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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불금(불타는 금요일밤)의 뜻을 아냐고 물었더니, 불허하다와 같은 의미쯤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어를 문어체로 사용하기를 즐겼는데,
유독 '허한다'와 '금한다'는 그에게 잘어울려서 은근 그런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곤 했었다.
오늘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의 '광야를 달리는 말'이라는 꼭지를 읽다가 그가 생각났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33쪽)나,
"너희는 배산임수를 모르느냐"(40쪽) 따위의 말들에서 그가 빙의한듯 겹쳐졌다.
'광야를 달리는 말'처럼 호방함을 흉내내었지만,
그리하여 쿨한듯 행동했지만 속 마음은 누구보다도 다정다감하였을 듯 하다.
내게 김훈은, 김현과 더불어 깔끔하고 명징하여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의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여우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감정이 넘치지 않고 똑 떨어지는 것이,
큐싸인 나기 바로 전까지 전화통 붙들고 깔깔거리다가 막이 오르면 눈물을 뚝뚝 떨구는 베테랑 연기자처럼,
독자를 자신의 의도대로 몰입하게 만들 수 있는 소설가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완벽하면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그의 산문들 또한 소설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따뜻한 온기를 가진 것이 숨통이 트이게 한다고 해야 할까?
내게만 그런지도 모르겠다.
암튼, 난 그가 아직도 글을 쓸때면 사각사각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쓴다는 것이,
커피는 케냐AA를 즐긴다는 것이, 좋았었다.
내가 결정을 잘 못하는 병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천안 삼거리에 걸린 능수버들처럼 '이것도 흥~, 저것도 흥~' 만사 오케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수더분해서 좋아보이는게 아니라, 줏대가 없어 희미하게 보이기까지 하는걸 보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라면을 끓이며'의 표제글이라 할 수 있는 '라면을 끓이며'를 보면,
깔끔하고 명징하여 군더더기 없는 문장력은 그대로인데 따뜻함이 배어있다.
나는 센불로 3분 이내에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유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붇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ㆍㆍㆍㆍㆍㆍ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안하게 끓는다.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과 같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키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고 환산 터지듯 펄펄 끓어야 면발이 깊이, 또 삽시간에 익는다. 익으면서 망가지지 않는다.(29쪽)
이 책은 그렇게 '라면을 끓이며'로 가볍게 시동을 거는 듯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얘기들이 가득하다.
밥 얘기, 삶 얘기, 목숨 얘기가 나온다.
돈에 관한 얘기도 나온다.
열대밀림 속에서 무위자연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말은 허망해서 그야말로 무위하다.ㆍㆍㆍㆍㆍㆍ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지만 인간은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느낀다. '무위'는 자연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손댈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열대의 밀림은 가르쳐 주었다.(80쪽)
자연을 인간이나 삶의 연장선 상에서 생각했던 내게,
자연과 인간이 친화적인 것이 아니라 적대적이란 얘기는 무척 충격적이었지만,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볼때 '인간을 위한'이나 '인간에게 이로운'이란 자연에 친화적이거나 공생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는 인간 중심의 편협한 사고일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평상시 깨달았던, 글쓰기도 그렇고 독서도 그렇고 경험을 수반해야 의미가 있다고 했던 것과 관련,
나도 그렇지만 김훈 또한 몸을 움직여서 일하는-소위 노동이라고 하는 일들에 익숙하지 않은 타입인 것이 글 곳곳에서 드러나서 겉도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그로 하여금 노동을 숭고하게 보이게 하고 숭배하는 것으로까지 비춰지는데,
노동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게 아니라,
지나친 숭상은 자리매김이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듯 여겨져서 아쉬웠다.
그 노동이라는 것이 과연 지휘자도 없는 오케스트라에 비견 될만한 것인지,
암벽등반가와 선원들의 그것과 소방관들의 소방호스를 연결시켜도 좋은 것인지, 말이다.
그외에도 세월호며 여자가 7까지 번호를 달고 이어지고 손과 발 온통 좋은 글 뿐이다.
일독을 권한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단다.
여기에 내가 한마디 첨언하자면,
내자신의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그리 많이 돌이킬 일도 그리하여 뉘우칠 일도 없지 싶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조금쯤은 슬프고 조금쯤은 누추한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거기다가 때론 케냐AA 커피처럼 씁쓸하고 알싸하기도 하고,
때론 퉁퉁 불은 라면 면발 같이 퍽퍽하기도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