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 - 먼 곳에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흔적들
청민 지음, Peter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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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여행에세이다. 여행에세이는 언제 읽어도 좋다. 다만 그 감정이 코로나19 전과 지금이 매우 달라졌다. 코로나19 전에는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오! 여기 찜콩. 여기도 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읽었더랬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의 생활방식이 싸그리 바뀌어버리고, 여행도 쉽게 갈수 없게 됨으로써 나에게 여행에세이는, 조금이나마 여행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대체제가 되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이번 책 『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다만 이 책에선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 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나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같은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 이야기가 왕왕 나오고, 그 이야기속에서 아주 진하게 가족에 대한 애정이 풍겨나오기 때문이다. 조금은 부러울 정도로.



저자의 가족애는 이 책의 구성에서 나타난다. 보통 글과 사진작가가 다를경우 친구나 동업자(?)인 경우를 자주 보았는데, 이 에세이의 사진작가는 저자의 부친이었다. 정말 에세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는 가족과 여행을 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함을 느끼는지 느껴진다. 정말... 책을 읽으면 저자의 가족에 단 한번도 신경을 쓴 적이 없었는데, 이 책만큼은 저자의 가족들이 너무 궁금해졌다. 가족간의 사랑이 어느정도가 되어야, 좋은 장소를 보면 가족과 함께 가고 싶고, 아버지가 자신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어머니가 주식으로 쌀이 아닌 파스타를 줘도 오히려 이해하며 맛있게 먹고, 남매간에 이렇게 화목할 수 있을까?



나도 저자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더랬다. 대부분이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여행이 많았지만, 언제나 어딜 가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가 당연하게 운전대를 잡았고, 엄마가 지갑을 챙기고, 나는 여행코스를 짰다. 물론 이 가족여행에는 언제나 동생은 없었다. 



동생, 그러니까 엄마아들이 내 여행계획에 없는게 아주 당연했다. 말이 동생이지, 뭐 나에게는 그저 혈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어려서부터도 그렇게 우애가 좋지 않았고, 둘이 성향차이도 너무컸고, 서로를 이해못했다. 심지어 엄마아들은 내 인생에 수차례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그 과정에는 아마 내 엄마아빠의 양육방식이 문제였을거다. 엄마아빠 눈에 나는 고작 한살 어린 남동생을 챙겨야하는 장녀였으니까. 그러니까 80-90년대 가정에서는 흔히 보였던, 장녀-남동생 양육방식이었다. 아마 지금 오은영박사님이 보면 솔루션을 받아야 할 가족이었을지도. 



그래서 그런가, 나에겐 ‘동생’이라는 존재가 딱히 없었다. 엄마아빠야, 내 엄마아빠니까 사랑하지만, 글쎄. 저자처럼 저렇게까지 애틋하고 살갑고, 좋은 걸 보면 생각날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여도, 성장과정에서 나도모르게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좋은 걸 보면 생각나고, 보여주고 싶은건, 혈연이 아니지만 나에겐 정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는 우리 신랑뿐. 아! 몇달 뒤에 태어날 내 새끼까지 포함해서!



아, 뒤늦은 깨달음! 생각해보니 저자와 나는 그저 ‘가족’의 범주가 다를뿐, 그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같은 결이다. 난 결혼 후 신랑와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다. 항상 좋은 걸 같이보고,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서로 사진찍어주는 거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하고! 이렇게 보니 저자의 가족애가 이해된다.




 


 



여행하면서 알게 됐다.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수 있으려면 돈이 든다는 사실을. 입장료를 지불하고 여행 경비를 내고, 시간과 돈을 쓰면서 말이다. 지금껏 나의 취향을 지켜준 얼굴들이 스쳐 갔다. 어릴 적 고모가 우리에게 사줬던 해리포터 책값, 거기에 함께 읽으면 좋을거라며 넣어준 초등생 필독서들. 그리고 같이 먹으라고 사준 간식들까지. 그때는 어려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돌아보면 전부 지켜진 마음이었던 거다. 당시 고모가 어린 조카들에게 준 책은 그냥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세상에는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런 세계도 있어’라고 말하며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끔 해준 선택권이었다. p 024



와, 계속해서 놀란다. 나에게 고모라는 존재는 선물을 줬다가, 자기 자녀 태어났다고 빼앗간 존재일뿐이었는데. 그때 내 동심은 바사삭이었는데. 하하.



여튼!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려면 돈이 든다는 사실은 어렸던 나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내 취향들을 보면, 돈도 오지게 많이 들었더랬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만, 책을 사기엔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론 턱없이 부족하고, 그러다보니 대여점에서 빌려 읽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심지어 대여료도 역시나 돈이 나가기에, 그 돈을 벌려고 얼마나 우유배달을 했던가^_T(울 엄마님은 나에게 용돈을 주는게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시급을 주었음..)



그렇게 열씸히 돈 모아서 책 빌려읽기! 그러다 머리통이 좀 커지니 내 시급도 올라가서, 받는 돈도 많아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책 사들이기! 하필 이렇게 머리통이 커졌을 땐, 만화책에 빠져있을 때라 만화책을 그렇게 사모았다. 그것도 원서로. 나름대로 일본어를 혼자 깨우쳤고, 그러다보니 원서를 읽기 시작하고. 근데 또 원서를 사면 국내판보다 금액이 비싸서, 또 돈이 쭉쭉쭉......T_T.... 거기다 장난감까지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돈을 버는 족족 내가 좋아하는 걸 위해 써버렸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려면, 그만큼 금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걸 너무 어렸을때 깨달은 불쌍한 나.



근데 또 아이러니한게, 내가 좋아해서 내 돈써서 샀던 것들을, 흥미가 떨어져서 되파니까 세상에 이게 또 돈이 되네? 그 어린나이에 제태크를 시작했고, 그렇게 내 돈 써서 산걸, 다시 되팔아서 돈을 조금 더 벌고, 또 그 돈으로 그때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는 무한 반복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다 커서도 이러고 있다는 것...ㅋㅋㅋㅋ



다만 과거에는 유형의 것들을 좋아해서 되팔면 돈이 되었지만, 지금은 여행같은 무형의 것 들을 더 좋아하게 되버려서....재테크가 잘 안된다. 하...




 


여름밤의 남산,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삐걱거리던 그에게 우리 좀 설렁설렁 살자던 나.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너무 주먹 꽉 쥐고 살지 말자며, 어린 동생을 챙겨야 하는 맏이말고 그냥 너답게만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이었는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의 끄덕임은 용기였을지도 모르겠다. p 078



몽골로 떠나게 된 데에는 오래된 친구의 채근도 있었지만, 나때문이기도 했다. 초여름이었던 그 무렵, 나는 한 사람과의 권태로운 관계를 정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만 생각했던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마음이 끝나버린 것과 별개로 지난 기억을 충분히 애도해야 했으니까. 잔잔하게 남은 감정은 치우려고 하면 할 수록 마음에 잔열을 남겼다. 그래서 떠나자는 친구의 말에 기대 도망치듯 몽골로 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p 082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내던져서, 지금껏 마주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시련(?)들과 마주하면서 머리속이 복잡할때가 참 많았다. 그럴 땐 여행이 참 좋은 것 같다. 그것도 오랜 친구와 훌쩍 떠나는 여행은, 가족과 떠나는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나 역시도 힘들었던 사회초년생시절 어느때였나, 내 오랜 친구와 훌쩍 여행을 떠난적이 있었다. 한번은 당일치기 군산으로, 또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아! 여행은 아니지만 정말 현실도피를 하고 싶어서, 고등학생 때 이 친구를 무작정 끌고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창덕궁이었나 ㅋㅋ)으로 향했던 적도 있었다. 답답한 수험생활을 벗어나고자 했던 그때였는데, 왜 하필 도피처로 나는 궁을 선택했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이 외에도 공연보러가자고 이 친구를 끌고가고, 어디 가자고 또 끌고가고. 정말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때마다 여기저기 많이도 끌고다닌 것 같다.



결혼 후에는 내 오랜 친구와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수험생 시절 훌쩍 궁으로 떠났던(?) 그때처럼, 매년 여름 차를 끌고나와서 서해바다를 보러가곤했다. 정확히는 오이도를 지나, 서해바다를 품은 시화나래휴게소를. 요 몇년 간은 코로나때문에, 서로 안전상(?) 비대면으로만 연락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가끔 서로 줄거 있으면, 마스크쓰고 문앞에서 주고 쿨하게 헤어진다.



분명 이 친구와 나는 성향이 꽤나 다른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맞는 건..... 전생에 부부였나 ㅋㅋㅋㅋㅋ




 


여행의 끝은 언제나 조용하다. 분명 어제까진 낯선 나라의 골목을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담요를 둘러 덮고 있다. 승객들 모두가 잠들어 조용한데,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여행의 꼬리가 소란스러운 꿈처럼 사부작사부작 밟힌다. 내일부턴 원래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겠지. p 094



여행의 끝자락에 <ONCE>를 다시 꺼내는 건 반복되는 나의 여행들이 이 영화와 닮은 것 같아서다. 떠나고 싶어 근질근질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시끄러운 이벤트는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현실로 돌아가는 사랑과 닮은 것 같아서.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두고 왔던 삶을 이어갈 내일의 나와 닮았다. p 095


아, 여행의 끝. 여행의 끝은 정말 싫다. 여행의 시작과 여행의 끝은 그 방식이 언제나 같다. 예컨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면 시작과 끝도 비행기, 국내여행이라면 시작과 끝은 자동차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쩜 여행의 시작과 끝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나 다른지.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설렌다. 내가 있던 현실과는 다른 이세계로 향하는 느낌이랄까? 반면에 여행의 끝은 정반대다. 계속 이세계에 있고싶은데, 목덜미를 잡혀서 어쩔수 엎이 현실로 끌려오는 느낌. 진짜 딱 그런 느낌이다. 내가 몇일간 낯선곳을 걸어다니며 여행을 했던 기억들은 꼭 꿈인 것마냥, 그렇게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여행의 끝. 



하지만 여행의 끝이 안좋은 것만은 아닌것이, 여행의 끌을 지남으로써 나에게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꿈꾸게 한다. 팍팍한 현실을 살려면, 언제든 여행이라는 쉴틈이 있어야하니 말이다^_T..




 


여행만 끝나면 여행을 마쳤을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낸다. 처음엔 그저 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뭔가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는 걸 모으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을 수집하자는 아이디어가 번뜩였고, 나의 엽서 여행은 시작됐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상점에 들려 엽서와 국제우표를 사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p 148



때로 여행은 물건으로 기억된다.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기억하고 싶다는 핑계로 값을 지불하는 느낌이지만, 물건이 지닌 깊이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니까. 처음에야 여행지에서 데려왔다는 낯선 신기함에 매일 들여다보지만, 삶은 언제나 정신없이 빠르고 여행의 기억은 바쁜 일상에 쉽게 잊힌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잊고 지냈던 여행의 물건이 다시 보인다. 아! 여기 있었구나. 그제야 정신없이 흘러가던 하루를 멈춰 세운다. 이거 거기서 샀었지. 맞아 나 그곳도 갔었지, 한 호흡을 쉬게된달까. p 164


나는 여행을 기념할만한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마그네틱, 팜플릿, 입장권 밖에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마그네틱을 사고, 팜플릿이랑 입장권은 티켓북에 정리하는걸로 내 여행을 기록하곤 했다. 그런데! 엽서라니!!!!!!!!!!! 와, 나는 왜 저자처럼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엽서와 국제우표를 사서,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내는 것. 여행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과거의 내가 보낸 여행엽서를 받을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여행은 끝났지만, 다시금 여행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것만 같다. 하, 이런 좋은 방법을 진작에 알았다면 해외여행, 국내여행 가는 족족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냈을텐데. 그러고 어느 날 그 엽서를 받으면 괜시리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서 기뻤을거고, 다시없을 여행 기념품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을텐데T_T 역시 여행 고수들은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도 남다르다. 이런건 기억해놨다가 잘 써먹어야지!



아... 여행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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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오늘의 독서태교★는 외국인이 바라본 1904년도의 대한제국의 모습이 담긴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거다」 라는 책이다. 예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구입하고는 방치해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다는건 안비밀! 그도 그럴것이... 조선후기-특히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책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해도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놈들의 행태에 분노만 차오르는지라, 읽으려고 해도 섣불리 손이 안간게 사실이다. 자기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들춰보는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피하고 외면할수록, 역사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일본놈들과 다를바가 없으니!



서애 류성룡의 말처럼 ‘잘못된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훗날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아무리 어두운 자국의 역사라도 꼭 읽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의 저자 아손 그렙스트는 스웨덴 사람이자 기자이다. 그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하지만 아손은 도쿄에서 본인이 원할만큼의 취재를 할 수 가 없었다. 왜? 러일전쟁의 무대는 러시아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학교 근현대시간에 배웠듯 러일전쟁은 조선 땅이 주 무대였다.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인데, 전쟁터는 조선 땅이라는 아이러니(자매품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청일전쟁도 조선 땅에서 일어남). 



이게 도쿄에 가있는 아손이 러일전쟁에 대해 제대로된 취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손은 실제 전투가 벌어지던 지역, 그러니까 조선으로 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기자들에게 전시여권을 발행해주지 않았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방도가 없었다. 바로 그 때!!!!! 일본으로 파견을 온 스웨덴인 장교가 나타났다. 그는 아손에게 조선으로 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기자라는 신분은 잊어버리시고 보통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역상으로 위장하는 것이지요. 개항지에 있는 사업 동료들을 찾아간다고 하세요. 요코하마의 수입상에게서 상품의 견본을 구하고 낯가죽을 두껍게 해두세요. 나가사키를 지나 부산, 제물포로 가세요. 거기에서 수도 서울은 바로 코앞입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문화 민족들 중 하나를 대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수도 중 하나와 접할 수 있을겁니다. 일본에 합병되기 바로 전의 코레아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전쟁 후 코레아의 운명은 일본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p 022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오기 위해 아손은 외국인이라는 본인의 국적을 무기삼아, 신분을 기자가 아닌 ‘상인’으로 위장하였고, 그렇게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아손.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부산은 생각보다 더 낙후되어있었다. 정확히는 조선인이 사는 촌락들이 말이다. 반면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부산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시를 하나둘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사람 살기 좋은 땅은 일본인들이 빼앗아가고, 조선인들은 낙후된 지역으로 몰렸던 것이다.


부산에서 받은 코레아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거리는 좁고 불결했으며, 가옥은 낮고 볼품이 없었다. 일본에서처럼 상점이나 눈길을 끄는 오래된 절도 없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겼으며, 문밖에는 집에서 버린 쓰레기가 쌓여 있고, 털이 길고 측은한 모습의 개들이 쓰레기 주위에 모여 먹을만 한 것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하수도가 있는데, 끈적끈적한 바닥에서 온갖 종류의 오물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는 머리가 더펄더펄한 애들이 놀고 있었는데 어제 그제 세수한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p 033



조선 땅을 하나둘 차지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속내는 스웨덴 사람인 아손의 눈에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코레아의 해변 촌락을 가로질러서 인력거꾼은 길이 더 넓고 비교적 깨끗한 시가지로 방향을 돌렸다. 생활력이 강한 일본 종족의 제국주의 근성은 코레아인들의 멸망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들이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은 코레아인들의 개혁된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것이었다. p 034



만약 조선후기 양반네들이 자신들의 탐욕에 빠지지 않고,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점차 근대화를 해나갔다면 어땠을까? 분명 조선에는 일본놈들이 근대개혁을 했던 시기보다 더 빠르게, 몇 차례나 근대화 및 개혁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오는 족족 차버린건 조선정부와 사대부라 불리는 양반네들, 그러니까 조선의 위정자들이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정신머리가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일본놈들이 저렇게 쉽게 조선 땅에 발을 디딜 수는 없었을텐데. 이게 내가 조선후기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분노하는 이유다.





조선땅에 들어온 아손은 조선의 사회상을 사진으로 정말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사진은 그가 쓴 조선 풍물지,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가히 놀라울만하다. 이렇게나 많은 조선말기의 사진이 남아있다니! 


코레아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따. 똑바로 치켜올린 얼굴은 거침이 없이 당당하였따. 걸음걸이는 힘차 보였으며 의식적으로 점잔을 빼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몸놀림은 일본인의 특징인 벌벌 기는 비굴함과 과장된 예의 차리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p 032



코레아의 고유화폐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노임이 매우 싸고 빈곤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인지, 코레아 화폐 단위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액의 동전 종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100캐쉬에 해당하는 1냥은 스웨덴 돈으로 환산하면 10외레가 된다. 1냥은 10전, 1전은 10푼, 마지막으로 1푼은 다시 10의로 나누어진다. 만약 10크로나에 해당하는 노잣돈을 소액권으로 휴대하려면 1만 캐쉬의 동전을 준비해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동전을 100개 단위로 매듭을 지어 실에 꿴 다음 가지고 다녀야 하니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겠는가! p 075



더 놀라운 사실은 아손이 경부선 철도의 첫번째 승객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침략정책, 그러니까 우리나라 물자를 일본으로 보다 빠르게 옮기기 위한 일환으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 말이다. 그 철도에서 아손은 일본인 대위와 만났고, 한양으로 오는 내내 그와 많은 대화를 하였다.



“코레아의 선비는 어떤 까다로운 사람의 눈에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그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옷을 자기 손으로 입어서는 안 되며 담뱃불도 스스로 켜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이는 말안장에 제 힘으로 오르는 법이 아니고, 또 다루기 힘든 조랑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하더라도 누가 와서 그를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는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비는 사사로운 장사에 관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장사가 바로 노동인즉, 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예절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고 모든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의식적으로 속이려 들지는 않지만 허무맹랑한 이론으로 결론을 맺는 논법은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출된 결론이 옳은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래도 양반들은 기죽는 일이 없지요. 만약 사람들이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다른 논리로 반박을 한다면 그는 예를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고, 미심쩍어 하는 사람을 석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설득시켰따고 스스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p 056



우리는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토의를 했는데, 코레아인들이 일본인들을 왜 눈엣가시처럼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 원인 중 코레아 내의 모든 비경작지와 모든 국내 자원을 일본인들이 유용할 수 있따는 일본 당국의 발표가 제일 컸다. 코레아 사람들은 땅에 대한 애착심이 무엇보다도 강하다. 농업은 생명의 원천이라 만약 농사가 다른 민족의 손에 의해 행해진다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종말이 다가온다는 증거였다. 일시적 점령이라는 게 결국 강탈로 끝날 것이고, 보호를 받는다는 처지에서 대일본제국에 합병이 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p 081



일본인 대위의 말에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그가 하는 말이 대부분이 사실이라 반박불가하다는게 슬플따름이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 답게, 선비들은 죽은 자의 말이나 되뇌이며,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몰락한 양반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대게 몰락한 양반이라할지라도, 양반놈들은 앉아서 글자만 읽을뿐이며, 그 양반들의 부인이 삯바느질등의 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니까. 뿐만인가? 이놈의 양반들은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송시열^^). 정신승리는 또 얼마나 잘하나. 겉으로는 청나라에 조아리면서, 뒤로는 명나라를 계승했다며 몰래몰래 제사를 지내는 꼴이라니(역시나 송시.ㅇ...). 



일본놈들은 이런 조선의 양반네들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혼마 규스케가 쓴 「조선잡기」만 읽어도, 일본놈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기전에 얼마나 철저하게 조선의 문화와 생활습관 등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국에서는 근대화 개혁을 차근차근 시행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조선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시간에 일본놈들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수단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던거다.





 


 



한양에 도착한 아손은 통역꾼인 윤산갈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내 꽁무니를 바싹 쫓는 윤산갈을 대동하고 코레아의 이 신기한 수도에서 나는 첫 번째 산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엠버얼리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거리는 사람은 전혀 없었으나 길 찾기가 쉽지 않았따. 꽤 넓은 몇 개의 거리들이 시내를 관통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완전한 미로를 방불케 했다. 큰길의 대부분이 최소한 60미터 이상의 폭을 가지고 있었고,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그 폭이 원래 6미터가 안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의 한 가운데로는 하수도 역할을 하는 도랑이 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 주위로 점점 작은 건물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급기야 짐을 실은 두 마리의 소과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p 096



서울의 광채가 다른 지방을 절대적으로 압도하고, 모든 코레아 사람이 꼭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서울 내에서만 궁과 임금의 눈길을 끄는 것이 용이하고 또 눈길을 끌게 됨으로써 공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또한 공직자의 신분으로서만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획득할 수 있다. (……) 지방의 백성들은 과세 부담이 큰 반면, 서울 사람들은 완전한 세금 면제를 받는다. 서울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조합을 형성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있지만, 지방은 직인제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각각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관의 권력 남용이나 일반사람들의 사기에 대처할 방도가 없다. p 107


역시 예나 지금이나 수도는 수도인가보다. 심지어 저때는 서울 살면 세금이 완전 면제라니. 이러니 사람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들어가려하지!!




 



아손은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조선의 여성’에 대한 내용에 할애했다. 그도 그럴것이 스웨덴을 비롯한 서양에선 조선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미 두세기나 앞선 18세기 프랑스 여성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뭐, 동서양의 막론하고 여성의 인권이 한참 뒤쳐져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나 달랐다. 



조선 못지않게 오랫동안 왕정이 이어진 서양권에서는 여성이 한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왕의 정부로 권력을 잡고 있던 경우도 많았다. 일반 백성조차도 여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저 참정권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달랐다. 한 왕조가 무너질때마다 혹은 왕이 무능할때마다 그 곁에 있는 여자를 탓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나마 천년전에 있었던 신라의 여성군주들을 보며,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은 그릇된 주자학에 매몰되어,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오롯이 대를 잇는 도구였고, 정쟁의 도구였으며, 언제든지 쉽게 버릴 수 있는 ‘패’였다.



1592년 일본의 히데요시가 코레아를 침략했을 때 수많은 남자들이 목숨을 잃어 조정에서는 모든 남자 노비를 노비의 신분에서 면제시켜주고, 그 이후로는 단지 여자만 노비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제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남자는 노비로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여자는 아직도 많은 수가 노비의 신분에 얽매여 있다. 대개의 경우 여자 노비는 남자 친척의 죄에 대한 대가로 자청해서 노비가 되었거나 노비 신분을 상속받은 사람들이다. p 164



노비가 되는 네 번째 경우로, 한 여자가 너무 가난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할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잘사는 이웃을 찾아가 집과 옷, 연료,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을 노비로 제공한다. 이상한 것은 자유의사에 의해 노비가 된 여자들의 지위는 일반노비들보다 한층 낮다는 것이다. 일반 노비들은 돈으로 자신의 자유를 다시 살 수 있는 반면에 자유의사로 노비가 된 여자들은 이럴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p 165



코레아 여성들에게 지워지는 가장 큰 의무는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최대의 염원이며, 항상 여자 측에 책임이 돌아가게 마련인 자식 없는 결혼 생활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딸들을 매우 일찍 시집보낸다. p 178



학교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코레아 여성의 교육은 기껏해야 가사를 돌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층 계급 여서으이 대부분은 한글에 숙달해있으며, 그 중 소수는 수박 겉핥기식이기는 하지만 한문도 깨친다. 중산 계급의 여자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예외적인 일에 속하고, 비천한 계급의 여성들 중에서 다만 점쟁이나 무기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다. p 184



나는 결혼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코레아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에 대해 취하는 공경스러운 태도를 두 눈으로 목격한 후, 여성이 어릴 적을 빼놓고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찌 않고 낮은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인 전의 여자들은 누구누구의 딸이라든지 누구누구의 누이라고 일컬어진다. 혼인한 후에는 친정 사람들은 그녀가 시집간 도시의 구역 명이나 마을 또는 동네 이름을 따서 그녀를 호칭하고, 그녀의 시부모는 그녀가 혼인 전에 살았던 곳의 이름으로 며느리 이름을 대신하여 부른다. p 187



아손이 이렇게 조선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많은 글을 쓴건,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그 어떤 조선의 전통보다도 조선의 여성들의 모습이 실로  ‘문화충격’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스웨덴에서 자신의 아내나 딸, 누이,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호칭한다고 상상해보라! 스웨덴 여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따. 그녀들은 단지 불평과 불만에 차 있으며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고 있다. p 188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위인들 중에서 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그 여성 위인들 중에서 그녀들의 당호가 아닌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되는가? 



자,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시대가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들은 많다. 물론 옛날에 비하면 정말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네 엄마들을 보자. 우리 엄마들은 본인의 이름은 잊힌채, 아직까지도 ‘ㅇㅇ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번엔 조선 왕실이다. 아손은 독일인 의사인 분쉬박사를 만났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분쉬 박사가 갑작스레 앓아누운 태자비(순명효황후 민씨)를 진찰하려 하였으나, 조선정부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분쉬박사의 진찰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픈여자라도 외간남자와 얼굴을 맞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조선의 관습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분쉬박사는 태자비의 진찰을 거부당하고, 대신 조선의 남성 의원이 태자비를 진찰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태자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코레아에서 가장 의술이 좋다는 남자 의원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 의원은 환자가 누워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대신 벽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아 진찰을 해야했습니다. 가는 비단 줄을 환자의 손목 주위에 바짝 감아 벽 사이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의원의 손에 전달되었고, 이런 식으로 그 의원은 진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의원은 조그마한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태자비의 아픈 배를 진단할 수 있었는데, 의원의 손이 태자비의 배에 직접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겹의 비단 헝겊과 그 위에 또 솜으로 누빈 일곱 겹의 두꺼운 이불을 태자비의 배위에 얹혔습니다. 결국 이 남자 의원은 자신의 동료 여 의원들이 내린 결론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악귀가 태자비의 배를 처소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속에서 악귀가 빠르게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른 손을 써서 악귀를 몰아내지 않으면 수습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섞인 진단이었습니다. 의원은 그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성문 중 한 문짝에서 빼온 나무로 탕약을 끓이도록 처방을 내렸는데, 아침마다 환자가 이 탕약 한 그릇을 마시면 나을것이라고 했지요.” p 199



아무리 조선의 왕실 의원이라도 남성은 남성. 당연히 제대로 된 진찰은 하지 못했고, 심지어 진찰뒤 병명이라는게 ‘악귀’에 쓰여있다는 것이다.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이 ‘악귀’라니. 심지어 처방전이 성문의 문짝을 탕약으로 끓여서 마시게 하라니. 이건 뭐 건강한 사람도 죽어나겠다. 결국 태자비는 죽었다.


황족일 경우 그 시신은 깨끗히 씻기고 수의가 입혀진 다음 적어도 다섯달 동안은 서늘한 방에 보관된다. 그동안에 장례식에 드는 비용에 충당할 목적으로 온 나라에 걸쳐 돈이 모금되는데, 대게 스웨덴 돈으로 200~300만 크로나는 족히 된다. 동시에 수천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장례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제작하고,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파견된다. p 202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든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 내 두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p 210



태자비가 죽었으니, 당연히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오죽하면 아손은 그 광경을 수차례 사진으로 담았고,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거라고 했을까. 물론 일반적인 왕정시대였다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동원에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어야할 시대니까. 하지만 태자비 장례식이 거행된 날은 다름아닌 1905년 초이다. 



대한제국의 왕실의 위험을 세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을 갈아넣어 태자비 장례식을 거행한 같은 해 11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아손이 본 태자, 그러니까 순종은 참으로 못생겼었나보다. 아니 근데 지금의 내가 봐도 못생기긴했다. 고종도 뭐. 분명 조선 초기만해도 세자가 잘생겼니, 왕이 잘생겼니 하는 말들이 실록에 꽤 남아있었는데. 언제부터 조선 왕실의 외모 유전자가 후퇴했나. 역시 완전한 방계로 틀어버린 선조때부터였을까, 으흠. 아님 또 다른 방계로 틀었던 철종때였을까. 참 아이러니하다.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보였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 통역관이, 나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장군의 신분으로서 코레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했다. 대답하기가 꽤 난처한 질문이었따. 불현듯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생각나서, 코레아 군대의 질서 정연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주신 지고한 황제 폐하이자 코레아 군대의 대원수를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잊을 수 없을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외교적인 답변이 황제의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p 219



고종과 대면한 아손을 보면, 고종의 답정너 성격이 아주 제대로 나타난다(반대로 아손의 처세술도ㄷㄷ). 그러니 자기 부친이 하려던 개혁마저 다 뒤로 엎어버렸겠지. 저러니 민비와 손붙잡고 무당말에 휘둘리며, 척족들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줬겠지. 다시한번 느끼지만 고종은 오롯이 자기의 권력과 무사안위만 중요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종이 자신의 무사안위에 급급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의 백성들-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나태한-은 그동안 속수무책인 채 손만 벌리고 서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황제와 황태자를 1년씩이나 가두어두다시피 했을 때도 나서서 멍에를 벗기기는 커녕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못한 가련한 백성이었다. 이런방식으로 왜국(난쟁이족)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조선 안에서는 이제 사실상 왜족이 군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의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방법은 조선 민족의 수천 년 전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하게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p 255



전통적으로 문자는 양반네들의 전유물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글공부를 할 수 없었다. 배움이 무기인데, 나라에서 나서서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기를 들 수가 없었다. 뿐만이랴? 양반네들의 세금탈취에 허리 필 세도 없이 일만해야했던 그들이었다. 그런 백성들이 작정하고 들어온 일본인을 상대할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만약 이 십자가들이 보존될 수만 있다면, 이것들은 일본인들이 코레아를 강점한 동안에 저지른 가장 악랄한 행위에 대한 경종이 될것입니다. 바로 이 하얀 십자가가 서있는 곳은 세 명의 코레아 농부들이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데 대한 항거의 뜻으로 최근에 완성된 철로를 부수려다가 발각되어 무참히 총살을 당한 장소이지요. 이 십자가 세 개에 몸이 묶인 세 명의 불쌍한 ‘죄수’들이 여기에 서 있었고. 땅이 울퉁불퉁한 저쪽에 일본 군인들과 그들의 지휘관이 정렬해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발사 명령이 떨어졌고 군인들은 57발의 총탄을 날렸습니다. 코레아인들은 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지요. 또한 시체를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시체는 이곳에 엿새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매장하기 위해 시체를 옮길 때는 독수리와 육식 조류들이 얼굴을 파먹어 신분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서서 이 비극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코레아에서 본 일본인의 인상은 일본에서 받은 그들의 인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물의 외면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p 267



정말 충격적인건, 이 책에 일본인이 조선의 백성들을 총살하는 사진이 무려 4컷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가련한 조선의 백성들, 왜 일본인에게 총살을 당했어야했나? 그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일본인들이 강제로 조선 땅을 빼앗아가서, 항의하고 싶어도 항의할 방법이 없어서 철로를 부수려고 했는데 일본인에 발각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그들을 사로잡아서 십자가 기둥에 묶고, 57발의 총탄을 달렸다. 3명을 죽이는데 57발의 총탄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총으로 난사를 했다.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갈동안, 조선의 위정자라는 것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휴....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가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암울한 역사 속에서 ‘리더’로 뽑으면 안될 사람들을 가릴 수 있는 눈은 나름대로 생겼다고 자부하는데 말이다. 매번 우리나라의 리더가 될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 왜 뽑으면 안될 사람만 수두룩한지. 대선 이후 다음 5년도 우리나라는 왠지 암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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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22-02-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놀랍네요. 예전에 일본이 조선을 연구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조선을 은근히 칭찬하더군요.. 아마 자기들끼리는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욕하고. . 하지만 당시 양반 문화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네요. 꼭 읽어 보겠습니다. 일단 제 페이퍼에 남아 두겠습니다.

피로 2022-02-19 09:26   좋아요 0 | URL
왕조시대에는 귀족문화와 같은 양반문화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세계가 발달하면서.... 변해가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선말 양반문화가 더더욱 공고해졌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ㅠㅠ...
 
가끔 집은 내가 되고 - 나를 숨 쉬게 하는 집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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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조금 특이하다.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세이인데, 이게 마냥 흔히 볼수 있는 에세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독특하다고 해야하나? 대부분의 에세이가, 저자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힐링을 주거나 위로를 주는 경우가 태반이다. 정확히는 본인이 좌절했던 경험을 극복하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다르다. 엄밀히 따지면, ‘공간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아님 ‘내 집 마련일기’? 라고 해야하려나. 그러니까, 이 책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젊은이들의 꿈!인 내집마련 고군분투기 인 것이다. 




저자는 원룸부터 시작해서 전세를 전전하며, 내집이면서 내집아닌 남의집살이의 설움을 느꼈다. 분명 내 집인데 집 꾸미는 것 하나 쉽게 할 수 없음에 슬퍼했다. 내 집을 내가 원하는대로 꾸미는 방법은 단 하나, 내 명의로 집을 사는 것. 그렇게 저자는 본인의 소비습관을 바꾸고,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모두가 원하는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물론 비싼 땅에 지어진, 비싼 집은 아니다. 도심 한켠에 있는 구축, 작은 아파트. 하지만 저자는 그 곳에서 본인만의 공간을 꾸려나간다. 



사계절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나무가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고 꽃이 되었다가 낙엽이 지고 결국 앙상한 가지만 남는 모습은 계절의 변화를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집에 옹래 머물며 차분히 공간을 관찰하면 굳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실내애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창문 앞이 뻥 뚫린 새 집에 살면서 계절에 따라 해의 위치가 바뀌고, 실내에 드는 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시간이 몹시 흥미로웠다. p 065



과거에, 그러니까 내 집이 아닌 엄마집에서 살았을 땐, 집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1도 해본적이 없다. 일단 창 밖을 내다보면 옆 동의 아파트가 보였고, 아래는 차가 쌩쌩다니는 도로였다. 따라서 계절감이 느껴질만한 그 무엇이 1도 없었다. 물론 아파트 단지내에 심겨있는 나무들이 보이긴 했지만, 당시의 나에겐 나무가 관심사가 아니기도 했고. 뭐, 언제나 방에 틀여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했으니 계절감이라곤 1도 느끼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결혼 후 온전한 내 집에서 살고 보니, 집에서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던 내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별로 햇볕이 들어오는 시간이 달랐다. 뿐만인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우리집 뒷산도 여러 색깔의 옷을 입은 것마냥 패션쇼를 해댔다. 집안에만 있어도 온전히 계절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겨울엔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소한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고, 여름엔 여름느낌나는 인테리어를 하게 된건 덤이다.



생각해보면 엄마집에서도 조금만 관심을 두었다면, 계절감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을텐데 말이다. 이런 차이는 아마도...내집이냐 아니냐에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또래와 비교해 독립을 일찍 했고, 모든 걸 부모님 도움 없이 스스로 해왔기 때문에 자취 생활에서만큼은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을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방이 없는 것과 있는 건 엄청난 차이였다. 각 방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부터 정해야 했고, 원룸에 오래 거주했기에 가구가 워낙 단출해 새집에 맞춰 새로운 가구를 들여야했다. p 076



온전한 내 집을 갖게 되면, 집에 대한 애정도가 달라진다. 내 집에 대한 애정이 높아지니, 당연히 내 집을 어떻게 꾸밀지도 신경쓰게 된다. 여기는 이런 가구를 놓고, 저기는 저런 가구를 놓고, 이쪽에는 화분을 놓고, 저쪽에는 책을 꽂고 등등등. 엄마집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던 나만의 인테리어가, 내 집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걸 샀다는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기본 인테리어가 괜찮은 널찍한 집에 살게 되니 좁은 집에 끼어 살 때보다 인테리어에 대한 욕망이 더욱 커졌다. 지난날엔 일정 수준 이상은 아예 포기하고 지냈다면, 이 집에서는 어딘가 아주 조금만 바꾸면 훨씬 나아질 것 같은데 집주인이 아니라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답답했다. 나의 갈중을 해결해줄 방법은 가구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사고 싶었으나 사지 못했었던 브랜드의 가구를 사거나 한 번도 놓아보지 않았던 유형의 가구를 두며 집을 꾸며나갔다. p 078



결혼 후 난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서 신혼집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 유년시절에 살던 구축 아파트를, 엄마에게 제값주고(^^...1원 한푼까지 다 받아가는 우리 엄마..) 그대로 사서 가지고 있다가, 결혼 후에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갔다는 뭐 그런 이야기? 솔직히 그 집은 너무 오래된 집이다보니, 신혼집으로 살기엔 문제점이 많긴 많았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이 담겨있던 집이었기에, 남들에겐 불편한점도 나에겐 너무 익숙했던지라 사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



다만... 워낙 오래된 집이다보니,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흔히 나오는 ‘재건축’ 이라는 문제로...... 내 집임에도 마음껏 꾸밀 수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T_T. 언제 부실지 모르니 가구도 당연히 사지 않았다. 인테리어? 역시나 하지 않았다. 정말 이 집을 오늘 부실지, 내일 부실지 모르는 시한부였기에, 가전이나 가구를 섣불리 살 수가 없었다. 결국 신랑이 자취할때 쓰던 소규모 가전제품들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고, 덕분에 우리 신혼집엔 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다. 이거 참.. 좋은건지 나쁜건지^_T...



대출조차 끼어있지 않았던, 오로지 내가 열씸히 내돈 모아 마련한 100% 내 집이었는데, 내 마음대로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집 살돈 모으는 건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재건축’ 그 한 단어 때문에 의도치 않는 내 집마련 저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건축을 하게되면 추가금이 나오는건 당연지사니 말이다. 그뿐만인가? ‘재건축’을 위해 내 집을 부시게 되면, 나는 그 동안 다른 집에 들어가 있어야하니 그에 대한 비용도 당연히 필요해진다. 



동경하는 게 생기니 욕심이 생겼고, 욕심은 목표가 되었다.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저지를 용기가 생겼다. 살아지는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지만, 주체적으로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하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보니 목표는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목표를 만들고 그걸 달성하는 데서 보람을 얻고, 한 단계씩 성장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나는 전셋집을 얻는 과정에서 커다란 목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돈을 쓴는 방법도 바뀌었다. 커다른 목표들을 위해. p 085



그렇게 내 첫집은 ‘재건축’을 이유로 부셔졌고, 나는 급하게 아주 자그만 신축빌라에 전세로 들어갔다. 어차피 2년 지나면 재건축 아파트가 지어질거라 생각했으니, 전세를 구하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않았었다. 하지만 소오름돋게도,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재건축이라는게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게 아닌데, 중간중간에 문제가 엄청 생기는지라, 2년안에 끝날 수 있는게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난 그 2년안에 재건축이 끝날거라 믿고, 별 생각없이 눈에 보이는 전세집을 들어간거다. 후..... 



결과론적으로 내 첫집 재건축은 중간에 사건사고가 많아서,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전세로 들어간 신축빌라는 하 ㅋㅋㅋㅋ 왜 빌라살면 안된다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재건축은 세월아 네월아, 전세로 살고있는 신축빌라는 진짜 개쓸...ㄹ.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서, 여기저기 청약을 많이 시도했다. 내 자신이 또 대견한게, 내 청약통장은 무려 중딩때(^^)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통장이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서도 꾸준히 청약통장에 돈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학생때는 달달이 2~3만원 입금이 고작이었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알바를 시작하면서 월 정기 입금금액을 10만원으로 올렸다. 취업이후로는 중간중간에 더 많은 돈을 입금할 때도 있었다. 거기다 이와 별개로 적금도 참 열씸히 들었던 내 자신 칭찬해!



어느새 내 청약통장에 있는 돈은 N천만원. 거기다 무수히 많은 청약 도전 끝에 하나 성공! 그 집이 지금 사는 집이다. 뭐, 이 집도 말이 많긴 오지게 많다. 분명 대규모 단지의 아파트였고, 건설사 브랜드만 보고 ‘개이득!!!’ 이었는데, 알고보니 도시 재개발 조합이 시행하는 곳이었다. 하. 내 첫집 재건축으로 조합에 이가갈렸던 난데, 청약 당첨된 아파트도 조합아파트였다니. 근데 이 사실을 입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후 난 정말 건설사 브랜드가 좋아도, 조합 아파트는 절대 입주하지 말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다는건 안비밀. 왜냐고? 대다수의 조합아파트는 조합에서 남겨먹는게 많아서, 아파트 건축에 사용하는 자재가 구려진다. 뿐만아니라 조합장이 과하게 해쳐먹어서, 조합장만 수시로 변경되거나, 공사가 연기되는 등 정말 좋은게 하나도 없다. 재건축 조합과, 재개발 조합을 연달아 겪은 내 경험이랄까.



내가 지금 사는 집은 완공된지 2년되었는데, 곳곳에 부실시공으로 문제가 많고, 심지어 아직까지 등기가 안났다. 분명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이랄까? 헌데 대부분의 조합아파트가 부실시공과 등기지연 문제를 가지고 있다(그땐 몰랐지...T_T). 



재건축 중인 내 첫집은, 내가 세 번째 집에 들어오는 동안도 무기한 연기되고 건설사 바뀌고 등등 여러 사건사고등으로 n년이 지나서야, 건물이 올라갔고, 올해 중으로 준공예정이다.



내 첫집과 지금 사는 집 사이에 낑겨살던 신축빌라 전세집은 ㅋㅋㅋㅋㅋ 역시 빌라는 살게 못된다.


 



 



뭐, 지금 집까지 오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찌저찌 난 내 집에서 살고 있다. 물론 내 첫집과 다르게 지금 집은 대다수가 은행지분(^^..)이지만 뭐, 대출도 자산이라니까?! 그려러니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집’이라는 것. 내 첫집과는 달리 부서질 걱정도 없기에,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데로 인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집 거실에는 소파도 TV도 없다. 소파가 있을 법한 자리에는 검은색 철제 다리를 가진 라운지 체어 두 개가 있고, 반대편 벽면은 빔을 쏘기 위해 아무것도 없이 비워놓았다. 여태 자취를 하면서 한 번도 소파와 TV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갑자기 그러면 소파와 TV를 사야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TV를 보지 않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눕다시피 편하게 기대거나 아예 노워 있는 건 소파보다 침대가 훨씬 편했다. p 131


내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한건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광파오븐을 사는 것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는 신랑이 자취하면서 쓰던 아주 작디 작은 저려미 친구들인데다가, 너무 오래사용해서 거의 혹사(?)시키는 기분까지 들게했던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을 보내고 새 친구들을 만나는데 얼마나 기쁘던지T_T!!! 특히 건조기, 와 건조기는 신세계였다.



가구는...... 남들 다 하는 소파를, 나는 사지 않았다. 나는 본투비 눕눕에 익숙한 사람이라, 소파를 사봤자 결국 바닥에 누워있을게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소파를 둘 자리에 책장을 두자(!) 라는 마음에, 거실 양쪽 벽면에 책장을 설치했다. 완벽한 거실의 서재화랄까. 여기서 함정은 우리집에 있는 제일 작은방에도 2개의 벽면에 책장을 설치해버렸다는 것. 우리집은... 서재가...두곳이나 된다ㅋㅋㅋㅋㅋ



이 외에도 사지 않은 것들이 꽤 된다. 정말 혹사시킨 것 같아서 보내준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혹사중이기 때문에! 고로 난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들어간 돈이라곤 위 가전 4종, 거실과 작은방 벽면 붙박이 책장 설치정도? 세상 많은 시간을 들인건 명실공히 붙박이 책장이다. 내 책들이 오래오래 꽂혀있는 공간이니까! 후후후.




 



새 집에 입주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나? 내 심신에 문제가 심각해졌을 무렵, 난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당시엔 식물의 ‘ㅅ’짜도 몰랐지만, 초록색을 보며 힐링하겠다는 생각으로 식물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 엄청난 식물공부가 시작되었다.



환기가 어렵고 베란다가 없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오랜 시간 다짐했다. 언젠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 꼭 식물들을 집안에 두겠다고. 가구도 다 들어오지 않은 집에 나는 식물부터 들였다. p 150



일주일에 한 번 식물들을 베란다로 옮겨 물을 줬고, 햇빛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분갈이를 위해 배양토를 몇 킬로그램이나 구입했고, 액체  비료나 흙에 섞는 영양제도 샀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은 서툴다는 것을 무섭게 증명하듯 입주 한 달이 지났을 때쯤부터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p 153



생각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식물이 자라는 건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방법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반응이 느려 인내가 필요했다. p 154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식물관련 책은 1도 안읽었었는데, 식물을 키우다보니 식물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집에 맞는 식물이 어떤 식물인지도 하나둘 깨우쳤고, 내 식물들이 왜 죽어가는지도 알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물키우기 2년차. 이제 나에게 분갈이는 껌이고, 비료주는 것도 껌이고, 식물 번식도 나름대로 자신있다. 그럼에도 간혹 죽이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집에 식물이 있으면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조금 더 책임감이 생기고, 조금 더 환기와 채광에 신경을 쓰게 되고, 조금 더 행복해진다. p 155



문제는.. 식물을 키우면서 채광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을 거실 창가에서 키우다보니, 거실 창 커테은 언제나 묶여있다. 식물을 키우기 전에는, 거실에 있는 내 책들 색 바랠까봐 언제나 커튼을 쳐놨었는데. 결국 난 식물을 얻고 책의 색바램을 지키지 못했다. 흑흑흑.



그리고 깨달았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는 책을 두면, 책이 상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우리집에선 책과 식물을 분리할 공간이 없다는 더 슬픈 사실을T_T.



결국... 이사가 답인건가....하..



내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가꾼 집, 깨끗하고 쾌적한 집, 애정이 담긴 집에 사는 사람은 당연한 수순으로 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농도가 짙어지고 집에 머물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안도감과 편안함 같은 감정들이 차오른다. p 182



지금까지 여러 집에 살면서 확실히 알게 된건, 내 집, 내 공간에 대한 내 애정이 나를 바꾼다는 사실이다. 나는 옛날부터 자타공인 집순이였다. 다만 과거엔 그저 나가기 귀찮아서 집순이였다면, 지금은 아니다. 지급은 내 집이 너무 좋아서 나가기가 싫다. 집안에만 있어도 놀거리가 넘처나고, 볼거리가 넘처나고, 무엇보다 가만히만 있어도 편안한 이 공간을 두고 밖에 나갈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누군가는 집안에만 있는 게으른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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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님의 파란만장만 집 장만기에서 결론은 조합아파트 가지마라네요 ㅎㅎ 피로님의 힘듦이 느껴지는데 읽는 저는 넘 재미있었어요 ㅎㅎ

피로 2022-02-07 13:34   좋아요 1 | URL
헛, 맞아요 ㅋㅋㅋ 결국 결론은 조합아파트는 절대 안된다!! 라는 점이죠..ㅎㅎ
 
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몇년간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틴어수업」의 속편이 나왔다. 「라틴어수업」이 저자가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면, 이번에 발간된 「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신학교를 다녔던 저자가, 종교에 대한 생각을 엮은 책이다. 정확히는 종교를 포함했지만, 그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과거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난 종교를 따지자면 무신론자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지않고, 무속에서 말하는 귀신도 믿지 않는다. 뭐, 하지만 관심사가 관심사인지라 소름돋게도 난 국내 무속신앙 책도 읽었고, 전 세계의 신화와 관련된 책도 거진 다 섭렵했다. 물론 너무 잡다하게 읽어서 그런지 머리속에 남는 건 없지만. 즉, 나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믿지않고, 믿을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학문으로써 혹은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함으로써의 종교는 공부하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 신학교를 다닌 본인이 깨우친 종교,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 종교를 믿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쓴다고 했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써는 약간의 물음표가 떠다니거나, 이 책을 덮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자의 전작인 「라틴어수업」을 읽어보았고, 물론 저 한권뿐이지만 저자가 어떤식으로 글을 쓰는지를 아주 대충은 느낄 수 있었고, 적어도 내가 혐오하는 방식의 종교를 옹호하는 글은 없을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 추측은 맞았다. 이 책은 전작처럼 인문학책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 모습을 이해하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이정표를 제시해주니 말이다.


최근 우연히 <나의 아저씨>라는 TV 드라마를 알게 됐습니다. 꽤 많은 사람이 드라마 속 40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보며, 자기 주위에 ‘저런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지는 않아서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삶에서 보고 배울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요. p 026



나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누군가를, 이 혼란한 삶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생각의 어른’을 바란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생각의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인간의 성장에 비유한다면,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어가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p 028


아, 슬프게도 나 역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 주위에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뿐만아니라, 나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하던 그들 역시 진정한 ‘어른’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 주변에는 진정한 ‘어른’이 없다. 물론 나 포함해서 말이다.



그저 미성년이 아닌 나이이며,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나이, 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있을 뿐, 딱 거기까지다. 그러니까 다들 몸만 크고 나이만 먹었을 뿐, 생각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근데 이게 내 세대만 그러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회사 동료들을 보자. 내 또래도 있으나, 나보다 한참 윗 세대, 심지어 정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세대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진정한 ‘어른’은 없다. 다들 남탓하기 바쁘고, 남의 공은 자기 껏으로 가로채기 바쁜 사람들 뿐이다. 그럼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라고,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은 없다. 서로 비방하고 헐뜯기 바쁘고, 국민을 위한다는 쇼맨십만 보이니 말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더더욱 진정한 ‘어른’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나 역시도 왜 내 주변엔 ‘어른’이 없는 건지 슬퍼했으니 말이다.



헌데,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 ​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완전 정곡. 나는 진짜 ‘어른’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내 스스로 그런 어른이 될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내 뒷 세대들도 이런 나를 보며, 진정한 어른이 없다는 사실에 한탄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세게 와닿았다. 어차피 내 윗세대에게 진정한 ‘어른’을 바라는건,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는 변화를 싫어하는 그들에게는 무리한 일이며,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내 스스로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 내 뒷 세대들만이라도 지금 내가 겪는 이 일들을 겪지 않게끔 하는 것.





어떤 시대든 장점과 단점이 공존합니다. 어느 시대라고 특별히 거룩하거나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다른 문제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는 지나간 역사나 인류 문명의 자산에 쌓인 데이터를 통해 통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역사는 똑같지는 않아도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참조할 만한 가장 좋은 예가 되어주지요. 그것이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일 겁니다. p 100



내가 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과거보다 더 나은 오늘, 내일로 향하기 위해. 단지 그 하나뿐이다. 그렇다고 역사에 기록된 모든 시대가 전부 잘났느냐? 그건 아니다. 일단 지금인 민주공화정시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왕조시대였다. 철저한 신분사회였고, 신분간의 계층이동은 불가했다. 뭐 오늘날에도 보이지 않는 신분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할말 없지만, 적어도 왕조시대였던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살기 좋아진게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수 많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대게 반복되었다. 분명 시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거의 비슷했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에 살고 있던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 귀하신 양반네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그놈의 양반운운하며, 어떻게든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픈 역사가 반복대는 와중에 무언가를 깨우쳤던 한 양반, 류성룡. 그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징비록’을 집필했다. 대부분의 아픈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권력층들의 부패와 무능, 외교에 대한 무지였으니, 앞으로의 역사에서는 이런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징비’하라는 의미로 책을 집필한것이다. 하지만 이런 ‘징비록’ 조차도 부패와 무능에 찌든 권력층에게는 하등 소용이 없었다. 이후로도 아픈역사는 반복되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민주공화정 시대인 지금은 어떠한가? 이 땅에서 한국전쟁 이후로 서로의 목숨을 죽고죽이는 ‘전쟁’은 사라졌으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외교, 정치, 사회, 경제 아주 전반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 피해는 역시나 국민들에게 가중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고 있기에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한다. 왕조시대에는 부패와 무능에 찌든 권력층을 끌어내릴 수 없었으나, 민주공화정 시대는 다르다. 적어도 국민들이 깨어있다면, 권력층을 끌어내릴 수 있고,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전 세계에 알릴 수도 있다. 뭐, 그렇다고 부패한 권력층이 스펙타클하게 바뀐다는 건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비록 오랜시간이 걸릴지언정 변할거라는 희망이 있다.



우선 종교의 자유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본권으로 여기에서 헌법상의 다른 기본권이 파생합니다. 세속주의 헌법을 채택한 우리나라 헌법 제20조도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사실 종교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 둘로 나뉩니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합니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서 종교 의식, 종교 선전, 종교 교육, 종교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합니다. 다만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의 기본권이나 사회 공동체 질서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됩니다. p 131



우리나라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해서 누구는 불교를 믿고, 누구는 천주교를 믿고, 누구는 개신교를 믿고, 누구는 원불교를 믿는다. 또 누군가는 나처럼 종교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가 믿는 게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지탄해서는 안되며, 서로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유독 특정 종교에서, 그 특정 종교를 믿는 아주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길이 없다. 심지어 그 종교를 앞에서 정치까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 종교가 과거에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때, 당시의 선교사들은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 종교가 믿는 신 역시 대한민국 땅에서 자신을 믿는 일부 신자들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우리나라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국가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국교로 삼지 않으며, 누구도 종교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상식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가진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으려면 상대의 종교적 신념도 존중하는 것이 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생략…)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혹은 종교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신에게 기쁨을 주는 종교적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자 오만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고 말했던 의미를 그리스도교뿐만아니라 모든 종교 공동체가 모른 척 하지 않아야 합니다. p 136



난 종교, 신, 귀신 그 어느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교 사찰 답사를 좋아한다. 개화 당시에 한반도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지역 곳곳에서 최초로 세워진 성당 답사를 좋아한다. 제주에 남아있는 우리의 무속신앙 흔적을 찾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외에 한국 땅에 있는 개신교의 흔적을 찾는 것은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마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개신교의 민폐와 부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세계사에서 배웠던 개신교는 종교개혁이래 구교(천주교)에 반발하며, 파생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고 배웠다. 분명 역사속에서 배운 개신교는 학문으로써 배움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개신교는, 글쎄. 내가 역사에서 배운 프로테스탄트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 개신교 신앙에 심취한 일부 신자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며 비난한다. 뿐만인가? 그저 신을 찾는 독실한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정말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가져가는 행위도 있다. 오죽하면 부자교회, 세습교회라는 말까지 나올까. 거기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결탁까지. 이런 현상 역시 내가 역사속에서 배운 프로테스탄트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난 이래뵈도 초등학교 땐 교회를 몇년간 다녀봤고(친구따라), 중학교때는 성당을 다녀봤고(친구따라), 고등학교는 심지어 천주교학교인 미션스쿨을 다녔다. 뭐, 그와 별개로 어렸을 때부터 사찰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사찰에서 모셨다(친가 불교). 그러니까 이유야 어찌했든 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종교는 나름대로 겪어본 셈이다. 뭐 이 과정에서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종교를 믿고, 구원을 청하느니, 그럴 힘으로 나 자신을 믿고, 내가 번 돈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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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 - 낯선 곳에서 생각에 중독되다
김경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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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면 여운이 남는 책이 있고, 개운하게 ‘끝!’하는 책이 있는다. 이 책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는 전자에 속한다. 읽고 나서도 꽤나 여운이 남는다. 아무래도 내가 즐겨하는 여행하는 방식이 그 장소에 대해 사유하며, 고찰하는 인문기행이다보니, 같은 선상에 있는 이 책의 내용이 꼭 내 마음 같았나보다. 



이 책의 인문기행은 크게 유럽, 일본, 중국, 아시아, 한국으로 나뉜다. 모든 단락들이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내 눈에 들어오는 기행은 일본기행과 한국기행이었다. 세계사, 한국사 가리지 않고 즐겨보는 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와 일본사를 즐겨읽고, 동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다른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는지에 대한 생각도 자주하다보니, 아무래도 유독 더 저자의 일본기행과 한국기행을 눈여겨 본 것 같다.



인문기행이라는 것이 때로는 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저자는 양쪽 모두의 시선으로 여행지를 바라보았다. 물론 문학적 소양이 비교적 낮은 내 입장에서는 문학적 시선의 인문기행이 조금은 어렵기도 했지만,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인문기행은 어떤 부분에선 매우 공감한 부분도 있는 반면, 또 어떤 부분에선 저자와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내가 맞고 저자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감상 역시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쪽으로 치우쳐진, 편협한 시각은 위험하기 때문에,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 뒤에 정말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도출하면 되는 것이다. 



일본 인문기행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괴물인가. 맹자와 순자가 수없이 교차하는 현세의 시간들이 광대한 실험장이다. 선은 악의 독성을 제거하면서 밝은 쪽을 향하는 특성이 있다. 악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그 자체의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불에 타버린 금각사는 일본 국민들의 모금으로 재건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금각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21


교토의 금각사는 사시사철, 그 어느때 가도 관광객이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다. 생각해보면 금각사도 여느 일본 사찰과 다를게 없는데, 유독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거 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금박이 씌워진 금각사의 모습 자체를 좋아하는 듯 싶다. 뭐 따지고보면 나도 화려한 그 모습에 끌려, 금각사를 두어차례 방문했으니 할말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금각사의 유래는 이렇다. 금각사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은뒤 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950년에 한번 화재로 불타없어졌다가, 5년 뒤 재건했다. 





나는 금각사가 왜 불타 사라졌는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목재 문화재야 원래 화재사건이 자주 일어나니, 자연적인 현상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금각사 화재는 방화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금각사』도 출간되었다. 



실제 금각사 방화범인 하야시 쇼켄. 그는 금각사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그가 왜 금각사를 불태웠을까? 그는 방화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으니 누구를 원망하지는 않겠다. 항소도 하지 않겠다.” 



금각사 방화를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던 그. 심지어 그곳에서 나고자랐던 그. 그는 대체 왜 금각사에 불을 냈을까? 소설 속의 방화범은 금각사의 미에 빠져, 금각사를 온전히 제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금각사에 불을 냈다는데. 실제 방화범은 대체 왜? 악한 마음을 품고 불을 냈던 것일까, 아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금각사를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을 낸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마음이 있었던걸까.



궁금하니 우선 소설 『금각사』부터 읽어야겠다. 하하하.



‘여우사냥’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작전명이다. 국모를 찌른 칼, 히젠도 칼집에는 번개처럼 일순간에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가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사건에 가담한 56명의 낭인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토오 가쓰야키는 이 끔찍한 범행을 잊고 싶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칼 히젠토를 절에 맡기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을 요청했다. p 124



1873년 고종 집권부터 난국을 바로잡고 조정을 일신하기 위해 1894년 김홍집 내각을 수립할 때까지 고위직을 자치한 민씨 일가는 51명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모친과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구한말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명성황후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팽창하는 일본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p  125



후쿠오카의 유명 관광지중 하나 쿠시다 신사. 그 곳에는 민비를 찌른 칼이 봉안되어 있다. 나 역시 후쿠오카에 갔을 때 이곳을 가면, 그 칼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들러볼까 싶었다. 아쉽게도 명성황후를 찔렀다는 크 칼, 히젠도는 볼 수 없었다. 과거에는 공개를 했었으나, 한국인들의 폐기 또는 인도 요청으로 전면 비공개가 되었다.



명성황후, 민비라 불리는 그 여자, 고종의 왕비였던 그 여자. 그에 대해 생각해보자.



저자는 민비를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 명성황후라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저자와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민비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건 맞다. 하지만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나라’였을까?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그랬을까? 적어도 민비가 죽기전까지의 행태를 본다면,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건 나라가 아니라, 자신과 고종의 왕권을 지키며, 즉 등골을 빼먹을 수 있는 순진한 백성들이 있는 나라였다.



저자가 말했듯 조선 말, 민씨일가는 고위직을 차지했다. 고위직이 아닌 직책에도 민씨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 행태는 관직매매, 백성에게 빨대꽂고 세금 빨아먹기였다. 민씨일가는 부패의 온상이었다. 물론 민씨일가가 권력을 차지하기 전, 안동김씨 세도기부터 이미 조선의 위정자들은 전부 부패했었다. 민비가 정말 나라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면, 고종과 권력을 잡았던 그 때, 부정부패를 척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동 김씨의 바통을 이어받은듯, 민비와 고종, 민씨일가 및 수 많은 인척들은 계속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백성들을 죽이겠다고 군대를 일으켰고, 심지어 외세까지 끌어들였다. 뿐만인가? 민비와 고종은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총애하여, 그 무당에게 온갖 재물을 얹어주며 옆에 끼고살았다. 대체 민비의 이 모습 어디에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민비는 조선의 백성들 손에 죽어야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백성들에겐 나쁜놈이었던 민비는, 더 나쁜놈인 일본에 의해 죽었다. 백성들은 이제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해야하고, 누굴 벌줘야하나? 민비가 일본의 손에 죽음으로써, 그에겐 ‘동정’이라는 면죄부가 생성되었다. 오죽하면 그를 미화하는 드라마, 뮤지컬이 계속 양산되겠는가.



민비가 일본 손에 죽었다고 면죄부를 주어선 안된다. 그는 고종과 함께 조선 망국행 급행열차에 브레이크를 부신 인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난 더욱 일본놈들에게 분노가 치민다. 일제로 인해 죗값을 치뤘어야할 고종과 민비에게 면죄부가 주어졌으니.



차디찬 돌 시비가 반가웠다.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의 명문사학 도시샤대학 캠퍼스 복판에서 시인 윤동주가 현세를 살고 있었다. 일본의 천년고도인 교토 시내 헤이안 신궁과 교토대 사이 가모가와강 안쪽의 교정은 영국풍 건물로 바뀌었고 흩어진 꽃다발과 종이학 몇 마리가 시비 제단을 지키고 있었다. 문학의 열망을 저버린 채 짧은 목숨을 마친 식민지 청년의 아픈 사연은 아직도 수용하기 힘든 역사의 현실이다. p 133



잊기는 쉬워도 잊히기는 어렵다. 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공간에서 나의 사고는 망각과 기억 사이를 분주히 들락거렸다. 그의 언어는 죽어서 명예를 지켰고 남겨진 사람들의 긍지로 부활했다. 그를 따라다니던 죽음의 십자가를 넘어야 오랜 이 갈등이 풀려날 텐데. 아직은 두 나라 사이에 가파른 비탈길은 끝나지 않고 있다. p 136



교토 도시샤 대학. 나 역시 신랑과 함께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간적이 있다. 위치를 모른 상태에서 윤동주 시비를 찾으러 갔을 땐, 왜 이리 외진곳에 있는가? 였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그리 외진곳도 아니었다. 내가 보았던 윤동주 시비는 그 옆의 정지용 시인의 시비와 함께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시비 앞에는 조그마한 태극기도 나부끼고 있었다.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갔을 당시에는 크게 생각치 않았던, 시비의 건립 취지를 지금와서 생각해봤다. 도시샤 대학의 윤동주 시비는 도시샤 대학 동문들과 재일교포,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즉 일본 민간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이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려고 모금활동을 하고, 운동을 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우리나라 근대사를 볼때마다 유독 느끼는 것 하나는, 정부가 주도해서 해도 모자를 일들을 대부분 민간에서 주도하고 진행한다는 사실이다. 이정도로 국민들에게 빚을 지는 정부라니. 매번 대통령이 바뀌면 변하겠지, 변하겠지 했지만, 슬프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변하지 않았다.



료마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메이지 유신 100년 만에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각색된 것이다. 1962년 4년 동안 <산케이 신문>에 연재된 8,000매의 원고는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혁명가의 풍운아였지만 19세기 말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가 수줍음을 잘 타고 시골 출신이라는 점, 놀라운 검술과 뛰어난 조정력으로 사츠마, 조슈, 도사번이 가담한 막부 반란군 삿조동맹을 성사시켜 유신이 무혈혁명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 일본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지만 32세의 젋은 나이에 살해되어 생을 마친 인생 역정은 스토리텔링의 완결판이 되기에 충분했다. p 148~149



메이지 유신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개화기 청년들의 애국심과 결단이 빚어낸 성공이다. 공익에 헌신하고자 했던 젊은 선각자들이 유신의 물줄기를 잡아냈다. 후세들은 그들을 정확히 관찰하면서 옳은 평가를 내리고자 했다. 치밀한 분석과 따뜻한 시선이 유지되어야 가능한 영역이다.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다. 위대함과 추악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빛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p 150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메이지 유신’. 우리는 이를 보고 깨달아야할 점이 매우 많지만, 뭐 생략한다. 저자는 어디까지나 사카모토 료마를 찾아 간 길위에 있으니, 나 역시도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난 저자가 들렀던 장소는 아니지만, 교토 가와라마치 일대를 걷다가 아주 우연치않게 사카모토 료마와 관련된 장소에 들른 적이 있다. 그 곳은 사카모토 료마가 괴한에게 습격받아 사망했던 그 장소, 오우미야 터였다. 그 장소에 서서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그는 당대에 있던 인물들과는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막부를 찾아가 대정봉환을 성공시켰던 사람이며, 근대화를 위해 나라의 문을 활짝 열게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드라마에 열광한다.



그런데 그런 사카모토 료마가 지금처럼 유명해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작가 시바 료타로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그는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을 인물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었을 인물을, 수면 위로 올리는 힘. 일종의 스토리텔링(물론 그 인물 자체의 일생도 중요하겠으나). 그것이 바로 이름을 남기느냐 아니느냐에 차이 인듯 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다. 위대함과 추악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빛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초석으로 성공한 메이지 유신은 결과론적으로 일본에게는 빛나는 역사가 되었지만, 우리에겐 일제강점기의 초석을 다진 사건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 인문기행


임금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항복하지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추위와 배고픔이 지쳐있던 백성들은 어둠을 틈타 성을 넘나들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에워싼 산성은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을 텐데 가만두어도 죽거나 항복할 것임을 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최명길과 김성한의 불꽃 튀는 언어의 칼날들이 겨울 눈송이들을 녹였으리라 짐작된다. 병사들의 수어장대와 사방 방어대열에 정신없던 순간에도 최고 의결기구인 임금의 어전회의는 남한산성 초라한 피난처 현장에서 끝까지 우왕자왕하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생략…) 그리하여 마침내 삼전도 항복이라는 치욕을 역사에 남긴 안타까운 임금 인조. 이마가 찧기고 백성들을 볼모로 잡혀가는 쓰라린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상처는 어쩌면 당파싸움과 세력대결로 세월을 보낸 조선사회의 예고된 비극이었다. p 286


부모님과 남한산성을 걸었던 경험이 있다. 성벽위를 걸으며 느꼈던 것이, 인조는 대체 왜, 조선의 백성들을 지옥에 빠뜨리는 그런 결정을 하였는가 였다.



인조가 대외적인 눈이 밝았더라면, 전 왕의 외교술의 반의 반만이라도 따랐더라면, 어쩌면 병자호란이라는 슬픈 전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투로 인해, 조선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인조는 거짓으로 중무장한채, 망해가는 명나라만 울부짖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 끝은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결국 제대로된 리더의 부재로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에 노예로, 공녀로, 볼모로 끌려갔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 내에서는 오랑캐엔 청나라에 사대를 해야하는 반발심에, 죽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는 기조가 널리 퍼지면서, 대부분의 사대부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대충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뜻인 ‘유명조선’이라는 단어가 떡하니 새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사대부들 눈에는 조선의 백성들은 없었다는 이야기. 



청령포는 불어난 강물에 포위되어 더욱더 외딴섬으로 변해 있었다. 폭염이 지나가는 길목에 이곳으로 나들이를 온 피서객들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애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느지 흐르는 동강은 말이 없는데. 소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룬 단종어소에 들어서니 콧등이 찡해온다. p 315



수양의 못된 행태를 보다 못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 복위를 추진했지만 사건이 중간에 탄로 나 가담자 전원이 참혹하게 참살되었다. 역사는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단종은 상왕을 내놓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그해 음력 6월 22일 창덕궁을 나선 단종은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6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700리 영월 유배길에 올랐다. p 316



조선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된다. 조카를 내리치고, 왕이 된 삼촌 세조. 그로 인해 이미 조선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왕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세상이 막이 올랐다. 바로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영월에서 단종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다니면서 역사에서 제일 쓸데없은 물음인 ‘만약’을 수도없이 되뇌었다. 만약 단종의 나이가 더 많았다면, 만약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만약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죽지 않았다면, 만약 소헌왕후와 세종이 연달아 죽지 않아서, 문종이 연달아 상을 치루지 않았더라면, 등등. 수많은 ‘만약’이 머리속을 떠다녔다. 



생각해보면 난 영월뿐만 아니라 세조와 관련된 유적지, 사육신과 관련된 유적지 참 많이도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단종과 세조,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가 머리속에 많이 남아있다. 그와 함께 ‘만약’이라는 물음도. 하지만 만약은 쓸데없는 가정일뿐,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1653년, 효종 4년 시기에 은둔국가었던 조선 땅으로 낯선 이방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이다. 제주목사 이원진응ㄴ 한양에서 내려온 박연(벨트브레)의 통역 도움으로 조사를 마치고 10개월 만에 이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청나라가 이 사실을 눈치챌까 봐 조선은 전전긍긍했다. 사신단이 올때마다 하멜일행을 가두거나 남한산성 등지로 피신시키고는 했는데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생략…) 결국 임금은 하멜 일행을 부안과 강진에 분산 수용하도록 명령했다. 전라도로 옮겨진 이들은 잡초를 뽑거나 새끼를 꼬는 잡역에 동원되었다. 1666년 7월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 11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 p 320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53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가 일본 규슈의 분고 앞바다에 표착했다. 본래 에라스무스호라고 불렸던 리프데호는 1598년 동방무역을 위헤 로테르담을 출항한 5척의 선단 가운데 한 척이었다. 전국시대 혼란한 천하를 통일하고 이 소식을 접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배를 보내 이들을 불렀다. 포르투갈어 통역으로 이뤄진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네덜란드 선박의 항행 이유와 유럽의 정세등을 질문했다.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조총을 전수받은 일본에는 선교사와 상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던 때였다. (…생략…) 고민 끝에 애넘스를 외교 자문역으로 임명했다. 마음을 연 애덤스는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영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을 알선했다. p 321



국내 1위 여행지 제주에는 하멜기념관이 있다. 나 역시 그곳을 가보았고, 그 곳을 가보니 더더욱 징비없는 우리나라의 태도에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왕조국가인 조선과는 다른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다.



동시대에 네덜란드 인이 들어왔던 조선과 일본,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온갖 근대화 선진기술로 무장한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조선은, 그들을 죄인취급했다. 반면에 일본은 그들을 통해 각종 선진 기술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들을 통해 외교통로까지 만든다. 조선은 세계를 향한 문을 꽁꽁닫았고, 일본은 세계를 향한 문을 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개혁이 가능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선을 포함하여,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삼고 괴롭혔다. 꽁꽁 문을 닫았던 조선은 당연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 시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암울했던 기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체 어떻게 네덜란드인을 대했던걸까? 당시 일본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 윌리엄 애덤스에게 미우라 지역의 영지를 하사했다. 한마디로 미우라 지역의 영주대접을 한 것이다. 조선이 하멜일행을 전라도로 유배보내어 죄인처럼 노역을 시킨것과는 아주 대비된다.



사실상 미우라 지역의 영주가 된 애덤스는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이름 역시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니 그가 바로 일본에서 유명한 ‘미우라 안진’이다. 



같은 시대, 같은 기회가 주어졌던 조선과 일본. 책에서야 하멜과 애덤스를 일화만을 이야기했지만, 조선에는 참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기회가 오는 족족 알아서 걷어차버린 것이 조선 왕실이고, 조선의 사대부였다. 결국 이 모든것이 얽히고 설켰다. 그 결과가 1900년대의 조선과 일본이다. 



여기서 또 다시 의미없는 물음을 떠올린다. 만약 조선의 위정자들이 징비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이 물음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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