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전생 체험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였을때,

텔레비젼에 한 여자연예인이 나왔었다.

그녀는 전생에 가난한 집의 사내아이였는데,

구걸을 갔다가 부잣집 딸을 보게 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암튼 전생의 그 사내아이가 죽은 이유가 죽은 이유가 상사병이었는지, 아사(餓死)였는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그 여자연예인의 현재모습은 부잣집 딸의 모습과 꼭 같았단다.

얼마나 그리고 염원하였으면 그렇게 꼭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싶어...꺼이 꺼이 울었었다.

 

'배 부른 돼지보다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둥 육체적ㆍ정신적 경계를 나눠가며 행복해지라고 강요할 만큼,

'행복해지소서~'하는게 어찌보면 괜찮은 덕담처럼 들리는 세상이지만,

고인 물은 썪는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과학이고 철학이고 종교고,

하찮은 장르소설에서조차 행복할때는 아무런 역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불행의 기록이고 소산이다.

 

왜 이런 연결도 안되는 것 같은 엉뚱한 얘길 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너무 행복해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하고 싶은건지,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하고 싶은건지,

내 자신을 나도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오랫만에 빼꼼, 고개를 내민 이유는...

'Y씨의 최후' 라는 너무 너무 근사한 책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책 뒷표지에 '영문학과 소속이지만 물리학심리학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에어리얼 만토.'

그리고 '영리하고, 우아하고, 아찔하고, 그리고 매우 위험한 스릴러'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쉬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레 겂을 먹어 이렇게 근사한 책을 놓치는 것 또한 정말 너무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떠벌인다, ㅋ~.

 

 

 

 

 

 

 

 

 Y씨의 최후
 스칼렛 토마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이 책의 주인공은 에어리얼 만토라는 여자다.

대학교 영문학과 소속이라고 해서 알 수 있듯이,

지적 호기심은 풍부하지만, 육체적ㆍ정신적 경계를 나눌 것도 없이 최저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지도교수가 관심을 갖던 'Y씨의 최후'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고,

그로 인하여 그녀 또한 인생에 최후를 맞게 되는데...

 

 

 

 

 

 

 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타나토노트 2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 열린책들 / 2000년 9월

 

 

옛날에 '타나토 노트'를 읽었을때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때 죽음을 체험하는 게 묘사되는데,

죽음의 세계가 너무 근사하여...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면 누구나 그쪽으로 넘어가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형수 중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을 뽑아,

그중에서도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야 하는 타당한 개연성을 부여했던게 관건이었다.

이 책 'Y씨의 최후'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가 이 책을 너무 너무 근사하다며 침을 튀기는 이유는,

과학, 철학, 심리, 물리, 천문 등...온갖 학문의 여러가지 학설들이 경계도 없는 듯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에드거 앨런 포' 같은 경우 '검은 고양이'를 쓴 작가로만 알고 있었지, 과학적 사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장르소설에선 경험과 실험외에도 과학적 사고 또한 필수불가결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실험과 같이 검증된 방법으로 얻어낸 체계적 지식과학이라고 한단다.

하지만, 과학이라고 하여 논리정연하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유효기간은, 새로운 진리나 법칙이 발견되기 전까지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올레르스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사고실험의 원칙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혹자는 그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족히 몇백 년 앞서 사고실험의 원칙들을 이용하여 대폭발이론을 만들어 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그는 산문시 '유레카'에서 자신의 다양한 과학적, 우주론적 사고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포는 실험적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론들은 사고실험 형태로, 혹은 그가 무한을 묘사하는 방식이라고 했던 '생각에 대한 생각'으로서 발현되었다. 그가 올베르그의 역설을 풀어 낸 방식은 역사상 가장 우아한 사고실험들 가운데 하나이다.ㆍㆍㆍㆍㆍㆍ에드거 앨런 포는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우리의 망원경이 셀 수 없이 많은 방향에서 찾을 수 있는 빈 공간들"에 대한 더 간단하고 개연성 있는 해답은 별들 가운데 일부가 단순히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빛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34~135쪽)

 

삶은 무 자르듯,그렇게 흑백논리로 명확히 잘라낼 수 없는 게 아닐까?

좋고 나쁜 신념이란 것만 해도,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 에 따라 결과는 엄청 달라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글쎄, 그 남자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네는 좋은 사람들에 속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좋은 사람들은 무엇을 대변하지? 자네가 그들과 싸울 예정이라면 왜 그들과 싸우는건지 이해할 필요가 있어."(310쪽)

 

 말을 하는 동안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내가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것뿐이라는 걸 깨닫는 지점까지 간다. 그러나 나는 울 수가 없다. 울면 끝장이다. 아드레날린이 모두 씻겨 나갈 텐데. 아드레날린이야말로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이다.(330쪽)

이 부분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눈물이랑 다른 견해여서 옮겨봤다.

울기까지 감정이 고조되고, 교감신경이 항진되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은 맞지만,

난 울고난 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난 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오히려 개운하고 홀가분함을 느끼는데,

이 책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무기쯤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얘기하면, 이 페이퍼의 제일 처음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가열차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행복에 겨워 우는 사람이 '울면 끝장이다'라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에요. 적어도 잡지에선 나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더군요." 내가 말한다.

 "자기 파괴적이라. 흥미로운 용어네요. 나는 나야말로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좀 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렇죠. 그것이 바로 도(道)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거든요. 자신을 파괴하고 자아를 제거하라."애덤이 말한다.(346쪽)

"나는 내가 신을 잃어버렸고, 그 다음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일반적으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찾고 그리고 신을 찾도록 돕는다는 걸 당신도 알 거예요.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데 성공했죠. 나는 그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욕망을 버리고 자아를 버리는 것에 관해 내가 읽은 모든 책들ㆍㆍㆍㆍㆍㆍ그것은 모두 문자 그대로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었죠. 그 모든 책을 읽었어도, 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종교의 일부분이 아닌 상태에서 종교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고요. 성경은 다른 여느 책들처럼 그저 한 권의 책이 되었어요. 나는 여전히 그것을 읽을 수 잇었고, 이런저런 부분이 의미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고, 이런저런 부분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걸 믿을 수는 없었어요."

 "영혼을 파괴하는 거죠. 자아를 파괴하는 것처럼."

"그래요. 난 진정 무아(無我)의 상태를 경험했어요. 그리고 그건 빌어먹을 만큼 무서웠죠."

"애덤ㆍㆍㆍㆍㆍㆍ."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 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 것.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지옥이에요. 타인은 지옥이라고 누가 말했죠?"

"사르트르요."(348쪽)

게다가,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우리가 흔히 절대적이라고 얘기하는 종교도 결국 입장에 따라 변하더라 하는 걸,

또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얘기하고 있다.

'도(道)를 자신을 파괴하고 자아를 제거하라'라고 해석한 것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모두 쿼크와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면ㆍㆍㆍㆍㆍㆍ."그가 운을 뗀다.

"뭐라고요?"

"우리는 사랑을 나눌 수 있고, 그것은 쿼크와 전자를 서로 비비는 것에 지나지 않겠군요."

"그보단 낫죠.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실제로 '서로 비비지' 않아요. 사실 물질은 다른 물질을 결코 건드리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원자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전자는 다른 전자들을 밀어내면서 원자의 외부에 자리를 잡는다는 걸 명심해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만 동시에 서로를 밀어낼 수 있는 거죠." 내가 말한다.(352쪽)

이 글을 읽으면서, 처음엔 과학자들은(음,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멋대가리 없이 사랑을 표현할까 싶었었다.

하지만, 다른 수식이나 미사여구 없이도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고갱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도(道)를 '자신을 파괴하고 자아를 제거하라'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언어학자들은 좀 나은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언어는 끝없이 어긋나면서 맞물리기도 하는 등,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어쩜 불가능하기 때문에...

표정이나 몸짓, 주변 상황 등을 고려하는 상호적인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의식이 언어와 연결외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을 폈다. 그에 의하면 옹알이 하는 아기, 즉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상징 질서'의 일부가 되는 것(즉 의식적인 세계를 갖는 것)으로의 도약은 정확히 우리가 언어를 획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세서 개별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아니다. (주여, 고맙습니다.)우리는 자아라고 불리는 무언가가 되는데, 자아는 오직 타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 (혹은 적어도 나의 세계는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이다. 그것은 수학처럼 닫힌 체계로,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이 다른 무언가가 아닐 때에만 의미가 있다. 2라는 숫자는 그것이 1이나 3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ㆍㆍㆍㆍㆍㆍ나는 오직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다. 이것은 기의 없는, 오직 기표만 있는 존재의 체계이다. 이 모든 존재의 체계는 마치 자물쇠를 채워놓은 호버크라프트처럼 무(無) 위를 떠다니는 닫힌 체계이다.(466쪽)

그렇다면 언어 외에  표정이나 몸짓, 주변 상황 등에 제약이 따른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할까?

자아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타자에 대한 배려가 우선 시 되는 수밖에 없다.

 

'언어' 만으로 사랑을 할때는,

그래서 '언어'가 서로를 어루만지고, 비비고, 느끼면서 사랑하는,

자아를 드러내고 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감정(emotion)을 그냥 '움직임(motion)'으로 부를 수도 있을걸세. 실제로 감정이란 단어가 단순히 움직임, 혹은 한 가지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동을 의미했다는 걸 나는 기억하네. 언어로 만들어진 이 세계에서는, 의미가 실제로 쓸모없어지는 경우는 결코 없어. 이 경우 움직임은 질량을 가지지 않는 어떤 것, 즉 움직임 그 자체에 관한 것일세. 그래서 그것이 운반하는 의미는 불가해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지. 자네를 거꾸로 이동시킬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도 말이야.ㆍㆍㆍㆍㆍㆍ.(478~479쪽)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과학은 없다
 맹성렬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8월

 

 

이 책에서 나는 현대 주류 과학의 입장에서는 '아웃사이더'나 마찬가지인 UFO와 미스터리 서클, 초능력과 죽음 뒤의 삶을 논할 것이며, 이들의 향후 과학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는 과학은 모두 허구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것은 무조건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며 인류의 사고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두려 하는,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오류를 걷어내자는 것이다.

 

 창조는 파괴를 필요로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최첨단 주류 과학에 갇힌 현대인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넓혀주고 싶다. 주류 과학계가 애써 외면하는 초상현상을 탐구하는 일은 과학의 재도약을 준비하는 첫번째 작업이다. 이 작업은 우리 스스로 머릿속에 그어놓은 상상력의 한계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류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축복된 재능은 빛을 보지 못하고 녹슬어버릴 것이다.(12~13쪽,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과학이라고 하여 논리정연하고 절대불변은 아니라는 거다.

그것들의 유효기간은, 새로운 진리나 법칙이 발견되기 전까지이다.

우리가 절대불변이라고 알고 있는 신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새롭게 유일신이나 절대 종교가 나타나기 전까지로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이런 최근접 체험은 공군 조종사들이나 관제요원들에 의해 비교적 먼 거리에서 목격되는 사례와는 구분되는 현상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책 제목에 '정확히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여러 유사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하는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후 다양하고 면밀한 연구ㆍ조사를 거치면서 그 모든 현상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63쪽)

 

그렇다고 내가 이 글을 이렇게 멋대가리 없게 끝낼까?

절대 그렇지 않지, ㅋ~.

세상에 절대불변한 것이 있긴 하다.

그건 '사랑'이다.

'사랑'이 절대불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눈 멀게 하여 물불 안가리게 되면,

세상은 온통 분홍분홍*^^*하게 변하고,

그땐 절대불변이 되고,

마냥 행복해진다.

 

하지만, 마냥 행복해지는 이 상황을 경계해야 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하는건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다들 각자의 고민으로 이 가을 秋男, 秋女가 되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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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22 17:56   좋아요 0 | URL
물질과 물질은 '서로 건드리거나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에서 밝힌 이야기예요.

따지고 보면, 이 댓글을 쓴다며 자판을 두들긴다 하더라도,
자판과 내 손가락은 '본질로는 서로 스치지도 부딪히지도 않'아요.

어쩌면, 이 댓글에 담기는 제 마음도
어느 곳으로도 안 간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씨앗을 살며시 뿌린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

아이리시스 2012-10-22 18:15   좋아요 0 | URL
다시 봐도 저 세 종류의 책은 양철나무꾼님 아니면 연결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뭐하느라 행복하신지 저도 좀 알려주세요, 책 좀 집어치우게요( '')
청춘을 책과 보내기에는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어제쯤부터 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동안은 아무도 저더러 책을 덮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저는 이 글도 책 덮고 사랑하라는 말로 읽혀요 히히

자주 오세요^-^

프레이야 2012-10-22 22:47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이 있어서 저도 있군요. 동감~
타자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자아를 존중하는 길이군요.
진리! 새삼 이렇게 풀어주시니 참 좋아요.
절대불변은 없는 것 같구요. 마냥 행복해지는 순간을
경계하라. 저에게 내리는 명령ㅋ
자주오세요2.ㅎㅎ

감은빛 2012-10-23 11:18   좋아요 0 | URL
저는 추남입니다. ^^
양철님 글 오랫만에 읽네요.
가을을 맞아 관심있는 소설 몇 권을 주문해서 일터 책상 한쪽 구석에 쌓아놓았는데,
바빠서인지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한번 들춰보지도 못하고 며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온이 갑자기 확 떨어졌어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