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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성공 -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
윤홍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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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홍식 교수는 복지정책을 다방면으로 연구한 학자로, 복지정책을 세분화해 가족정책, 여성정책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복지정책이 어떻게 국가에 수용되는가 하는 과정 측면이나 권력분립이 주는 영향 등의 변인은 물론, 복지정책의 역사적 측면을 살펴보는 등 양적 연구 이외에서도 많은 성과를 내놓았습니다. 특히나 여러 방면에서 복지라는 개념을 보고자 하는 시도와, 그에 걸맞은 다양한 변인을 설정하는 인사이트가 돋보입니다.

윤 교수는 제작년 사회평론아카데미 출판사에서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3»을 출간하며 복지정책에서 'histoire des mentalités'를 어떤 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 보였습니다. 해당 저서가 분명히 학술서인 반면 이번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이상한 성공»(2021)은 설명하는 어조나 어투부터 정말 한국이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를 궁금해 하는 일반인과 대중을 위한 책임이 분명합니다. 누군가는 한국이 "복지국가"라는 점에 부동의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또 한국이 "불평등한 복지국가"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성공»은 단호합니다. 한국의 경제학적(특히나 GDP 측면에서) 성공은 "이상한 성공"이며, 한국은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개념이 책의 서두에 나오면 당연스레 그 '개념' 혹은 '정의'와 그것이 정립된 역사가 나오게 됩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만, 저자가 서술하는 '역사'는 조금 더 진중하고 분석의 깊이가 남다릅니다. 윤 교수는 10년에 걸쳐 한국의 정치상황과 복지정책의 발전 관계와 각종 상관관계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출판했고, 이를 다시 깁고 다듬어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윤 교수가 존댓말로 친절히 알려 주는 한국의 복지정책과 복지국가론에는 그 서사와 맥락을 무시하고 제도적 측면을 다뤄선 안 되겠다는 일성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왜 이런 책을 출판해야 하고, 이런 태도를 지향해야 할까요? 윤 교수 자신이 사회참여적인 학자인 것은 하나의 이유일 뿐입니다. 복지정책의 수혜자이자 정책입안자이기도 할 독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정책을 위해, 좋은 국가를 위해, 또 나와 가족과 우리 공동체를 위해 더욱 참여하고 소리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을 위해 저자는 우리의 생각에 친절히 개입합니다.

그 좋은 정책이 무엇인지, 좋은 국가가 무엇인지, 왜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15장에 걸쳐 담아내며 완결성을 추구했습니다. 특히, 좌우 일각에서 나오는 (586) 세대론에 대해서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말을 통렬하게 한편으론 세련되게 반박하며 문제의 본질은 "계급 불평등"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86세대 중 출세한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1960년대에 태어난 50대가 모두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높은 지위에 있고, 높은 소득과 부를 독점했다고 묘사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계급 불평등을 세대 불평등으로 감추려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 p.40.

저는 이 부분에서 (1) 세대별 소득과 부의 격차와 그것에 선행하는 지표 중 하나인 (2) 교육불평등과 (3) 현재와 비교할 때의 절대적 소비력 격차에 따른 삶의 질 (QoL) 등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무엇보다 간명하게 86세대 책임론을 논파해낸 점에 놀랐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세대론에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는 잘못되었고, 나아가 제가 보기에는 문제의 직접적이고 주요한 원인에서 눈을 떼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 않나 하는 의문까지 들게끔 합니다.

누군가는 모든 것이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는 극소수 (보수적) 86세대 사람들에 대한 반동적 성격에서 나온 말이 86세대 책임론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틀렸다고 반대급부에서 86세대 책임론이 맞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둘 다 틀렸다는 것 또한 책에선 상세히 다룹니다. 요 근래에 들어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장학재단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의 70%가 고소득층 자녀라고 합니다". SKY 학생 중 정시 비율을 보면 이러한 학생 가구의 소득 격차와 관계가 있다는 무참한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즉, '노력' 이전의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참혹한 통계는 9월 10일자 경기신문에 실린 곽노현 전 교육감의 기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실의 영재학교에는 ‘타고난 영재’들이 아니라 ‘만들어진 준재’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가장 확실하고도 충격적인 증거는 서울과학고, 경기과학고 등 수도권 3대 영재학교 재학생의 절반이 강남의 특정학원 출신이라는 점이다. 영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4~5년의 치밀한 준비기간과 최소한 7~8000만 원의 사교육비가 필요하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만한 시간과 비용을 쓸 수 있고 유명학원에 가까이 사는 수도권, 특히, 서울 강남의 부유층에 유리하고 농어산촌가정과 저소득층가정의 ‘숨어있는 장영실’들에게 불리하단 뜻이다."

위 사실은 과학고-영재학교 재학생이나 학부모라면 '공공연한' 일인데다 해당 집단의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그룹의 밖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거나 입막음당하고 있으니 실로 '비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학생을 선발한다 하는 것은 다른 요인을 제하고 그 성장가능성을 보고 입시에 반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이니까요. 인재를 키워낸다는 것은 지금 수학 과학 문제를 남들보다 조금 잘 푼다는 현재의 '실력'과는 무관하니까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잔인한 방증입니다.


"진짜 영재는 하늘의 선물이라 부모나 지역,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분포할 게 틀림없다. 진정한 의미의 영재라면 소득상위 10% 부모 아래서도 10%가 나올 것이고 소득하위 10% 부모 아래서도 10%가 나올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서울이나 강남이 인구비례보다 훨씬 많을 리 없고 농어산촌이 인구비례보다 더 적을 리도 없다. 지금처럼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리도 없다. 요컨대, 타고난 영재만 뽑는 족집게 영재학교라면 그 학생 구성이 지역별, 계층별, 성별로 지금처럼 편중되지 않고 고르게 분산되어야 맞다."

곽 전 교육감은 이러한 입시 방법에 대해서 어떠한 대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를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으니 그 원인을 찾아내고자 통계를 먼저 확충하자고 합니다. 이러한 당연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때가 있고 아닌 때가 있다는 사실은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기회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런 배경에 갇혀 있는 사회에서 단발적이고 나이브한 '공정'은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고려하지 않거나 고려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외치는 '공정'이 의미를 가질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본디 자유주의가 선망하는 meritocracy 사회는 이렇게까지 불균등한 기회를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은 현실적으로 기회의 불평등이 문제된다고 해도 사회는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혹은 제도의 수용자가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회가 그러한 합리적이지 못한 제도에 고착되면서 "능력이란 것이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닌데" 반대로 그렇게 이해되는 경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심각히 우려할 만합니다.

한국에서 그러한 생각이 커지고 있는 데에는 역사적 맥락 또한 존재합니다. GDP 성장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어 아주 빨랐고, 그러한 성장의 단초를 온전히 권위주의 정부가 제공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의 파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진화해 권위주의 체제(와 그 위정자)에 경제성장의 공로를 오롯히 돌리며 하나의 정치적 집단을 단단하게 형성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논거가 사실이 아니며 이러한 연구성과는 다양한 나라에서, 석학들에 의해 증명되었고 또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꼼꼼하게 부연합니다. Hirschman, Sen, de Mesquita, Rajan 등의 연구와 UNDP의 논의 등을 참조해 읽어볼 만합니다. 수출주도 행태, 거버넌스의 역할, 국내법적 제도, 민주화운동이 정치에 주는 영향, GDP 성장 자체가 실제 국민의 삶을 개선시키는가 등 다양한 측면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가 없겠죠.



2.

저자의 생각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만큼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 또한 존재하고 그 또한 명확합니다. 첫째는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입니다. 저자는 복지정책의 방향을 완전한 보편주의로 돌리자고 주창합니다. '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차이나고 폄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나온 답처럼 보입니다. "복지 욕구가 입증되지 않는 사람들을 복지에서 배제하고 욕구에만 기초해 권리를 부여하면, 그 복지국가의 복지제도는 취약계층을 위한 잔여적 복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재정의한 복지국가에는, "사회권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시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시장과 가족의 역할도 고려"돼야 합니다. 이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상위 10%의 효용감을 위한 '친절한 개입'이 효과적이라는 데엔 이론이 상당할 것입니다. 저부터 동의하기 어렵고요. 재난지원금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윤홍식 교수와 대담했던 양재진 교수 편에 더 공감합니다.


"개인에게는 소득보장효과가 미미한 푼돈이지만, 국가적으로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기존 사회보장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 이번 재난지원금이 사회적·경제적 문제 때문에 주어진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고용보험 하에서 실업급여, 고용유지지원금 등 사회안전망의 보호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 재난지원금으로 인해 방금 말씀드린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는 더욱 힘들어진다는 점도 직시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경제위기에도 고용유지지원금 같은 사회보장 덕분에 실업률은 4퍼센트 정도에 머무르잖아요. 그러니까 정책 수요 대상도 200만명 정도여야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재난지원금은 실효성이 낮습니다." – '창작과비평, 48(3), 2020-09'에서 부분 발췌.

둘째는 거시경제 지표나 그 성과를 온전히 복지정책으로 돌리려는 시도입니다. 복지정책이 준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Atkinson 이래의 연구를 같이 고려할 때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지정책이 얼마나 주요히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저자는 확장재정을 옹호하며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예시를 들었습니다 (pp.306–316). 하지만 제도주의 학자로서 왜 복지정책에 한정해 국가를 평가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저자는 '아이슬란드는 IMF가 요구한 긴축을 거부했고, 그리스는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다르니 승자가 명확하다'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수많은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산업구조는 다릅니다. 두 국가의 정치체제에 영향을 준 국민들의 여론도 달랐고, 실제 그리스는 갈팡질팡하다 포퓰리즘 정부마저 정책 변동 폭이 대단히 컸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증세를 했을 때 소득수준 별 실질 소득세나 자본세 등이 그리스와 크게 달랐습니다. 세금을 바라보면 대중의 인식도 달랐습니다. 어떠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고, 그러한 목적세적 특성을 가진 재정이 어떤 '선택과 집중'을 거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저자가 논하는 '보편주의'에도 반하는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공공지출의 경상GDP 대비 규모나 그 비율도 달랐으며 제도적 측면에서 차이는 사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위기 이후 금융 부문을 어떻게 처리했고, 그 정책의 지속성이 언제까지 유지됐는지 또한 부채 총액의 해당 부문 비율을 고려할 때 아주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거시정책인 통화정책을 논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을 복지로 환원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화 안정을 위해 어떻게 유동성을 확보했고 그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도 이야기했어야 합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략 끝에 "긴축이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내용"이라며 인용 하나 없이 내린 결론도 아쉽습니다.

이 결론을 이용해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대응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앞서 지적한 이유들 때문에 근거가 미약해집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홍 부총리의 재정운용방식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아주 제한적으로 재정을 이용했고, 국채에 대한 과도한 리스크를 추정했습니다. 이는 2019년까지 세출에 대해 온건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던 것과 대조되는 지점입니다. 마치 박근혜 정부 시절 40%라는 학술적 근거도 없는 재정건전성 지표를 맹신하고 있던 바보같은 행위를 바라보듯 적어내려간 서술방식은 홍 부총리에 동정표를 주고 싶게끔 합니다. 공적이전소득과 재정승수에 대해서 과연 기획재정부가 아무런 근거 없이 정책을 운용했을까요? 분명히 아닌데 책만 읽으면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조세재정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감세보단 세출 증가가 훨씬 더 GDP에 영향 미친다는 보고서가 있고 한국은행도 정부 지출 재정승수 효과는 2.3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 (IMF) 자료를 보더라도 감세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통계 분석자료가 있다." – 홍남기, 2019-11-05.

마지막은 비례대표제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전문 분야가 아닌 관계로 말을 아끼려 합니다. 진보당과 리버럴당을 구분할 정도의 정성이었다면, 현실의 진보당이 어떤 계층을 위해 소리를 높이고 있는지도 조금 더 중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p.331의 ‹OECD 회원국의 GDP 대비 이전소득비율과 비례대표성› 그림의 미주에 오타가 있는데, 아무튼 여기서 인용한 Alesina et al.의 회귀분석에서는 GDP 대비 이전소득비율과 다른 변인도 같이 비교했고, 비례대표성의 경우에도 인과가 도출되기보단 다른 정치적 맥락 또한 주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 정치제도가 가지는 내생성을 고려한다면*, 비례대표성만 비교한 것에서 결론을 의도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소간 듭니다.


*: "Political factors that influence U.S. exceptionalism run deeper than differences in electoral rules.", 결론에서 논문 저자가 주요 factor로 꼽은 "Racial fragmentation", "hostility to welfare", "a stronger connection between effort and earnings" 등.



3.

이 문단부터는 9월 14일(현지시간) 미국 Pew Research Center의 서베이를 보고 적은 것인데요. 저자가 '핀란드 청년들의 고민' 파트에서 한국의 청년들과 핀란드 청년들은 고민하는 게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놀랍지 않느냐. 그 이유가 각 사회 배경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의 논의에서 책을 출발시켰는데, 양립가능성을 얼마나 고려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서베이 결과가 나와 아래와 같이 짧게 부연합니다.


핀란드 교육청 관계자가 이곳 청년들도 고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죠. […] 핀란드 청년들은 '기후위기와 세계평화'를 고민한다는 거예요.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 pp.23-24.

"핀란드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의 반경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본" 것인데, 한국은 "자신의 문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를 자문합니다. 그런데 COP26 총회를 앞두고 발표된 어제자 서베이 결과에서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먼저 기후변화가 생애 동안 개인의 삶에도 악영향을 주는 게 염려되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결과를 살펴보면 실로 충격적입니다. 한국은 겨우 11%만이 부정했습니다. 88%는 염려된다고 대답했죠. 기후변화의 영향을 잘 알고 있는 비율(= 긍정 - 부정)은, 조사대상국 중 최고치입니다. 저자가 강조한 "북유럽 청년"들의 국가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는 스웨덴은 무려 56%가 부정하고 겨우 44%만이 염려된다고 밝습니다. 한국(88-11=+77)과 스웨덴(44-56=-12)의 격차는 엄청납니다. 이러한 상관관계를 이루는 요인 중 하나는 정치성향인데요. 스웨덴의 우파는 겨우 27%만이 기후변화의 악영향이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좌파도 57%로 낮은 편이에요. 한국은 각각 84%와 90%로 특이한 양상이죠.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핀란드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인류의 보편적 삶으로까지 연장해서 보니" 같은 서술이 적절치 않다는 충분한 방증이 됩니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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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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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지소미아 (GSOMIA)가 끝나는지 아닌지 그 결과가 나오는 대한민국 외교 역사에 있어서 한 기준이 되는 달이다. 일본의 선제조치는 무익한 것으로 돌아갔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또 벌어질지는 모르는 가운데 WTO 소송과 끝없는 갈등의 길만이 그려져 있다. 일본이 이런 공격적인 수를 쓰는 이유는 국제법적으로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거나 법적으로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국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때문이다. 미묘한 것은 이때 역사성이라는 관념을 투사하고 해석하기 좋은 쪽은 오히려 국내정치라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민국가 (nation-state)의 대립구도에서 파생된 역사가 이제는 일본의 국내정치라는 틀에서 더 용이하게 해석되고 쓰인다. 현재 일본 내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의 결과가 나오곤 하는데, 이런 민족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저 역사성이라는 소재가 참 적절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역사를 타고 올라가 보면 국제정치가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 내용은 경제제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일본의 선제적인 선택으로 귀결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빨려들어가 파멸로 함께 끝난 암울한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본은 그렇다면 동맹이던 다른 국가들에겐 의존할 수 없었을까. 이때 일본의 이익 (interest)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독일이 빠질 수 없다.


이 독일은 상당히 독특한 국가다. 현재 세계를 지배한다고도 볼 수 있는 국제적인 규범 UN은 독일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독일이 아닌 또 다른 국가가 전쟁을 일으켰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가정은 역사서 앞에서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독일이 보편주의 국제법 체계와 강행규범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엄청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독일은 왜 그런 길로 빠진 것일까. 이 물음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지난 100년에 있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소상히 알고 있다. 국가이익 (national interests)을 위해서이다. 이 국가이익이라는 국제경제학적 조어는 순간마다 그에 해당하는 가치가 달라지기에 실증적 사관과는 충돌하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요즘에는 그것 또한 추량하는 방법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상당한 수의 방법과 기발한 분석틀로 일본의 국가이익을 알아냈고 각종 정치적 선택의 이유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관념 체계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독일의 경우이다. 왜 하필 유대인이지? 히틀러의 Mein Kampf에서 뜬금없이 유대인이 탄압과 차별이 대상이 된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에서 잘못 받아들여져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오용되곤 한 개념은 사회진화론인데, 이 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어떤 민족이든 어떤 가치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은, 히틀러는 거기에 유대인을 집어넣었다. 왜 유대인이었을까. 그리고 유대인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왜 그들을 학살해야 했을까. 학살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학살이라는 말을 동아시아 전역으로 끌고 온다면 무참히 당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사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동적이었다든지 미쳐돌아가는 일본 대본영이나 지휘관들 개인의 문제 등 참화의 이유를 나름대로 규명할 수가 있다. 그것이 현대인의 시각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도 당대의 전쟁범죄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수준에선. 그러나 반항도 않았고 이미 공고히 점령된 강역 내에서 특정 민족만을 초점으로 해 학살한다는 것은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다. 교과서나 교양 유럽사 책들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 피상적인 답만을 제공하는데 이번에 알았지만 그것은 한국만의 이야기였다.


이미 유럽 학계에서는 당연하게도 그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어 어떤 사람들은 그 책임을 군사국가화된 프로이센을 원형으로 보아 근본적인 책임을 거기에 묻기도 하고 그를 반박하는 연구도 상당수 존재한다. 분명 독일에서는 대다수의 시민이 히틀러와 그의 정당, 나아가 그의 국가와 체제를 지지했고 유대인에 배타적인 독일인들의 시각 또한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마티 출판사로부터 서평 이벤트로 받은 이 책이 답을 준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Clark의 전작 『몽유병자들』(2019)이 더 상세히 다루는 측면도 있지만, 이 책은 반대로 프로이센의 시작으로 내려가 그 동인을 탐구하고 수정주의적 논문 등을 근거로 편견을 없애나간다. 특히 군국주의, 군사적 토대가 처음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의 논리적 정합성이 낮은 주장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배척해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문제라고 하나 짚어본다면, 한 주장과 그 근거를 자신이 소개하고 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건 헛소리다 이러이러해서 해버리는데, 내가 그 전자에 놀라 오 역시 그랬었군 하자마자 바로 반대 주장에 납득돼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전공 시대가 아닌 17-18c에서 더욱 그랬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준 다음 문단은 꼭 인용해야 할 것이다.


감정적 동기를 강조하면 프리드리히의 이후 역사 기록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충돌할지도 모른다. 기록들에서 그는 자신을 냉혹한 '국가 이성 (raison d’état)'의 초이성적 집행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변화의 배후에 작용하는 원동력에 대한 더 기본적인 그의 믿음과 완전히 일치한다.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가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사라는 것은 남자의 열정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본디 유치한 이유들이 결국엔 대격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19년 나온 작가의 전작은 프로이센 통사라기보다는 19c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중심으로 비추고 있으니 목적 측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거대한 역사가 테마인 책은 사실 그리 읽어본 경험이 많지는 않다. Ian Morris의 유머러스한 인류학 저서, 이 책에도 인용된 James C. Scott의 현대적인 감각의 장대한 길이의 역사 지적질, 그리고 국제정치학과 경제학 모두에 의미가 깊은 Charles Kindleburger의 책들이 먼저 떠오른다. 이 책의 의미는 물론 이런 명저에 이르지는 않는 것 같다. 경제적 관점이 빈약하고, 비스마르크를 평할 때에도 국제정치학적 사유가 충분하지 않다. 답답한 미괄식 태도와 절대 한 소제목 파트를 다 읽지 않는 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저자가 그리 해야 하는데 못한 것이 아니라, 서문에도 나와 있듯 자신은 딱딱한 언어로 자신이 제기한 질문을 풀어나가겠다고 전제하였는데 실제 그것들이 책을 읽으면 충분히 풀리는 것으로 봐선 큰 문제는 아니다.


독일은 '특수노선 (Sonderweg)'으로 나아갔고 이것이 12년간의 나치 독재로 절정에 올랐다. 프로이센은 소멸했지만, '프로이센'은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징표로 되살아났다. […] 독일은 프로이센의 완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이센의 실패에서 나온 것이다. […] 그래서 나는 프로이센의 기록을 다루면서 선악을 나누거나 그 경중을 가리지 않으려 했다. '교훈'을 전하거나 현재 또는 미래 세대에게 도덕적·정치적 조언을 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용을 좀 더 보충하겠지만 일단은 이런 식으로 적을 수밖에 없겠다. 읽으면서 모아둔 교정이 필요한 곳을 모았다. 번역 교열은 물론 있었겠지만 특히나 프로이센 역사서 같은 경우는 번역 시 저자가 국제정치학의 조어를 사용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걸 고려해서 적어줘야 하는데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영문판과 같이 읽으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해결했는데 이런 부분은 다음 쇄에서 수정이 필요하다. 몇 가지만 나열하겠다.


1장

1. The key lies partly in the prudence and ambition of the ruling dynasty. → 열쇠는 통치 왕조의 분별력과 야망에 있다.


여기서 prudence는 현실주의의 개념으로 비스마르크나 프로이센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읽어낼 때 잘 쓰이는 말로, 분별력이 아니라 '신중함', '신중성'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Weber나 Morgenthau의 책 등을 참조하자.


2장

푸펜도르프는 저서 『만국법 요론』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자연법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다. '통치권'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오직 폭력으로 안녕을 추구할 거라며 "어디나 위해를 가하는 자와 위해에 반발하는 자 사이의 싸움으로 요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통치권에 대응하는 원본의 단어는 sovereignties인데, (국가)주권이 더욱 타당하다.


그리고 중간에 어딘지 모르겠는데, 예방전쟁을 예방 전쟁이라고 썼다가, war of precaution과 pre-emptive war를 헷갈리기도 하던데, 스타일은 하나로 통일해줬으면 좋겠고, 이 두 가지 개념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 번역해야 한다.


7장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은 사실상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앞에서 외교 혁명이라는 국제정치학적 평가가 나왔지만, 저자가 프로이센이야말로 진짜 혁명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고 말하는 대목이므로, '사실상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는 상당히 어색하다. 침공이야말로 진짜 혁명이었다는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The long journey towards full membership of the European concert of powers that had begun with the reign of Peter the Great was now complete. → 표트르 대제의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유럽 권력 콘서트의 정회원 자격을 향한 긴 여정은 이때 마무리되었다.


콘서트가 나와서 일단 웃었다. Concert of Europe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기반으로 한 협조체제를 의미한다. 콘서트 정회원 같은 게 아니다. 맥락에서 혼자 따로 노는데 이게 이상하지 않았다니.


10장

그는 소통을 위한 매체를 개방하고 교육받은 대중을 공익을 위한 조화로운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그런 반대는 필요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공익에 대응되는 말이 general good이던데, 이건 차라리 공동선에 가깝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11장

힘의 균형은 프랑스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balance of power인데, 이론 이름이다. 세력균형.


12장

p.538 메클렌부르크 공장 → 공작.

p.539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 맥락상 오스트리아 외교정책의 손실은 없고 단지 프로이센에 비해 뒤처진 것이므로 손실이라고 하면 안 됨. 원문은 undo the damage였나인데 늦은 출발, 뒤처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등으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

p.540 internal disorder을 '국제적인 무질서'라고 번역했다.


particular interests → '특수한 관심'이라고 돼 있다. 관심이 아니라 계속 이익으로 해석한 만큼 이익으로 번역해야 함. 헤겔 때문에 현실주의와 '국가이성'이 민족주의의 힘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익이라고 보는 게 조금 더 적절하다. '특수한'보다는 '개별'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


국가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유일무이한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랑케가 정말 이런 말을 했는가?


원문은 In essays published in 1833 and 1836, Ranke declared that the state was a ‘moral good’, and an ‘idea of God’, an organic being with its ‘own original life’, which ‘penetrates its entire environment, identical only with itself’. 인데, 어디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말이 있는지? 이런 사관은 랑케에 반대되는 헤겔-막스의 역사관이 아닌가 한다.


13장

p.612 물음로

p.617 사회적 보주의자


14장

p.665 단일 정치 제제


15장

p.703 보잘것없어 보였다. → 맥락상 말이 안 된다. 해석상으로도 외교정책이 그나마 다른 정책보다 나았다고 봐야 맞다.

p.731 National Liberals는 민족주의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국민자유주의자'이다.

p.735 분쟁 휘말릴 → 분쟁에

p.736 베네티 → 베네데티


16장

p.764 무서운 국내 요인 → 위협적인 국내 요인


오타나 해석이 이상하거나 혹은 학술용어상 구분이 필요한 몇몇 경우를 예시해보았는데, 실은 굉장히 해석이 깔끔해서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헤겔 부분은 역자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듯 그 내용을 읽고 헤겔의 역사관을 역사는 진보한다 이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없을 듯하다. 헤겔철학은 청년헤겔학파 등 영향력도 그렇고 이 책의 주제인 민족주의의 역사성이라는 개념과도 맞닿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정치적 현실주의를 결합하게끔 만든 장본인이라 그 이해가 특별히 중요한데 이렇게밖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건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모든 부분은 유려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서평단으로서 오늘까지 적어야 하는 터라 Greenberg 책이나 박상섭 교수, Mearsheimer의 저작과 관련해서 적용해보고 싶은 관점을 덮어둔 채 뒤죽박죽인 글로 마치려 한다. 한국인의 관념과 거리가 있는 프로이센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통사라서 편견을 소개해주면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고 바로 그걸 반박해주는 것에 충격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 구성 측면에서 재미난 책이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다만 내용을 완벽히 꿰고 있어야 하고 중간 소제목들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는 전제는 필요하다. 아날학파도 아니고 국내정치와 문화사 관점에서 프로이센을 까다롭게 읽어냈는데, 국제레짐 속에서, 혹은 경제사적 접근방법으로 프로이센을 들여다 보는 책도 출간됐으면 한다.


사실 프로이센과 바로 위에 붙은 덴마크는 왕 이름이 다 똑같아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저자도 지적했듯 19c 중반 급박한 시기의 덴마크에서 등장하는 사람 이름은 대부분 크리스티안 아니면 프레데리크인데, 일견 재밌기도 하지만 그만큼 읽기 힘들다는 말도 된다. 프로이센은 한 수 더 떠서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끝까지 프리드리히랑 빌헬름으로 점철돼 있다. 그중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이름이 합쳐진 왕도 상당수 존재하며, 칭호가 바뀌면서 프리드리히 3세가 어느 순간 1세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에 반해 조선의 시호 제도는 얼마나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가. 우스갯소리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프로이센 역사는 여러모로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먼 유럽 북해에 붙어 있던 작은 국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차고 넘침을 『강철왕국 프로이센』(2020)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c 중후반부터는 자료 측면에서나 논리나 다소 힘이 달리는 듯한 감이 있지만, 그 부분은 전작에서 다루기도 해서 과감히 분량이 줄어든 듯하다. 19c에 모두가 놀랄 급성장을 해낸 프로이센이 20c에 독일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단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지정학적, 정치적 의미를 찾으러 끝까지 파고드는 책이니 교과서적 내용에서 벗어나 심도있는 이해를 목표로 한다면 상당히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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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의약품 시대가 온다 - 합성의약품 시대는 가고,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김시언.이형기 지음 / 청년의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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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의약품에 관한 피상적인 온라인 글보다 배울 점이 많아 좋았습니다. 특히 GMP 과정에서 어떻게 chemical drug와 차이를 보이는지 같은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좋았네요.

다만 바이오시밀러 현황은 통계가 너무 옛날 거라 상황을 완전히 잘못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만합니다. 바이오의약품이자 호중구 감소증 치료용 조혈제인 filgrastim은 오리지널인 Amgen의 Neupogen 시장 점유율이 공고하므로 바이오시밀러 진입장벽이 여전히 높아 경제학적 타당성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서술했는데 약간 어폐가 있습니다.

먼저 미국 통계만 들었고 유럽의 현황을 살피지 않은 점에 따른 문제가 있습니다. 2019년 나온 책인데 2019년까지의 바이오시밀러 market share 추이를 본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지요.

미국은 바이오시밀러의 시장 잠식 속도가 느리지만 유럽에선 아주 빠른 편입니다. 시장 조사 기관은 규제보다는 광고 역량 등에 따른 결과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Celltrion의 Remsima가 infliximab 시장의 오리지널을 밀어내고 EU 시장 과반 이상의 판매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미국이라도 최신 통계를 전혀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제시한 것은 Zarxio가 등록되고 단 몇 개월 후의 점유율과 판매량뿐. 2019년 1분기 통계를 보면 filgrastim의 바이오시밀러 점유율이 오리지널보다 높습니다. Novartis의 자회사 Sandoz가 만든 Zarxio와 Teva의 Granix의 점유율 합은 60%에 달합니다.

시계열로 다른 chemical drug의 시장 잠식 속도와 비교하면 느린 건 확실합니다만, 바이오시밀러 법이 만들어진지 10년, FDA 룰까지 완벽히 개정된 건 겨우 5년이니 단순 비교할 순 없겠죠.

하나 더 꼽자면, 바이오의약품 중 항체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phage display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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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메시스
호르메시스, 때로는 약이 되는 독의 비밀 - 나쁘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에 대한 재발견
리햐르트 프리베 지음, 유영미 옮김 / 갈매나무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알라딘 리뷰 중에 "의학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분야"라거나 "음양 원리 챕터로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거뒀다"라는 말이 있어서 평소보다 다소 장황하게 적어보려 합니다.



1 의학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분야


먼저, 의학이라는 field 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분야는 물론 아닙니다. 그 이유로는 일단 호메시스 현상이란 게 그다지 학계에서 인기가 있는 주제는 아니거든요. 따라서 이 설의 지지자도 적습니다. 주류 dose-response 설의 지지자가 거의 압도적 대다수이니까요.

또 다르게 이 말을 읽으면, 여러 학문 중 의학에서 가장 논란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 또한 다릅니다. 방사선 방호를 전공한 사람들은 다들 아는 내용이지만, 전리방사선을 인체에 투사하면 어느 양이든간에 일단 해롭다고 합니다. 특히, 일년에 1 mSv 이상인 경우는 과학적으로 나름의 통계적 유의미성을 갖는다고 하죠. 이 값이 아니더라도, 이보다 낮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을 여지는 있고 이런 저선량 방사선에 대한 연구는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적은 방사선이 몸에 약이 된다는 식의 연구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굉장히 낮은 양의 방사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방사선이란 게 저자의 말대로 호메시스 영역이 굉장히 작아서 그 구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죠. 진실은 지금 인간이 알아내지 못하겠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진실이 숨겨져 있는 터라, 공공보건 관점에서는 호메시스 효과를 기반으로 정책을 설계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증명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일부 증명되었다한들 이 분야 정책은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만들어지는 게 보통이라, 적은 양은 오히려 좋다는 말이 좋지 않은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다 해야 할지, 인류엔 불행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ICRP에서는 현재 전리방사선에 있어서의 호메시스 이론은 거의 반쯤 폐기 처분한 상태입니다. 대신 몸에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수준 미만에서는 통계적 유의성이 거의 없는 수준으로만 그렇고, 선량이 늘어날수록 그 위험성은 커진다는 LNT 모델을 사용합니다. 문제가 없다는 전제가 이 모델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실제 초저선량에서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논문이 없습니다. 저선량에서는 통계적으로는 그다지 의미는 없지만 백혈병이라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병리학적 결론이 적지만 있긴 합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도 결론이 명확하지만 원자력과 방사선에 관한 괴담은 한국이든 외국이든 똑같이 시끄러운가 봅니다. 별로 전문가들의 말에는 관심이 없어요. 다들 무섭다고나 하니 한편에서는 또 다른 이상한 주장이 횡행합니다. 그게 호메시스입니다. 적어도 이 동네에서의 지위는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의학계, 정확하게는 약리학, 그중에서도 독성학계에서는 어떨까요. 이 분야가 호메시스 효과가 태동한 곳이기도 하고 발상지인만큼 나름의 주목을 받으며 어느 정도 인용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이론을 미는 대표적인 학자가 그 수많은 논문에 (교신저자 등의 방법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그렇지 IF가 높은 peer-reviewed journals에서도 자주 통과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의학, 약학 논문에 인용되고 있고요.

말만 그럴듯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 딱 좋은 내용인데, 그런 걸 잘 아는지 증명한다고 여러 물질에서 호메시스 효과가 나오는지 다 해 보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효과가 나타나는 용량, 시간은 물론 최근엔 분자생물학적 접근도 하고 있더라고요. 일부 signal 현상을 호메시스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는 내용이라든지. 사실 이 책의 저자도 말했지만 모든 물질과 모든 현상에서 호메시스가 작동하는 건 아니다, 그 말만 있으면 이 분야에선 딱히 문제 없는 이론이 됩니다. 호메시스 영역이 작아 검출하기 어렵다고 얼버무려도 되고 말이죠.

갖가지 현상을 호메시스 베이스에서 보이겠다는 목표는 참 좋습니다. 그 이론이 실제하는 원리와 다르더라도요. 그렇게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실험 단계에 있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일반인들에게 허황된 일부 내용을 섞어 선전하는 것은 질이 나쁘다고 봅니다. 그건 과학자라는 전문가의 윤리에도 걸맞지 않고 일반적인 도덕으로도 부적합 딱지를 받기 더 없이 적합하겠네요.



2 음양원리


이 책의 저자가 딱히 생명과학 분야나 보건학 관련 지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은 한 50페이지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자신이 이해한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책 이곳저곳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체로 유사과학이나 동종요법이라는 평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저자는 수많은 참고문헌과 그중 일부를 소개하며 그런 지적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얕은 지식이 드러나게 마련인데요. 음양 원리를 이용해 설명하려던 점은 “든 내용도 없는 책인데 이렇게 마무리라니. 뻔하군.”이라는 식의 인상을 주기 쉽습니다. 따라서 우선 잘못은 저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이 사상의학과 같은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지 않은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의학과 다르게 많은 과학자들에게 검증받고 있고 그 언어는 과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런 평은 무책임합니다. 독자는 저자가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하든, 근거를 제시하지 않든 비판적 독해를 주어진 환경 내에서 최대한 해내야 합니다. 그게 독서입니다.



3 나가며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호메시스 효과를 다루고 있지만, 저자 뇌에도 그 기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해결하려면 영어로 된 논문을 직접 찾아보며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건 좀 귀찮죠. 하지만 안 하고서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덕희 교수 책이 이것보다는 한 발 더 나아가 있지만 거의 비슷한 전개를 따르고 있고 대중서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과학적 설명 수준은 사실 거의 비슷하니까요. 이 교수는 가능한 역량이 있음에도 시간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책으로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미시 세계에서는 양자 얽힘이 있어서, 광속보다 빠르게 정보가 전달돼. 광속보다 빠른 게 없다는 사실은 상대성 이론에서 나왔고 이미 증명도 됐는데 뭔 소리냐고? 자세한 건 네가 찾아봐.”와 비슷한 결과를 맞습니다. 내용은 부실해도, 양자 얽힘이나 호메시스라는 것이 이 책 때문에 부정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숙지한 채 굳이 궁금하면 읽어 볼 수는 있겠지만 별로 추천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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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강박 혹은 카펫 무늬
바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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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영화에 깔린 복선과 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작품성을 비판하는 관객이 있다고 하자. 잘못은 있는가? 누구에게 있는가?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론으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할 듯 싶다.

그래서 이런 글 (링크)을 봐도 어쩔 줄 모르고 고민만 되풀이하게 된다. 이 글에 대해 몇 가지만 덧붙여 보도록 한다.



1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풍 이야기에서 따뜻한 감동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과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


저 글쓴이의 말처럼 작가에게 그런 강박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대개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오가와 요우코 (小川洋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일단 다르다. 예술 철학에 있어 '미'는 대상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함께 그것을 감각하는 주체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움'은 대중의 호오와 크게 관련 있다고 봄이 명백하다. 오가와 소설에서 나타나는 '미'는 여기서 좀 벗어난다. 대중의 보편적인 취향과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

'동화풍 이야기'라는 말도 이상하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의 말을 빌리자면, 오가와 소설은 분명히 동화풍 이야기 카테고리에도 들어갈 수 없다. 오히려 마술적 사실주의나 환상문학에 가깝다. 이런 분류에 속하다 보니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기묘함에 불평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나, 이유없이 싫어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바다」에 관해서


'나'에 의해 소개되는 이즈미 (泉) 씨의 가족은 평범해 보인다. 저마다의 특징이야 없을래야 없을 수 없지만, 치매 기가 있는 할머니나 공무원 아버지는 어느 가정에 있든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 이들이 보편성에서 떨어져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가와는 이러한 일상적인 서사에 신비하고 기묘한 색채를 곧잘 섞어낸다. 이것은 그러한 특수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는 말이 아니다. 환상문학적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버섯들 사이에 숨어 있는 독처럼, 단 하나의 요소로 완전히 다른 결말로 이끌려 간다.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의하시구려"


이즈미 씨네 할머니가 말했듯 이 작품에서 "독"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진정으로 특이한 인물은 '꼬마 동생'이다. 그에 의해 세계가 뒤바뀌고 무너져 내린다.

그가 '꼬마 동생'인 이유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지적 능력이 꼬마에 머물러 있어서임이 아마 틀림없어 보인다. 묘사되기로도 그는 인간 사회보다 동물들의 규칙에 끌리는 듯하다. 죽음과 삶과 같은 원초적 행위를 바라보며 일차원적 욕망을 희구한다. 어린 아이들이 대체로 그렇듯 탄산 음료를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은 자신만의 장소에 보관한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한 인간 사회의 원동력인 탐욕은 결여되어 그런 자신의 보물을 쉽게 내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적 합의 같은 말과 별 상관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비문명적으로 읽힐 수 있는 그의 아이덴티티는 이윽고 명린금 연주를 통해, 그리고 그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다. 이 몽환성 넘치는 문학적 장치가 문명과 반문명 양 극단에 대한 예찬 없이도, 그 바다의 소리만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음은 매우 자명하다.

명린금과 같은 기괴하고 독특한 motif는 오가와 소설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서정성과 가장 잘 어우러진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침울함이 살짝 깃든 간결한 문체, 죽음을 은밀히 드러내는 각종 메타포 등 논해 볼 게 다양한 작품인데, 그건 기회가 닿으면 하도록 하고 피곤하니까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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