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난 목숨을 걸고 하는 운명적인 사랑이나, 불같은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남편을 만났고,
6년의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 삶이 늘은 아니고 때때로 축복이라고 믿으며 지금까지 무난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난 '운명적인 사랑'이나 '불같은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환상이나 로망 같은 걸 가지고 있었나 보다.
처음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이라는 이 책의 제목만을 보고도 가슴이 설레였으며,
즐겨찾는 이들의 서재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책 소개와 리뷰를 보고서는 홀라당 반해,
당장 밤을 새워 읽을 것처럼, 친구를 졸라서 구해놓고는 여태 '홀라당 발라당~'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운명적인 사랑'이나 '불같은 사랑' 또는 '숨가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운명의 장난'이나 '불장난' 또는 '숨가쁘기만한 열정'이라고 대치했을 때 하등 문제될게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해피엔딩과는 동떨어진 결말로 이어지게 마련인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난 어째서 이들의 숨가쁜 사랑을 마냥 부러워했던 것일까?
그들이 영화같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다가 간것을 부럽다고 하기에는,
스포트라이트는 그들의 사생활마저도 여과없이 비춰냈으며,
심지어 어두운 단면들에 굴곡을 부여하여 심하게 굴절시키기까지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도록 운명지어진 이들이 있다지만,
운명의 신은 참으로 얄궂어 때와 장소 등 그밖의 모든 조건까지 맞춤하게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둘의 경우가 그랬는데,
스물네 살의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40대 중반의 로맹가리야 그렇다고 쳐도,
스물 하나의 진 세버그도 이미 결혼을 한 후라는 것도 그렇다.
내가 진 세버그였다면 로맹가리가 아무리 멋있다고 해도,
중후한 매력을 가진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매력은 사랑이랑은 또 다른 것일 것 같은데 말이다.
백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이 둘의 삶은 어느 누구 하나 일반적이지는 못하다.
스물한 살에 이미 성공과 친근해진 진 세버그도 그렇지만,
유대계에 러시아에서 출생, 프랑스로 이주하는 등의 이력을 가진 로맹 가리가,
사회적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군인, 외교관,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두루 섭렵하는 것도 그렇다.
게다가 로맹가리는 다양한 직업편력만큼이나 여성편력도 구사한다.
진은 연약했다. 가리는 당시 일시적 우울 증세를 보이며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인간 본성에서 비롯한 온갖 일관성 없는 언행에 낙심했다. 그것은 전쟁 때문이었고, 그의 광적인 성생활 때문이었고, 또한 나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진을 길가에 핀 개양귀비처럼 꺾어서 웃옷 주머니에 꽂았을 때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115쪽)
이 책은 문장이 참 좋은데, 그걸 번역하는 과정에선 십분 발휘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수식이 화려하거나 함축적인 문장의 경우,
수사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문장을 이렇게 저렇게 제한하는 정도가 달라지는데 말이다.
문장이 좋다는 건,
로맹 가리가 레슬리와 만나는 과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가리는 레슬리에게서 분신같은 나그네의 영혼을 알아보고 춤이라도 추려는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ㆍㆍㆍㆍㆍㆍ사실 두 사람은 존재와 사물의 영靈을 제 것으로 삼아 변화시키려는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스스로 무대에 올라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바꿔놓으려는 자신들의 욕구에 응하려는 듯 했다.ㆍㆍㆍㆍㆍㆍ레슬리는 그가 그 자신을 알게 하는 데도 분명 기여했다.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명 작용을 통해 그 역시 그녀가 최고의 자기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때로는 한쪽의 자아를, 때로는 상대 쪽의 '나'를 성가셔하며 레슬리와 가리는 미숙하거나 유감스런 행동의 한계를 일러주고 인도해주는 특별한 직감을 갖춘 관계를 유지했다. 은밀한 떨림이 적절한 때에 찰칵 하고 당신을 관용으로, 신중함으로,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관계 말이다.(68~70쪽)
우리는 흔히 같이 살면 닮는다는 말을 한다.
난 이 말을 '좋아하면'이나 '사랑하면'쯤으로 바꾸고 싶은데, '공명작용'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공명 작용'이라는 것이 상호간의 것이어야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것이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때론 '존경한다'는 말로 이 방향성을 일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데,
요즘은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존경이나 사랑은 고사하고 의사 소통도 불가능할테니 말이다.
얼마 전에 존경하는 분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멘.붕.임~--;"
전화가 곤란하여 매번 문자를 보내는 줄 알면서도, 대번에 전화가 걸려 왔다.
"멘홀(이 붕괴되어 속)에 빠졌다구?"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가 8년을 같이 살았고,헤어져서 12년을 그렇게 지냈다고 하더라도...
책에는 숨가쁜 사랑이라고 사랑에 방점을 찍어가며 멋지게 표현하려 노력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비극적 결말은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도 가리도 육욕과 매력을 소유한 존재라는 자신들의 운명을 벗어날 이유가 없었다. 운명이 마술을 부려 사랑의 제1계명, "달려들라. 때가 되면 알게 되리라"를 강력히 부추길 때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누구도 행복을 거슬러 노를 젖지 못하는 법이다.
정신적 품성이 끌림과 유혹의 요인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 품성에 감성과 매력과 아름다움까지 더해진다면 그 힘은 절정에 이른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는 그 모든 걸 팔고 남을 정도로 가졌으니 그들의 결합은 "행복의 비밀은 엉덩이와 마음에 있다."라고 한 자크 프레베르의 생각에 넉넉히 부합할만했다.(108쪽)
책에서는 이들의 헤어짐을 24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빚어내는 신체적 차이쯤으로 언급했는데, 비단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제 두 여자 사이에는 경쟁심까지 끼어들었는데, 그것은 소리 없이 진의 자존심을 긁었고 레슬리의 악의를 부추겼으며 가리를 괴롭혔다. 레슬리에게는 신체적 차원에서 불공정한 싸움이었다면, 진에게는 지적 차원에서 똑같이 불공정한 싸움이었다. 요컨대 서로가 상대편은 가졌거나 숙달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한 것을 질투했다. 특히 진이 괴로워했다. 레슬리는 자신도 많은 연인을 가졌고, 누구보다 일탈적이고 모험적인 여행도 햇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여자로서 자신이 이젠 스무 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였다. 그녀는 젊은 남자가 자기보다 진을 선택한 경우라면 훨씬 관대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늙은 부부의 정원에 웬 지각없는 여자가 끼어들어 논 것이라면 훨씬 관대했을 것이다ㆍㆍㆍㆍㆍㆍ. 하지만 이 미국 여자의 침입은 레슬리에게 '그 자리에서 비켜. 내가 앉을 테야'를 의미했다.(112~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