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 스탠퍼드대 미래인생 보고서
티나 실리그 지음, 이수경 옮김 / 엘도라도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도 모르게 스물을 지나쳤지만


표지가 끌린다는 핑계를 대고 읽었다. 원래 자기계발서는 안 읽는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지 굳이 책에서까지 남들 말을 고집하고 싶진 않아서.

저자는 창의적으로 살라면서 여러 과제를 내고 그걸 해온 학생들 등의 사례를 소개한다. 과제라 함은 학교에서 내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리 좁게 해석해야 하는 게 아니며 인생 전반의 문제 또한 과제이고, 기회이다. 그러나 저자의 과제를 실제 맞닥뜨린다면 몹시 난처할 것 같고, 읽으면서도 마음 한 켠이 (벌써) 답답하다.

실패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 답답할 텐데, 나 역시도 그렇다. 가장 작은 것으로는 학교의 수행평가에서 시작해, 소논문, 전람회, 연구주제까지 모든 게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일이 아니던가. 모든 사람은 트라우마가 있다. 극복하기 나름이지.

위에 나열한 저런 학사일정의 목표는 정말로 창의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학원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결과였고, 대부분 그쪽의 언질이 주제로 잡히곤 했다. 여기서 좌절한 것이다.


내가 아직 기억하는 중학교 수행평가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이렇다. 첫 번째는 도덕 시간이었다. 교사가 고른 (도덕 교과에서 가르칠 만한) 위인 중 하나를 우리가 랜덤하게 뽑아 그 설명 등을 프리젠테이션으로 발표하는 거였다. 조별이었는데 세상 어느 조나 다 그렇듯 1명이 다 하는 구조였다. 오히려 이건 내가 독단적으로 구도를 선택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다. 보기 나름이다.

컨셉은 지식채널e였다. 다른 조가 디자인과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에 골몰할 때 우리는 그냥 까만 배경에 하얀 글만 넣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한 학년 뒤 같은 교사의 같은 과제를 만나 다시 우려먹었다.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었고 그때는 마우스 딸깍거리는 것도 귀찮고 다른 스타일을 고민하다 아예 동영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당시 동영상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과제 하나 때문에 그런 걸 배울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중학교 때 나는 놀기 바빴다. 매일매일이 재밌었고 미래는 별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프리미어? 애프터이펙트? 베가스? 나사 풀린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동영상 컨셉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파워포인트를 동영상처럼 꾸몄다. 메크로랑 타이밍을 적절하게 설계해서 파워포인트지만 동영상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건 리스크가 있었는데, 발표 현장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 학교엔 교실마다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교사들이 랩탑을 들고 다녀서 몇 번이고 찾아가 테스트를 해봤다. 폰트, 동영상 속 동영상을 포함한 오브젝트 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런 완벽주의적 습관은 원래 내게 없었는데 이전 학년 때 폰트나 동영상이 깨져 발표에 실패한 그룹을 보면서 더 강해졌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노력했다. 한번은 헬렌 켈러에 대해서 조사해야 했다. 뽑고 나서, 아, 편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어릴 적 위인전을 봤다면 헬렌 켈러를 모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뜬금없이 사회주의자니, 페미니스트니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사회와 정치에 너무나도 관심이 많았고, 교사가 원한 방향과는 달랐겠지만 그 부분도 충실히 넣어 발표를 했다. 물론 반응이 좋았다. 전교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덤이었다.


또 다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우리 도시' 명소를 소개하는 팸플릿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거야 쉬운 것 아닌가, 대충 검색해서 넣으면 되니까'라고 과제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중요한 내용은 주로 끝에 있다는 말을 새겨 들어야 한다. 문제는 상위 세 명인가 하여튼 최고성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10%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고민을 했다. 이때는 어떻게 엄마가 내 옆에서 도울 시간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줬다. 당시 전교 1.5% 안에 있었으니 특목고 준비겸 그런 것 같은데 이유를 확신할 수는 없고.

어쨌든 결국 팸플릿을 어떤 방식으로 꾸미는 게 좋을까 그것이 관건이었다. '어떤 방식'이라 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이렇게 나눠 보는 것은 문제 해결의 기본이다. 프로그래밍에서의 가장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나, Divide and Conquer라고. 그렇게 나누면 결국 물리적인 것과 서술적 측면이 남는다.

나는 단지 미술에 전혀 조예가 없어 물리적인 면을 포기했다. 왜 팸플릿은 대개 접혀 있고 그걸 펼치면 다른 정보도 적혀 있는 것이지 않나?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입체적인 것을 생각했다가 도저히 만들 능력이 부족해 생각만 하다 포기했다. 그것도 괜찮은 시도였을지 모르겠지만 상상 이상으로 내 미술 실력은 조악해서 열심히 만들어도 장난스럽게 했다며 비난을 받는 수준이므로, 자제하기로 했다.

그래서 남은 것은 소개를 어떻게 서술하느냐였다. 고민을 하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코스였다. 정확한 방식은 기억이 안 나지만 크게 2-3가지 코스를 준비하고 일부 겹치게 만들면서 그곳에 간단한 장소 설명을 적었다. 아무리 팸플릿을 만들어봤자 위치가 '**동 391-23'따위로 적혀있으면 가치가 없다. (지도 들고 다니던 시절이다….) 결국 우리가 루트를 지정해서 골라가는 편이 더 목적에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식에서 출발했다. 평가는 매우 좋았다.

왜 그땐 이런 수행평가에 목숨걸고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학교에서도 공부만,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만 시킨 아이들과, 다른 적절한 방식으로 교육시킨 아이들 중 누가 더 성과가 높을까? 나는 분명 후자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수능 수학 등급별 커트라인을 보면 공부를 전혀 안 하는 학생의 비율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게 다 현 교육과정과 압박이 강한 교육문화 탓으로 보인다. 끝없이 공부하라 시키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나 싶다. 그 외침만큼 할 리도 만무하고, 그런 환경에서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 비율은 훨씬 클 테니.


중학교 이야기 나머지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앞서 잠시 소개했던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내가 가장 황당했던 것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혼자 공부하던 산소의 라디칼 관련 내용이 교내 연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나는 참가하지 않았다. 내가 공부하던 내용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많았지만 그걸 정말 연구에 적용할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다. 그 내용을 정리해 자랑스럽게 블로그에 올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 연구나 내가 적은 내용이나 일반화학 내용을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라 절대 그 '연구자'가 혼자 생각했을 리는 없으리라 보인다.

결국 학원. 나는 돈도 문제지만 엄마도 바빠 그런 정보 네트워크가 없었고, 심지어 1학년 때까지는 학원의 존재조차 몰랐다. 일반 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교와 다른 일부 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다. 이런 곳에서 고교입시도 준비한다고 한다. 다른 세상이다.

내가 거기서 좌절했지만 모든 걸 자본과 소득의 탓으로 돌리진 않았다. 요즘엔 '노오력' 등으로 386, 486, 586을 거친 일부 몰지각한 세대의 말을 무작정 비꼬는데 난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렇다. 내가 좀 더 똑똑하고 노력했다면 혼자서도 다 준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불합리적이며 기회의 평등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그런 이상은 정치인이 추구할 방향인 것이지, 일반 개인이 자신 삶에서 감당하고 찾으려 발버둥치는 것을 강제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물며 그 목적이 이런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이야기가 샜다. 앞으로도 일부러 이야기를 이리저리 비틀고 흘리면서 삶의 궤적을 조금씩 소개해보고자 한다. 책을 매개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명분이 작아지진 않을 테니깐.

여러 경험으로 창의적 해답을 내놓았을 때의 성취감을 알고 있다. 기분이 아주 좋고 성장한 느낌을 받는다. 내 경우엔 아주 소박한 것들이었지만. 그 성취감을 증폭시켜줄 더 큰 장소 - 예를 들면 저자가 주최하는 캠프라든지 - 가 있으면 도전이 두렵지 않은 삶이 꽃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현실이, 지금 이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저자 말대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중요"하니까, 전제부터 타당한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