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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 빨간소금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남덕현의 '충청도의 힘'을 제법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 책도 그럴 줄 알고 단숨에 들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재밌긴 재밌는데, 이상하게 내겐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웃음도 그렇지만 깨달음 또한 강요한다고 되는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어르신들의 일상에 밀착렌즈를 들이대듯 사소한(이라고 쓰고 자세하고 세세한 이라고 읽는다) 데서 웃음을 끄집어내려는 것이 지나쳐서 깨달음을 강요하는듯 여겨진다.
웃음코드의 타겟은 사투리인데,
그건 어르신들의 일상이니까 자연스러운데, 거기서 깨달음을 끄집어내려는게 작위적이다.
책을 읽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책을 쓴 작가의 몫이 아니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들듯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받아들이고 체화하기에 달린게 아닐까.
삶이 통속적인 것은 맞지만,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되는 웃음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사투리를 사용하는 건 좀 비겁한 일 같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풍자와 해학으로 드러나는 따뜻함을 잘 장착하였다.
풍자와 해학을 장착한 글로 봤을 때도 손색이 없지만,
그냥 봤을 때 잘 벼리고 톱아낸 한편의 수필 같기도 하고 산문시 같기도 하다.
동네 마실 나갔다가 어르신들 이야기에 말려들어 심판을 보게 생겼다.
한동네에서 태어나 칠팔십 년을 함께 살고, 별일 없으면 한동네에서 생을 마치는 인연들이다. 짐작컨대 오늘 말고도 누누이 같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 아님은 자명하다. 서로의 소리를 듣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지. 그들은 언어의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고유한 소리를 내는 악기에 가깝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발화자가 아니다. 언어에서 의미체계를 걷어내고 오로지 소리만을 건져 즐기는 지음(知音)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언어의 의미체계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극복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맞수답게, 서로 질세라 최선을 다해 한 편의 아름다운 합주를 펼친다.(9쪽)
내가 이곳 알라딘 서재에서 관계맺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말로도 그러하지만,
글로는 한술 더 떠 시시비비를 가리는 글을 쓸 깜냥이 아니기도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 즉 네트워킹을 하는 방식 자체가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관심이 있고 없고,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 의 취향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면 대략난감할 따름이다.
"화투판이만 있구 정치판이는 읎는 게 있는디 뭔 중 아는감?"
ㆍㆍㆍㆍㆍㆍ
"그려 독박. 독박은 노상 궁민덜이 대신 쓰니께! 정치허는 것덜은 마냥 고, 궁민덜은 노상 독박!"
"그러믄 지비는 이번 슨거이서 워디를 밀거사는겨?"
"쌍눔의 개갈 안 나는 화투판 치다두 안 볼 참이니께! 내 세금으루 판돈 걸구선 마냥 고 허는 꼬라지 보는 것두 환장허겄는디, 옆이서 누구 이겨라, 누구 져라 응원까장 혀줄 일 있남?"
"그려두 슨거는 안 혀야 써?"
"참말루, 츤하에 무식헌 소리 허구 있네. 허믄 뭐헌댜? 저것 덜 뽑아놔봤쟈 다 비광이여, 비광! 서루 잡아먹을드끼 으르렁 그르렁허는 거 같어두, 겔국 서루 붙어먹으야 삼점 나는 비광들이라니께! 허, 쌍눔의 화투판!"
살아온 내력이 진실을 직관하는데, 드잡이면 어떻고 막무가내면 어떠랴.
시골평론만 한 정치평론을 일찍이 들어본 역사가 없나니.(78~79쪽)
요즘 대통령 탄핵과 맞물려서 시국이 말이 아니다.
다른 것을 향하여선 서울과 시골, 수도권과 변두리를 나누지 않지만,
정치는 생물이라고 정치적인 사안을 향하여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 계파 간의 갈등이 존재하고, 지방색이라고 할까...지역마다 특색이 존재한다.
'드잡이면 어떻고 막무가내면 어떠랴'라는 말은 '목소리 큰넘이 이긴다'는 자조와 다를 게 무엇인가.
"다 헛꽃이지 뭐. 헛꽃 피는 게지 안 그려? 헛꽃 지는 디두 눈물 나는 게 사램이구."
북어대가리 삶는 냄새는 구수해도 아궁이 연기는 매운지라, 어르신도 나도 눈물을 질금거린다.
"나이 오십에 이깐 눔의 연기에 우는겨?"
"어르신도 우시면서 뭘 그러세요."
"나는 우는 거 아닌디?"
"그럼요?"
"속이서 새루 눈물이 나오야 우는 걸루 치는 거 아녀?"
"그런데요?"
"나는 속이서 새로 눈물 나온 지가 원젠지 까마득햐."
"그럼 지금 눈물은 어디서 나오는 건데요?"
"워디서 새루 나오는 눔이 아니라니께? 예즌부텀 배까티 매달려 있든 눔덜이 인자서 녹어 흐르는겨."
"옛날에 울었던 눈물이 아직까지 밖에 매달려 있어요?"
"잉. 사람이 한꺼번에 다 울구 마는 게지, 슬플 때마덤 새루 우는 중 아남? 사람 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구, 애통이구 절통이구 난리를 치나마나 다 뻔한 일인디, 뭐가 맨날 새루 슬프다구 그띠마다 새루 눈물이 난댜? 사램이 맨날 새루 우는 중 알지만서두 내가 볼 띠는 한번이 다 울구 마는겨. 울기는 다 울었는디 미련이 남아설랑 차마 다 못 떨구구선 장 매달구 사는 게지. 우는 게 일인중 아느니, 우는 건 일두 아닌겨! 매달려 있는 눔의 거 미련 읎이 다 떨구구 가는 게 일이지. 아, 정 붙이는 게 일인겨, 정 띠구 가는 게 일인겨?"(247쪽)
"워떤 낭구가 수월허게 꽃을 떨구는가 알어?"
"글쎄요."
"속이 텅 빈 눔이 꽃두 잘 떨구는겨. 이따 산이 가서 아무 낭구나 손바닥으루다 두들겨봐. 속이 꽉 찬 눔은 암만 두들겨두 손바닥만 아프지 꽃이 고대루 매달려 있는디, 우덜맨치 늙어서 속이 텅 빈 낭구는 한 번 두들기믄 우수수 꽃을 떨구니께. 왜 그런 중 알어?"ㆍㆍㆍㆍㆍㆍ"제갈공명 말구는 내가 아는 공명이 읎어서 지비가 말허는 공명이 뭔 중은 모르겄지만서두 서루 속으로 생각허는 건 한거질겨. 속이 빈 눔을 켜야 깽깽이두 속으루 울어서 소리를 떨구는 거 아녀? 같은 이친겨. 사램두 늙어서 속이 텅 비야 시방 맹키루 허깨비 같은 연기가 스쳐두 속이 울믄서 눈물을 수월허게 떨구는 거니께. 그눔의 거 얼렁 떨구구 가야지 원제까장 그 무거운 눔의 걸 달구 댕기믄서 용을 쓸겨, 안 그려?"(249쪽)
마당 벚나무가 그 위로 꽃잎을 떨군다. 속이 텅 빈 나무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것들은 벌써 진 꽃잎이 아니던가. 이미 다 울어서 오래 전 매달아놓은 눈물이나 다 떨구고 가는 것이 사람의 한 생이라면, 저것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벌써 진 꽃잎들이 매달려 있다가 이제야 지는 것이 아닌가.(250쪽)
하지만 이러쿵 저러쿵 해도 내가 두 엄지를 척하고 추켜세울 수밖에 없는건 이 구절때문이다.
인생을 앞서 살아간 사람 특유의 기지와 해학이 넘쳐난다.
그걸 벼리어낸 작가도 멋지다.
밑도 끝도 없는 싱거운 소리만 늘어간다. 오랫동안 열어야 할 것은 닫고, 닫아야 할 것은 열고 살았다, 그래서 '열다'와 '닫다'는 나에게 실패한 언어다. 실패한 언어의 의미, 실패한 언어의 은유와 비유와 상징을 버리는 길은 침묵뿐이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실패한 언어를 입에 담을 때에는 의미를 제거하고 소리만 내고 싶고, 그리하여 싱거워진다.(266쪽)
이런 문장도 너무 좋다. 사족이 될줄 알면서도 옮겨적지않을 도리가 없다.
새벽으로 치자니 당겨 쓸만한 아침이고, 아침으로 치자니 남은 새벽이 억울할 즈음에 스님이 돌아오셨다. 얼굴을 말똥소똥 쳐다봐도 뭐 하다 오셨는가 한 말씀이 없고, 왔느냐 언제 가느냐 한 물음도 없다. 그러더니 내가 어제 일망타진한 참외 꼭지 세 개를 보고는 입을 쩍 벌리신다.(272쪽)
여기 저기서 심플 라이프, 미니멀 라이프를 외친다.
버리고 비워 홀가분해지는 홀쭉한 삶에 유형의 물건들 말고,
내가 뱉어내는 말들, 생각을 옮겨낸 여물지 않은 글이나 그림 따위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숙연해진다.
더 많이 비우고 줄여야 할텐데...생각만으로 잉여이다, 행동으로 옮기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