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노승영.박산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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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번역 관련 서적을 읽었지만 이 책은 또 다르게 읽혔다.

그동안의 번역 관련 서적들이 번역의 일반론 내지는 어떻게 하면 번역을 더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 책은 번역가의 일상에서부터 번역과 관련한 에피소드, 번역의 테크닉, 번역가가 되는 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역과 번역가에 대해 궁금한게 있는 사람이 읽어도 좋겠고,

나처럼 번역에 대해 관심은 없지만 박산호 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재밌게 읽힌다.

박산호 님이야 장르소설 분야에서 입지를 굳힌 분이란걸 알겠고,

노승영 님은 과학책을 주로 번역하셨다는데,

안타깝게도 노승영 님이 번역하신 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다만 노승영 님의 번역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과학서나 기술서 내지는 의료관계서 따위를 읽으면서,

번역의 잘ㆍ잘못은 차치하고라도,

용어가 익숙하지 않고 통일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는고로,

노승영 님이 말씀하시는 애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1부 번역이라는 작업부터 시작하여,

2부 생계형 번역가의 하루,

3부 살펴보고, 톺아보고, 따져보기,

4부 번역가의 친구들, 5부 번역가를 꿈꾸는 당신에게,

에 이르기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번역 관계 서적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근래에 읽은 것만 해도 정영목 님, 조영학 님에 이어 세번째인데,

가장 재밌고 가독성도 좋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번역가와 편집자들 입장에선 내가 밥맛이었겠구나 싶다.

그러니까 나는 트집잡기 대장이었다.

책을 읽다가 티끌이라도 발견하면 그게 내게는 들보만한 오류로 여겨졌다.

번역에서는 더 했다.

언어뿐만이 아니라 뉘앙스와 풍습 등 비언어적 요소들까지 '복원'(들어가는 말-'번역은 복원이다)해내는 과정에서 여백이랄까, 공백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간극이 크다 싶으면 불편했다.

 

노승영, 박산호 두 분의 글을 읽고 보니,

어쩔 수 없는 번역 오류들이 있게 마련인것 같고,

언어뿐만이 아니라 뉘앙스와 풍습 등 비언어적 요소들까지 번역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그런 오역들 보다는,

(내로라 하는 번역가들도 오역한 것은 나도 잡아내지 못했을테니까~--;)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간단한 실수에 더 크게 툴툴거렸는지도 모르겠다.

 

노승영 님의 글을 읽다보면 복원이나 이식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말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스미스의 번역을 대략적으로 평가하자면 내용을 크게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원문에 종속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국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영어에 대입하면 흐름이 끊기고 리듬이 어긋나기 마련인데 그녀의 문장은 영어로만 놓고 보아도 짜임새가 훌륭하다. 문학 번역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준은 원작의 '가치'를 얼마나 제대로 번역해내느냐다. 이 점에서 『The vegetarian』은『채식주의자』가 한국어로 거둔 문학적 성취를 영어로 엇비슷하게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스미스는 단순히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영국 문학에 한국 문학을 성공적으로 이식한 것이다.(19쪽)

 

'번역가의 직업병' 꼭지도 재밌게 읽었다.

불면증과 대인기피증은 직업병으로 분류하기도 애매하단다.

쇼핑중독이나 눈이 뻑뻑하고 초점 맞추기가 힘들다('노안'이라고 하지 말란다) 따위가 있지만,

노승영 님이 힘주어 언급하신 직업병으로는 독서불능증이 있다.

근데 이게 무척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번역서들을 보게되면 오타나 오류가 빈번한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대단한 오역이야 전문 번역가들이 모르면 우리는 더 모를 것이니까 논외로 하고 말이다.)

이 문단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번역 강의 때마다 수강생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번역은 실력이 아니라 속력에 따라 보상받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매번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실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번역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131쪽)

 

물론 이해가 되었다고 오타나 오류를 그냥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건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어야 건강한 글도 나온다, 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고,

이건 글을 쓰는 작가나 번역가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런 구절도 재미있었다.

이게 전부다. 번역가의 장비는 소박하다. 컴퓨터는 워드프로세서의 브라우저만 잘 돌아가면 충분하다. 원서와 노트북만 달랑 들고 동네 카페에 가서 작업하는 번역가도 많다. 번역가가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은 머릿속이다. 장비의 효율성은 뇌의 효율성을 따라가지 못한다.(255쪽)

 

이런 부분은 앞의 '데버러 스미스'의 『The vegetarian』과 비교가 되어 좀 씁쓸했던 부분이지만,

'균형감각'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쯤으로 생각해야겠다.

논지를 부각하느라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썼지만 사실 단어는 언어 공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거칠게 말하면 어휘와 문법이야말로 언어의 전부 아니겠는가? 번역가 입장에서 보면 뉘앙스와 문화 등의 비언어적 요소조차 어휘에 녹아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 텍스트를 저 텍스트로 바꾸는 것일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균형 감각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289쪽)

 

'주'에 나오는 도서와 자료, 홈페이지 다 한번쯤 봐두어도 좋을 것 같고,

책 속에 언급되는 책들을 한 반 정도 읽은 것 같은데 뒤에 '도서 목록'으로 따로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다.

여러 모로 책읽기가 힘들었던 요즘 도움도 되고 흥미로웠던 독서였다.

 

개인적으로 존카첸바크의 책들이 좀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완전 좋아하는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인기가 없는 장르이거나 작가인가 보다.

 

책 겉표지의 제목 박스를 보고 테트리스 블록깨기를 연상했다.

번역 뿐만 아니라 삶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고 맞춰 깨나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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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9-05 17:06   좋아요 2 | URL
요즘엔 정영목 선생님 책 등등 번역관련 책들이 많이 눈에 띄네요. 전 이 책은 처음 보는데 당장 읽고 싶어요.
<채식주의자> 언급한 대목도 읽고 싶고, 뇌의 효율성 ㅋㅋㅋㅋ 이 부분도 무척 재미있네요.
양철나무꾼님 따라 읽으려면 한참 바빠야하겠지만(헉헉), 그래도 양철나무꾼님 따라 읽고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8-09-05 17:29   좋아요 1 | URL
저는 박산호 님이 좋아서 이 책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노승영 님의 글들도 다 재밌더라구요~^^

아무래도 눈이 쉬이 피로해서 그렇겠지만, 짧게 끝나서 한꼭지씩 읽을 수 있는 이런 글들이 좋더라구요.

저도 단발머리 님 책들이 다 좋아보이지만,
서두르지는 않고 천천히 따라읽겠습니다~^^

[그장소] 2018-09-07 22:06   좋아요 1 | URL
저는 문학 잡지에서 노승영 님 글을 보고 반했었어요 . 악스트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 아마 김연수 작가 편이었나 그래요 . 문체가 제 취향이라 그랬는지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8-09-10 08:44   좋아요 1 | URL
넵, 이 책만 봐도 노승영 님...반할만한 글을 쓰시더군요.^^
아직 이 분의 문체를 파악할 정도로 글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그장소] 님께서 이렇게 강추하시니 믿고 골라읽을 수 있겠어요~^^

루쉰P 2018-09-08 23:43   좋아요 1 | URL
여전하십니다 그려 껄껄껄 전 시험 떨어져서 낙향해 집에 와 있습니다. 훗.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크흑...눈물이 멈추지 않지만...뭐 어쨌든 ㅎ
잘 지내시죠? 죄송합니다. 자주 오지 못해서...

2018-09-10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8-09-13 13:34   좋아요 2 | URL
번역가들 책이 요즘 참 많긴 하네요. 저는 늘 그냥 지나쳤지만 나무꾼님 후기를 보면 또 궁금증이 동합니다.
노승영 님은 이러저러 번역 관련 발언들도 많고 해서 글은 자주 봤던 것 같아요.
꼼꼼하고 논리적이고 대충 물러서지 않는 느낌.
이런 류의 책중에 가장 재미있었다하시나 또.... 읽게 될 것 같아요. 흐흐.

양철나무꾼 2018-09-13 16:28   좋아요 1 | URL
제가 좋아하는 번역가들이 몇 분 계신데,
그중 한분은 은퇴하신듯 하고,
(손주 볼 동화책 쓰시고 동화책 번역하시는 듯)
나머지 분들은 제가 좋아하는 것처럼 다른 분들도 좋아하시는지,
이렇게 책들로 만나보게 되네요.
이 책도 좋았지만, 조영학 님도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두권 모두 강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