를 탈출시키려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제보했기 때문이에요. 그에게 계획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후략)." - P170

 내 표정을 본 로즈가 책상 서랍을 열어 스카치 한 병과 양주잔을 꺼냈다. 그러고는 잔에 술을 넉넉하게 채워 내게 건넸다.
"이게 필요한 것 같군요. 의사로서 하는 처방이에요." - P170

내막을 알고 충격을 받아서인지, 갈 곳을 잃어버린 나의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방금 마신 술 때문인지 몰라도 내 안에서 뭔가가 갑자기 폭발했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버릇없는 애 대하듯 무시하며 떠드는 데 넌더리가 났다. - P171

토머스는 냉정함을 잃지 않은 듯 보였지만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더는 친절한 척하려 애쓰지 않았다. 내가 의분에차 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태도 변화에 겁을 먹었을 것이다.
그에게 맞설 수 있는 뻔뻔함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 P172

"로즈, 그럼 이제 이 친구에게 꼬마 괴물을 치료하겠다고 덤벼들었던 똑똑하고 고집불통인 젊은 의사 얘기를 들려주는 게 어떤가?"
(중략). 대신 두 눈에 슬픔과 연민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그녀가 나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 P174

(전략).
로즈가 마른침을 삼켰다. 당시 기억이 아직도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
"과장이 아니에요. 실제로 나를 대리모처럼 대하기 시작했죠. 부모가 눈에 띄게 병원에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 그들이 멀리 떨어져 산다고 짐작했던 터라 조의 행동이 그리놀랍지는 않았어요. 조가 내게 애착을 보일수록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았고, 병세가 호전될수록 내게 더 기대는 상황이 반복되었죠. 이전에 소시오패스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겁에 질린 아이로 변해가는 듯했어요." - P175

로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떨리자 서둘러 눈물을 삼켰다.
"머지않아 4개월 차 정도면 조를 퇴원시킬 수 있을 거라자신했고, 마지막으로 공감 능력을 검사하려고 애완동물한 마리를 입양시켰죠. 작은 고양이였어요. (중략).
조가 고양이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무슨꽃 이름 같은 거였는데."
"파이버우드 플라워."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맞아요! 그 이름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 P177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이번에는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중략).
그녀의 목소리가 다이아몬드처럼 딱딱해졌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놀림을 당한 뒤로 나를 ‘참견쟁이 로지‘라고 부른 사람은 없었어요. 누가 나를 로즈라고부르는 걸 조가 들었을 리도 없고요. 알아맞힐 수조차 없어야 했죠. 하지만 조는 알고 있었어요. (후략)." - P178

그때 그녀의 뒤에서 토머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커, 자네는 아직도 저 미친놈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릴 때 놀이터에서 괴롭힘 당했던 기억을 마술처럼 알아내고,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가장 치명적인 방법으로 공격한 환자가 어떤 정신의학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번 생각을 들어보고 싶구먼. 어떤가?"
나는 나 자신이 싫어져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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