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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배신 - 베테랑 번역가도 몰랐던 원어민의 영단어 사용법
박산호 지음 / 유유 / 2017년 4월
평점 :
박산호 님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박산호 님을 쩜 아는것 같다.
소싯적 장르소설을 즐겨 읽을 당시 로렌스블록, 마이클 코널리와 스튜어트 맥브라이드 등의 역자로 알게 되었고,
난해하다던 '콰이어트 걸'을 통해서 완전 애정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페터 회'는 스밀라도 그랬지만, '콰이어트 걸'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역자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행간의 뉘앙스까지 번역해 내지않는다면,
독자가 이해는 고사하고 읽기조차 쉽지 않은 책이었으니까 말이다.
(돌이켜 보면 완전 영광인데, 그때 내 리뷰에 뭐라고 비밀 댓글을 달아주시기도 했었다, ㅋ~.)
그렇게 역자 박산호 님과 나는 각자의 삶을 살아왔고,
단어의 배신이라는 이 책을 통해서 조우하게 된 셈이다.
실은 젊은 시절의 나는,
장르소설이 좋아도 너무 좋은데,
읽다보면 너무 날림인 번역들을 만나곤 해서,
'그렇다면 내가 번역을 해봐?'하는 허무 맹랑한 꿈을 꿨었던 터라,
'콰이어트 걸'의 탄탄한 번역이 참 좋았었고,
그런 역자에게 무한 애정을 가지고 신뢰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 책에는 박산호 님이 그동안 번역하며 만난 단어중에 다양한 의미와 흥미로운 역사를 지닌 100개가 소개됐다.
다 알고있는 듯 여겨지는 단어였지만,
읽다보니 의미와 역사에 대해선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방식이 좋았던건 단어를 무조건 외우도록 소개하는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단어와 뜻을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방법을 취한다.
하나의 뜻에서 꼬리를 물고 다른 뜻을 유추해낼 수 있도록,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연결을 한다.
그렇다고 수다스럽거나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깔끔하다.
예를 들면 fix를 설명하면서,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속성 다이어트를 해야한다고 하면서 상황 속에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끼워넣는 식으로 말이다.
책의 내용은 한 단어에 한장을 할해해서 설명하고 적절한 예문을 나열하는 식으로 좋은데,
아쉬운 점이라면,
편집이라고 해야 할까,
단어를 배치하는 방식과 글씨체가 낯설다.
단어가 앞에 나오는게 아니라,
발음기호와 단어의 뜻이 나열되고,
본문 내용 중에 검은 원 안에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단어가 또 멋을 부린 글씨체다.
영문을 보게 되면,
우리가 흔히 인쇄체와 필기체라고 알고 있는 글자들이 섞여 있다.
g나 y같은 것도 그렇지만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닌데 s는 좀 심하다.
영문과 번역문에서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확인 하기 쉽게,
그 단어를 돌출시키는 방법으로 필기체를 사용한 예문에 익숙했던 터라,
이 책에서도 그런건가 자꾸 쳐다보게 된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얇고 가벼우면서도,
단어의 다양한 의미와 역사를 흥미롭게 써내려간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머릿말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공지능이 번역 시스템에 도입된 시대에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단어를 폭넓게 이해하는 능력이 아닐까? 세계 각국의 사람과 수월하게 의사소통하기 위해 영어 단어에 담긴 여러 갈래의 뜻을 음미하며 원서를 읽고 섬세하게 사유하며 고른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이 될 것이다.(11쪽)
비단 외국어의 번역에만 국한된 건 아닌것 같다.
내가 내뱉는 말이나 쓰는 글들이 얼마나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한 것인가 라고 한다면,
글쎄다, 상대방 보다는 내 편할대로, 내 위주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에 있어선 외국어 능력도 중요하지만,
번역된 내용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서 제대로 된 국어실력도 중요하다.
그렇게 단어에 담긴 여러 갈래의 뜻을 음미하고,
섬세하게 사유하며 고른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번역을 하고 글을 썼는가는,
작품이 대신 말해주는 것이다.
부디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