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독법이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가변적인 것이다
때때로 누군 말로써 자신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 글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말과 글 양쪽 다 자신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웅현 님의 '다시, 책은 도끼다'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실전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근사한 책이었다.
다시,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얼마 전,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잘라내어, 지인에게 여쭙는 과정을 리뷰에 올린 적이 있다.
난 이 지인이라는 사람과 계속 책에 관해서 이것 저것 여쭙는 사이였고,
그래서 용어가 통일되다보니,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박웅현보다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었나 보다.
혼란스러움을 줄이겠다는 선의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나 보다~--;
그리고 이 책의 한 부분, 불교와 관련하여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 지인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이런 답을 주셨다.
나도 지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불교의 개념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고,
이책에서 궁금하였던 부분에 관해서 였다.
'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멸이랍니다'라고 한 저 문장과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 호응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 강의내용을 토대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강의 도중에는, 말하기 중에는 말외의 모든 공감각적인 표현들이 감정전달의 수단이기 때문에 의미하는 바가 충분히 전달되었겠지만, 책으로만 읽어선 충분히 오해할 여지가 있다 싶어서 였다.
그러다 보니, 일이 커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침묵을 지킨다는 것도 비겁한 일인것 같아 바로 잡아본다.
내가 책에서 궁금했었던 부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인의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같은 경우도,
처음 저 구절만을 접한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나 또한 그 부분을 간과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가 '언어도단'을 일걷는 것만 인지하고는,
언어도단을 말함으로써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근데, 사실은...
불교의 언어는 언어도단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이렇듯 오해가 생길 여지가 다분하다는데,
이건 넷상에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인, 반어법이랑도 닮았다.
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역설이나 반어를 많이 사용해서, 때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다던지, 감정이 목소리에 실리는 대화의 경우에는 덜 한데,
글자로 어떤 상황이나 사실을 전달할 경우, 분위기까지 통째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때문에 여간 아쉽지가 않다.
태어남도 없고 소멸됨도 없는 것,
그리하여 멸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 아닐까?
모든 고뇌를 멸해서 새로운 연을 이루는 게 아니라,
모든 고뇌 자체가 망상임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열반이요, 해탈이 아닐까?
그러니 내 마음이 곧 부처고,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달으면,
곧 부처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박웅현 님이 책에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임을 깨달으라'는 말을 빼먹은 채로,
그냥 멸만을 얘기해서, 의미를 모호하게 한것을 바로 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불교의 개념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다.
길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는데, 난 때로 너무 집착하고 연연해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