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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평점 :
황인숙은 내게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라는 시로 각인되었다.
시라는 것은 어느 정도 운율과 리듬감을 갖고 있게 마련이지만,
황인숙을 읽다보면,
현실의 꿀꿀함에 리듬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경쾌함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때론 타자와의 대화 같기도 하고, 때론 혼잣말 같기도 한데,
읽다보면 어느새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서,
입꼬리가 올라가고 배시시 해시시 거리게 된다.
이걸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해설'에서 '명랑'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니의 시를 읽다보면 경쾌하지만 마냥 가볍지않은 것이 적당한 온기와 품위를 지닌다.
간혹 너무 가벼워서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붙잡으려고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방식으로 제 속을 가벼이 해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하긴 요즘은 황인숙의 명랑함은 언감생심,
가볍고 단출해서 중량감 없으므로 머물지 않고,
그리하여 계획없이 날아 오를 수 있고,
날아오르지 않더라도 떨쳐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그런 삶을 꿈꿨었다.
떠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고,
존재감 1도 없이 사는 삶을 꿈꿨달까?
황인숙은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했단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서 하고싶었던 얘기도 내가 보기엔 '명랑하라 고양이, 명랑하라 그대'처럼 여겨졌다.
칠월의 또 하루
싸악, 싸악, 싸악, 싹싹싹
자루 긴 빗자루로
자동차 밑 한 움큼 고양이밥을
하수구에 쓸어버린다
"내가 밥 주지 말라꼬 벌써 멫 번이나 말했나?"
동네 부녀회장이라는 이의 서슬이
땡볕 아래 퍼진다
나는 그저 진땀 된땀 식은땀을 쏟을 뿐
찍소리 못 하고 선 내게
그이는 빗자루를 땅바닥에 탈탈 털며
눅인 목소리로 말한다
"누구는 고양이 멕인다고 일부러 사다 놓는 밥을
이리 내삐리는 마음은 좋은 줄 아나?
사람 좀 그만 괴롭혀라, 사람이 먼저 살고 봐야지!"
새끼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어미고양이
멀리도 달아나지 않고
옆 자동차 밑에서 숨죽이고 있다
내가 어떻게든 해줄 것을 믿는 듯
흠뻑 젖은 셔츠 아래서
위가 뜨끔거린다
당신은 내게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당신도 좀 그렇다
언젠가 아침 출근길의 일이었다.
동네 길고양이를 모아놓고 어떤 여자가 자기몫의 햄버거빵을 인심 쓰듯 나눠주고 있었다.
그런데 빵안의 패티는 쏘옥 빼서 여자가 먹고 햄버거 빵만을 던져주는데,
고양이가 냄새만 맡고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던져준건 양파와 밀가루 빵껍질뿐이었는데, 고양이가 먹으면 위험한 음식이다.
여자는 고양이가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육두문자를 섞어 욕을 하고 있었는데,
고양이는 욕을 못 알아먹을 뿐이고,
주변 사람들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시에서
"사람 좀 그만 괴롭혀라, 사람이 먼저 살고 봐야지!"라는 부분은,
인간만이 우월하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고 방식이다.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는게 아니라, 사람과 고양이가 같이 살아야 한다.
'흠뻑 젖은 셔츠 아래서 위가 뜨끔거린다'라는 구절은 동네 부녀회장을 따끔하게 꼬집는 언어 유희이다.
'아래서'와 '위가' 어우러져 절묘하다.
저 시뿐만 아니라 그니의 시를 읽다보면,
'달아', '비야', '아참', '아' 따위의 감탄사를 통하여 그렇게 환기되고 전환되어 명랑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고통
가장 따뜻한 데를
추위도 안 타는 시계가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기억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비쩍 마르고 오들오들 떠는 것들을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열정이니 고양감이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시니 음악이니 존재니
행복감이니 다행감이니
심장이 찌그러진다
찌그러져라, 참혹하게 찌그러져
터져버려라
연식 오랜 시계여
진공처소기여
피도 눈물도, 눈도 코도 귀도,
아므 감각도 없는 것이여
고통이라는 시도 좋다.
이 시를 읽다보면 '고통'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절실한 표현이자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가장 따뜻한 데를 추위도 안 타는 시계가 차지하고 있다'고 읊조리고 있는데,
시계는 사람마냥 추울수록 '째깍'거리며 달음박질을 치는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아무 감각도 없다'는 것은 인간 위주의 편협한 사고일 뿐이다.
거기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각'을 웃질로 놓는 도그마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걸 '살고싶지 않아'라거나 '죽고싶다'고 하지 않고,
ㆍㆍㆍㆍㆍㆍ
나도 살아 있다
우리를 오래 살리는,
권태와 허무보다 더
그냥 막막한 것들,
미안하지만 사랑보더 훨씬 더
무겁기만 무거운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 부분)
라고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의 한구절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데,
'무겁기'를 '무섭기'로 오독하고 일부러 그리 읽은 것이라고 우기기 바쁘다.
암튼 문학평론가 조재룡의 '해설'중 일부분을 옮겨보게 되면,
'황인숙의 시에서 말들은 감정을 한 웅큼 머금은 상태 그대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시가 깊이를 갖는다는 것은 조금 특이한 일'
이라고 하고 있는데,
황인숙의 이 시집을 선물받아 읽은 나로서는,
깊이를 가늠할 깜냥이 안되지만 넓이로 미루어 깊숙하다고 설레발 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 춥고 쓸쓸한 겨울이 적당이 뜨듯하게 여겨졌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