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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ㅣ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유치환 님의 '깃발'을 보면,'이렇게도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참 전 읽은<올가의 반어법>을 시작으로<발명마니아>(미식견문록>을 거쳐<문화편력기>까지 4권의 책을 읽은 후 느끼는 건데,나의 마리여사는 '깃발'을 닮았다.
어릴적부터 세상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녀 <문화편력기>란 이렇게 멋진 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지만,난 머릿 속으로 세상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느라 그녀가 잃었을 것들을 셈하기에 바쁘다.
그게'깃발'로 공중에 매달렸기 때문에 우리는 멋지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지만,
난 이시대를 사는 또 한사람의 외로운 영혼을 본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하고 먹먹하기도 하다.
'이곳저곳을 널리 돌아다님.여러가지 경험을 함'이란 '편력'에 맞게 경험시대와 장소를 아우르는 71편의 글들이 소개되는데,
우리의 정서와 비슷한 건 비슷해서 좋았고 새로운 내용들은 색달라서 호기심이 생겼다.
<친척인가 친구인가 이웃인가>에서부터 마리여사만의 독특한 반어법을 읽을 수 있었는데,
한 곳에 정착하는데서 느낄 수 있는 '안락함-안정감'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나 친척 간의 유대관계,친구관계,인간관계 등 그녀가 포기했어야만 하는 것들을 최대한 쿨한 척 얘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으로 창을 내겠소''따뜻한 남쪽에서 살고 싶어요.'해가며 남향을 선호하는데,
일본도 그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반면 유럽에서는 가구가 상하기 쉽기 때문에 남향집을 꺼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집이면 얼마간의 프리미엄도 붙는다고 알고 있다.
집을 부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밥맛들에게 이런 밥맛 발언으로 응수해야겠다.
"전 유럽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요~^^"
'옛이야기에 숨은 교훈'에서는 마리여사 버젼의 새로운 옛이야기들을 만들어냈나 싶기까지 하다.
'인류는 참으로 오랫동안,육체노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식으로 생각해왔다...내리 일만 하는 신데렐라는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고,본래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인 백설공주가 일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사태라는 설정이 그 증거다...그런데 옛이야기에는 다른 메시지도 들어있다.일하지 않고 응석받이로 자란 계모의 친딸들은 제멋대로이고 바보인 데다 정 없고 심술궂고 오만한 데 비해,일하면서 자란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는 상냥하고 슬기로워 모두에게 사랑받는다.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이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인류가 예부터 간파했기 때문은 아닐까.(48~49쪽)'
<요리와 먹이의 경계선>의 내용들은 대부분 '미식 견문록'이란 책으로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한 것은 '플라스틱 그릇에 담기는 순간,어떤 요리든 먹이로 전락한다.','식욕은 먹고 있을 때 생겨난다.'는 문구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심장에 털이 난 이유>란다.
개인적으로 번역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유독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지않는다.'와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그 미묘한 차이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어한다면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은 맞지않는다고 한다.동시통역사의 심장은 뻣뻣한 털로 덮여있다고들 한다.
이걸 전환하여 생각해보면,이 미묘한 차이에 마음 걸려하는 섬세함이 번역을 하는 데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심장에 털난다.'...이부분은 그간 나의 정서상으로는 '양심에 털난다'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일례로 영어로 heart,mind가 우리말로 가볍게 번역하면 '심장'이지만,따져 들어가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고종석'의 <여자들>에'요네하라 마리'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었던 게 떠오른다.
'글은 남고 말은 날아간다'는 속담이 가리키듯,통역사의 노동은 대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그것은 허공으로 사라진다.반면에 번역가의 노동은 기록으로 남는다.기록으로 남지 않는 자신의 노동을 보상하기 위해 요네하라 마리는 문필가가 됐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리여사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이나 감상과는 또 다른 교훈이라고 할까,처세법 한가지를 깨달았는데,어떤 무리에서 왕따를 당했을 때의 대처법이다.
왕따를 당했을때 취할수 있는 방법은 두가진데,
하나는 미운오리새끼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체념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난 원래 백조야' 이러면서 '스스로 따'를 즐기는 게 아닐까 싶다.
마리여사는 후자를 택한 거 같고...
그리하여 그녀의 영혼은 외롭지만 말랑말랑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개와 고양이를 무더기로 키울 수 있었을테고,
하루에 일곱 권씩의 독서를 해치울 수가 있었을 것이며,
생각들을 확장시키고 뻗어 많은 글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고,
발명품들로 형상화 시킬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
이런 교훈은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니,
나머지 책의 내용들이 다른곳에 실렸어도 좋았을 것을 짜집기한듯 가볍고 산만하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좋은 남편을 만나면 남편을 잃었을 때 엄청나게 불행하고,나쁜 남편을 만나면 남편이 없어졌을 때 해방감이 엄청나다.'
'러시아인에게는 자기의 재능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라는 감각이 있는데...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경우...노력해서 몸에 익힌 재능은 자기것이지만,자기 재능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자존심이나 잘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전혀없는 것,그것이 천재라는 겁니다.
같은 구절도 충분히 생각할만한 거리를 제공했다.
옮긴이의 말에 보면,'그녀를 위한 자리는 이땅에 없다...독자들 가슴 속에 그녀를 위한 따뜻한 빈자리가 있기를 빈다'는 구절이 있다.
내게 그녀는 깃발처럼 높이 걸려있지만,늘상 바라보고 되뇔 수 있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