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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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읽을 책을 어떻게 고르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때 그때 필 꽂히는 대로'이다.

은연중에 내 심리 상태를 반영하게 될텐데,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보니, 나이듦이나 죽음에 관한 책들이 많다.

 

생각나는 것들만 꼽아보자면,

좀 멀게는 '헤닝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최근 것으론,

전설의 편집자라는 '다이애너 애실'의 '어떻게 늙을까'부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바턴',

그리고 '필립 로스'의 이 책까지...

핸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이 대기중인데, 딴 책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돌아와야 겠다.

침잠할까 두렵다.

 

정영목 님의 번역은 믿고 골라읽을 정도이지만,

필립 로스의 경우,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책은 몇 권 소장 중이지만,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나이듦이나 죽음과 관련된 여러 명의 글들을 읽었는데,

본인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그것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솔직했고,

그리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훅~!'하고 강하고 묵직하게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또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남자답거나 성숙하거나 철학적인 척할 필요 없이, 느끼는 대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었다.(16쪽)

 

필립 로스의 아버지 하먼 로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았고,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다음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여자를 원치 않아. 내가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여든여섯이야, 하먼." "왜 이래, 나 참, 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하고 즐거운 식사를 하고, 인간다운 사람들과 사귀는 얘기를 하는 거라고." (59쪽)

빌 위버라는 친구와 필립 로스의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이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이 어르신들이 많아서 일테지만,

난 빌 위버의 심정도 하먼 로스의 심정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를 이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빌 위버는 관계 자체가 버겁고 힘에 부친다는 얘기일 것이고,

하먼 로스는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 하먼 로스가 남은 노년을 이렇게 보내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겠다.

 

책을 읽으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필립 로스의 나이는 쉰 살 생일이 언급된 걸로 미루어,

쉰 언저리이고,

우리나라에 좀 늦게 번역되어 나온 것인가 보다.

1933년생으로, 올해 그의 나이가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 나이 정도이다.

 

필립 로스의 다른 글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그를 멋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마음 씀씀이와 표현력 때문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빌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랑스럽게 소곤거렸다. "말 한번 제대로 하는군."

"저 아시잖아요, 빌 - 늘 대중이 바라는 걸 알죠."

"역시 나의 필립이야." 빌은 말하더니 내 손을 잡고 음악가들이 악기를 들고 나타나 자리에 앉아 조율을 시작할 때까지도 놓지 않았다. 빌은 내가 아직도 일곱 살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일곱 살 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손을 잡고 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나이를 먹었건 얼마든지 내 손을 잡고 있을 권리가 있었다.(64쪽)

 

솔직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허먼 로스의 죽음이 그리 아프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넘겼다는 건 아니고,

폭풍 눈물을 흘렸지만, 뭐~ㅠ.ㅠ

 

이 책에 등장하는 상황이 1980년대 상황일듯 하고,

우리의 지금 현실과 비교되어 완전 부러웠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주도했듯,

삶이 그러하였듯 죽음을 주도적으로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또 부러웠던 것은 필립 로스 같은 효자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 허먼 로스가 보험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고 한다지만,

노후 생활이나 치료비나 병원비 따위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랬다.

 

그 상황을 2017년 현재 우리나라로 옮겨 온다고 한다면,

노후 생활자금도 그러하지만,

병원비나 기타 비용 또한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어르신은 많지 않을것이다.

일정 부분 자식들에게 부담을 줄 것이고,

때문에 우리 옛 말에는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는 것일게다

 

필립 로스와 관련하여서도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때,

대화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부러웠었는데,

이건 필립 로스의 상황을 알게 되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때론 가까운 사이일수록 나누기 어렵고 껄끄러운 대화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럴때 대화를 나눌 (이성이든 동성이든) 친구가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지만,

관점을 살짝 비틀어 보니까,

이 무렵 필립 로스는 이혼을 하여,

본인의 심장 수술을 할때도 혼자 버텨내야 했던 걸 보면,

배우자나 부모, 자식과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찌 되었건 간에,

이 책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틀어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이야기마다- 뉴어크의 다운넥에서 아일랜드인 불량배와 맞서던 이야기든 방과후에 사촌의 대장간에서 일하던 이야기든-의사는 초조함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호기심으로 귀를 기울였으며, 친절하게도 아버지가 할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당면한 문제로 방향을 틀었다. 의사는 아버지에게 입천장을 통해 바늘을 찔러넣어,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자세히 설명했다.(157쪽)

의사가 아버지가 어떤 얘기를 하든 다 들어줄 정도로,

환자 한명 한명에게 시간을 충분히 배정하고,

환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상세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귀가 안 들리지는 않으나,

담 같은 걸 높이 쌓아올리고,

일정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어느 순간 잽싸게 차단해 버린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엮이는 건 사절이다.

 

암튼 허먼 로스, 우리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잘 살면서 죽음에 잘 다가간다.

 

필립 로스 또한 글의 곳곳에 유머 코드는 장착했지만,

아버지의 삶을 미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잘 그려내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삶을 미화시키지 않고 곧이곧대로 그려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다음 구절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필립이 꼭 어머니 같아."

  나는 놀랐다. 처음에는 그것보다는 "꼭 아버지 같아"하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아버지의 묘사는 사실 나의 상식적인 기대보다 더 통찰이 있는 것인 동시에, 훨씬 노골적이고, 뻔뻔스럽고, 또 부러울 정도로 자의식 없이 솔직한 것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늘 나에게 뭔가, 관습적인 미국 아버지가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 스포츠가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남성이 되는 법 같은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이지만 허영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내 소년기 갈망,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 대신 현명하고 위엄 있는 아버지가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갈망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스러운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나도 모르게 반쯤 창피해하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의 공격받기 쉬운 면, 특히 반유대주의적 차별의 표적이 되기 쉬운 면 때문에 아버지와의 유대는 강해지고 아버지를 얕잡아보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단단해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일상어를 배웠다. 아버지 자신이 바로 일상어, 시적이지 않고 표현이 풍부하고 바로 과녁을 노리는 일상어, 그 모든 뻔한 한계와 더불어 그 모든 끈덕진 힘을 지닌 일상어였다.(216쪽)

이 책이 아름다운 것은,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가 죽을때까지 삶을 마주 대하는 품위 때문이고,

한가지 더, 필립 로스가 지금 그의 아버지 나이 언저리에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재산, 부동산 따위가 아니라,

어떤 기질 같은 것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는 건 어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드는,

조금은 쌀쌀하고 쓸쓸하기도 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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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7-12-16 09:46   좋아요 0 | URL
좋은 말이지? 영광인거네.
우리는 어울려 살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기도 하고 살아가는 것 같애.
그런데 문득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는 건,
내가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대가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닐까?

난 나이를 먹으면서 좀 느슨해지는 것 같애.
만남이나 모임을 점점 줄이려고 하기도 하지만,
모임 후까지 내가 무슨 얘길했고,
상대방이 무슨 얘길했고,
기억하지도 못 하지만,
기억할 필요도 못 느껴.
그냥 모임 자체를 즐긴다고 해야할까?

내 그대를 애정하는 마음에서 한마디 하자면,
때로는 분석 같은거 하지말고,
‘냅둬, 이대로 살다 죽게‘해봐.
한결 편안하고 살만해진다, ㅋ~.

실상 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일을 하긴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덴 신경 못 쓰는데,
오히려 그게 좋다~^^

마녀고양이 2017-12-19 11:51   좋아요 1 | URL
그렇게 느슨해진다니 반갑다~~~~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는구나, 그것도 잘. ^^

분석이라고 하니 사고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내가 뭘 원하는 건지 인식하는 소리를 듣겠다는 거지.
자기의 특별한 말을 기억하기보다는 독특한 자기의 분위기들, 느낌들.
묘하게 중독적이라서 끊지 못하는. 아하하.

양철나무꾼 2017-12-19 18:24   좋아요 0 | URL
ㅎ,ㅎ...내가 ‘쫌‘ 분위기와 느낌이 있어주시지~^^
난 한때 독특한 분위기와 느낌을 목소리에 축소시켜 적용하려 하고,
그게 컴플렉스였었지.
근데 이제 독특한 분위기와 느낌을 가졌다고 하면 고맙게 받아들여.
뭐, 이 나이쯤이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고치기가 힘드니까 말야.
이젠 컴플렉스를 넘어서, 칭찬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진화 중이라고나 할까?

난 요즘 칭찬 결핍이야, 칭찬 많이 해줘~^^

마녀고양이 2017-12-20 10:17   좋아요 1 | URL
다정함 지적이면서 엉뚱한 매력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서 멋져보이고 따뜻하고 마음 약해서 다른 사람 잘 도와주고, 안 그럴 거 같은데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게 가장 고마움~~

단발머리 2017-12-15 19:15   좋아요 1 | URL
저도 필 꽂히는 대로 읽는 편이예요. ㅎㅎㅎㅎ 양철나무꾼님도 그러시다니... 전 또 그게 무척 반가워요~~~~~

저도 이 책 읽고 리뷰 써야지 하고 있는데, 먹먹하기도 하고 할 말이 많기도 하고 해서 내내 미루고 있어요.
필립 로스처럼 효자 아들을 두었다는데 허먼 로스에게 축복이다 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의 다른 책에서 그가 그렇게 미워하고 벗어나고자 했던 그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뭐랄까... 무척 복잡한 기분이 들었어요.

죽음과 부모. 부모의 죽음이 던지는 그림자 같은 것 때문에 전.. 조금 어지럽고.. 그렇게 읽었습니다.
좋은 책에 어울리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7-12-16 10:0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이 좋은 리뷰라고 해주셔서, 정말 좋아요.
전 이 책을 blanca님이랑 님 페이퍼를 보고 내처 읽게 됐는데,
님이 왜 필립 로스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님이 말씀해주신 복잡한 기분도 충분히 알 것 같고 말이죠.
무엇보다 친정 아버지가 내후년이면 팔십이셔서 더더욱이요.

전 주변에서 어르신들을 많이 봐서 나이듦이나 죽음 따위에 초연할 줄 알았는데,
제 ‘스스로‘가 나이드는걸 곳곳에서 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그건 또 속수무책으로, 손 쓸 수 없이 밀려오더군요.

그래도 이런 책을 읽으며,
뭐랄까, 워밍업 한달까,
위안 받는달까 그렇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님의 이 댓글도 참 따땃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한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__)

sprenown 2017-12-15 19:29   좋아요 1 | URL
품위있는 죽음! 저도 쓸데없는 생명연장장치 쓰지 않고,사랑하는 가족의 배웅을 받고 편하게 죽고싶어요.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평균수명까지 행복하게 잘살고..돈많은 이건희가 불쌍하죠.

양철나무꾼 2017-12-16 10:12   좋아요 1 | URL
돈많은 이건희가 불쌍하다는 대목에서 살짝 웃었습니다.
돈으로,
이런 저런 기계를 붙여놓고,
기계의 힘으로 버텨내고 있는,
그가 불쌍한거, 맞네요.

돈 많은 사람은,
맘대로 죽을 수 조차 없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해지기도 하고 말이죠.

전 돈은 많지 않으니 맘대로 죽을 수 있을것 같고,
이제 건강 관리에 힘쓰고 노력할 일만 남았죠.

그런 의미에서,
날도 추운데 옷 뜨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시길~!^^

sprenown 2017-12-16 12:1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나무꾼님도요!

북극곰 2017-12-22 20:47   좋아요 0 | URL
이책이 나왔었군요. 저도 필립 로스 무척 좋아해요. 요즘 연말이라 쇈히 들떠서 책만 지르고 있는데 이 리뷰를 보니 안 담을 수가 옶네요.

양철나무꾼 2017-12-26 10:1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완전 재밌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인간적 고뇌 따위를 실감있게 그려내는 점이 좋았어요.
님도 후회하지는 않으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