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19
이규희 지음 / 네버엔딩스토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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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이 떨어져 쌓이고 또 한 알이 떨어져 쌓이면 시간도 따라서 흘러간다.

똑딱. 1초는 별 것 아닌 시간인 것 같지만 그 1초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다.

교통사고가 날 뻔한 아이를 끌어안고 반대편으로 구르는 데 걸리는 시간.

단거리 달리기에서 1등과 2등을 판가름하는 시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시간.

미소를 짓는데 걸리는 시간.

'고마워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행복해요' 라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시간.

가슴 아픈 사람을 꼭 끌어안아줄 수 있는 시간......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자면 한이 없지만 이런 모든 일들을 다  꿰뚫는 건

그 1초 사이에 무언가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의 문턱을 넘고, 누군가는 행복해지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변화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앉아 아무도 그냥 보내지 않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도 은비를 만나 짧은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참, 그런데요 할머니, 그렇게 멀리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한 게 할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셨어요? 고향에도 안 가고 엄마랑 동생들도 안 만나고.

난 할머니처럼 살지 않을래요. 이젠 그날 밤 일 따윈 다 잊을 거예요.

아직 이렇게 어린데 꽃도 못 피우고 시들시들 말라가면 억울하잖아요.

전 누구보다 예쁜 꽃으로 피어날 거라고요!

 

늦은 밤에 찰흙을 사갖고 돌아오다가 수상한 사람에게 잡혀갈 뻔 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은비. 

꽃을 보면 꽃다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좋다고 꽃을 자식처럼 키우던 할머니가

정신을 놓고 요양소로 가신 뒤 화분을 몽땅 집으로 갖고 온 은비는

할머니를 대하듯 화분들을 돌보면서 이렇게 자신의 상처도 치유한다.

아래쪽에 꽉 차 있던 모래가 뒤집으면 다시 스르륵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처럼

시간을 거슬러 은비가 할머니가 된 것 같은 그 사건을 겪으며

할머니와 은비가 어느새 같은 걸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은비는 누구보다 할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나둘 떠나가면 우린 결국 모래알이 다 빠져나간 빈 모래시계가 되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모두 다 잊히고 말 텐데. 아무도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를 텐데.

 

함께 활동하던 위안부 할머니가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걱정을 하시던 황금주 할머니.

용산참사는 그걸 겪은 사람들이 이고 갈 문제가 되고, 이산가족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된 것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도 그들과 그들을 도와주는 몇 몇 사람들만의 문제가 될 것이 염려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은비 엄마처럼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들과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라는 방관자들 속에 나도 넣어야겠지만

몇 알 남지 않은 모래가 다 빠져 빈 모래시계가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남아 흘러내리는 모래가 있을 때, 

몽땅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더불어 내 일이 아니면 신경쓰지 않는 어른들에게도 각성의 의미가 있다. 

 

덜 아문 상처를 그대로 덮어두기만 해서는 낫지 않는다.

다시 건드려 고름을 뽑아내고 적절한 치료를 해야 한다.

그 치료의 첫 걸음이 관심이라는 것을 이 책은 다시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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