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도 다가오고 하여, 못 뵌지 오래된 스승님께 '보고 싶어 죽겠어요.'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산에 가면 들 보고 싶을까요?'하는 답문자를 보내오셨다.
이 분의 언어 유희를 어느 정도 아는지라,
'들에 가면 산이 보고 싶고 말이죠~^^'하고 맞장구를 쳐드렸다.
주말에 홍천의 비발디파크에 다녀왔다.
놀토가 아니어서 아이의 결석문제를 가지고,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헐~(,.) 아이의 담임선생님...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르더라.
대단히 난해하거나 중의적인 내용도 아니고,
'가족 모임이 있어 학교를 결석하겠다'했더니,
'알겠다, 결석시켜라. 진료확인서가 있으면 병결 처리된다'라고 대답하길래 그런 줄 알았었다.
토요일 오전 9시에 전화를 해선 '훌륭한 강사님을 모시고 진로 특강을 하니 꼭 등교를 시켜야 한다.'고 하길래,
'그러냐, 벌써 출발을 했는데...꼭 되돌려야 하냐?'고 했더니,
'알겠다, 좋은 특강인데 아쉽다.'고 하시더라.
그 후로,
'어디냐? 온다는 얘기 아니었냐?'
비슷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이틀에 걸쳐 무려 열 몇통의 전화를 받다보니, 짜증이 났다.
상대가 못알아 듣는 말을 구사한 것도 아니고,
사투리나 외래어를 섞어 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디를 향하여 출발을 했는지까지 명확히 했건만,
제대로 듣지 않아 실수를 하고도...고칠 생각을 안하다니.
나중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눈치없게 못 알아들은게 아닌가...엉뚱한 생각까지 했었다.
어른인 나와도 이런데, 아이들과는 눈높이를 어찌 맞출지 심히 걱정스럽다.
그 와중에 심보선을 읽었다.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뒷표지 발췌
나와 닮았다는 건 적어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경우 어긋나도...짐작하는 동안 즐거우니 그걸로 된거다.
개인적으로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좋아한다.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나 '평범해지는 손' 따위를 좋아한다.
'눈 앞에 없는 사람'이 사랑이나 사랑의 쓸쓸함에 대해 얘기했다면,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허허로움에 대해서 얘기했다 하겠다.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심 보 선 -

1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 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 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쌓이고 녹는다
그뿐이다
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
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오래 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한쪽 눈이 먼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
이쪽으로 뒤뚱대며 다가온다
지저귐, 새의 발랄한 언어가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늘 속에서 맴도는 검은 얼룩이었겠지만
3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가을의 햇빛 속에서
다친 새들과 나와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 숙고할 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고요해진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자살자는
몸을 던지는 순간에 점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직전까지
디디덤 디디덤 엇박자로 명랑하게 뛰었겠지만
그늘 속에 버려진 타인의 물건들
그 흔해빠진 손바닥과 손등들
냉기가 뚜렷이 번져가는 여생을 어색하게 견디고 있다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4
내게 인간과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알려다오
거기 머물며 남아 있는 모든 계절이란 계절을 보낼 테다
그러나 애절하고 애통하고 애틋하여라,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구나
아아, 발밑에 검은 얼룩이 오고야 말았다
햇빛 속에서든 그늘 속에서든
나는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기에
지금으로서는
평범해지는 손
- 심 보 선 -
하얀 손 창백한 손
흐린 초점으로 보면
사라지는 은하계 같은 손이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여자는 소파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다
오랜 윤회 끝에 한 천 년 만에
이 자세를 되찾았다는 듯이 누구에게도
이 자세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손의 주인이 말을 한다 고마워
너를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남자의 손은 여자의 얼굴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연못처럼 고요하다
둘에서 셋 아니면 셋에서 넷이 되었겠지
그 정도겠지
왠지 이 방의 가구들은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하다
부처가 방금 걸어 나간 적멸보궁 같다
이제 당신도 그만 나가보지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는 바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 자세 그대로
소파 위에서 이별을 반가사유하며
영원히 늙어가겠다는 듯이
남자는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사랑을 일용하였으나
생의 터럭 한 올조차 포기한 적 없다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깊이 파인 흉터이듯이
무엇을 쥐었다 베었던가
생각은 안 나지만
손이 아주 아팠던 기억은 있듯이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을 되돌아볼 것이다
숭고한 영감이라 부르든
가혹한 저주라 부르든
사랑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였다
이별하고 나서 남자의 손은 점점 평범해져갔다
환속한 중의 이마가 빛을 잃어가듯이
그리고 정철훈의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읽었다.
이도백하(二道白河)
- 정 철 훈 - 
옛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를 견뎠을까
지금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도 못했을텐데
이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귀밑머리 가늘게 떨리는 세월의 강가에서
돌을 주워 솥단지를 걸고 청솔가지 꺾어 불을 지피며
건너가야 할 강 너머를 바라보던 아득한 시선들
지금도 강가에 가면
그 옛날 불을 지피던 검댕이 돌들이 뒹굴고 있다
가로지른다는 것은 여기서는 안 보이는 틈새를 가까스로 빠져나가는 일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태우는 일
강을 건넌 사람들에게서는 연기 냄새가 난다
태워간다는 거
사랑하는 일이 돌을 주워오고
청솔가지를 꺾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지금도 어두운 주방에 쭈그리고 앉아 사부작사부작
슬픔을 삭이는 소소한 움직임이 강을 건너는 것이다
안으로 삭여 스스로 흐느끼지 않으면 강은 건널 수 없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면
강가에 지핀 장작불은 유난히 거세게 타오르고
뜨거운 바람이 소스라치며 하늘로 빨려올라간다
광주리며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아이들 손목을 잡았다지만 더러는 물에 빠져죽고
더러는 물속을 걸어 건넜던 것이다
아무 소리도 없이 강물만 사부작사부작
파랗게 파란 채 죽은 것들이 강이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칠흙 같은 어둠 속
휘영청 달 하나가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시집<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중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람만이 외로워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구나 하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얘기할 수 없는 것도 슬픔이지만,
아무리 사랑한다 얘기한다 하더라도 얘기가 안 통한다면,
공허한 울림이나 메아리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들어줄 사람을 위해 얘기를 하는거고,
읽어줄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닐까,
그래야 겠다.
내가 해석되고 싶은 대로,
내가 해석되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의 말에, 글에 귀기울이고 집중해야겠다.
다행히도...나는 옛사람이 아니어서,
사랑한다사랑한다 얘기할 수 있으니,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나이를 건너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