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이 책은 별다른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생각 외로 너무 좋았다.
나는 이런 식의 글을 엿보는걸 좋아한다.
박용하 시인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10년 견디다, 경기도의 한 시골로 이주해서 원주민과 외지인이 기름과 물처럼 섞여있는 곳에서 7년 6개월을 견뎠다. 말이 시골이지 인심이 고약했던 곳이었단다.
그리고 2008년 가을, 오빈리로 옮긴 후의 1년여의 삶을 일기 쓰듯 기록하고 있다.
'흙을 만지며 사는 삶은, 글 쓰는 삶과는 다른 희열을 내게 주었다'라는 '자서'로 시작한다.
처음 별다른 생각없이 책을 설렁설렁 넘기던 나는 이내 자세를 고쳐앉았다.
2009년 1월 2일 금요일의 일기는 이렇다.
바늘이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느낌. 총알이 몸을 뚫고 뒤로 나가는 느낌. 허공을 딛고 있는 느낌. 도끼날이 얼굴을 향해 달려오는 느낌. 물이 폐로 들어가는 느낌. 피할 수 없는 느낌. 한 느낌이 사라지면 재차 돋아나는 느낌. 병든 느낌. 병들 느낌. 죽은 느낌. 죽을 느낌ㆍㆍㆍ이 숱한 느낌들. 느낌의 천방지축. 느낌의 백팔번뇌. 왜 나는 이 느낌들을 반팔 티 벗듯 벗어던지지 못하는가. 대체 내 속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대체 내게 무슨 장애가 있는 걸까. 대체 내 뇌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오늘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공포, 우울과 무기력, 울분과 분노가 명멸했는가.(39쪽)
그의 일기는 어찌보면 아내와의 불화, 경제적 궁핍등이 언뜻 두드러져 보이는 듯도 싶지만,
실상은 시대와의 불화이고,사회를 향한 냉소이다.
아니 어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화를, 술을 들이부어 잠재우려 망각하려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산수유꽃이 피었다. 잠깐 멈춰서서 눈길 줬다.(77쪽)
민들레가 피었다. 수양버들도 연두색을 내밀고 있다. 철쭉과 목련도 꽃봉오리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하루가 다르다.(79쪽)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세상의 불의나 보고 순응할 수 없어 눈 감아버리려니,
그마저 비겁하게 여겨져서 힘들었을 것이다.
새들이 급하게 날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너무 센 사람. 나는 많이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72쪽)
같은 문장들을 봐도 그렇다.
계간시지 '시로 여는 세상'에 이홍섭 시인이 골라놓았다는 시 두편('신달자'의 '씀씀이', '조기조'의 '나의 성장사')을 인용해 놓았는데 다 좋았다.
그러면서 '이홍섭 시인의 계간시평은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있는 시평이었다'라고 하는데,
박용하 시인 만의 마음이 아니고, 시평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도, 철학도 문학평론도 알아먹을 수 있게 해야 적어도 읽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 아닌가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임의진과 김두수를 언급한 것도,
그가 보려고 사들이는 책들도 그 무렵을 추억할 수 있게 해서 좋았다.
매번 술마시고 무기력해하고 좌절해 버리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그건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는 무심한듯,
'세상이란 곳은 역겨움으로 치면 끝이 없고 그 아름다움으로 쳐도 끝이 없다'(110쪽)
라고 그가 자조하듯 말이다.
읽다 말고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 보았다.
시인일기
박용하 지음 / 체온365 /
2015년 9월
길이 우리를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박용하.박용재 지음 / 문학세계사 /
2016년 6월
실은 며칠전 이런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지 살짝 고민을 했었다.
요즘 제가 특별한 일은 없는데,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 줄어들면서 사소한 것에도 예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요.
사실 섬세하고 예민한 것은 그(또는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촉수를 지녔을 뿐이다.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 수밖에 없도록 한 이 그지같은 세상,
맨 정신으로 살긴 너무나 폭폭하니까 박용하 시인처럼 술을 배워 보세요...라고 하려다가,
술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닐까 싶어 '푸훗~'하고 속으로 웃었다.
박용하 시인의 '오빈리 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씩 줄어드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느낌이 드니까 말이다.
꼭 무엇인가를 해야된다는 생각,
무엇인가를 꼭 잘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 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때는 그냥 느낌적으로만 느끼는 그런 것 보다는, ㅋ~.
작고 사소한 것부터라도 프로그레스 노트 또는 성취노트를 쓰면서 돌아보고 계획을 세우는건 어떨까 싶다.
나같이 만사가 구찮다, 하는 타입이라면 '오빈리 일기'를 살짝 흉내내봐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ㅋ~.
이렇게 거창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데, 알라딘 알림이 맞춤하게 이런 책을 소개한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힘
홍주현 지음 / 사우 /
2017년 1월
그리고 박용하 시인이 '오빈리일기'를 통하여 언급한 그 많고 많은 음악중 오늘 나의 선택은 '해리 벨라폰테'이다.
아흑,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