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리터의 눈물 - 눈꽃처럼 살다 간 소녀, 아야의 일기, 개정판
키토 아야 지음, 정원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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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키토우 아야 (木藤亜也)는 폴 모리아의 토카타를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의 문학적 소양과 예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오히려 어릴 때 적은 일기에 더 드러나고 있는 게 뚜렷하여 '아쉽다'. 나는 리스트 (Franz Liszt)의 나단조 곡들을 들으며 그의 삶을 곱씹었다.


지금까지는 여동생이 심술궂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실은 다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학교 갈 때 남동생은 나를 두고 척척 앞으로 가 버리는데, 여동생은 더딘 나랑 보폭을 맞춰서 걷는다. 그리고 육교를 건널 때는 가방을 들어주고, "언니는 손잡이를 잡아."라고 말해 준다.(p.23)


엄마가 의사 선생님께 내 상태를 설명했다. 넘어질 때는 보통 팔을 앞으로 뻗어 몸을 보호하는데, 그러지 않고 얼굴을 그대로 땅에 부딪쳐서 턱을 다친 것,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아서 걸음걸이가 불안한 것, 살이 빠진 것, 동작이 둔하고 민첩하지 못한 것 등. 엄마가 설명하는 내용을 듣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늘 바쁘게 지내는 엄마가 이렇게나 자세히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니……. 엄마는 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계셨구나.(pp.26-27)


내가 죽을 둥 살 둥 공부하는 건 이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나한테서 공부를 빼면 불편한 몸만 남을 뿐. 생각하고 싶지 않아. 외로워도 힘들어도, 이게 현실인걸. 머리는 나빠도 좋으니 제발이지 몸이 건강했으면…….(pp.49-50)


학생수첩 외에 신체장애인수첩을 받았다. 척수소뇌변성증.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운동신경을 지배하는 소뇌의 세포 움직임이 약해지는 병이라고 한다. 한 100년쯤 전에 처음 발견한 병이란다. 이 병은 왜 나를 택했을까? 운명이라는 한마디 말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p.53)


"절대로 무리하지 마. 택시 회사에는 엄마가 설명해 두었으니까 너는 택시비를 내지 않아도 돼."

엄마, 난 꼭 돈 먹는 벌레 같아요. 언제까지나 부담만 주는 아이 같아요. 엄마, 미안.(p.55)


장애인도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마음을 지녔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편할 뿐이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려면, 건강한 사람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무언가를 익혀야 한다.(p.69)


특별활동 시간에 임원과 각각의 학급 일을 맡아서 할 담당자 선거가 있었다. 반 학생 수는 마흔다섯 명. 담당자로 선출된 건 마흔네 명. 나 혼자만 아무 일도 맡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괴로우니까, 난 천사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하자. 떨어진 휴지를 주울 수도 있고, 창을 닫을 수도 있어. 하려고만 하면 할 일이 얼마든지 있거든.(p.69)


히가시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정신 바짝 차리고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희망을 남겨 놓는 게 필요했다.(p.102)


자연히 나아질까? 17살이 되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싸워야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까? 나는 엄마의 지금 나이인 42살이 된 나를 상상할 수 없다. 히가시 고등학교를 2학년 때 그만두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듯이 42살까지 산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불안하다. 하지만 살고 싶다.(p.127)


초등학교 때는 크면 의사가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때는 대학에서 복지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히가시 고등학교 때는 문학 계동으로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꿈은 바뀌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목표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도 졸업한 후에 몸이 불편한 아이들의 식사를 도와주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손을 잡아 사람의 따스함을 전해 주고 싶다.(p.139)


눈물을 참고, '엄마, 다시는 걸을 수 없어요. 붙잡고 서려 해도 설 수가 없어요.'라고 종이에 써서 문을 열고 내밀었다. 내 얼굴을 보여 주는 것도,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도 괴로워서 얼른 문을 닫았다.(p.219)


화장실까지 3미터를 기어서 간다. 복도가 싸늘하다. 내 발바닥은 부드러워서 손바닥 같다. 반대로 손바닥과 무릎은 발바닥처럼 딱딱하다. 보기 흉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유일한 이동수단이니까.

뒤에 인기척이 났다. 기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기어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눈물을 뚝뚝 떨으뜨리면서…….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단번에 터져 나와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고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게 내버려 두었다. 엄마의 무릎이 내 눈물로 흠뻑 젖고, 엄마의 눈물이 내 머리카락을 적셨다.(p.219)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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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 - 300년 후 미래에서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을 바라보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M. 콘웨이 지음, 홍한별 옮김, 강양구 해제 / 갈라파고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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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지적


몇 가지 지적을 좀 해보자.

번역, 교열, 편집 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100자평으로 감당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리뷰로 남긴다. 다만 내가 느낀 것을 토대로 욕하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렇게 허비하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 한 가지씩만 예시를 들고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번역. 기가 막힌다. 대체 역자가 누구길래 Fisherian statistics를 무시하는 것인지.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왜 뚜렷한 인식론적 근거도 수학적 근거도 없는 95퍼센트 신뢰수준이라는 기준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는지는 역사학계의 오랜 의문이다.(p.41)


그러나 원문에는 저런 무책임한 말이 적혀 있지 않다. 바로 역자가 '수학적 (mathematical)'을 수식하는 'substantive'라는 형용사를 빼먹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번역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선 '상당한 수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이건 극명히 차이나는 문장인 게 명백하지 않나. 피셔 기준이 얼마나 정합적인지를 두고 논쟁이 없었을 것 같나, 왜 과학계 성과를 이렇게 무심하게 후려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긴 뭘 알 수 없겠나. 무식해서 그렇지. 이건 무지가 아니다. 무식이다. 무식은 죄가 아니다. 다만 저작물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칭찬받을 일이라고 할 순 없겠다.


두 번째, 교열.

미국 정치 지도자들도 그것을 부인하는 입장에 섰다.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도 기업가, 은행가,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기후변화의 '불확실성'을 내세우는 주장을 널리 퍼뜨렸다.(p.25)


복합 명사의 띄어쓰기가 널뛴다. 무슨 문장끼리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 수정할 여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 사실 엄밀하게는 그것도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바로 다음 문장이다. 너무나 기본적인 기준인데 충족하지 못한다.


세 번째, 편집.

번역하면서 문단을 붙이거나 뗄 수 있다. 그러나 원체 긴 문단인데 관련성도 떨어지는 것을 붙이는 건 적절한 편집이라고 보기 힘들다. 편집자는 pp.40-42, 장장 세 페이지에 달하는 문단을 만들어 냈다. 너무 길어서 적기 싫다. 읽기 또한 벅찼다. 지쳐서 원문을 봤더니 딱 중간에서 끊겨 두 문단이었다. 그 두 문단을 붙일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정도로만 하자.


기후변화라는 개념 자체는 대중들에게 오래지 않았으며 점진적으로 느껴지는 현상이기에 얼마나 심대한 위협인지 체감하기 무척 어렵다. 대부분의 과학 교양서에서는 위험하다고 열심히 소리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잘 다가오지 않는다. 혼자만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도 들며 공감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의 여름철 기온 추세를 보면 꾸준히 더워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막연하게 더워진다는 것이지 그 실체를 명확하게 대중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후의 영향이 더 적은 지역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450 ppm에 달한다면 어떨까, 2030년 탄소중립을 이루지 못한 때라면 어떨까. 지구가 지금보다 2-3℃ 더 뜨거워진다면 어떨까. 모든 책에 나오는 여러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때의 환경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다를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간 게 이 책이다.

이 책은 지구가 망하는 걸 아주 실감나게 보여준다.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내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건 100년 전에도 지구가 지금과 같은 꼴이 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이 책이 조금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통 칭찬을 하기엔 부족한 점도 없지 않다. 여러 가지 중립적이지 않은 서술이 있지만 기왕 적었으니 앞서 언급한 내용을 재활용하자. 역자가 허섭하기 짝이 없는 실수를 한 그 문장은 허리케인이 심해진 것이 무엇 때문인지 논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허리케인이 심해진 것이 기후변화 탓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물리학 이론에 따라 저기압 생성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높아지면 허리케인의 수가 늘거나 규모가 더 커진다는 예상과 일치하는 결과였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맞는 내용이나 이 사례에 단순히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역적으로 다 다른 요인이 있고, 어떤 곳에선 허리케인의 수에만 영향을 주고, 다른 곳에선 오히려 세기가 약해지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저자의 단호함은 도리어 이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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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 2018-09-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리뷰는 오히려 이 책의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해 준다. 리뷰를 작성한 분은 촛점 흐리기를 사용해서 예비독자들에게 책의 가치를 떨어 뜨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직 책을 읽지 않았지만 리뷰를 보면 이 책의 주제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일부 번역 교열의 실수나 논리의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언급 정도로 그칠 일이지 리뷰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왜? 이 책은 교양서이지 전문과학도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MIO 2019-03-04 00:28   좋아요 0 | URL
미안합니다. 굉장히 늦게 보았네요. 초점 흐리기나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는 하려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 읽힐 수는 있다고 이해합니다. 애시당초 이 책은 한 곳에 너무 초점이 명확한지라 다른 쪽이 부옇게 나오고 있어서 제가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책이 어느 한 지점에 있어 분석적이고 전문성을 갖는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필드에서는 그 반대쪽을 이렇게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로 인해 이 책의 가치가 다른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목적의 서적보다 가치가 낮은 것이지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정공 씨는 어찌 받아들일지 몰라도 이론 수준에 머무르는 지식을 단순히 별다른 근거도 없이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려거든 여러 합당한 전제 조건을 통과한 것만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혹 그런 것들이 전공자, 전문가에게 읽힌다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책이 교양서이기 때문에 그런 책임을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사려깊이 생각해서 결과물을 내놨어야 합니다. 특히 fisherian 통계학을 무시한 부분은 이게 과학 책은 맞나 의심스럽더군요. 누구에게 추천할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그 기회를 쓰레기통에 넣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의 책이니 그런 행동을 취할 것이고 그에 따른 글을 쓴 것입니다. 정공 씨가 쓰신 글에 비해 제가 너무 과도한 노력을 쏟은 것 같아 이것참 아깝네요. 혹시라도 보시거든 좋은 하루 되세요.
 
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 바닷마을 다이어리 3 바닷마을 다이어리 3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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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대한 세 가지 단상


1
만화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한국인 대부분은 만화영화, 즉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만화책이 일컫는 범위는 실제로 그 모든 '만화책'을 포괄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순정만화를 먼저 떠올리고 다른 만화를, 또다른 사람은 서브컬처로 대표되는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무엇이 있을까?

대부분은 그런 종류가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교토국제만화박물관 (京都国際マンガミューシアム)을 다녀와 특별전을 보면서 위에 언급한 부류와 다른 여러 외국 만화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만, 그러한 분류가 일본에도 널리 존속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이 작품도 정말 우연한 경로로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서브컬처에 공을 들이던 내가, 소학관 (小学館; 쇼우가쿠칸) 만화상이란 것도 몰랐다니. 등잔 밑에 어둡다는 말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아무튼 그래서 영화로 알게 됐냐고? 그것도 아니다. 다른 책을 구매하다 알라딘 사은품 목록에 이를 표지로 한 틴케이스가 있길래 대체 무슨 작품인가 해서 찾아본 것이다.

이처럼 거의 매일, 나 자신의 시야가 좁다는 것을 느낀다. 거시적인 것은 물론일 테고, 이런 아주 자그마하고 인생의 톱니바퀴에 중요치 않아 보이는 것에서도 틀린 것을 발견한다. 그때마다 기쁘지만 얼마나 더 생각을 수정해야 할까. 내가 발견한 사실은 그 위 층위에서 또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진 않지만 궁금증은 더해간다.

무언가 예시를 하나 보자. 탄핵을 불복하는 무리들이 어제오늘 뉴스를 장식하고 있음은 관심이 없어도 모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의경들과 마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경은 그들과 달리 그 사람들을 진압하고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시하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 온 것이지. 그리고 이것을 쉽게 '공무'라고 부른다.

어떤 의경은 자신의 이념에 반해 그 사람들을 진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그들 주장에 동조해서, 공권력의 폭력을 수반한 진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등….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혹자는 이럴 수 있다. 공권력이 폭력시위를 해소하고자 공무를 집행하지 않는다면 국가기관은 위상과 권위에 타격을 받고 나아가 사회 불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런 경우 타격받는 것은 사회적 약자가 먼저다.

시위의 주체를 친박 어르신들에서 한상균이 이끄는 민주노총으로 바꾸어 보자. 당신의 생각은 일관적일 수 있는가? 나는 동일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 주장은 현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의 가장 적합한 논거를 종합한 것일 뿐이다. 나는 저항권을 인정할 수 없는 모든 폭력집회는 경찰이 진압해야 한다고 본다 – 그 진압의 수위는 논외로 하자. 이 생각이 옳을까? 만약 객관적인 논리로 이런 게 뒤집힌다면, 내가 이렇게 주장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책임은? 한편으로는 논리는 보편적이어서 적용 대상에 대해 변동되지 않는가?

세상은 간단하지 않고, 모든 상황은 서로 다른 여러 결과를 초래한다. 그 결과끼리 상하부 구조가 있어 연결지을 수 있는지도 대충 생각해서 알 수 없고, 그 양을 수치화하는 것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쉽게쉽게 말을 뱉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을 검열하고 발화를 막자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열심히 뒤돌아보자. 알 수 없는 것은 많지만 시곗바늘은 지금도 움직인다.


2
여러분은 책을 읽을 때 같이 무엇을 하는가.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람마다 각양각색이겠다. 나도 음악을 듣는다. 영화관도 단지 시청각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책을 볼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다만, 영화의 경우는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음악이 나오는 데에 반해 책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우리가 선정해야 한다. 또한 책의 분위기는 항상 변하므로 음악 또한 감정선의 중간의 있는 것을 고르거나 그 때에 맞춰 변화하는 것을 택하는 게 좋다. 혹은 그때마다 바꾸거나.

그래서 어렵다. 나는 1권을 읽을 때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라기에, 드뷔시 (Debussy)의 La mer를 들었다. 당신은 인상주의 미술작품을 몇 가지 떠올릴 수 있는가. 난 거의 모른다. 아마 잘 아는 사람도 그 작품을 9분할하여 맨 아래 중간에 있는 것이 어떤지 묻는다면 정확히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음악도 인상주의 작품은 그런 특징이 있어서 감정의 중간선에 있는 편이다. 잘 어울렸느냐, 그건 모르겠다.

2권을 읽을 땐 베를리오즈 (Berlioz)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을 들었다. 첫 권을 읽으니 이 책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략 감을 잡아서 선택이 어렵지 않았다. 이 책에 피아노는 아니다. 이번 3권을 읽을 땐 고레츠키 (Górecki)의 교향곡 3번 (Symphony No.3)을 들었다. 이전까지 이 곡을 듣고 운 적은 없었는데 – 눈물 찔끔은 카운팅하지 말자 – 오늘은 펑펑 울었다.

어쩌면 3권보다 2권 내용이 좋았을 수도 있다. 음악 탓에 책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 것일 수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책들의 제목은 책 내 이야기들 소제목 중 가져온 것이며 동시에 그 이야기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건 2권이 더 나았다고 평가할 수밖에. '한낮에 뜬 달'인데, 난 기존에 낮에도 달이 떠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책 제목을 보고선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보는 대신 그 단어가 그리는 풍경과 느낌을 무심코 생각해버린 것이다. 평소에 이성을 그리 중시하는 사람이. 이런 것 역시 '한낮에 뜬 달'과 같은 현상 아닐까. 작가가 개인의 감상을 어디까지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좋다.

앞으로 음악을 어떻게 선택할지 고민이 길어질 것 같다.


3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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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클래식 - 클래식 음악의 낯선 거장 49인
이영진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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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들을 위한 도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고전음악계의 숨겨진 보물들을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동시에 클래식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곧 마이너리티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분명히 이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 아니다. 디자인이나 제목에서 교양 도서 느낌을 풍긴다는 점이 귀여운 낚시 요소이다.


목차부터가 압권이다. 아마 웬만큼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분류마다 적힌 이들이 대체 누군지 한둘 빼고 모를지도. 나도 현악 연주자 카테고리를 보고 비슷한 상황에 귀착된 것 같다. 내가 엄청나게 고전음악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2,000곡 이상의 서로 다른 곡을 들었다. 연주자를 달리 한다면 그 배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 적힌 현악기 연주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나는 같은 레퍼토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여러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걸 접하길 약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동시간을 들은 사람보다 더 많은 작곡가를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기 나온 작곡가를 다 알진 못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개중 몇은 이름을 들어본 정도로 안다고 염치없이 말한 경우도 있고, 겨우 몇 곡 들어본 것도 있으니.

내가 듣는 레퍼토리는 주로 피아노 음악에 편중되어 있으므로 피아니스트는 반 이상 들어본 이름이었다. 특히 메이에르와 치아니, 바이젠베르크와 아파나시예프는 자주 듣는 편에 속한다. 예고로프와 유디나는 음반을 소유하고 있지만 날을 잡고 집중해보진 않았다.

지휘자는 반도 모른다. 로젠탈과 미트로풀로스, 안체를, 케겔 정도? 현악은 카우프먼, 골드베르크, 샤프란, 마르치, 페라스 외에 다 모르겠다.

일반인이 보기에 마르치나 하이페츠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어차피 모르는데 알아가면 된다 그리 생각한다면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말해줄 순 있겠다. 다만 그 사람이 이 책을 끝까지 읽을지는 모르겠다.


비유명 음악인인 데에는 대부분 이유가 있다. 단명하거나, 실력이 유명인보다 떨어지거나, 여성이거나, 정치적 이유로 배제되거나 등. 이 책은 다채롭게도 이러한 각각의 사연을 가진 음악인들을 한데 모았다. 맨날 같은 음악만 듣고 있다면 이 책에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위 나열한 사유 중 현재 즐기고 있는 작품보다 음악적으로 재미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 만한 것이 2번 정도가 다니깐.


내용은 기대 이상으로 자세하다. 심지어는 간략한 음악사 이야기뿐만 아니라 추천 음반까지 소개한다. 필연적으로 소개된 음악을 들으면서 읽게 될 텐데 이 두꺼운 책을 소화하려면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참고문헌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지식의 한도 내에서 검증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해봤더니 다 맞는 걸로 보아 정보의 무결성을 무턱대고 감히 의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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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 스탠퍼드대 미래인생 보고서
티나 실리그 지음, 이수경 옮김 / 엘도라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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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스물을 지나쳤지만


표지가 끌린다는 핑계를 대고 읽었다. 원래 자기계발서는 안 읽는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지 굳이 책에서까지 남들 말을 고집하고 싶진 않아서.

저자는 창의적으로 살라면서 여러 과제를 내고 그걸 해온 학생들 등의 사례를 소개한다. 과제라 함은 학교에서 내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리 좁게 해석해야 하는 게 아니며 인생 전반의 문제 또한 과제이고, 기회이다. 그러나 저자의 과제를 실제 맞닥뜨린다면 몹시 난처할 것 같고, 읽으면서도 마음 한 켠이 (벌써) 답답하다.

실패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 답답할 텐데, 나 역시도 그렇다. 가장 작은 것으로는 학교의 수행평가에서 시작해, 소논문, 전람회, 연구주제까지 모든 게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일이 아니던가. 모든 사람은 트라우마가 있다. 극복하기 나름이지.

위에 나열한 저런 학사일정의 목표는 정말로 창의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학원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결과였고, 대부분 그쪽의 언질이 주제로 잡히곤 했다. 여기서 좌절한 것이다.


내가 아직 기억하는 중학교 수행평가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이렇다. 첫 번째는 도덕 시간이었다. 교사가 고른 (도덕 교과에서 가르칠 만한) 위인 중 하나를 우리가 랜덤하게 뽑아 그 설명 등을 프리젠테이션으로 발표하는 거였다. 조별이었는데 세상 어느 조나 다 그렇듯 1명이 다 하는 구조였다. 오히려 이건 내가 독단적으로 구도를 선택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다. 보기 나름이다.

컨셉은 지식채널e였다. 다른 조가 디자인과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에 골몰할 때 우리는 그냥 까만 배경에 하얀 글만 넣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한 학년 뒤 같은 교사의 같은 과제를 만나 다시 우려먹었다.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었고 그때는 마우스 딸깍거리는 것도 귀찮고 다른 스타일을 고민하다 아예 동영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당시 동영상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과제 하나 때문에 그런 걸 배울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중학교 때 나는 놀기 바빴다. 매일매일이 재밌었고 미래는 별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프리미어? 애프터이펙트? 베가스? 나사 풀린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동영상 컨셉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파워포인트를 동영상처럼 꾸몄다. 메크로랑 타이밍을 적절하게 설계해서 파워포인트지만 동영상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건 리스크가 있었는데, 발표 현장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 학교엔 교실마다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교사들이 랩탑을 들고 다녀서 몇 번이고 찾아가 테스트를 해봤다. 폰트, 동영상 속 동영상을 포함한 오브젝트 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런 완벽주의적 습관은 원래 내게 없었는데 이전 학년 때 폰트나 동영상이 깨져 발표에 실패한 그룹을 보면서 더 강해졌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노력했다. 한번은 헬렌 켈러에 대해서 조사해야 했다. 뽑고 나서, 아, 편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어릴 적 위인전을 봤다면 헬렌 켈러를 모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뜬금없이 사회주의자니, 페미니스트니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사회와 정치에 너무나도 관심이 많았고, 교사가 원한 방향과는 달랐겠지만 그 부분도 충실히 넣어 발표를 했다. 물론 반응이 좋았다. 전교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덤이었다.


또 다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우리 도시' 명소를 소개하는 팸플릿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거야 쉬운 것 아닌가, 대충 검색해서 넣으면 되니까'라고 과제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중요한 내용은 주로 끝에 있다는 말을 새겨 들어야 한다. 문제는 상위 세 명인가 하여튼 최고성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10%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고민을 했다. 이때는 어떻게 엄마가 내 옆에서 도울 시간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줬다. 당시 전교 1.5% 안에 있었으니 특목고 준비겸 그런 것 같은데 이유를 확신할 수는 없고.

어쨌든 결국 팸플릿을 어떤 방식으로 꾸미는 게 좋을까 그것이 관건이었다. '어떤 방식'이라 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이렇게 나눠 보는 것은 문제 해결의 기본이다. 프로그래밍에서의 가장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나, Divide and Conquer라고. 그렇게 나누면 결국 물리적인 것과 서술적 측면이 남는다.

나는 단지 미술에 전혀 조예가 없어 물리적인 면을 포기했다. 왜 팸플릿은 대개 접혀 있고 그걸 펼치면 다른 정보도 적혀 있는 것이지 않나?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입체적인 것을 생각했다가 도저히 만들 능력이 부족해 생각만 하다 포기했다. 그것도 괜찮은 시도였을지 모르겠지만 상상 이상으로 내 미술 실력은 조악해서 열심히 만들어도 장난스럽게 했다며 비난을 받는 수준이므로, 자제하기로 했다.

그래서 남은 것은 소개를 어떻게 서술하느냐였다. 고민을 하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코스였다. 정확한 방식은 기억이 안 나지만 크게 2-3가지 코스를 준비하고 일부 겹치게 만들면서 그곳에 간단한 장소 설명을 적었다. 아무리 팸플릿을 만들어봤자 위치가 '**동 391-23'따위로 적혀있으면 가치가 없다. (지도 들고 다니던 시절이다….) 결국 우리가 루트를 지정해서 골라가는 편이 더 목적에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식에서 출발했다. 평가는 매우 좋았다.

왜 그땐 이런 수행평가에 목숨걸고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학교에서도 공부만,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만 시킨 아이들과, 다른 적절한 방식으로 교육시킨 아이들 중 누가 더 성과가 높을까? 나는 분명 후자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수능 수학 등급별 커트라인을 보면 공부를 전혀 안 하는 학생의 비율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게 다 현 교육과정과 압박이 강한 교육문화 탓으로 보인다. 끝없이 공부하라 시키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나 싶다. 그 외침만큼 할 리도 만무하고, 그런 환경에서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 비율은 훨씬 클 테니.


중학교 이야기 나머지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앞서 잠시 소개했던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내가 가장 황당했던 것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혼자 공부하던 산소의 라디칼 관련 내용이 교내 연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나는 참가하지 않았다. 내가 공부하던 내용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많았지만 그걸 정말 연구에 적용할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다. 그 내용을 정리해 자랑스럽게 블로그에 올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 연구나 내가 적은 내용이나 일반화학 내용을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라 절대 그 '연구자'가 혼자 생각했을 리는 없으리라 보인다.

결국 학원. 나는 돈도 문제지만 엄마도 바빠 그런 정보 네트워크가 없었고, 심지어 1학년 때까지는 학원의 존재조차 몰랐다. 일반 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교와 다른 일부 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다. 이런 곳에서 고교입시도 준비한다고 한다. 다른 세상이다.

내가 거기서 좌절했지만 모든 걸 자본과 소득의 탓으로 돌리진 않았다. 요즘엔 '노오력' 등으로 386, 486, 586을 거친 일부 몰지각한 세대의 말을 무작정 비꼬는데 난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렇다. 내가 좀 더 똑똑하고 노력했다면 혼자서도 다 준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불합리적이며 기회의 평등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그런 이상은 정치인이 추구할 방향인 것이지, 일반 개인이 자신 삶에서 감당하고 찾으려 발버둥치는 것을 강제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물며 그 목적이 이런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이야기가 샜다. 앞으로도 일부러 이야기를 이리저리 비틀고 흘리면서 삶의 궤적을 조금씩 소개해보고자 한다. 책을 매개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명분이 작아지진 않을 테니깐.

여러 경험으로 창의적 해답을 내놓았을 때의 성취감을 알고 있다. 기분이 아주 좋고 성장한 느낌을 받는다. 내 경우엔 아주 소박한 것들이었지만. 그 성취감을 증폭시켜줄 더 큰 장소 - 예를 들면 저자가 주최하는 캠프라든지 - 가 있으면 도전이 두렵지 않은 삶이 꽃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현실이, 지금 이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저자 말대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중요"하니까, 전제부터 타당한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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