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비치는 언덕길 : 바닷마을 다이어리 3 바닷마을 다이어리 3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에 대한 세 가지 단상


1
만화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한국인 대부분은 만화영화, 즉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만화책이 일컫는 범위는 실제로 그 모든 '만화책'을 포괄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순정만화를 먼저 떠올리고 다른 만화를, 또다른 사람은 서브컬처로 대표되는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무엇이 있을까?

대부분은 그런 종류가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교토국제만화박물관 (京都国際マンガミューシアム)을 다녀와 특별전을 보면서 위에 언급한 부류와 다른 여러 외국 만화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만, 그러한 분류가 일본에도 널리 존속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이 작품도 정말 우연한 경로로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서브컬처에 공을 들이던 내가, 소학관 (小学館; 쇼우가쿠칸) 만화상이란 것도 몰랐다니. 등잔 밑에 어둡다는 말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아무튼 그래서 영화로 알게 됐냐고? 그것도 아니다. 다른 책을 구매하다 알라딘 사은품 목록에 이를 표지로 한 틴케이스가 있길래 대체 무슨 작품인가 해서 찾아본 것이다.

이처럼 거의 매일, 나 자신의 시야가 좁다는 것을 느낀다. 거시적인 것은 물론일 테고, 이런 아주 자그마하고 인생의 톱니바퀴에 중요치 않아 보이는 것에서도 틀린 것을 발견한다. 그때마다 기쁘지만 얼마나 더 생각을 수정해야 할까. 내가 발견한 사실은 그 위 층위에서 또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진 않지만 궁금증은 더해간다.

무언가 예시를 하나 보자. 탄핵을 불복하는 무리들이 어제오늘 뉴스를 장식하고 있음은 관심이 없어도 모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의경들과 마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경은 그들과 달리 그 사람들을 진압하고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시하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 온 것이지. 그리고 이것을 쉽게 '공무'라고 부른다.

어떤 의경은 자신의 이념에 반해 그 사람들을 진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그들 주장에 동조해서, 공권력의 폭력을 수반한 진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등….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혹자는 이럴 수 있다. 공권력이 폭력시위를 해소하고자 공무를 집행하지 않는다면 국가기관은 위상과 권위에 타격을 받고 나아가 사회 불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런 경우 타격받는 것은 사회적 약자가 먼저다.

시위의 주체를 친박 어르신들에서 한상균이 이끄는 민주노총으로 바꾸어 보자. 당신의 생각은 일관적일 수 있는가? 나는 동일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 주장은 현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의 가장 적합한 논거를 종합한 것일 뿐이다. 나는 저항권을 인정할 수 없는 모든 폭력집회는 경찰이 진압해야 한다고 본다 – 그 진압의 수위는 논외로 하자. 이 생각이 옳을까? 만약 객관적인 논리로 이런 게 뒤집힌다면, 내가 이렇게 주장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책임은? 한편으로는 논리는 보편적이어서 적용 대상에 대해 변동되지 않는가?

세상은 간단하지 않고, 모든 상황은 서로 다른 여러 결과를 초래한다. 그 결과끼리 상하부 구조가 있어 연결지을 수 있는지도 대충 생각해서 알 수 없고, 그 양을 수치화하는 것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쉽게쉽게 말을 뱉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을 검열하고 발화를 막자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열심히 뒤돌아보자. 알 수 없는 것은 많지만 시곗바늘은 지금도 움직인다.


2
여러분은 책을 읽을 때 같이 무엇을 하는가.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람마다 각양각색이겠다. 나도 음악을 듣는다. 영화관도 단지 시청각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책을 볼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다만, 영화의 경우는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음악이 나오는 데에 반해 책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우리가 선정해야 한다. 또한 책의 분위기는 항상 변하므로 음악 또한 감정선의 중간의 있는 것을 고르거나 그 때에 맞춰 변화하는 것을 택하는 게 좋다. 혹은 그때마다 바꾸거나.

그래서 어렵다. 나는 1권을 읽을 때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라기에, 드뷔시 (Debussy)의 La mer를 들었다. 당신은 인상주의 미술작품을 몇 가지 떠올릴 수 있는가. 난 거의 모른다. 아마 잘 아는 사람도 그 작품을 9분할하여 맨 아래 중간에 있는 것이 어떤지 묻는다면 정확히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음악도 인상주의 작품은 그런 특징이 있어서 감정의 중간선에 있는 편이다. 잘 어울렸느냐, 그건 모르겠다.

2권을 읽을 땐 베를리오즈 (Berlioz)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을 들었다. 첫 권을 읽으니 이 책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략 감을 잡아서 선택이 어렵지 않았다. 이 책에 피아노는 아니다. 이번 3권을 읽을 땐 고레츠키 (Górecki)의 교향곡 3번 (Symphony No.3)을 들었다. 이전까지 이 곡을 듣고 운 적은 없었는데 – 눈물 찔끔은 카운팅하지 말자 – 오늘은 펑펑 울었다.

어쩌면 3권보다 2권 내용이 좋았을 수도 있다. 음악 탓에 책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 것일 수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책들의 제목은 책 내 이야기들 소제목 중 가져온 것이며 동시에 그 이야기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건 2권이 더 나았다고 평가할 수밖에. '한낮에 뜬 달'인데, 난 기존에 낮에도 달이 떠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책 제목을 보고선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보는 대신 그 단어가 그리는 풍경과 느낌을 무심코 생각해버린 것이다. 평소에 이성을 그리 중시하는 사람이. 이런 것 역시 '한낮에 뜬 달'과 같은 현상 아닐까. 작가가 개인의 감상을 어디까지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좋다.

앞으로 음악을 어떻게 선택할지 고민이 길어질 것 같다.


3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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