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 - 300년 후 미래에서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을 바라보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M. 콘웨이 지음, 홍한별 옮김, 강양구 해제 / 갈라파고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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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지적


몇 가지 지적을 좀 해보자.

번역, 교열, 편집 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100자평으로 감당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리뷰로 남긴다. 다만 내가 느낀 것을 토대로 욕하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렇게 허비하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 한 가지씩만 예시를 들고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번역. 기가 막힌다. 대체 역자가 누구길래 Fisherian statistics를 무시하는 것인지.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왜 뚜렷한 인식론적 근거도 수학적 근거도 없는 95퍼센트 신뢰수준이라는 기준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는지는 역사학계의 오랜 의문이다.(p.41)


그러나 원문에는 저런 무책임한 말이 적혀 있지 않다. 바로 역자가 '수학적 (mathematical)'을 수식하는 'substantive'라는 형용사를 빼먹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번역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선 '상당한 수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이건 극명히 차이나는 문장인 게 명백하지 않나. 피셔 기준이 얼마나 정합적인지를 두고 논쟁이 없었을 것 같나, 왜 과학계 성과를 이렇게 무심하게 후려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긴 뭘 알 수 없겠나. 무식해서 그렇지. 이건 무지가 아니다. 무식이다. 무식은 죄가 아니다. 다만 저작물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칭찬받을 일이라고 할 순 없겠다.


두 번째, 교열.

미국 정치 지도자들도 그것을 부인하는 입장에 섰다.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도 기업가, 은행가,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기후변화의 '불확실성'을 내세우는 주장을 널리 퍼뜨렸다.(p.25)


복합 명사의 띄어쓰기가 널뛴다. 무슨 문장끼리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 수정할 여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 사실 엄밀하게는 그것도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바로 다음 문장이다. 너무나 기본적인 기준인데 충족하지 못한다.


세 번째, 편집.

번역하면서 문단을 붙이거나 뗄 수 있다. 그러나 원체 긴 문단인데 관련성도 떨어지는 것을 붙이는 건 적절한 편집이라고 보기 힘들다. 편집자는 pp.40-42, 장장 세 페이지에 달하는 문단을 만들어 냈다. 너무 길어서 적기 싫다. 읽기 또한 벅찼다. 지쳐서 원문을 봤더니 딱 중간에서 끊겨 두 문단이었다. 그 두 문단을 붙일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정도로만 하자.


기후변화라는 개념 자체는 대중들에게 오래지 않았으며 점진적으로 느껴지는 현상이기에 얼마나 심대한 위협인지 체감하기 무척 어렵다. 대부분의 과학 교양서에서는 위험하다고 열심히 소리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잘 다가오지 않는다. 혼자만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도 들며 공감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의 여름철 기온 추세를 보면 꾸준히 더워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막연하게 더워진다는 것이지 그 실체를 명확하게 대중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후의 영향이 더 적은 지역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450 ppm에 달한다면 어떨까, 2030년 탄소중립을 이루지 못한 때라면 어떨까. 지구가 지금보다 2-3℃ 더 뜨거워진다면 어떨까. 모든 책에 나오는 여러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때의 환경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다를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간 게 이 책이다.

이 책은 지구가 망하는 걸 아주 실감나게 보여준다.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내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건 100년 전에도 지구가 지금과 같은 꼴이 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이 책이 조금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통 칭찬을 하기엔 부족한 점도 없지 않다. 여러 가지 중립적이지 않은 서술이 있지만 기왕 적었으니 앞서 언급한 내용을 재활용하자. 역자가 허섭하기 짝이 없는 실수를 한 그 문장은 허리케인이 심해진 것이 무엇 때문인지 논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허리케인이 심해진 것이 기후변화 탓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물리학 이론에 따라 저기압 생성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높아지면 허리케인의 수가 늘거나 규모가 더 커진다는 예상과 일치하는 결과였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맞는 내용이나 이 사례에 단순히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역적으로 다 다른 요인이 있고, 어떤 곳에선 허리케인의 수에만 영향을 주고, 다른 곳에선 오히려 세기가 약해지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저자의 단호함은 도리어 이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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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 2018-09-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리뷰는 오히려 이 책의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해 준다. 리뷰를 작성한 분은 촛점 흐리기를 사용해서 예비독자들에게 책의 가치를 떨어 뜨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직 책을 읽지 않았지만 리뷰를 보면 이 책의 주제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일부 번역 교열의 실수나 논리의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언급 정도로 그칠 일이지 리뷰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왜? 이 책은 교양서이지 전문과학도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MIO 2019-03-04 00:28   좋아요 0 | URL
미안합니다. 굉장히 늦게 보았네요. 초점 흐리기나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는 하려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 읽힐 수는 있다고 이해합니다. 애시당초 이 책은 한 곳에 너무 초점이 명확한지라 다른 쪽이 부옇게 나오고 있어서 제가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책이 어느 한 지점에 있어 분석적이고 전문성을 갖는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필드에서는 그 반대쪽을 이렇게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로 인해 이 책의 가치가 다른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목적의 서적보다 가치가 낮은 것이지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정공 씨는 어찌 받아들일지 몰라도 이론 수준에 머무르는 지식을 단순히 별다른 근거도 없이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려거든 여러 합당한 전제 조건을 통과한 것만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혹 그런 것들이 전공자, 전문가에게 읽힌다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책이 교양서이기 때문에 그런 책임을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사려깊이 생각해서 결과물을 내놨어야 합니다. 특히 fisherian 통계학을 무시한 부분은 이게 과학 책은 맞나 의심스럽더군요. 누구에게 추천할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그 기회를 쓰레기통에 넣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의 책이니 그런 행동을 취할 것이고 그에 따른 글을 쓴 것입니다. 정공 씨가 쓰신 글에 비해 제가 너무 과도한 노력을 쏟은 것 같아 이것참 아깝네요. 혹시라도 보시거든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