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글을 얼마나 반영할까.
늘상 고민거리이다.
핸드폰이란 것이 나오고, SNS가 발달하면서,
참 많은 것들을 문자 메시지나 카톡의 형태로 대신하면서,
말로 할때는 적어도 음성으로라도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는데,
문자 메시지나 카톡으로는 그럴 수 없어서 오해를 몰고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직접 얼굴을 보고 나누는 대화는 그나마 낫다.
애기를 할때 상대방의 반응이나 표정 따위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피드백을 보면서 적당히 반응할 수 있어서 한결 낫다.
암튼 난 문자 메시지나 카톡 따위로 상대방에게 내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한다.
그건 알라딘 서재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웃 서재라고는 해도 넷 상에서의 친분에만 의존하는 것인데, 짬뽕공처럼 이리저리 넘나든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말이다.
상대방이나 주변에서 봤을때는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은데, 툴툴대는 경우가 있다.
이건 상대방이 맘에 안 들어서 툴툴거리는게 결코 아니다.
버림 받거나 거절 당할까봐 두려워서 비롯된 일종의 방어기제이고 위장전술인데,
'친하게 지내고 싶다, 놀아달라'를 반어법으로 얘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나의 그런 댓글에 뜨악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 드린다.
서론이 길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 라디오에서 하는 '노중훈의 여행의 맛'을 들으면,
'박찬일의 맛'이라는 꼭지가 있는데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케미가 끝내준다.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을 듣고 있는것 같다.
뭐랄까, "나 너랑 안 놀거야~(,.)'와 '한번만 봐주라, 벌러덩'이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이, ㅋ~.
하지만, 방송이라서 그런 건지, 둘 사이에 서로에 대한 배려랄까, 예의와 격식 따위는 또 제대로다.
그게 박찬일의 매력이다.
사람이 하는 말이 그 사람의 글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모르겠지만,
박찬일이 쓴 글을 보고 있으면 하는 얘기가 듣고 싶고,
얘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그의 책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책을 소개하느라 장황했는데, 이제 곁에 두고 아껴 읽을 일만 남았다.
그의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지만,
이 정도의 글솜씨라면 음식도 맛깔 날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이런 말 조심해야 하는데, ㅋ~.
하긴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안 지키는 사람 하나 봤다~ㅠ.ㅠ)
나를 이렇게 장황하게 떠들게 만든 'PROLOGUE'의 한구절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노인이 국숫발을 삼키는 장면이 그 어떤 슬픈 소설보다 더 선명하게 슬펐다. 그것을 잊을 수 없어 이 책 안에 녹아 있다. 나의 분별없는 시니컬함은 실은 슬픔이라는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울수 없어서 나는 냉소했는지 모른다. 그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어쩌다 제목에 미식가가 들어가지만, 내 미각은 실은 미식의 반대편에 있다. 거찰게 먹어왔고, 싼 것을 씹었다. 영양과 가치보다 주머니가 내 입맛을 결정했다. 함께 나누는 이들의 입맛이 그랬다. 소 등심 대신 각 떨어진 돼지고기를 구웠고, 조미료 듬뿍 든 찌개에 밥을 말아 안주했으며, 노천의 국수집에서 목숨처럼 길고 긴 국숫발을 넘겼다. 그것이 내 몸을 이룬 음식이니, 미식이란 가당찮다. 그럼에도 미식이라고 할 한 줄기 변명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순전히 음식의 건실한 효용을 사랑했던 것이다. 가장 낮은 데서 먹되, 분별을 알려고 했다. 뻐기는 음식이 아니라 겸손한 상에 앉았다. 음식을 팔아 소박하게 생계 하는 사람들이 지은 상을 받았다. 그것이 미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미식의 철학적 사유와 고급한 가치의 반대편에 있는 저 밥상들이 나는 진짜 미식이라고 생각한다.(5~6쪽)
기록 경신이다.
오늘은 프롤로그를 읽다가 대성통곡을 했다.
사는게 힘들어, 미식가 입맛을 지닌 아들에게 허름한 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먹였다.
그래도 엄마의 시니컬한 반어법을 닮지 않고 착하고 따뜻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식가의 허기
찬일 지음 / 경향신문사 /
2016년 12월
오늘의 1일1그림이다.
누구인지는 퀴즈이다, ㅋ~.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ㅋㅋ동철씨구만'이라고 하는데,
'동철씨'는 울남편의 이름인데 '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