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극우파들 (양장) - 유럽에 들이닥친 우익 열풍,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장 이브 카뮈 외 지음, 은정 펠스너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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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속적으로 번역서들에 있어서 그 번역이 적절하고 타당하게 옮겨진 것인가를 묻는 데엔 물론 이유가 있고, 이는 무척 간명하다. 저자가 의도한 내용과 내게 전해지는 게 다르면 그건 문제가 있다. 특히나 학술서에서 관련 사실을 나열할 때는 더욱 그렇다.


마찬가지로 전에 읽었던 『IS 리포트』라는 책을 번역했던 이 번역가는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상 (독일어 부문)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정작 번역된 책은 모두 프랑스어가 원어다. 출판사 측에선 이 번역가에 대해 4개 국어를 나열하고선 각 언어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관심이 많다며 대담한 소갯말을 써 뒀지만, 나는 이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번역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영문판을 읽어봤더니 완전히 곡해한 부분이 여러 곳 있었으니.


아쉽게도 난 프랑스어판을 소장하고 있지는 않아서 하버드 대학 출판 (HUP)의 임프린트인 밸크냅 (Belknap)에서 나온 영역판을 보고 비교했다.


We thus arrive at a continuum that preserves specificities: Fascism is autonomous vis-à-vis "fin de siècle nationalism," but without being disconnected from it, and the comparison between Nazism and Fascism moves in only one direction (Nazism goes further than Fascism). It is easy to understand what separates the factions from each other, what allows individuals to move from one to the other, but also what leads to so many excesses in the efforts to amalgamate the two.

즉 이러한 특수성은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특수성은, 파시즘이 '역사 말기의 민족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민족주의와 한 번도 분리된 적 없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또 다른 특수성은 나치즘을 파시즘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해도 그 반대로 파시즘을 나치즘에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인데, 이는 나치즘이 파시즘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개인의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이처럼 여러 가지 성향들을 혼재하게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이걸 이렇게 해석해 둔 것도 있고 (웃음만 나온다), 그런가 하면


The Blanquists later rallied behind General Ernest Boulanger, a nationalist figure nicknamed "Général Revanche," at a time when the left was also deep in the process of producing an ideology.

그들은 또한 일명 '복수의 장군'으로 불렸던 민족주의자 불랑제 장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같은 시기에 좌익 진영도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재정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rally behind'를 '조롱하다'로 해석해 정반대 의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는 에른스트 불랑제가 블랑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Bonapartisme'을 '나폴레옹 정책'이나 '나폴레옹 이념'으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심지어 한 페이지 안에서 이러한 단어가 제시됐다 (다른 페이지에선 '나폴레옹주의'라는 말까지 병용했다). 1장만 봐도 이 꼴이다.


Déroulède spoke of a "plebiscitary republic," in which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would be elected by universal suffrage, and the popular will would be expressed through "legislative plebiscites," another name for referendums.

데룰레드는 '국민투표에 의한 공화제'를 당의 정책으로 제시했는데, 이 공화제는 보통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며 '합법적 선거'나 국민투표를 통해 구성된 시민자문위원회의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도 안 되는 해석이다. 'plebiscite'와 'referendum'이 같이 나오고 있는데, 이에 차이를 두지 않은 번역은 전공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실 이렇게 불분명하게 넘어가선 안 된다. 이 두 용어의 회색 지대가 존재하긴 하지만, 'plebiscite'는 Bonapartisme을 논할 때 굉장히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니 확실히 구분지어야 한다.) '합법적 선거'라는 해석이나, '법제화된 plebiscite'를 국민투표와 병렬적으로 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울은 학술서에 감수도 없이 비전문가의 번역을 그대로 쓰는 건지, 그런 조잡한 번역본을 무려 38,000원이나 받으면서 팔아먹겠다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각주를 빼면 350쪽도 되지 않는데 이 가격은 뭘까? 독자를 우롱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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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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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기분이 딱히 좋진 않았지만 페이지만은 술술 넘어갔다. 펼쳐지는 내용과 제재를 기피해서 그랬다기보단 현대인의 입장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자기 혐오가 일궈낸 반응이 아닐까 생각했다.


왜 무라타 사야카 (村田沙耶香)라는 작가가 '편의점 인간'이라는 책을 쓰고선 '소멸세계'를 썼는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몰랐다. 그는 전통적 세계관과 현대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 중 일부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데에 능하다. 이 책에선 편의점에 녹아든, 그것보단 편의점이라는 사회의 규정이 전부의 가치인 생물학적 '인간'이 그 도구로 나온다. 그뿐이지, 편의점 그 자체에 대한 시비나 호불호가 주제는 아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서도 결국 정상가족이 얼마나 정상적인가를 다시 물으리라 생각한다.


제155회 아쿠타가와 상 심사위원었이던 야마다 에이미 (山田詠美)의 말처럼 "편의점과 그 주변의 조밀한 곳을 확대했을 뿐"인데, 실제 사회의 차별적이고 다양성이 존중되지 못하는 부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파편적일 수밖에 없는 편의점을 작은 사회로 가뿐히 확장시키고, 주인공 후루쿠라 케이코 (古倉恵子)의 가치관인 폐쇄적인 또 다른 작은 사회와 어우러지게끔 했다.


작중 대립하면서도 은근히 동질적인 인간이던 후루쿠라와 시라하 (白羽)는 마지막엔 다른 길을 택한다. 하지만 그들이 택하는 두 가지 행로 모두 정상성에서 거리가 멀어 작가의 지향점이 어디인가 파악하려면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범주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사회학적·철학적으로 어떤 우위가 있고 어찌하여 합리적인가 여러 물음이 생길 수 있고, 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고민해볼 거리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삶의 가치를 우위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 속에 갇혀 사는 차별적인 인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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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프리드먼 교수의 경제학 강의
데이비드 D. 프리드먼 지음, 고기탁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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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를 새에 웬만한 교양서는 원서와 함께 읽는 스타일이 정착되고 말았다. 그런 나를 전제하고서 이 책의 한국판은 좀 이상하다고 말해본다.


번역이 중구난방이어서 혹시 판이 다른가 했더니, 앞쪽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This Korean edition wa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Writers' Representatives LLC." 회사 둘이서 쑥덕대며 원문을 훼손했다는 말을 예쁘고 깔끔하게 적어놨다. 열심히 축약해놨는데 그게 도움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원문이 훨씬 낫다. 그렇다면 간략하게 만든 의의는 무엇인가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답은 내겐 없다.


이 책을 읽는 의의에 대해서는 그래도 간략하게 설명해볼 수 있다. 얼마 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람은 행동경제학 권위자였다. 한국에서는 『넛지 (Nudge)』로 꽤 유명한 경제학자다. 행동경제학은 고전적인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공격한다. 데이비드 프리드먼 (David D. Friedman)의 학문적 성과나 이 책에서 그 원칙을 언제, 어떻게 언급하는가를 확인해보자. 그도 그 원칙을 똑같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면 '시작하는 말'이 나온다. 두 번째 문단을 읽다 보면 게리 베커 (Gary Becker)의 불량아 정리 (Rotten Kid theorem)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which tells us when a rational child will…" 그만 읽자. 'rational', 경제학원론에 나오는 수만 가지 경제학 용어 중 프리드먼이 가장 처음으로 등장시킨 것이 바로 이 합리성이다. 1강의 첫 줄은 "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적인 행동을 탐구한다"이며, 사실 1강 전체를 합리성이 경제학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역설한다. 그 말대로 중요하다. 그리고 이번 노벨 경제학상이 인간은 기존 경제학의 주장만큼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하겠다. 바로 그 점에 지금 이 책을 읽는 의의가 있다.


원문이 워낙 좋은 교과서이다 보니 마구 헤집어 놔도 나쁘지 않은 책이지만, 원서를 보길 추천한다. 한국판은 합리적이지 못한 책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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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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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만나고 싶지 않은 재미없는 사회과학 이론서와 수도 없이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겁하면서 책을 덮곤 한다. 재미없는 사회과학 이론서는 굉장히 재미없다. '굉장히'에 악센트를 두고 싶다. 의미 없이 글자 수를 늘리는 이유가 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무릅쓰고도 이렇게 적고 싶다.


나는 이 책이 바로 그런 부류가 아닌가 잠시 의심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사람인가 아닌가는 저자의 격렬함과 유머에 대한 독자의 평가를 보면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was the age of innocence, and historians walked in the Garden of Eden, without a scrap of philosophy to cover them, naked and unashamed before the god of history. Since then, we have known Sin and experienced a Fall; and those historians who today pretend to dispense with a philosophy of history Pre :merely trying, vainly and self-consciously, like members of a nudist colony, to recreate the Garden of Eden in their garden suburb. Today the awkward question can no longer be evaded.


굳이 원전의 표현을 적어두고 싶었다. 해석은 아래와 같다.


당시는 천진난만한 시대였으며 그래서 역사가들은 자신들을 가려줄 한 조각의 철학도 걸치지 않고 역사의 신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부끄러움도 없이 에덴 동산을 돌아다녔다. 그때 이후 우리는 죄를 알게 되었고 타락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철학이 필요 없는 척하는 역사가들이 나체촌의 주민들처럼 교외의 전원주택지에 에덴 동산을 재건해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것은 남의 눈을 끌어보려는 쓸모없는 짓일 뿐이다.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그 거북한 질문은 더 이상 회피될 수 없다.(p.33)


나는 저자가 마이네케의 사례를 보여준 뒤 덧붙인 깜찍한 조롱을 읽고 실컷 웃었다. 감탄했으며,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저자가 '좀더 실감나는 뚜렷한 사례'를 또 보여준다기에 잠시 갸우뚱했다. 그것을 읽고 나니 이 즐거움을 나만 알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적어둔다.


혹은 좀더 실감나는 하나의 뚜렷한 사례를 들어보자. 1930년대에 자유당 (주– '휘그'라고도 불림)은 영국 정치의 실세로서는 막 궤멸했는데, 그 무렵 버터필드 교수는 <휘그적 역사해석>이라는 책을 써서 굉장한 그리고 그럴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남다른 책이었다. 그러나 치밀함과 정확성에서 무엇인가 부족했던 그 책의 결함은 재기 넘치는 독설로 메워졌다. 독자들은 휘그적 해석이 나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휘그적 해석에 반대하여 제기된 비난들 중의 하나는 그 해석이 '현재와 관련하여 과거를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관한 버터필드 교수의 입장은 단호하고 신랄했다.


"한 눈 (eye)을, 말하자면, 현재 위에 올려놓고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모든 죄악과 궤변의 원천이다. 그런 연구야말로 '비역사적'이라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12년이 흘렀다. 버터필드 교수의 조국은 '한 눈을, 말하자면, 현재 위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과거를 불러냈던 한 위대한 지도자 (주– 처칠) 밑에서, 흔히 휘그적 전통 속에 체현 (體現)되어 있는 입헌적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치러졌다고들 하는 그런 전쟁에 돌입했다. 1944년에 출간된 <영국인과 그들의 역사>라는 한 작은 책에서 버터필드 교수는 휘그적 역사해석은 '영국적인' 해석이라고 단정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인과 그들 역사의 동맹'을 그리고 '현재와 과거의 결합'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버터필드의 세계관이 이렇게 뒤바뀐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악의적인 비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의 의도는 제2의 버터필드로 제1의 버터필드를 비판하거나, 술 취한 버터필드 교수를 맑은 정신의 버터필드 교수와 대결시키려는 데에 있지 않다.(pp.60-62)


저자의 유명한 아포리즘 때문에 이렇게 즐거움을 주는 창작물이 되레 묻히는 상황은 아쉽기 짝이 없다. 한편으로는 유머와 지적 유희가 아닌 다른 요소로도, 다른 저자, 예컨대 수많은 유명한 철학자의 저서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는 독특하다면 또 그러한 사람이라 이렇게 전체를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또한 평범한 사람이라서 그들의 집약된 표현도 아낀다. 하지만 숲을 본 뒤 나무를 보면 한층 더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경험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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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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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같은 판형과 두께 때문에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가 없었지만, 내용도 이게 자기계발서의 처세술 파트인지 젠더학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니 실망이 크다. 외국에 더 좋은 페미니즘 에세이 (울스턴크래프트, 너스바움 등)나 입문서가 지천에 널려 있으며 심지어는 훨씬 저렴한 편인데 왜 이걸 선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기니 짧게 답해본다.


먼저 시간 축을 2015년 2월로 돌려보자. 나는 트위터의 몇몇이 (그들이 말하는) '넷페미'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아젠다로 가져간 것은 가장 처음엔 이슬람 혐오 (Islamophobia)였다. 과연 이게 상호교차성으로 용인받을 수 있는 논지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들은 잘못된 사실로, 보편적 인권의 가치에서 벗어나 괴상한 논리로 무슬림을 비하해댔다.


그 뒤엔 '나는 샤를리 엡도다'라는 우스운 수준의 배경지식이 깔린 해시태그 운동으로 발전했다. 한명숙 언팔 운동 등 정치적 색채가 강한 해시태그 운동 – 그것도 꽤 의미 있는 규모로 한정하더라도 – 이라면 여럿 있었지만, 페미니즘의 가치가 들어간 것은 사실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페미니즘'이 잘못된 것이었던 게 실패였다면 실패였다. 모든 자본주의와 모든 자유주의, 그리고 모든 공산주의가 정합성을 갖췄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해당 명제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추가로 적어둔다.


이들이 사실 '넷페미'의 주류가 되었고, '페페페'를 만들었고, 망했으며, '메갈리아'를 만들었고, 망했으며, '워마드'를 만들었고, 망했다. 사이트나 프로젝트는 번번이 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영향받은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성공한 점도 없지 않다. 다만 운동 방법론으로서 적합했느냐, 그들이 지금 알고 있는 상식이 주류 페미니즘과 상충하는 부분이 얼마나 있어 어떻게 영향을 끼쳤느냐는 것은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물론, 적절치 못했다고 생각한다. '자매애' 개념을 들이대고 연대를 논하더라도, 생물학적 남성을 거의 완전히 배제한 채로 시작한 운동이 성공하기는 단연코 어려우니 말이다. 가부장제가 공고하고, 역사적 배경으로부터도 남성의 계급 우위가 확실한 이 나라에서 그게 쉬웠다면, 애저녁에 부계 사회는 낡아가고 있을 것이다. 초기 운동 방법론을 정립한 사람들은 아마추어였고, 의회 정치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고, 그 결과 깊은 고민 없이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일부 여성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반대 급부로 '페미니즘=메갈=워마드=…'라는 해괴한 공식을 남성들에게 던져준 꼴이 됐다. 이를 단순히 공1 과1로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평가한다. 성 대결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대부분 남성인 점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고민해봐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두는 실질적으로 '여성 혐오'를 한다. 이건 발화자나 행위자의 젠더와 아무 관계가 없다. 버틀러, 크리스테바, 너스바움 그 누가 정립한 페미니즘 개념이 옳고 틀리건 누구나 여성 혐오를 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아직 규명되지 않은 여러 생활 속 혐오가 깃든 요소가 넘쳐날 것이기에. 누구나 여성 혐오를 하지만, 그 정도의 차가 있을 뿐이다. 제약이 남성보다 덜한 여성이 비교적 여성 혐오를 덜 한다. 이러한 환경은 아마 페미니즘 이론서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므로 운동을 계획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것이다. 그런데 설득 대신 상호 비난과 비하로 번지게 된 이유는, 그 당시 상수였던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아니라 변인이었던 운동 계획자들의 노선에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는 남성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다 – 남성들의 심각한 여성 혐오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교묘히 이를 피해가려는 것도 아니다. 감정적으로만 다가서면 나도 끝도 없이 이것만 열심히 지적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건 무익하다 –. 하지만 재교육화가 필요한 집단에 좋지 않은 접근 방법이 반복되었고,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노선을 택했을까? 여성 개인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이 됐다는 말은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모든 운동은 자신의 가치관의 관철을 목적으로 하는데, raw하고 래디컬한 자세로 상대를 설득하고, 목표를 이뤄내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극단주의 운동이 역사상에서 실패해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반대되는 전략을 바로 '성 주류화' 혹은 '다수파 전략'이라고 부르고 선진국 소수 집단에선 이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 현대 개혁 세력에게는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여성들의 분노가 큰 건 사실이고, 커야 한다. 그 분노는 운동을 추동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의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동력으로 작용해야 어떠한 상황이든 매끄럽게 넘어가는 데에 기여하고 부작용이 없다.


총선만 되면 공천받은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악수하며, 한 표 부탁드린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을 죽도록 외친다. 잠도 극단적으로 줄이고 거의 매일 그런 일을 한다. 이들이 고맙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가치관이 옳음을 알고 그 정당의 정강·정책에 따라 당연히 자신이 당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구태여 고맙다는 의사 표시를 유권자에게 왜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몹시 간단하다. 사회가 그 가치관이 옳다는 것을 보장하고 있지 않으며, 그렇게 유권자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치관은 총선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마이너하다. 이들은 기득권적 논리에 휘둘리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그 방면에 친화적으로 대응하므로 이들 개개인에게 선택받는 것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매우 소중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선택을 전제로 고마워하는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고, 더 나아가 이런 이유가 기반이 되어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진다.


그럼 위의 기득권적 논리를 남성 계급 우위, 즉 가부장제로 바꾸고, 작은 사회였던 총선 판을 사회로 격상시켜 보자. 정치권이 자신들의 훌륭한 정책을 유권자들이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듯이 운동 세력 또한 대상에 관한 비난을 지양해야 한다. 여기선 실제로 유권자들과 대상이 멍청한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왜 그들은 설득을 배제하고 분노를 털어내는 데 주목했는지 고민해보자. 대충 생각해도 이는 성공하기 매우 어렵지만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나는 여기에 애초 창안자들의 의도가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의회민주주의의 프로세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투표로 일컬어지는 대의민주성과 관계가 없었다. 혹은 관계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온라인에서 세력을 불리기만 하면 됐으므로.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의회민주주의를 배제함으로써 그들은 그 개념과 집단을 기득권으로 투사하여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부터 – 영부인 이희호는 대한민국 전후 1세대 페미니스트이며, 정부 전반에도 페미니즘 영향이 많이 닿았다. 그 결과 여성 정책 담당 부서가 여성부로 최초로 승격된다. – 굳건히 페미니즘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정당은 민주당이고, 최근까지도 여성의전화, 여성민우회, 여성연합 등 주류 페미니즘 시민단체의 인력 중 상당수는 이곳으로 흡수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의회민주주의에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차지하는가는 제쳐두더라도, 그 페미니즘의 지분은 민주당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민주당과 그 페미니즘을 기득권으로 몰아 이득을 보고자 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아마 처음에 이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나중이 되어선 이 목적이 크게 의미를 가졌다. 처음부터 주류를 배싱하고 나온 괴란한 물건이었던 이들의 페미니즘은 여태 쌓아온 논의와 이루어낸 성과를 모두 무시했다. 하물며 새누리당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도 여러 번 했다. 이건 돌출발언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잘 보여주는 일종의 표상이었다. 목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반민주당이었다. 페미니즘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우선시되는 도구의 하나였다.


나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이뤄낸 여성 정책 성과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이게 대한민국 여성계가 이뤄낸 거의 모든 성과인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는 한나절만에 나열하기 힘들 만큼 적지 않은 양이다. 그래서 이화여대 사회운동 라인과 리버럴 페미니즘을 위시한 단체의 수장이 다 민주당으로 갔던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도 과가 크지만 여성 정책에 기여한 것이 있는데, '그들'이 민주당계 정부의 공로를 모두 무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분명히 해온 게 있고 심지어 많은데, 그것들이 없다고 우기며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을 각인시키려 노력한다?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이들의 시도는 역대 최다표차 대통령이 당선됨과 동시에 총선에서 그들이 지지하는 군소 진보정당이 폭삭 망하면서 실패했지만, 온라인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문가들이 담론을 세밀히 구축한 게 아니라 이상한 주장이 다수 혼재돼 있으며, 대부분은 최소 10년 이전 여성단체 및 국회에서 논의가 끝난 것들이다. 기초가 없는 이들의 주장이 어느새 책으로 만들어지고, 마치 반론에 반론을 거쳐 타당한 논리로 세워져 학계에서 주류로 인식된 것마냥 퍼져나갔다. 사실은 이게 맞지 않는다는 국내외 석학들의 책과 논문이 있음에도.


이들이 이처럼 리버럴 페미니즘의 성과를 경시하는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노선이 크게 두 가지 정도 된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 페미니즘으로, 노동당이 선호할 만하다. 현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니 의회민주주의를 무시해도 된다는 점에서 아귀가 맞는다. 두 번째는 에코페미니즘과 래디컬페미니즘의 요상한 혼종으로, 탈성장, 반과학, 생물학적 남성 배제 등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런 내용이 페미니즘의 '거의 모든 것'인 양 읽히고 쓰이는 게 불쾌하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시류에 편승해서 '한탕 해보자'는 그분들의 의지로 읽는다.


책 내용도 시원치 않아 지적할 부분이 한 트럭은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기로 한다.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이건 개인 관점에선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타당하지만, 보편적이진 않다. 사법이나 정치에서는 달리 이해되고, 그건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꼭 '남혐'을 해야겠느냐",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이것을 손쉽게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이라고 동일시하면서 '그렇게 똑같이 혐오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려면, 남성혐오가 생겨나기 이전에 그토록 만연했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과 제재가 있어야 했고, 그것을 재밌다고 소비하거나 묵인 혹은 방관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 있어야 했고, 남성혐오 직전까지 여성들이 수없이 제기해온 온건하고 지적인 비판에 반응을 했어야 합니다.


이렇게 손쉽게 '일베의 논리와 표현을 소비하고 방관하는 이들에게 비난이 없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신들이 여성혐오를 하는 줄 잘 모르는 집단도 여성혐오를 극대화하고 강력히 전파하는 그 사이트의 폐쇄를 위한 정치권 운동에 동조하는 열렬한 운동이 있었다. 이에 젠더는 무관했다.


수많은 남성이 '김치녀', '된장녀'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말리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성이 이를 묵인했는데, 어떻게 여기서 젠더를 매개체로,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두고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동시에 '미러링'이라는 임의적 개념하에 실행되면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닐진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하는 게 현명한 일일까? 아니 타당한 일이긴 할까.


혐오 표현 (hate speech)의 관점에서, '남성 혐오'라는 것은 소수자성을 떠난, 개념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런 말은 없다. 이 부분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지 말자는 말은 반 이상 틀렸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반대되는 현상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제도적으로 처리하기 힘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정치적 냉소주의, 요즘의 조어로 말하면 '정치 혐오' 풍조를 머금게 하는 데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는 점에서 이는 어느 정도 맞다.


표면상의 이유로 '미러링'은 발화의 상대가 젠더 위계를 깨닫고, 두 집단이 상호 비방을 하되 그것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부분의 '기성' 페미니스트들의 우려와 같이 남성 집단은 아무런 이해를 못했다. 이는 남성 집단이 미개해서 생긴 일은 아니다. 미러링라는 것이 전략적으로 아둔했을 뿐이다. 이해만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남성 집단의 잘못된 결속은 덤으로 딸려왔다. 미러링은 이 과정에서 발화자들의 유희로 전락했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페미니즘의 효용성을 남성 집단이 깨닫도록 국가가 장기적으로 준비하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 조심히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그들 때문에 더 까다로워졌다. 더 변명은 필요없다. 이는 분명히 실패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두들겨 맞던 쪽이 계속 맞지 않는 이상, 그들의 평온한 현실에 갑자기 등장한 과격함이라는 혐의는 기본으로 안겨집니다. 남성의 세계는 여태껏 평화로웠으니, 어떤 목소리도 과격하고 돌연하게 느껴질 밖에요. 어차피 그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억압받는 쪽이 억압하는 쪽의 마음에 드는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본인이 3.1운동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다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이런 이상적 화합의 방식으로 평등을 일군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불평등이 없었을 겁니다. 아이슬란드는 여성이 거리를 점거한 뒤 성평등지수 세계 1위 국가가 되었고, 서프러제트 운동은 과격했으나 투표권을 얻어냈습니다.


동의할 수 없다. 68 혁명 이후 거의 모든 사회적 소수자 권리의 증대는 끊임없는 설득과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너무 보수적이어서 설득의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비방을 하는 식으로 해결된 사례는 없다.


저자가 예시로 드는 서프러제트 운동은 영국 양당제 의회의 진보적 축이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지 않고 심지어는 훼방놓기까지 하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의회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기에 최후의 방법으로 저항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1운동이 해방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평화로워서였을까? 너무 몰지각한 주장이라 덧붙일 말도 없다. 백인-흑인 격차 역시 폭력적인 운동이 성과를 이뤄낸 것이 아니며,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미국 민주당에서 비주류의 주류화 정치를 해왔던 게 기제가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는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 체계를 굳이 깨고 싶다는 저자의 일념이 읽힌다. 앞서 예시로 든 두 가지 노선 중 하나에 분명히 해당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억압받는 쪽이 억압하는 쪽에게 그들이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궤변이다. 현실의 희망을 모두 소거하고 싶어 이골이 나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다. 실제로는 젠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행정부가 있으며, 입법부 또한 제1당이다. 그리고 억압하는 대부분이 자신이 억압한다고 인지를 하지 못한다. 여기서 설득을 하는 것이, 그들의 표현으로 '억압하는 쪽의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굴종인가? 아니다.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은 타협이다. 이 개념 안에는 설득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설득이라는 투쟁은 민주주의의 가장 주요한 과정이 된다. 이걸 빼고 어떤 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조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내가 언급한 모든 '운동 (movement)'은 '정치 운동 (political movement)'이고, 현대 정치는 민주주의를 주춧돌로 삼고 있으니 설득의 방법론으로 해결하지 않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멀어지겠다는 말과 같다.


이 모든 건 문제 해결의 방법론이 주제가 될 때의 이야기이며, 개인적 관점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은 구조적 억압과 남성의 개별적 억압에 분노할 자유가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남성이 들어보자고 결정했다고 할지라도, 여성은 그 결정에 감동하고 고마워하며 남성을 사랑으로 환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랫동안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제 와 듣기로 결정만 하고 여전히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상대에게 여성이 등을 돌릴 수도 있는 겁니다. 화합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오랫동안 귀를 닫고 있었던 이들 쪽에서 '들어보자'는 결정을 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여기에선 과장해 내로남불 수준의 성 대결을 유도한다. 가부장제로 인해 모든 사람의 사고방식이 남성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음은 저자도 말했고, 나도 알고,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고', '여성의 관점이 부재'한 남성 집단은 젠더 감수성이 낮고, 그 결과 문턱이 더 높다는 아주 자연스레 전개되는 논리를 전제에 두면, 그들에게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다시 말해 설득의 방법론을 벗어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사회 문제를 풀어갈 것인지 한숨만 나온다.


여러 세력이 하나의 가치를 두고 다른 방법으로 성취를 노력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에 걸맞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때 그 여러 세력은 자신이 주류가 되었을 때 충분히 대중을 설득할 수 있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춰야 한다. 문제는 현재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들의 대체재로서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목소리는 훨씬 크다. 심지어 한 것이 없다고 매도와 마타도어를 일삼는데, 불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행히도 이들이 실패해도 국회나 정부에서 페미니즘이 가지는 위상은 견고하고 더욱 많은 부분을 점유할 것이다.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젠더를 고려해 예산을 계획하는 성인지 예산제는 발전을 거듭할 것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행정적 손길은 더욱 세밀하고 주의 깊어질 것이다. 문제는 더욱더 바보가 된 남성 집단의 젠더 감수성을 어떻게 정치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룰 것인가만 남았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는 득도 있고 실도 있었지만, 나는 과가 명백히 크다고 본다. 이렇게 적으면 나 또한 반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으로 매도할 테니 그것 또한 과에 추가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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