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숨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책제목 : 국수

◎ 지은이 : 김숨

◎ 펴낸곳 : 창비

◎ 2022년 1월 21일 개정판 1쇄, 243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 수록작품 : < 그 밤의 경숙>, <국수>, <옥천 가는 날>,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막차>, <구덩이>

김숨은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된 인물, 이한열. 그가 남긴 운동화- 망가져서 가루가 되다시피 한- 복원에 관한 기록이었던 <L의 운동화>로 처음 만났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복원이라는 구역으로 끌고가는 솜씨가 하도 탁월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책이 두 번째.

어젯밤 9시가 넘어서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잠들기 전까지 이 책을 다 읽고, 읽고나서 그 밤에 읽은 걸 후회했다. 마치 '희망따위는 노래하지 않겠다. 이런 아픔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만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색으로 치면 검은 색, 매혹적인 검은 색이 아니라 생명이 다 꺼진 검은 색이다. 어두워서 숨이 막힌다.

<그 밤의 경숙>

'실내등을 밝히지 않아 그녀와 아이들은 먹지 위에 눌러쓴 글씨처럼 흐릿했다.' (8쪽)

늦은 밤 언니네 집들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재빨리 출발해버린 택시로 인해 퀵 기사와 부딪힐 뻔하자 경숙의 남편은 차에서 내려 그와 욕설로 대응한다. 경숙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울분을 거기에 쏟아붓는 것 같은 남편은 이미 이성상실. 경숙은 퀵기사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자신이 근무하는 콜센터에서의 일들이 마구 떠올라 횡설수설. 돌아간 듯 싶었던 퀵기사가 다시 돌아와 창에 침을 뱉고 남편은 그를 치고 달아난다. 커튼 가게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정말 사람이었을까? 그녀의 죄책감이었을까?

<국수>

엄마가 집을 나가버린 뒤 아빠가 맞아들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앉았다가 반죽을 하고 국수를 만들어 주인공과 동생들에게 준다. 아무런 간을 하지 않은 국수.

'반죽에 매달려 있으려니 속절없이 나이가 들어버린 심정입니다. 반죽에 밀가루를 솔솔 뿌려가면서 밀개로 밀 즈음에는 당신만큼 맥없이 늙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49쪽)

임신이 안 되어 인공수정을 시도하고 있던 주인공은 병원에 가야할 날에 갑자기 그녀를 찾아 내려간다. 그리고 찬장에서 밀가루를 찾아 그녀가 했던 것처럼 국수를 만들어 혀에 암이 생겨 아무 것도 넘기지 못하는 그녀에게 줄 참이다. 이야기는 국수를 만드는 과정과 그녀가 주인공의 삶에 들어온 과정들, 그리고 임신을 하지 못하는 그것이 친 엄마도 아닌 그녀 탓이라고 하는 주인공은 그녀에게 말을 하듯.

'당신이 양푼 속에 소금물을 부어가며 치대고 치댄 것, 그것은 어쩌면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시간이 아니었을까요.'(54쪽)

세상 좋아하는 국수가 이렇게 맛없게 보이기도 처음이다. 아무런 간을 하지 않은 채 조선간장, 들기름, 쪽파, 고춧가루, 물엿 등을 넣어 양념장을 넣는 국수는 별로 좋아한 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늘 제대로 간이 된 국수를 끓여줬으므로. 입안에 넣으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밀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숨막힘이 지배한다.

<옥천 가는 날>

연휴가 낀 토요일 오후 옥천으로 내려가는 자매들과 어머니. 일언반구도 없는 아흔둘의 어머니도 그렇지만 자매들도 서로의 얼굴을 보려하지 않는다. 밀리는 차 안, 두서없이 옛날 이야기들과 고달픈 삶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마침내 도착한 옥천의 한 장례식장. 구급차에서 내리는 자매들은 죽은 어머니를 모시고 그렇게도 가고 싶어하던 옥천에 당도한 것이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하루종일 오리뼈를 고아서 그 국물을 맛나게 들이켜는 시아버지. 그 냄새가 죽도록 싫은 임신한 며느리. 전기문을 필사하고 산책을 나갔다가 온갖 고물을 들고와 자신의 방에 두는 시아버지. 잉크제조회사 영업사원인 남편은 아버지가 살던 빌라를 처분한 돈으로 펀드에 투자한뒤 거의 날려버렸기에 할 수 없이 같이 살게 된 것. 노인은 그중 4천만원만 주면 자신이 나가겠노라고 한 뒤부터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다. 어느 날 저녁 노인은 산책을 나가다말고 며느리에게 302호집 새댁에게 돈 삼십만원을 빌려주었는데 오늘 준다 했으니 네가 받으라며 나간 후 소식이 없다. 남편도 들어오지 않고 며느리는 오리뼈만 남도록 바싹 졸여서 노인이 한 국자도 못 마시게 만들고는 노인을 찾아 나선다. 302호에는 여자가 살지 않는다.

<막차>

며느리가 암으로 죽을 것 같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올라가는 막차 안. 대꾸하지 않는 남편을 상대로 줄곧 말을 거는 아내. 딱히 뭔가 할 일을 하지 않는 남편 대신 미장원을 해서 살림을 꾸려온 아내는 피곤하고 힘들다는 푸념이 그치지 않는다. 어쩌다 나란히 달리게 된 다른 고속버스에 사람이 하나도 안 탄 게 너무 신기했던 그녀가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자 여태 대꾸없던 남편이 누군가 탔다고 한다. 돌아보니 남편의 얼굴이 비칠 뿐이다. 휴게소에 잠시 정차했다 올라탄 버스에 남편이 없다. 운전사는 아내 혼자 탄 게 아니었냐고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찾겠다고 기다려달라고 내린다. 그때 아까 봤던 고속버스에 남편과 닮은 사람이 하나 타서 유유히 떠난다. 그 사람은 진짜 남편이었을까, 그녀는 운전사 말대로 혼자 탄 걸까?

<구덩이>

구제역으로 돼지를 살처분하는 구덩이를 파는 일에 동원된 주인공.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구덩이는 더디 파지고 때맞춰 배는 아파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함께 일을 하는 남씨는 아내가 암이라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주인공은 아들이 어릴 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떠났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한다. 엄마와 이혼하라고 종용하는 중이다. 돼지를 몰살시켜야 하는 농장에는 노인말고도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는 아들과 임신한 외국인 며느리가 있다. 그 아들은 주인공이 돼지를 모두 죽인다고 믿고 그를 죽이려고 망치로 머리를 때리지만 그는 수건으로 대충 막은 뒤 일을 마친다. 구덩이는 남씨의 아내 암으로 이어진다. 암이 너무 퍼져서 그냥 덮었다는 그 말은 구덩이에 돼지를 묻고 그냥 덮었다는 말과 오버랩되고 구덩이 속에 들어가 죽이라고 소리치던 노인과도 겹친다. 다 죽인 것과 다름없다. 자신의 아들 재구가 되어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며 주인공인 나는 그저 피만 줄줄 흘리고 있다.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작가의 특기인가보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쫓아가질 못하고 몇 걸음이나 뒤쳐져서 왔던 길을 한참 뚫어지게 노려봐야했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힘든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측은하지만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하겠다. 그 손을 잡으면 나도 그들의 삶에 물들 것만 같아서, 피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