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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평점 :
오늘의 독서태교★는 외국인이 바라본 1904년도의 대한제국의 모습이 담긴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거다」 라는 책이다. 예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구입하고는 방치해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다는건 안비밀! 그도 그럴것이... 조선후기-특히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책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해도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놈들의 행태에 분노만 차오르는지라, 읽으려고 해도 섣불리 손이 안간게 사실이다. 자기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들춰보는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피하고 외면할수록, 역사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일본놈들과 다를바가 없으니!
서애 류성룡의 말처럼 ‘잘못된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훗날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아무리 어두운 자국의 역사라도 꼭 읽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의 저자 아손 그렙스트는 스웨덴 사람이자 기자이다. 그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하지만 아손은 도쿄에서 본인이 원할만큼의 취재를 할 수 가 없었다. 왜? 러일전쟁의 무대는 러시아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학교 근현대시간에 배웠듯 러일전쟁은 조선 땅이 주 무대였다.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인데, 전쟁터는 조선 땅이라는 아이러니(자매품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청일전쟁도 조선 땅에서 일어남).
이게 도쿄에 가있는 아손이 러일전쟁에 대해 제대로된 취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손은 실제 전투가 벌어지던 지역, 그러니까 조선으로 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기자들에게 전시여권을 발행해주지 않았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방도가 없었다. 바로 그 때!!!!! 일본으로 파견을 온 스웨덴인 장교가 나타났다. 그는 아손에게 조선으로 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기자라는 신분은 잊어버리시고 보통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역상으로 위장하는 것이지요. 개항지에 있는 사업 동료들을 찾아간다고 하세요. 요코하마의 수입상에게서 상품의 견본을 구하고 낯가죽을 두껍게 해두세요. 나가사키를 지나 부산, 제물포로 가세요. 거기에서 수도 서울은 바로 코앞입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문화 민족들 중 하나를 대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수도 중 하나와 접할 수 있을겁니다. 일본에 합병되기 바로 전의 코레아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전쟁 후 코레아의 운명은 일본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p 022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오기 위해 아손은 외국인이라는 본인의 국적을 무기삼아, 신분을 기자가 아닌 ‘상인’으로 위장하였고, 그렇게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아손.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부산은 생각보다 더 낙후되어있었다. 정확히는 조선인이 사는 촌락들이 말이다. 반면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부산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시를 하나둘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사람 살기 좋은 땅은 일본인들이 빼앗아가고, 조선인들은 낙후된 지역으로 몰렸던 것이다.
부산에서 받은 코레아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거리는 좁고 불결했으며, 가옥은 낮고 볼품이 없었다. 일본에서처럼 상점이나 눈길을 끄는 오래된 절도 없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겼으며, 문밖에는 집에서 버린 쓰레기가 쌓여 있고, 털이 길고 측은한 모습의 개들이 쓰레기 주위에 모여 먹을만 한 것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하수도가 있는데, 끈적끈적한 바닥에서 온갖 종류의 오물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는 머리가 더펄더펄한 애들이 놀고 있었는데 어제 그제 세수한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p 033
조선 땅을 하나둘 차지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속내는 스웨덴 사람인 아손의 눈에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코레아의 해변 촌락을 가로질러서 인력거꾼은 길이 더 넓고 비교적 깨끗한 시가지로 방향을 돌렸다. 생활력이 강한 일본 종족의 제국주의 근성은 코레아인들의 멸망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들이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은 코레아인들의 개혁된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것이었다. p 034
만약 조선후기 양반네들이 자신들의 탐욕에 빠지지 않고,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점차 근대화를 해나갔다면 어땠을까? 분명 조선에는 일본놈들이 근대개혁을 했던 시기보다 더 빠르게, 몇 차례나 근대화 및 개혁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오는 족족 차버린건 조선정부와 사대부라 불리는 양반네들, 그러니까 조선의 위정자들이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정신머리가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일본놈들이 저렇게 쉽게 조선 땅에 발을 디딜 수는 없었을텐데. 이게 내가 조선후기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분노하는 이유다.
조선땅에 들어온 아손은 조선의 사회상을 사진으로 정말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사진은 그가 쓴 조선 풍물지,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가히 놀라울만하다. 이렇게나 많은 조선말기의 사진이 남아있다니!
코레아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따. 똑바로 치켜올린 얼굴은 거침이 없이 당당하였따. 걸음걸이는 힘차 보였으며 의식적으로 점잔을 빼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몸놀림은 일본인의 특징인 벌벌 기는 비굴함과 과장된 예의 차리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p 032
코레아의 고유화폐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노임이 매우 싸고 빈곤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인지, 코레아 화폐 단위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액의 동전 종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100캐쉬에 해당하는 1냥은 스웨덴 돈으로 환산하면 10외레가 된다. 1냥은 10전, 1전은 10푼, 마지막으로 1푼은 다시 10의로 나누어진다. 만약 10크로나에 해당하는 노잣돈을 소액권으로 휴대하려면 1만 캐쉬의 동전을 준비해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동전을 100개 단위로 매듭을 지어 실에 꿴 다음 가지고 다녀야 하니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겠는가! p 075
더 놀라운 사실은 아손이 경부선 철도의 첫번째 승객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침략정책, 그러니까 우리나라 물자를 일본으로 보다 빠르게 옮기기 위한 일환으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 말이다. 그 철도에서 아손은 일본인 대위와 만났고, 한양으로 오는 내내 그와 많은 대화를 하였다.
“코레아의 선비는 어떤 까다로운 사람의 눈에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그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옷을 자기 손으로 입어서는 안 되며 담뱃불도 스스로 켜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이는 말안장에 제 힘으로 오르는 법이 아니고, 또 다루기 힘든 조랑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하더라도 누가 와서 그를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는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비는 사사로운 장사에 관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장사가 바로 노동인즉, 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예절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고 모든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의식적으로 속이려 들지는 않지만 허무맹랑한 이론으로 결론을 맺는 논법은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출된 결론이 옳은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래도 양반들은 기죽는 일이 없지요. 만약 사람들이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다른 논리로 반박을 한다면 그는 예를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고, 미심쩍어 하는 사람을 석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설득시켰따고 스스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p 056
우리는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토의를 했는데, 코레아인들이 일본인들을 왜 눈엣가시처럼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 원인 중 코레아 내의 모든 비경작지와 모든 국내 자원을 일본인들이 유용할 수 있따는 일본 당국의 발표가 제일 컸다. 코레아 사람들은 땅에 대한 애착심이 무엇보다도 강하다. 농업은 생명의 원천이라 만약 농사가 다른 민족의 손에 의해 행해진다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종말이 다가온다는 증거였다. 일시적 점령이라는 게 결국 강탈로 끝날 것이고, 보호를 받는다는 처지에서 대일본제국에 합병이 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p 081
일본인 대위의 말에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그가 하는 말이 대부분이 사실이라 반박불가하다는게 슬플따름이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 답게, 선비들은 죽은 자의 말이나 되뇌이며,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몰락한 양반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대게 몰락한 양반이라할지라도, 양반놈들은 앉아서 글자만 읽을뿐이며, 그 양반들의 부인이 삯바느질등의 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니까. 뿐만인가? 이놈의 양반들은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송시열^^). 정신승리는 또 얼마나 잘하나. 겉으로는 청나라에 조아리면서, 뒤로는 명나라를 계승했다며 몰래몰래 제사를 지내는 꼴이라니(역시나 송시.ㅇ...).
일본놈들은 이런 조선의 양반네들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혼마 규스케가 쓴 「조선잡기」만 읽어도, 일본놈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기전에 얼마나 철저하게 조선의 문화와 생활습관 등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국에서는 근대화 개혁을 차근차근 시행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조선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시간에 일본놈들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수단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던거다.
한양에 도착한 아손은 통역꾼인 윤산갈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내 꽁무니를 바싹 쫓는 윤산갈을 대동하고 코레아의 이 신기한 수도에서 나는 첫 번째 산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엠버얼리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거리는 사람은 전혀 없었으나 길 찾기가 쉽지 않았따. 꽤 넓은 몇 개의 거리들이 시내를 관통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완전한 미로를 방불케 했다. 큰길의 대부분이 최소한 60미터 이상의 폭을 가지고 있었고,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그 폭이 원래 6미터가 안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의 한 가운데로는 하수도 역할을 하는 도랑이 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 주위로 점점 작은 건물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급기야 짐을 실은 두 마리의 소과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p 096
서울의 광채가 다른 지방을 절대적으로 압도하고, 모든 코레아 사람이 꼭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서울 내에서만 궁과 임금의 눈길을 끄는 것이 용이하고 또 눈길을 끌게 됨으로써 공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또한 공직자의 신분으로서만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획득할 수 있다. (……) 지방의 백성들은 과세 부담이 큰 반면, 서울 사람들은 완전한 세금 면제를 받는다. 서울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조합을 형성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있지만, 지방은 직인제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각각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관의 권력 남용이나 일반사람들의 사기에 대처할 방도가 없다. p 107
역시 예나 지금이나 수도는 수도인가보다. 심지어 저때는 서울 살면 세금이 완전 면제라니. 이러니 사람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들어가려하지!!
아손은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조선의 여성’에 대한 내용에 할애했다. 그도 그럴것이 스웨덴을 비롯한 서양에선 조선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미 두세기나 앞선 18세기 프랑스 여성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뭐, 동서양의 막론하고 여성의 인권이 한참 뒤쳐져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나 달랐다.
조선 못지않게 오랫동안 왕정이 이어진 서양권에서는 여성이 한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왕의 정부로 권력을 잡고 있던 경우도 많았다. 일반 백성조차도 여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저 참정권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달랐다. 한 왕조가 무너질때마다 혹은 왕이 무능할때마다 그 곁에 있는 여자를 탓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나마 천년전에 있었던 신라의 여성군주들을 보며,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은 그릇된 주자학에 매몰되어,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오롯이 대를 잇는 도구였고, 정쟁의 도구였으며, 언제든지 쉽게 버릴 수 있는 ‘패’였다.
1592년 일본의 히데요시가 코레아를 침략했을 때 수많은 남자들이 목숨을 잃어 조정에서는 모든 남자 노비를 노비의 신분에서 면제시켜주고, 그 이후로는 단지 여자만 노비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제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남자는 노비로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여자는 아직도 많은 수가 노비의 신분에 얽매여 있다. 대개의 경우 여자 노비는 남자 친척의 죄에 대한 대가로 자청해서 노비가 되었거나 노비 신분을 상속받은 사람들이다. p 164
노비가 되는 네 번째 경우로, 한 여자가 너무 가난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할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잘사는 이웃을 찾아가 집과 옷, 연료,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을 노비로 제공한다. 이상한 것은 자유의사에 의해 노비가 된 여자들의 지위는 일반노비들보다 한층 낮다는 것이다. 일반 노비들은 돈으로 자신의 자유를 다시 살 수 있는 반면에 자유의사로 노비가 된 여자들은 이럴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p 165
코레아 여성들에게 지워지는 가장 큰 의무는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최대의 염원이며, 항상 여자 측에 책임이 돌아가게 마련인 자식 없는 결혼 생활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딸들을 매우 일찍 시집보낸다. p 178
학교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코레아 여성의 교육은 기껏해야 가사를 돌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층 계급 여서으이 대부분은 한글에 숙달해있으며, 그 중 소수는 수박 겉핥기식이기는 하지만 한문도 깨친다. 중산 계급의 여자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예외적인 일에 속하고, 비천한 계급의 여성들 중에서 다만 점쟁이나 무기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다. p 184
나는 결혼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코레아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에 대해 취하는 공경스러운 태도를 두 눈으로 목격한 후, 여성이 어릴 적을 빼놓고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찌 않고 낮은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인 전의 여자들은 누구누구의 딸이라든지 누구누구의 누이라고 일컬어진다. 혼인한 후에는 친정 사람들은 그녀가 시집간 도시의 구역 명이나 마을 또는 동네 이름을 따서 그녀를 호칭하고, 그녀의 시부모는 그녀가 혼인 전에 살았던 곳의 이름으로 며느리 이름을 대신하여 부른다. p 187
아손이 이렇게 조선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많은 글을 쓴건,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그 어떤 조선의 전통보다도 조선의 여성들의 모습이 실로 ‘문화충격’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스웨덴에서 자신의 아내나 딸, 누이,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호칭한다고 상상해보라! 스웨덴 여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따. 그녀들은 단지 불평과 불만에 차 있으며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고 있다. p 188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위인들 중에서 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그 여성 위인들 중에서 그녀들의 당호가 아닌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되는가?
자,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시대가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들은 많다. 물론 옛날에 비하면 정말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네 엄마들을 보자. 우리 엄마들은 본인의 이름은 잊힌채, 아직까지도 ‘ㅇㅇ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번엔 조선 왕실이다. 아손은 독일인 의사인 분쉬박사를 만났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분쉬 박사가 갑작스레 앓아누운 태자비(순명효황후 민씨)를 진찰하려 하였으나, 조선정부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분쉬박사의 진찰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픈여자라도 외간남자와 얼굴을 맞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조선의 관습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분쉬박사는 태자비의 진찰을 거부당하고, 대신 조선의 남성 의원이 태자비를 진찰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태자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코레아에서 가장 의술이 좋다는 남자 의원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 의원은 환자가 누워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대신 벽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아 진찰을 해야했습니다. 가는 비단 줄을 환자의 손목 주위에 바짝 감아 벽 사이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의원의 손에 전달되었고, 이런 식으로 그 의원은 진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의원은 조그마한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태자비의 아픈 배를 진단할 수 있었는데, 의원의 손이 태자비의 배에 직접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겹의 비단 헝겊과 그 위에 또 솜으로 누빈 일곱 겹의 두꺼운 이불을 태자비의 배위에 얹혔습니다. 결국 이 남자 의원은 자신의 동료 여 의원들이 내린 결론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악귀가 태자비의 배를 처소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속에서 악귀가 빠르게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른 손을 써서 악귀를 몰아내지 않으면 수습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섞인 진단이었습니다. 의원은 그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성문 중 한 문짝에서 빼온 나무로 탕약을 끓이도록 처방을 내렸는데, 아침마다 환자가 이 탕약 한 그릇을 마시면 나을것이라고 했지요.” p 199
아무리 조선의 왕실 의원이라도 남성은 남성. 당연히 제대로 된 진찰은 하지 못했고, 심지어 진찰뒤 병명이라는게 ‘악귀’에 쓰여있다는 것이다.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이 ‘악귀’라니. 심지어 처방전이 성문의 문짝을 탕약으로 끓여서 마시게 하라니. 이건 뭐 건강한 사람도 죽어나겠다. 결국 태자비는 죽었다.
황족일 경우 그 시신은 깨끗히 씻기고 수의가 입혀진 다음 적어도 다섯달 동안은 서늘한 방에 보관된다. 그동안에 장례식에 드는 비용에 충당할 목적으로 온 나라에 걸쳐 돈이 모금되는데, 대게 스웨덴 돈으로 200~300만 크로나는 족히 된다. 동시에 수천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장례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제작하고,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파견된다. p 202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든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 내 두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p 210
태자비가 죽었으니, 당연히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오죽하면 아손은 그 광경을 수차례 사진으로 담았고,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거라고 했을까. 물론 일반적인 왕정시대였다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동원에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어야할 시대니까. 하지만 태자비 장례식이 거행된 날은 다름아닌 1905년 초이다.
대한제국의 왕실의 위험을 세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을 갈아넣어 태자비 장례식을 거행한 같은 해 11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아손이 본 태자, 그러니까 순종은 참으로 못생겼었나보다. 아니 근데 지금의 내가 봐도 못생기긴했다. 고종도 뭐. 분명 조선 초기만해도 세자가 잘생겼니, 왕이 잘생겼니 하는 말들이 실록에 꽤 남아있었는데. 언제부터 조선 왕실의 외모 유전자가 후퇴했나. 역시 완전한 방계로 틀어버린 선조때부터였을까, 으흠. 아님 또 다른 방계로 틀었던 철종때였을까. 참 아이러니하다.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보였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 통역관이, 나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장군의 신분으로서 코레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했다. 대답하기가 꽤 난처한 질문이었따. 불현듯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생각나서, 코레아 군대의 질서 정연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주신 지고한 황제 폐하이자 코레아 군대의 대원수를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잊을 수 없을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외교적인 답변이 황제의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p 219
고종과 대면한 아손을 보면, 고종의 답정너 성격이 아주 제대로 나타난다(반대로 아손의 처세술도ㄷㄷ). 그러니 자기 부친이 하려던 개혁마저 다 뒤로 엎어버렸겠지. 저러니 민비와 손붙잡고 무당말에 휘둘리며, 척족들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줬겠지. 다시한번 느끼지만 고종은 오롯이 자기의 권력과 무사안위만 중요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종이 자신의 무사안위에 급급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의 백성들-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나태한-은 그동안 속수무책인 채 손만 벌리고 서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황제와 황태자를 1년씩이나 가두어두다시피 했을 때도 나서서 멍에를 벗기기는 커녕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못한 가련한 백성이었다. 이런방식으로 왜국(난쟁이족)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조선 안에서는 이제 사실상 왜족이 군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의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방법은 조선 민족의 수천 년 전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하게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p 255
전통적으로 문자는 양반네들의 전유물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글공부를 할 수 없었다. 배움이 무기인데, 나라에서 나서서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기를 들 수가 없었다. 뿐만이랴? 양반네들의 세금탈취에 허리 필 세도 없이 일만해야했던 그들이었다. 그런 백성들이 작정하고 들어온 일본인을 상대할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만약 이 십자가들이 보존될 수만 있다면, 이것들은 일본인들이 코레아를 강점한 동안에 저지른 가장 악랄한 행위에 대한 경종이 될것입니다. 바로 이 하얀 십자가가 서있는 곳은 세 명의 코레아 농부들이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데 대한 항거의 뜻으로 최근에 완성된 철로를 부수려다가 발각되어 무참히 총살을 당한 장소이지요. 이 십자가 세 개에 몸이 묶인 세 명의 불쌍한 ‘죄수’들이 여기에 서 있었고. 땅이 울퉁불퉁한 저쪽에 일본 군인들과 그들의 지휘관이 정렬해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발사 명령이 떨어졌고 군인들은 57발의 총탄을 날렸습니다. 코레아인들은 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지요. 또한 시체를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시체는 이곳에 엿새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매장하기 위해 시체를 옮길 때는 독수리와 육식 조류들이 얼굴을 파먹어 신분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서서 이 비극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코레아에서 본 일본인의 인상은 일본에서 받은 그들의 인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물의 외면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p 267
정말 충격적인건, 이 책에 일본인이 조선의 백성들을 총살하는 사진이 무려 4컷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가련한 조선의 백성들, 왜 일본인에게 총살을 당했어야했나? 그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일본인들이 강제로 조선 땅을 빼앗아가서, 항의하고 싶어도 항의할 방법이 없어서 철로를 부수려고 했는데 일본인에 발각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그들을 사로잡아서 십자가 기둥에 묶고, 57발의 총탄을 달렸다. 3명을 죽이는데 57발의 총탄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총으로 난사를 했다.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갈동안, 조선의 위정자라는 것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휴....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가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암울한 역사 속에서 ‘리더’로 뽑으면 안될 사람들을 가릴 수 있는 눈은 나름대로 생겼다고 자부하는데 말이다. 매번 우리나라의 리더가 될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 왜 뽑으면 안될 사람만 수두룩한지. 대선 이후 다음 5년도 우리나라는 왠지 암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