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중에 한명은 책을 고르는 기준이 500쪽 이상의 두꺼운 책이다.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읽다가 재미없으면 책베개로 사용을 하려는 것이라고 혼자 상상을 하고 낄낄거린다.
두꺼운 책을 싫어하는 내 입장에선, 차라리 분권이 낫다.
두꺼운 책들은 대부분 내용이 어렵고 그러다보니 진도가 안나가는데,
그걸 출퇴근할때 들고다니면 어깨나 손목 어디 한군데는 고장나기 십상이다, ㅋ~.
내가 두꺼운 책을 안 좋아한다고 하여, 장편이나 대하 따위를 싫어하느냐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니어주신다.
난 장편과 대하 물을 완전 즐긴다.
무더운 여름 날이나 긴긴 겨울 밤, 이런 책들을 읽으며 지새우는 재미는,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어~♬" 수준이다.
호킹지수라는 것이 있다.
책이 얼마나 재미 있어 술술 읽히는지, 완독률을 알려주는 지수인데,
미국의 수학과 교수가 만든 것이라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스티븐 호킹' 박사에서 따온 것이 맞다.
전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 팔린 저서 <시간의 역사>때문에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것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는데, 호킹지수는 6.6%였다.
100페이지짜리 책이라면 6.6페이지에서 '책베개'가 됐다는 의미이다.
더 심한 책들도 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2.4%, 힐러리 클린턴의 <힘든 선택들>은 1.9%였다.
호킹지수가 높은 책으로 등장한게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인데, 호킹지수가 무려 98.5%란다.
<헝거게임> 43.4%, <위대한 유산> 28.3%과 비교하여 봤을때, 현저히 높다.
그런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를 오늘 알라딘 서재 마실을 다니다가 발견했다.
그동안 이 책의 광고를 보기는 했으나,
<비밀의 계절>을 쓴 그 '도나 타트'와 연관시키지 못했었는데,
오늘 <비밀의 계절>광고를 보다보니까,
그녀라는 게 떠올랐다.
<비밀의 계절>을 읽을 때 느꼈던 것인데,
유려한 수사와 강박적일 정도로 세밀한 설정으로 천재 작가라는 수식이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이번 작품도 기대된다, 이제 발견한게 아쉬울 정도다.
난 <비밀의 계절>을 2008년, 2월에 읽고 8일에 이런 독서 기록을 남겼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한마디로 묘하다.
책의 내용이나 구성 등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지만,
인생에 대한,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에 입이 쩍 벌어지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이윤기 님의 번역이어서 시작한 책인데,
당신은 '번역이 어찌어찌 음역하고 의역했지만 자신이 좀 없었다'라고 역자서문에서 밝히고 계시기도 하지만,
역자가 작가에게 끌려다닌다는 느낌에서 오는 개운하지 못함과,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대학생들의 행태라는 것이 남의 나라 일이고 픽션이니 차치하고 백번양보하자 하여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은 그리스 고전을 배우고 가르치는 여섯 학생과 지도교수 중에서 '3척동자(있는 척, 센척, 쿨한 척)' 리처드가 작중화자로 얘기를 이끌어가는 게 맘에 들지 않았는 지도 모르겠다.
대학도, 과도, 막연한 동경에 의해서 택하게 되고,
그 과에서 거절당하자 그 주위를 맴돌다가,
과의 나머지 구성원들의 눈에 띄어 간택되어지는 소극적인 인물로 나온다.
내가 여기서 '리처드'에게 궁금한 것은,
막연한 동경이었던 과의 다섯 학생과 지도 교수가, 적어도 리처드를 자극하고 깨어있게 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거다.
리처드 본인의 영혼이 어떤 의미로든 깨어있지 못하다면,
이제부터 얘기되어지는 '육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 하나의 죽음과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하지만, 난 이 책의 뒷 표지를 열심히 읽어, '...그리고 두개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터라, 책을 마칠때까지 긴장감은 여전했다.
'리처드'라는 소극적인 작중 화자는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했고,
때문에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노래의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하는 가사처럼,
다섯명에 대한 리처드 자신의 개인적인 호ㆍ불호에 따라 같은 추억을 두고 책임의 경중을 달리 얘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이책은 원제 'The secret history'처럼,
죽음과 누가 왜 죽였는지를 파헤쳐갔다기 보다는...
대학 생활에서 감성과 이성을 어떻게 안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 삶이라는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 수도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아폴론의 이성적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헨리쯤이고,
디오니소스의 광기에 찬 세계, 감성적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헨리쯤 되는 것 같다.
나머지는 감성과 이성을 적절히 더하고 덜어내어 버무려진 인물들인데, 나름 매력적이다.
리처드는 소극적인 인물인 동시에, 부정적인 인물이다.
"...아모르 윈키드 옴니아(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는 말을 상기시키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짧고 서글픈 인생을 통해 내가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옛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이기지는 못한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이기가 쉽다."
라는 구절은 슬프기까지 하다.
물론 리처드의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캐릭터가...범인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들을 친구를 받아들일 수도 그들의 친구로 본인이 흡수되지도 못하여...
이 얘기를 2권씩이나 길게, 까딱하면 책베개가 될 정도의 두께로 끌어 나가는 원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착오인지, 번역상의 오류인지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있다.
기질이나 심술이라고 해 놓고,體液, 脾臟이라는 한자를 사용한 부분이 있다.
양방으로 생각하여도, 한방으로 생각하여도 연관성이 없는 부분이다.
문맥상보자면,
*의학이나 교감신경의 조화에 무지한 사람들 →나에게
*미개인 →주술사에게 그러듯 나에게
*헨리(많이 아파봐서 다른 사람에 비해 나은 편이지만
기질이나 심술에 관한 질문을)→나에게 고통을 호소하고는 한다.
이성과 지성의 상징인 헨리가 무지한 사람인양 질문을 해, 리처드가 놀라기는 했겠지만...'기겁을 하다'라는 표현은 과하고 어색하다.
또 한군데는,
'선의 수련법에 무드라라고 하는 게 있어'라고 하면서 무드라와 면벽을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도, 리처드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동시에...죽은 영혼에 진정한 슬픔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감성을 대변하는 버니가 죽고,
남아있는 인물들 중 (본인은 이성의 편에 서고 싶어했지만),
감성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세수하면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물과 찬물이 뒤섞이는 바람에 울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셈이다. 간헐적으로 북받쳐오르는 흐느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하는 부분에서, 감정적으로 유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동시에,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감성적이었던 리처드는...
버니가 죽고도, 그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구분되어 독립될 수 있었고,
그들의 이성(지성)을 자신의 것에 배가하여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일 테니까 말이다.
"프랜시스를 상대로 하면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깊게 들으면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놀라움, 연민, 당혹감 같은 종류의 반응을 적절하게 보였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그의 질문을 받고 있노라면 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는 부분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잘 들어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짓게 되는 부분이었다.
책 끝부분에,
'아름다운 것에 사랑을 쏟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냐. 그러나 의미있는 것과 맺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피상적인 것이라네.'
하는 부분은 얼마전 '탄허'를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 같다.
책의 많은 내용들 중 저자가 직접 체험하여 자기것화하고, 체화하고 쓴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부분은,
총상의 느낌을 '처음으로 취했을 때의 느낌, 처음으로 여자와 함께 잘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라고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느낌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아서,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면,자기것으로 만들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그리스어 과제가 시간에 쫒기자, 편법을 써 일단 (모국어인)영어로 써놓고 이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방법을 썼다. 그리스어 산문 작법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언어를 숙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어를 이용한 사고법이다.'
라고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 얘기되어지고 있는 '전과목 영어수업논란'과 관련하여 생각이 복잡해지는 데...
이 책의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영어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영어를 이용한 사고법'이 되는 것이다.
영어를 이용한 사고법으로 우리의 이성과 감정을 얼마나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고전과 전통이라는 뿌리는 썪어가고 있는데,그 위에서 영어를 이용한 새로운 사고는 잘 자랄 수 있을까?
암튼, 이 책이 우리에게 무엇을 느끼게 하려고 씌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대학에서 우리는 이성과 감성을 적당히 안배하여 버무려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현실에선 종종 패잔병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헨리의 말처럼,
너무 마음만으로 살아 내 마음으로는 내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서,
자기 손으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것,
이것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했던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