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 - 낯선 곳에서 생각에 중독되다
김경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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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면 여운이 남는 책이 있고, 개운하게 ‘끝!’하는 책이 있는다. 이 책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는 전자에 속한다. 읽고 나서도 꽤나 여운이 남는다. 아무래도 내가 즐겨하는 여행하는 방식이 그 장소에 대해 사유하며, 고찰하는 인문기행이다보니, 같은 선상에 있는 이 책의 내용이 꼭 내 마음 같았나보다. 



이 책의 인문기행은 크게 유럽, 일본, 중국, 아시아, 한국으로 나뉜다. 모든 단락들이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내 눈에 들어오는 기행은 일본기행과 한국기행이었다. 세계사, 한국사 가리지 않고 즐겨보는 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와 일본사를 즐겨읽고, 동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다른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는지에 대한 생각도 자주하다보니, 아무래도 유독 더 저자의 일본기행과 한국기행을 눈여겨 본 것 같다.



인문기행이라는 것이 때로는 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저자는 양쪽 모두의 시선으로 여행지를 바라보았다. 물론 문학적 소양이 비교적 낮은 내 입장에서는 문학적 시선의 인문기행이 조금은 어렵기도 했지만,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인문기행은 어떤 부분에선 매우 공감한 부분도 있는 반면, 또 어떤 부분에선 저자와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내가 맞고 저자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감상 역시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쪽으로 치우쳐진, 편협한 시각은 위험하기 때문에,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 뒤에 정말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도출하면 되는 것이다. 



일본 인문기행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괴물인가. 맹자와 순자가 수없이 교차하는 현세의 시간들이 광대한 실험장이다. 선은 악의 독성을 제거하면서 밝은 쪽을 향하는 특성이 있다. 악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그 자체의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불에 타버린 금각사는 일본 국민들의 모금으로 재건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금각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21


교토의 금각사는 사시사철, 그 어느때 가도 관광객이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다. 생각해보면 금각사도 여느 일본 사찰과 다를게 없는데, 유독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거 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금박이 씌워진 금각사의 모습 자체를 좋아하는 듯 싶다. 뭐 따지고보면 나도 화려한 그 모습에 끌려, 금각사를 두어차례 방문했으니 할말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금각사의 유래는 이렇다. 금각사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은뒤 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950년에 한번 화재로 불타없어졌다가, 5년 뒤 재건했다. 





나는 금각사가 왜 불타 사라졌는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목재 문화재야 원래 화재사건이 자주 일어나니, 자연적인 현상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금각사 화재는 방화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금각사』도 출간되었다. 



실제 금각사 방화범인 하야시 쇼켄. 그는 금각사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그가 왜 금각사를 불태웠을까? 그는 방화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으니 누구를 원망하지는 않겠다. 항소도 하지 않겠다.” 



금각사 방화를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던 그. 심지어 그곳에서 나고자랐던 그. 그는 대체 왜 금각사에 불을 냈을까? 소설 속의 방화범은 금각사의 미에 빠져, 금각사를 온전히 제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금각사에 불을 냈다는데. 실제 방화범은 대체 왜? 악한 마음을 품고 불을 냈던 것일까, 아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금각사를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을 낸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마음이 있었던걸까.



궁금하니 우선 소설 『금각사』부터 읽어야겠다. 하하하.



‘여우사냥’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작전명이다. 국모를 찌른 칼, 히젠도 칼집에는 번개처럼 일순간에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가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사건에 가담한 56명의 낭인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토오 가쓰야키는 이 끔찍한 범행을 잊고 싶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칼 히젠토를 절에 맡기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을 요청했다. p 124



1873년 고종 집권부터 난국을 바로잡고 조정을 일신하기 위해 1894년 김홍집 내각을 수립할 때까지 고위직을 자치한 민씨 일가는 51명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모친과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구한말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명성황후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팽창하는 일본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p  125



후쿠오카의 유명 관광지중 하나 쿠시다 신사. 그 곳에는 민비를 찌른 칼이 봉안되어 있다. 나 역시 후쿠오카에 갔을 때 이곳을 가면, 그 칼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들러볼까 싶었다. 아쉽게도 명성황후를 찔렀다는 크 칼, 히젠도는 볼 수 없었다. 과거에는 공개를 했었으나, 한국인들의 폐기 또는 인도 요청으로 전면 비공개가 되었다.



명성황후, 민비라 불리는 그 여자, 고종의 왕비였던 그 여자. 그에 대해 생각해보자.



저자는 민비를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 명성황후라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저자와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민비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건 맞다. 하지만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나라’였을까?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그랬을까? 적어도 민비가 죽기전까지의 행태를 본다면,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건 나라가 아니라, 자신과 고종의 왕권을 지키며, 즉 등골을 빼먹을 수 있는 순진한 백성들이 있는 나라였다.



저자가 말했듯 조선 말, 민씨일가는 고위직을 차지했다. 고위직이 아닌 직책에도 민씨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 행태는 관직매매, 백성에게 빨대꽂고 세금 빨아먹기였다. 민씨일가는 부패의 온상이었다. 물론 민씨일가가 권력을 차지하기 전, 안동김씨 세도기부터 이미 조선의 위정자들은 전부 부패했었다. 민비가 정말 나라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면, 고종과 권력을 잡았던 그 때, 부정부패를 척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동 김씨의 바통을 이어받은듯, 민비와 고종, 민씨일가 및 수 많은 인척들은 계속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백성들을 죽이겠다고 군대를 일으켰고, 심지어 외세까지 끌어들였다. 뿐만인가? 민비와 고종은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총애하여, 그 무당에게 온갖 재물을 얹어주며 옆에 끼고살았다. 대체 민비의 이 모습 어디에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민비는 조선의 백성들 손에 죽어야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백성들에겐 나쁜놈이었던 민비는, 더 나쁜놈인 일본에 의해 죽었다. 백성들은 이제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해야하고, 누굴 벌줘야하나? 민비가 일본의 손에 죽음으로써, 그에겐 ‘동정’이라는 면죄부가 생성되었다. 오죽하면 그를 미화하는 드라마, 뮤지컬이 계속 양산되겠는가.



민비가 일본 손에 죽었다고 면죄부를 주어선 안된다. 그는 고종과 함께 조선 망국행 급행열차에 브레이크를 부신 인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난 더욱 일본놈들에게 분노가 치민다. 일제로 인해 죗값을 치뤘어야할 고종과 민비에게 면죄부가 주어졌으니.



차디찬 돌 시비가 반가웠다.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의 명문사학 도시샤대학 캠퍼스 복판에서 시인 윤동주가 현세를 살고 있었다. 일본의 천년고도인 교토 시내 헤이안 신궁과 교토대 사이 가모가와강 안쪽의 교정은 영국풍 건물로 바뀌었고 흩어진 꽃다발과 종이학 몇 마리가 시비 제단을 지키고 있었다. 문학의 열망을 저버린 채 짧은 목숨을 마친 식민지 청년의 아픈 사연은 아직도 수용하기 힘든 역사의 현실이다. p 133



잊기는 쉬워도 잊히기는 어렵다. 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공간에서 나의 사고는 망각과 기억 사이를 분주히 들락거렸다. 그의 언어는 죽어서 명예를 지켰고 남겨진 사람들의 긍지로 부활했다. 그를 따라다니던 죽음의 십자가를 넘어야 오랜 이 갈등이 풀려날 텐데. 아직은 두 나라 사이에 가파른 비탈길은 끝나지 않고 있다. p 136



교토 도시샤 대학. 나 역시 신랑과 함께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간적이 있다. 위치를 모른 상태에서 윤동주 시비를 찾으러 갔을 땐, 왜 이리 외진곳에 있는가? 였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그리 외진곳도 아니었다. 내가 보았던 윤동주 시비는 그 옆의 정지용 시인의 시비와 함께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시비 앞에는 조그마한 태극기도 나부끼고 있었다.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갔을 당시에는 크게 생각치 않았던, 시비의 건립 취지를 지금와서 생각해봤다. 도시샤 대학의 윤동주 시비는 도시샤 대학 동문들과 재일교포,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즉 일본 민간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이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려고 모금활동을 하고, 운동을 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우리나라 근대사를 볼때마다 유독 느끼는 것 하나는, 정부가 주도해서 해도 모자를 일들을 대부분 민간에서 주도하고 진행한다는 사실이다. 이정도로 국민들에게 빚을 지는 정부라니. 매번 대통령이 바뀌면 변하겠지, 변하겠지 했지만, 슬프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변하지 않았다.



료마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메이지 유신 100년 만에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각색된 것이다. 1962년 4년 동안 <산케이 신문>에 연재된 8,000매의 원고는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혁명가의 풍운아였지만 19세기 말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가 수줍음을 잘 타고 시골 출신이라는 점, 놀라운 검술과 뛰어난 조정력으로 사츠마, 조슈, 도사번이 가담한 막부 반란군 삿조동맹을 성사시켜 유신이 무혈혁명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 일본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지만 32세의 젋은 나이에 살해되어 생을 마친 인생 역정은 스토리텔링의 완결판이 되기에 충분했다. p 148~149



메이지 유신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개화기 청년들의 애국심과 결단이 빚어낸 성공이다. 공익에 헌신하고자 했던 젊은 선각자들이 유신의 물줄기를 잡아냈다. 후세들은 그들을 정확히 관찰하면서 옳은 평가를 내리고자 했다. 치밀한 분석과 따뜻한 시선이 유지되어야 가능한 영역이다.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다. 위대함과 추악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빛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p 150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메이지 유신’. 우리는 이를 보고 깨달아야할 점이 매우 많지만, 뭐 생략한다. 저자는 어디까지나 사카모토 료마를 찾아 간 길위에 있으니, 나 역시도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난 저자가 들렀던 장소는 아니지만, 교토 가와라마치 일대를 걷다가 아주 우연치않게 사카모토 료마와 관련된 장소에 들른 적이 있다. 그 곳은 사카모토 료마가 괴한에게 습격받아 사망했던 그 장소, 오우미야 터였다. 그 장소에 서서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그는 당대에 있던 인물들과는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막부를 찾아가 대정봉환을 성공시켰던 사람이며, 근대화를 위해 나라의 문을 활짝 열게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드라마에 열광한다.



그런데 그런 사카모토 료마가 지금처럼 유명해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작가 시바 료타로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그는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을 인물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었을 인물을, 수면 위로 올리는 힘. 일종의 스토리텔링(물론 그 인물 자체의 일생도 중요하겠으나). 그것이 바로 이름을 남기느냐 아니느냐에 차이 인듯 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다. 위대함과 추악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빛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초석으로 성공한 메이지 유신은 결과론적으로 일본에게는 빛나는 역사가 되었지만, 우리에겐 일제강점기의 초석을 다진 사건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 인문기행


임금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항복하지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추위와 배고픔이 지쳐있던 백성들은 어둠을 틈타 성을 넘나들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에워싼 산성은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을 텐데 가만두어도 죽거나 항복할 것임을 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최명길과 김성한의 불꽃 튀는 언어의 칼날들이 겨울 눈송이들을 녹였으리라 짐작된다. 병사들의 수어장대와 사방 방어대열에 정신없던 순간에도 최고 의결기구인 임금의 어전회의는 남한산성 초라한 피난처 현장에서 끝까지 우왕자왕하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생략…) 그리하여 마침내 삼전도 항복이라는 치욕을 역사에 남긴 안타까운 임금 인조. 이마가 찧기고 백성들을 볼모로 잡혀가는 쓰라린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상처는 어쩌면 당파싸움과 세력대결로 세월을 보낸 조선사회의 예고된 비극이었다. p 286


부모님과 남한산성을 걸었던 경험이 있다. 성벽위를 걸으며 느꼈던 것이, 인조는 대체 왜, 조선의 백성들을 지옥에 빠뜨리는 그런 결정을 하였는가 였다.



인조가 대외적인 눈이 밝았더라면, 전 왕의 외교술의 반의 반만이라도 따랐더라면, 어쩌면 병자호란이라는 슬픈 전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투로 인해, 조선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인조는 거짓으로 중무장한채, 망해가는 명나라만 울부짖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 끝은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결국 제대로된 리더의 부재로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에 노예로, 공녀로, 볼모로 끌려갔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 내에서는 오랑캐엔 청나라에 사대를 해야하는 반발심에, 죽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는 기조가 널리 퍼지면서, 대부분의 사대부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대충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뜻인 ‘유명조선’이라는 단어가 떡하니 새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사대부들 눈에는 조선의 백성들은 없었다는 이야기. 



청령포는 불어난 강물에 포위되어 더욱더 외딴섬으로 변해 있었다. 폭염이 지나가는 길목에 이곳으로 나들이를 온 피서객들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애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느지 흐르는 동강은 말이 없는데. 소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룬 단종어소에 들어서니 콧등이 찡해온다. p 315



수양의 못된 행태를 보다 못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 복위를 추진했지만 사건이 중간에 탄로 나 가담자 전원이 참혹하게 참살되었다. 역사는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단종은 상왕을 내놓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그해 음력 6월 22일 창덕궁을 나선 단종은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6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700리 영월 유배길에 올랐다. p 316



조선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된다. 조카를 내리치고, 왕이 된 삼촌 세조. 그로 인해 이미 조선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왕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세상이 막이 올랐다. 바로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영월에서 단종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다니면서 역사에서 제일 쓸데없은 물음인 ‘만약’을 수도없이 되뇌었다. 만약 단종의 나이가 더 많았다면, 만약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만약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죽지 않았다면, 만약 소헌왕후와 세종이 연달아 죽지 않아서, 문종이 연달아 상을 치루지 않았더라면, 등등. 수많은 ‘만약’이 머리속을 떠다녔다. 



생각해보면 난 영월뿐만 아니라 세조와 관련된 유적지, 사육신과 관련된 유적지 참 많이도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단종과 세조,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가 머리속에 많이 남아있다. 그와 함께 ‘만약’이라는 물음도. 하지만 만약은 쓸데없는 가정일뿐,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1653년, 효종 4년 시기에 은둔국가었던 조선 땅으로 낯선 이방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이다. 제주목사 이원진응ㄴ 한양에서 내려온 박연(벨트브레)의 통역 도움으로 조사를 마치고 10개월 만에 이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청나라가 이 사실을 눈치챌까 봐 조선은 전전긍긍했다. 사신단이 올때마다 하멜일행을 가두거나 남한산성 등지로 피신시키고는 했는데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생략…) 결국 임금은 하멜 일행을 부안과 강진에 분산 수용하도록 명령했다. 전라도로 옮겨진 이들은 잡초를 뽑거나 새끼를 꼬는 잡역에 동원되었다. 1666년 7월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 11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 p 320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53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가 일본 규슈의 분고 앞바다에 표착했다. 본래 에라스무스호라고 불렸던 리프데호는 1598년 동방무역을 위헤 로테르담을 출항한 5척의 선단 가운데 한 척이었다. 전국시대 혼란한 천하를 통일하고 이 소식을 접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배를 보내 이들을 불렀다. 포르투갈어 통역으로 이뤄진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네덜란드 선박의 항행 이유와 유럽의 정세등을 질문했다.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조총을 전수받은 일본에는 선교사와 상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던 때였다. (…생략…) 고민 끝에 애넘스를 외교 자문역으로 임명했다. 마음을 연 애덤스는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영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을 알선했다. p 321



국내 1위 여행지 제주에는 하멜기념관이 있다. 나 역시 그곳을 가보았고, 그 곳을 가보니 더더욱 징비없는 우리나라의 태도에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왕조국가인 조선과는 다른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다.



동시대에 네덜란드 인이 들어왔던 조선과 일본,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온갖 근대화 선진기술로 무장한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조선은, 그들을 죄인취급했다. 반면에 일본은 그들을 통해 각종 선진 기술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들을 통해 외교통로까지 만든다. 조선은 세계를 향한 문을 꽁꽁닫았고, 일본은 세계를 향한 문을 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개혁이 가능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선을 포함하여,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삼고 괴롭혔다. 꽁꽁 문을 닫았던 조선은 당연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 시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암울했던 기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체 어떻게 네덜란드인을 대했던걸까? 당시 일본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 윌리엄 애덤스에게 미우라 지역의 영지를 하사했다. 한마디로 미우라 지역의 영주대접을 한 것이다. 조선이 하멜일행을 전라도로 유배보내어 죄인처럼 노역을 시킨것과는 아주 대비된다.



사실상 미우라 지역의 영주가 된 애덤스는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이름 역시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니 그가 바로 일본에서 유명한 ‘미우라 안진’이다. 



같은 시대, 같은 기회가 주어졌던 조선과 일본. 책에서야 하멜과 애덤스를 일화만을 이야기했지만, 조선에는 참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기회가 오는 족족 알아서 걷어차버린 것이 조선 왕실이고, 조선의 사대부였다. 결국 이 모든것이 얽히고 설켰다. 그 결과가 1900년대의 조선과 일본이다. 



여기서 또 다시 의미없는 물음을 떠올린다. 만약 조선의 위정자들이 징비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이 물음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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