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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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조선판 요괴열전이다. 심지어 무려 실록에도 기록된 요괴들의 이야기다. 조상님들 두루마기 입고, 갓을 쓰던 그 시절에 무슨 요괴야? 그냥 단순히 상상아니야? 라고 하고 싶지만..... 놀랍게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 말이다. 



엄청나게 유명했던, 단순히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별에서 온 그대』, 『푸른바다의 전설』 의 모티브도 전부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에서 나왔다. #별에서온그대 모티브는 《조선왕조실록》, #푸른바다의전설 모티브는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서 나왔다.



자 그럼 본 책을 리뷰하기에 앞서, 맛보기용으로.... #별그대 #푸른바다전설 에 대한 이야기를 스윽 펼쳐본다.


"간성군(杆城郡)에서 8월 25일 사시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태양이 비치었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는데, 우레 소리가 나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갈 즈음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니, 푸른 하늘에서 연기처럼 생긴 것이 두 곳에서 조금씩 나왔습니다. 형체는 햇무리와 같았고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멈추었으며, 우레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났습니다.


원주목(原州牧)에서는 8월 25일 사시 대낮에 붉은 색으로 베처럼 생긴 것이 길게 흘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갔는데, 천둥 소리가 크게 나다가 잠시 뒤에 그쳤습니다.


강릉부(江陵府)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차 커져 3, 4장(丈)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했습니다.


춘천부(春川府)에서는 8월 25일 날씨가 청명하고 단지 동남쪽 하늘 사이에 조그만 구름이 잠시 나왔는데, 오시에 화광(火光)이 있었습니다. 모양은 큰 동이와 같았는데, 동남쪽에서 생겨나 북쪽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매우 크고 빠르기는 화살 같았는데 한참 뒤에 불처럼 생긴 것이 점차 소멸되고, 청백(靑白)의 연기가 팽창되듯 생겨나 곡선으로 나부끼며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우레와 북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다가 멈추었습니다.


양양부(襄陽府)에서는 8월 25일 미시(未時)에 품관(品官)인 전문위(全文緯)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듯 하더니 곧 1장 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크기는 한 아름 정도이고 길이는 베 반 필(匹) 정도였는데, 동쪽은 백색이고 중앙은 푸르게 빛났으며 서쪽은 적색이었습니다. 쳐다보니, 마치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도는데, 모습은 깃발을 만 것 같았습니다. 반쯤 공중에 올라가더니 온통 적색이 되었는데, 위의 머리는 뾰족하고 아래 뿌리쪽은 짜른 듯하였습니다. 곧바로 하늘 한가운데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흰 구름으로 변하여 선명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 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두 조각이 되더니, 한 조각은 동남쪽을 향해 1장 정도 가다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한 조각은 본래의 곳에 떠 있었는데 형체는 마치 베로 만든 방석과 같았습니다. 조금 뒤에 우레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끝내는 돌이 구르고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그 속에서 나다가 한참만에 그쳤습니다. 〈이때 하늘은 청명하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0권, 광해 1년 9월 25일 계묘 3번째기사 - 강원도에서 일어난 기이한 자연현상에 대해 강원 감사 이형욱이 치계하다


위 기사가 별그대의 모티브가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아주 멋진 외계인 김수현을 만날 수 있.ㅇ.....ㅋㅋㅋㅋㅋ 흠흠흠. 위 기사는 말그대로 기이한 자연현상을 기록한 것인데, 이 자연현상에 현대인들이 상상을 한스푼 첨가하여 멋진 판타지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요괴에 대한 기록도 실려있는 《조선왕조실록》인데,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한 기사 쯤이야!



김담령이 흡곡현의 고을 원이 되어 일찍이 봄놀이를 하다가 바닷가 어부의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어부에게 무슨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부가 대답했다.


“제가 고기잡이를 나가서 인어 여섯 마리를 잡았는데, 그중 둘은 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넷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나가서 살펴보니 모두 네 살 난 아이만 했고,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으며 콧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귓바퀴가 뚜렷했으며 수염은 누렇고 검은 머리털이 이마를 덮었다. 흑백의 눈은 빛났으나 눈동자가 노랬다. 몸뚱이의 어떤부분은 옅은 적색이고, 어떤 부분은 온통 백색이었으며, 등에 희미하게 검은 무늬가 있었다. 남녀의 음경과 음호 또한 사람과 똑같았으며,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주름 무늬가 있었다. 이에 무릎에 껴안고 앉히자 모두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며, 사람을 대하여서도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하얀 눈물만 비 오듯 흘렸다. 김담령이 가련하게 여겨 어부에게 놓아주라고 하자, 어부가 매우 애석해하며 말했다.


“인어는 그 기름을 취하면 매우 좋아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습니다. 오래되면 부패해 냄새를 풍기는 고래 기름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요.”


김담령이 뺴앗아 바다로 돌려보내니 마치 거북이처럼 헤엄쳐 갔다. 김담령이 무척 기이하게 여기자, 어부가 말했다.


“인어 중에 커다란 것은 크기가 사람만 한데 이것들은 작은 새끼일 뿐이지요.”



- 어우야담 만물편:인어- (돌베게, p 764)


위 야사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다. 이 일화를 찾을라고 간만에 책장에서 벽돌책인 어우야담을 꺼내서 읽었다. 후... 


다만 여기서 함정인 것은 어우야담 속 인어를 구출해준 김담령,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이민호가 맡았던 김담령은 실제로는 그리 착한 원님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위 야사와 드라마 판타지로 인해 완전 착한 인물인줄 알았던 김담령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여러번 나올 정도로 부패한 조선의 관리였다^^.....


여기까지가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리뷰전 맛보기! 이제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저자가 머릿말에서 말했듯이 이 책에는 실록에 실린 총 20여 종의 괴물(또는 요괴)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실록에 대한 기록과 당대 상황을 서술하며, 진짜 괴물이었는지를 추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건....조선괴물지도! 



실록을 보면 이 괴물들이.. 전국 방방곡곳에서 나오는데, 독자들이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한반도 지도상에 각 지역별로 괴물들이 출몰(?)위치를 표기한 것이다. 이런건 책 페이지 말고도, 별도 족자형식(?)의 부록으로 줘도 좋을 것 같은데...ㅋㅋㅋㅋㅋ



조선의 괴물지도


1. 전쟁으로 쇠락한 지네호텔: 오공원 (충청도)


2. 천하의 전우치를 골린 여우: 흰 여우 (전라도)


3. 풍년과 흉년을 예언한 행운의 편지: 삼구일두귀 (전라도)


4. 가뭄과 홍수보다 혹독한 농부의 적: 강철 (경상도)


5. 남해를 붉게 물들인 별: 천구성 (경상도)


6. 고래기름보다 좋은 인어기름: 인어 (강원도)


7. 왕건으로 이어지는 용의 계보: 용손 (경기도)


8. 부처가 된 세조의 경고: 생사귀 (전라도)


9. 성종의 관심을 끈 땅속 귀신: 지하지인 (서울)


10. 중종을 떨게 한 연산군의 그림자: 수괴 (서울)


11. 인종이 죽자 나타난 검은 기운: 물괴야행 (황해도)


12. 사도세자를 향한 저주: 도깨비 (전라도)


13. 정조의 마음을 어지럽힌 사슴과 곰: 녹정과 웅정 (경상도)


14. 조선이 빅풋은 벽곡의 달인: 안시객 (강원도)


15. 바다 건너 거인의 나라: 거인 (강원도)


16. 행운의 상징, 불행의 상징: 금두꺼비 (강원도)


17. 전쟁을 끝낸 사슴 발의 여인: 녹족부인 (평양)


18. 코끼리, 얼룩말 그리고 불가살이: 박과 맥 (평안도)


19. 호랑이를 떨게 한 사자: 산예 (함경도)


20. 만인의 피를 마신 뱀: 만인사 (함경도



 풍년과 흉년을 예언한 행운의 편지: 삼구일두귀 (전라도)


조선판 행운의 편지(?) 주인공 삼구일두귀. 머리는 하나요, 입이 세개 있는 요개라는 뜻이다. 전라도지방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내용대로라면 삼구일두귀가 처음 내려온 곳은 함평이 아니라 능성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구일두귀는 능성의 한 부잣집에 내렸다. 이상한 모습에 겁먹은 부자는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우호를 표하기 위해 밥을 대접하는 듯 하다. 삼구일두귀는 밥을 한 동이나 먹었다. 당시 유행한 이야기에서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는 것은 종종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듯 싶다. p 045


확실히 옛날엔 팩트체크(?)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더라, 한양에서 멀디 먼 전라도에서 일어나는 요괴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들테니, 장계를 받는 그대로 실록에 기록했다는게 딱 느껴진다. 허허허허. 실록이란게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아주 중요한 보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쓴거고, 사람이 쓴만큼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뭐 여튼 너무나 생소한 삼구일두귀라는 요괴. 그냥 생소한 요괴로 끝나면 거기서 끝날텐데, 실록엔 그 뒷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런 내용이!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문이 퍼진 과정이 꽤 흥미롭다. 특히 149세 먹은 승려라는 인물의 행적이 눈길을 끄는데, 8월 3일자 기록은 앞서 5월 26일자 기록보다 이를 더욱더 자세히 소개한다. (생략) 즉 나이 많은 승려가 직접 전라도에 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 운남성 원광사라는 절에 살던 어느 노인이 149세가 되어 세상을 뜬 후 그 혼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혼백은 미래에 난리가 난다고 예언한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 중에 무당이 있는 것을 보면, 무당이 굿하는 중에 혼백이 씌웠다고 하면서 말이나 노래로 사람들에게 전한것일지 모른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예언이 편지로 전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편지에는 예언 외의 다른 말도 쓰여 있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믿지 않으면 눈이 먼다.


- 여기 적힌 내용을 한 번 전하면 한 몸이 재난을 피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두 번 전하면 집안이 재난을 피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세 번 전하면 태평한 시절을 본다. p 047~049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7명에게 보내야~’ 라고 하는 한때 엄청 유행했던 그 행운의 편지가 무려 5백년 전 조선에서도 성행했었다니!!!!!!!!!!


유행은 돌고돈다더니, 이런 거까지도 돌고도나보다.




가뭄과 홍수보다 혹독한 농부의 적: 강철 (경상도)


나에겐 일요 웹툰(합격시켜주세용/이온)에서도 종종 만나서 익숙한 깡철이가 나왔다!!! 완전 반갑반갑 !!!! 웹툰에선 용이 되기 위한 선발과정에 참가한 이무기............이무기인가, 이무기사촌인가, 뭐 여튼 그런 격의 캐릭터로 나온 깡철인데!!! 크 ㅋㅋㅋㅋㅋㅋㅋㅋ


조선 후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괴물을 꼽는다면 단연 ‘강철’이라고 생각한다. 강철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로 소, 말, 용 등을 닮았다고 묘사된다. 괴물 이야기치고는 기록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고,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강철 이야기는 한 두해 동안 잠깐 돌고 만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이상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이수광, 이익, 이덕무 같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들도 짧게나마 강철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다. p 055



강철 이야기는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 싶다. 물론 완전히 맥이 끊겨버린 것은 아니다. 18세기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한 괴물 이야기였던 만큼, 흔적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최근까지 전승된 민속놀이로, 농사를 망치는 재해를 쫓아달라고 기원하는 ‘꽝철이 쫓기’가 있다. 《한국민속신앙사전》에 실린 사례를 보면 경상북도 일대의 농민들이 꽹과리와 징을 치며 산 능선을 돌았다고 한다. 꽝철이가 산 능선에 앉는 버릇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꽝철이를 쫓고 풍년을 빈 것이다. 꽝철이는 조선시대 기록에 등장하는 강철의 발음이 변형된것으로 보인다. 다른 민속놀이에서도 강철을 용이 못 된 이무기 비슷한 것으로 보고, 꽝철이, 깡철이 등 변형된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p 056



이렇게 보면 강철은 어떤 특정 자연 현상을 상징하는 괴물이라기보다는, 농사를 허망하게 망치는 재해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홍수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강철을 폭우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가 유행하고, 가뭄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강철을 열기와 메마름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가 유행한 것 아닐까. p 059



웹툰에서도 깡철이가 뜨겁고(?) 불을 잘 쓰던데, 오. 진짜였어!! 심지어 조선시대에 제일 핫했던 친구였어!! 특히 농사가 흉작일때는 더더더욱 핫하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친구였어!!!! 하지만 그것도 다 한철. 농업이 주였던 조선과는 달리 현재 대한민국에선, 깡철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T_T..


심지어 농촌인구가 줄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 마저 줄어들고 있으니. 조만간 깡철이도 사라질듯 싶다. 주거형태 변화로 인해 우리나라 가택신들이 사라졌듯이...




고래기름보다 좋은 인어기름: 인어 (강원도)


위에서 드라마 #푸른바다의전설 및 어우야담으로 언급했던 인어이야기! 무려 출처는 강원도다. TMI이긴 하지만, 춘천에 있는 할머니댁에 갈때마다 의암댐에 인어상을 매번 봤었다. 그 당시에는 왜 뜬금없이 서양의 인어(?)가 왜 춘천에 있지? 라는 물음표가 엄청 떠다녔었는데. 이게 다 이유가 있던거였다니..! 아 물론 강원도에서 발견된 인어들은 우리가 아는 서양의 이쁜 인어공주가 아닌, 중국의 교인쪽에 가까웠던 것 같긴 하지만;;


조선시대 이야기에서 인어는 신비롭고 고결한 바다의 왕족(서양인어)도 아니고, 선원들을 유혹하는 마법적인 매력을 지닌 괴물(세이렌)도 아니다. 좀 희귀할 뿐이지 그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다. 낚시꾼에게 붙잡히고, 어부는 ‘기름 짜는 것’으로 인어의 쓸모를 말한다. 얼굴은 사람처럼 생겨 김담령에게 깊은 동정심이 우러나게 할 정도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인어를 대하는 태도는 여느 물고기를 대하는 태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고래기름은 상하면 냄새나지만 인어기름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p 083



조선의 인어 이야기가 이 한 편 뿐인 것은 아니다. 역시 《어우야담》에 짧게 실린 것으로 성격이 좀 다른 이야기도 있다. 간성, 그러니까 지금의 강원도 고성에서도 인어 한 마리가 잡혔는데, 피부가 눈처럼 희고 여성처러 ㅁ생겼으며, 장난을 치니 깊은 정이라도 있는 듯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 놓아주니 다시 돌아오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다고 한다. 여성 인어가 남성 뱃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유럽권에서 유행한 인어 이야기와 좀 더 비슷해보인다. 강원도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인어를 목격했다는 사례가 있다. 예를들어 18세기에 활동한 학자 위백규의 《격물설》에는 “근년에 어부가 인어를 잡았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확한 장소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주로 호남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하면, 전라도의 남해안이나 서해안이 배경이지 않을까 싶다. p 084



인어이야기가 널리 퍼진 데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중국 고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고전에는 예로부터 ‘교인’이라고 하는 바다에 사는 사람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교초’라는 매우 신비로운 옷감을 짠다거나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문학의 소재로 좀 과할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작가들도 시를 지으며 교인이나 교초 같은 말을 즐겨 썼다. p 086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후기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울릉도의 ‘가지어’를 바다에 사는, 사람과 비슷하지만 사람은 아닌 동물로 소개한다. 가지어는 울릉도, 독도에 사는 바다사자의 한 종류인 강치를 일컫는 말인듯 하다. 《동사강목》이 강치를 어린아이와 비교하고 기름짜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수염이 있다는 것도 강치의 모습과 닮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인어 이야기는 뱃사람들이 강치의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나 귀여운 모습을 신기하게 여겨 말을 전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p 089



조선이나, 옆나라 중국이나 양쪽 모두 ‘고래기름보다 인어기름이 낫다’라는 말이 꾸준히 나온 것을 보면 인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나보다. 다만 당시에는 과학 연구가 발달하지 못했기에 ‘사람과 비슷한 물고기’로 보았을 뿐이랄까?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발견된 인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도 저자와 비슷한 생각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말한 인어는 독도의 강치같은 바다사자는 아니었을까하고.



하지만 인어가 사라졌듯, 강치도 사라졌다.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일본놈들은 마구잡이로 강치를 사냥해서 강치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강치 지방은 기름으로 이용하고,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하고, 살아있는 생물은 서커스용으로 학대했다. 그렇게 우리 동해안에 살았던 강치는 인어전설만 남긴채 사라졌다는 슬픈 이야기.




왕건으로 이어지는 용의 계보: 용손 (경기도)



지금까지 기록에 남아있는 요괴들은 대체적으로 자연환경이나, 생소한 동물을 비유한 거라고 한다면... 용손, 즉 용의 자손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용의 자손, 어쩌면 지금도 성씨를 바꿔서 근근히 살아남았을수도 있다. 이렇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한반도에서 용의 자손이 약 5백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기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나라, 왕건이 세운 ‘고려’를!


용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 또는 유럽이나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활용할 법한 소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동안 용의 자손, 즉 ‘용손’이 있다는 괴물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친숙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려시대에는 임금이 바로 용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p 096



용손은 천명이 다하고, 선리는 부창해 영화하도다. 천년 전에 그 징조가 심히 밝았도다. 하늘이 열어주어 우리 임금이 점치었또다. 아름답다! 천만 년의 태평을 열어놓았도다.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이요, 높고 높은 화악이로다. p 097 (인용 《태종실록》)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해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 했다. 그 후 작제건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으로 화해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해 우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아니했다. p 104 (인용 《세종실록》)



정말로 1,000년 전에는 서해에 용이 살았고, 그 딸이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근거는 없지만 용의 딸이라는 저민의의 정체가 사실 해적은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본적이 있따. 왕건의 할아버지뻘이라면 장보고가 해적을 물리치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다. 특히 장보고가 몰락한 후 해적은 신라의 중요한 사회 문제였다. 거타지 이야기에도 선원들이 옛 백제 땅 출신 해적들을 방비하괒 고민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작제건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저민의는 용의 딸이 아니라, 용의 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해적이었을 수 있지 않을까. 저민의가 이끄는 해적 무리가 다른 무리와 파벌 싸움을 벌이다가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데, 화살을 잘 쏘는 작제건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상대편을 물리친 사건이 용손 이야기로 신비롭게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p 105



그러니까 한마디로 작제건이라는 사람이 서해용왕의 딸과 결혼해서 아이를 나았는데, 그 아이가 왕륭이다(1대용손). 왕륭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왕건(2대용손)이다. 즉 왕건의 할머니가 용이고, 왕건은 용의 손자라는 이야기. 이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대대손손 왕씨가 왕이되니, 왕씨가 용손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심지어 야사에 따르면 고려 말 우왕은 본인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 왕씨 혈통이 맞다며 겨드랑이에 있는 용의 비늘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이렇든 저렇든 한 나라를 세우는 왕 치고 출생의 비밀이 없는 왕은 없으니, 고려 왕씨의 용손 전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는게 맞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저 이야기가 정말 진실이라면,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 땅에는 용손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조선초 살아남아 성씨를 바꾼, 고려왕씨의 후손은 현재도 살아있으니, 그들 모두가 용손이 아닌가! 물론 용의 피가 1천년의 세월만큼 엄청엄청 옅어졌겠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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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1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어가 안 예뻐서 ㅎㅎㅎ 그러고 보면 산해경에도 인어아저씨가 나오지 서양쪽의 인어공주 모습은 없는듯합니다. 곽재식작가님 정말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나 지식이 많은 듯 해요. 책도 재미있게 쓰시고 ~ 저도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피로님 *^^*

피로 2022-02-24 11: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산해경에서 나오는 인어아저씨가 고대 한반도에서 알고 있는 인어였쬬 ㅎㅎ
현대에 와서 서양의 인어공주 이야기가 흘러들어오면서, 우리 머리속에 인어의 모습이 공주님으로 고착된것같아요 ㅎㅎ

mini74 2022-03-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 축하드려요 ~~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피로님^^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 - 먼 곳에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흔적들
청민 지음, Peter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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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여행에세이다. 여행에세이는 언제 읽어도 좋다. 다만 그 감정이 코로나19 전과 지금이 매우 달라졌다. 코로나19 전에는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오! 여기 찜콩. 여기도 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읽었더랬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의 생활방식이 싸그리 바뀌어버리고, 여행도 쉽게 갈수 없게 됨으로써 나에게 여행에세이는, 조금이나마 여행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대체제가 되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이번 책 『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다만 이 책에선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 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나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같은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 이야기가 왕왕 나오고, 그 이야기속에서 아주 진하게 가족에 대한 애정이 풍겨나오기 때문이다. 조금은 부러울 정도로.



저자의 가족애는 이 책의 구성에서 나타난다. 보통 글과 사진작가가 다를경우 친구나 동업자(?)인 경우를 자주 보았는데, 이 에세이의 사진작가는 저자의 부친이었다. 정말 에세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는 가족과 여행을 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함을 느끼는지 느껴진다. 정말... 책을 읽으면 저자의 가족에 단 한번도 신경을 쓴 적이 없었는데, 이 책만큼은 저자의 가족들이 너무 궁금해졌다. 가족간의 사랑이 어느정도가 되어야, 좋은 장소를 보면 가족과 함께 가고 싶고, 아버지가 자신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어머니가 주식으로 쌀이 아닌 파스타를 줘도 오히려 이해하며 맛있게 먹고, 남매간에 이렇게 화목할 수 있을까?



나도 저자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더랬다. 대부분이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여행이 많았지만, 언제나 어딜 가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가 당연하게 운전대를 잡았고, 엄마가 지갑을 챙기고, 나는 여행코스를 짰다. 물론 이 가족여행에는 언제나 동생은 없었다. 



동생, 그러니까 엄마아들이 내 여행계획에 없는게 아주 당연했다. 말이 동생이지, 뭐 나에게는 그저 혈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어려서부터도 그렇게 우애가 좋지 않았고, 둘이 성향차이도 너무컸고, 서로를 이해못했다. 심지어 엄마아들은 내 인생에 수차례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그 과정에는 아마 내 엄마아빠의 양육방식이 문제였을거다. 엄마아빠 눈에 나는 고작 한살 어린 남동생을 챙겨야하는 장녀였으니까. 그러니까 80-90년대 가정에서는 흔히 보였던, 장녀-남동생 양육방식이었다. 아마 지금 오은영박사님이 보면 솔루션을 받아야 할 가족이었을지도. 



그래서 그런가, 나에겐 ‘동생’이라는 존재가 딱히 없었다. 엄마아빠야, 내 엄마아빠니까 사랑하지만, 글쎄. 저자처럼 저렇게까지 애틋하고 살갑고, 좋은 걸 보면 생각날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여도, 성장과정에서 나도모르게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좋은 걸 보면 생각나고, 보여주고 싶은건, 혈연이 아니지만 나에겐 정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는 우리 신랑뿐. 아! 몇달 뒤에 태어날 내 새끼까지 포함해서!



아, 뒤늦은 깨달음! 생각해보니 저자와 나는 그저 ‘가족’의 범주가 다를뿐, 그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같은 결이다. 난 결혼 후 신랑와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다. 항상 좋은 걸 같이보고,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서로 사진찍어주는 거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하고! 이렇게 보니 저자의 가족애가 이해된다.




 


 



여행하면서 알게 됐다.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수 있으려면 돈이 든다는 사실을. 입장료를 지불하고 여행 경비를 내고, 시간과 돈을 쓰면서 말이다. 지금껏 나의 취향을 지켜준 얼굴들이 스쳐 갔다. 어릴 적 고모가 우리에게 사줬던 해리포터 책값, 거기에 함께 읽으면 좋을거라며 넣어준 초등생 필독서들. 그리고 같이 먹으라고 사준 간식들까지. 그때는 어려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돌아보면 전부 지켜진 마음이었던 거다. 당시 고모가 어린 조카들에게 준 책은 그냥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세상에는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런 세계도 있어’라고 말하며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끔 해준 선택권이었다. p 024



와, 계속해서 놀란다. 나에게 고모라는 존재는 선물을 줬다가, 자기 자녀 태어났다고 빼앗간 존재일뿐이었는데. 그때 내 동심은 바사삭이었는데. 하하.



여튼!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려면 돈이 든다는 사실은 어렸던 나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내 취향들을 보면, 돈도 오지게 많이 들었더랬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만, 책을 사기엔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론 턱없이 부족하고, 그러다보니 대여점에서 빌려 읽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심지어 대여료도 역시나 돈이 나가기에, 그 돈을 벌려고 얼마나 우유배달을 했던가^_T(울 엄마님은 나에게 용돈을 주는게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시급을 주었음..)



그렇게 열씸히 돈 모아서 책 빌려읽기! 그러다 머리통이 좀 커지니 내 시급도 올라가서, 받는 돈도 많아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책 사들이기! 하필 이렇게 머리통이 커졌을 땐, 만화책에 빠져있을 때라 만화책을 그렇게 사모았다. 그것도 원서로. 나름대로 일본어를 혼자 깨우쳤고, 그러다보니 원서를 읽기 시작하고. 근데 또 원서를 사면 국내판보다 금액이 비싸서, 또 돈이 쭉쭉쭉......T_T.... 거기다 장난감까지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돈을 버는 족족 내가 좋아하는 걸 위해 써버렸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려면, 그만큼 금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걸 너무 어렸을때 깨달은 불쌍한 나.



근데 또 아이러니한게, 내가 좋아해서 내 돈써서 샀던 것들을, 흥미가 떨어져서 되파니까 세상에 이게 또 돈이 되네? 그 어린나이에 제태크를 시작했고, 그렇게 내 돈 써서 산걸, 다시 되팔아서 돈을 조금 더 벌고, 또 그 돈으로 그때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는 무한 반복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다 커서도 이러고 있다는 것...ㅋㅋㅋㅋ



다만 과거에는 유형의 것들을 좋아해서 되팔면 돈이 되었지만, 지금은 여행같은 무형의 것 들을 더 좋아하게 되버려서....재테크가 잘 안된다. 하...




 


여름밤의 남산,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삐걱거리던 그에게 우리 좀 설렁설렁 살자던 나.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너무 주먹 꽉 쥐고 살지 말자며, 어린 동생을 챙겨야 하는 맏이말고 그냥 너답게만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이었는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의 끄덕임은 용기였을지도 모르겠다. p 078



몽골로 떠나게 된 데에는 오래된 친구의 채근도 있었지만, 나때문이기도 했다. 초여름이었던 그 무렵, 나는 한 사람과의 권태로운 관계를 정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만 생각했던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마음이 끝나버린 것과 별개로 지난 기억을 충분히 애도해야 했으니까. 잔잔하게 남은 감정은 치우려고 하면 할 수록 마음에 잔열을 남겼다. 그래서 떠나자는 친구의 말에 기대 도망치듯 몽골로 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p 082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내던져서, 지금껏 마주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시련(?)들과 마주하면서 머리속이 복잡할때가 참 많았다. 그럴 땐 여행이 참 좋은 것 같다. 그것도 오랜 친구와 훌쩍 떠나는 여행은, 가족과 떠나는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나 역시도 힘들었던 사회초년생시절 어느때였나, 내 오랜 친구와 훌쩍 여행을 떠난적이 있었다. 한번은 당일치기 군산으로, 또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아! 여행은 아니지만 정말 현실도피를 하고 싶어서, 고등학생 때 이 친구를 무작정 끌고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창덕궁이었나 ㅋㅋ)으로 향했던 적도 있었다. 답답한 수험생활을 벗어나고자 했던 그때였는데, 왜 하필 도피처로 나는 궁을 선택했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이 외에도 공연보러가자고 이 친구를 끌고가고, 어디 가자고 또 끌고가고. 정말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때마다 여기저기 많이도 끌고다닌 것 같다.



결혼 후에는 내 오랜 친구와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수험생 시절 훌쩍 궁으로 떠났던(?) 그때처럼, 매년 여름 차를 끌고나와서 서해바다를 보러가곤했다. 정확히는 오이도를 지나, 서해바다를 품은 시화나래휴게소를. 요 몇년 간은 코로나때문에, 서로 안전상(?) 비대면으로만 연락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가끔 서로 줄거 있으면, 마스크쓰고 문앞에서 주고 쿨하게 헤어진다.



분명 이 친구와 나는 성향이 꽤나 다른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맞는 건..... 전생에 부부였나 ㅋㅋㅋㅋㅋ




 


여행의 끝은 언제나 조용하다. 분명 어제까진 낯선 나라의 골목을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담요를 둘러 덮고 있다. 승객들 모두가 잠들어 조용한데,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여행의 꼬리가 소란스러운 꿈처럼 사부작사부작 밟힌다. 내일부턴 원래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겠지. p 094



여행의 끝자락에 <ONCE>를 다시 꺼내는 건 반복되는 나의 여행들이 이 영화와 닮은 것 같아서다. 떠나고 싶어 근질근질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시끄러운 이벤트는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현실로 돌아가는 사랑과 닮은 것 같아서.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두고 왔던 삶을 이어갈 내일의 나와 닮았다. p 095


아, 여행의 끝. 여행의 끝은 정말 싫다. 여행의 시작과 여행의 끝은 그 방식이 언제나 같다. 예컨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면 시작과 끝도 비행기, 국내여행이라면 시작과 끝은 자동차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쩜 여행의 시작과 끝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나 다른지.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설렌다. 내가 있던 현실과는 다른 이세계로 향하는 느낌이랄까? 반면에 여행의 끝은 정반대다. 계속 이세계에 있고싶은데, 목덜미를 잡혀서 어쩔수 엎이 현실로 끌려오는 느낌. 진짜 딱 그런 느낌이다. 내가 몇일간 낯선곳을 걸어다니며 여행을 했던 기억들은 꼭 꿈인 것마냥, 그렇게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여행의 끝. 



하지만 여행의 끝이 안좋은 것만은 아닌것이, 여행의 끌을 지남으로써 나에게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꿈꾸게 한다. 팍팍한 현실을 살려면, 언제든 여행이라는 쉴틈이 있어야하니 말이다^_T..




 


여행만 끝나면 여행을 마쳤을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낸다. 처음엔 그저 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뭔가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는 걸 모으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을 수집하자는 아이디어가 번뜩였고, 나의 엽서 여행은 시작됐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상점에 들려 엽서와 국제우표를 사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p 148



때로 여행은 물건으로 기억된다.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기억하고 싶다는 핑계로 값을 지불하는 느낌이지만, 물건이 지닌 깊이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니까. 처음에야 여행지에서 데려왔다는 낯선 신기함에 매일 들여다보지만, 삶은 언제나 정신없이 빠르고 여행의 기억은 바쁜 일상에 쉽게 잊힌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잊고 지냈던 여행의 물건이 다시 보인다. 아! 여기 있었구나. 그제야 정신없이 흘러가던 하루를 멈춰 세운다. 이거 거기서 샀었지. 맞아 나 그곳도 갔었지, 한 호흡을 쉬게된달까. p 164


나는 여행을 기념할만한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마그네틱, 팜플릿, 입장권 밖에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마그네틱을 사고, 팜플릿이랑 입장권은 티켓북에 정리하는걸로 내 여행을 기록하곤 했다. 그런데! 엽서라니!!!!!!!!!!! 와, 나는 왜 저자처럼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엽서와 국제우표를 사서,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내는 것. 여행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과거의 내가 보낸 여행엽서를 받을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여행은 끝났지만, 다시금 여행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것만 같다. 하, 이런 좋은 방법을 진작에 알았다면 해외여행, 국내여행 가는 족족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냈을텐데. 그러고 어느 날 그 엽서를 받으면 괜시리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서 기뻤을거고, 다시없을 여행 기념품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을텐데T_T 역시 여행 고수들은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도 남다르다. 이런건 기억해놨다가 잘 써먹어야지!



아... 여행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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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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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태교★는 외국인이 바라본 1904년도의 대한제국의 모습이 담긴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거다」 라는 책이다. 예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구입하고는 방치해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다는건 안비밀! 그도 그럴것이... 조선후기-특히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책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해도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놈들의 행태에 분노만 차오르는지라, 읽으려고 해도 섣불리 손이 안간게 사실이다. 자기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들춰보는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피하고 외면할수록, 역사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일본놈들과 다를바가 없으니!



서애 류성룡의 말처럼 ‘잘못된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훗날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아무리 어두운 자국의 역사라도 꼭 읽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의 저자 아손 그렙스트는 스웨덴 사람이자 기자이다. 그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하지만 아손은 도쿄에서 본인이 원할만큼의 취재를 할 수 가 없었다. 왜? 러일전쟁의 무대는 러시아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학교 근현대시간에 배웠듯 러일전쟁은 조선 땅이 주 무대였다.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인데, 전쟁터는 조선 땅이라는 아이러니(자매품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청일전쟁도 조선 땅에서 일어남). 



이게 도쿄에 가있는 아손이 러일전쟁에 대해 제대로된 취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손은 실제 전투가 벌어지던 지역, 그러니까 조선으로 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기자들에게 전시여권을 발행해주지 않았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방도가 없었다. 바로 그 때!!!!! 일본으로 파견을 온 스웨덴인 장교가 나타났다. 그는 아손에게 조선으로 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기자라는 신분은 잊어버리시고 보통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역상으로 위장하는 것이지요. 개항지에 있는 사업 동료들을 찾아간다고 하세요. 요코하마의 수입상에게서 상품의 견본을 구하고 낯가죽을 두껍게 해두세요. 나가사키를 지나 부산, 제물포로 가세요. 거기에서 수도 서울은 바로 코앞입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문화 민족들 중 하나를 대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수도 중 하나와 접할 수 있을겁니다. 일본에 합병되기 바로 전의 코레아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전쟁 후 코레아의 운명은 일본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p 022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오기 위해 아손은 외국인이라는 본인의 국적을 무기삼아, 신분을 기자가 아닌 ‘상인’으로 위장하였고, 그렇게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아손.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부산은 생각보다 더 낙후되어있었다. 정확히는 조선인이 사는 촌락들이 말이다. 반면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부산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시를 하나둘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사람 살기 좋은 땅은 일본인들이 빼앗아가고, 조선인들은 낙후된 지역으로 몰렸던 것이다.


부산에서 받은 코레아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거리는 좁고 불결했으며, 가옥은 낮고 볼품이 없었다. 일본에서처럼 상점이나 눈길을 끄는 오래된 절도 없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겼으며, 문밖에는 집에서 버린 쓰레기가 쌓여 있고, 털이 길고 측은한 모습의 개들이 쓰레기 주위에 모여 먹을만 한 것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하수도가 있는데, 끈적끈적한 바닥에서 온갖 종류의 오물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는 머리가 더펄더펄한 애들이 놀고 있었는데 어제 그제 세수한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p 033



조선 땅을 하나둘 차지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속내는 스웨덴 사람인 아손의 눈에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코레아의 해변 촌락을 가로질러서 인력거꾼은 길이 더 넓고 비교적 깨끗한 시가지로 방향을 돌렸다. 생활력이 강한 일본 종족의 제국주의 근성은 코레아인들의 멸망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들이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은 코레아인들의 개혁된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것이었다. p 034



만약 조선후기 양반네들이 자신들의 탐욕에 빠지지 않고,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점차 근대화를 해나갔다면 어땠을까? 분명 조선에는 일본놈들이 근대개혁을 했던 시기보다 더 빠르게, 몇 차례나 근대화 및 개혁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오는 족족 차버린건 조선정부와 사대부라 불리는 양반네들, 그러니까 조선의 위정자들이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정신머리가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일본놈들이 저렇게 쉽게 조선 땅에 발을 디딜 수는 없었을텐데. 이게 내가 조선후기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분노하는 이유다.





조선땅에 들어온 아손은 조선의 사회상을 사진으로 정말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사진은 그가 쓴 조선 풍물지,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가히 놀라울만하다. 이렇게나 많은 조선말기의 사진이 남아있다니! 


코레아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따. 똑바로 치켜올린 얼굴은 거침이 없이 당당하였따. 걸음걸이는 힘차 보였으며 의식적으로 점잔을 빼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몸놀림은 일본인의 특징인 벌벌 기는 비굴함과 과장된 예의 차리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p 032



코레아의 고유화폐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노임이 매우 싸고 빈곤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인지, 코레아 화폐 단위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액의 동전 종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100캐쉬에 해당하는 1냥은 스웨덴 돈으로 환산하면 10외레가 된다. 1냥은 10전, 1전은 10푼, 마지막으로 1푼은 다시 10의로 나누어진다. 만약 10크로나에 해당하는 노잣돈을 소액권으로 휴대하려면 1만 캐쉬의 동전을 준비해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동전을 100개 단위로 매듭을 지어 실에 꿴 다음 가지고 다녀야 하니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겠는가! p 075



더 놀라운 사실은 아손이 경부선 철도의 첫번째 승객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침략정책, 그러니까 우리나라 물자를 일본으로 보다 빠르게 옮기기 위한 일환으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 말이다. 그 철도에서 아손은 일본인 대위와 만났고, 한양으로 오는 내내 그와 많은 대화를 하였다.



“코레아의 선비는 어떤 까다로운 사람의 눈에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그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옷을 자기 손으로 입어서는 안 되며 담뱃불도 스스로 켜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이는 말안장에 제 힘으로 오르는 법이 아니고, 또 다루기 힘든 조랑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하더라도 누가 와서 그를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는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비는 사사로운 장사에 관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장사가 바로 노동인즉, 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예절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고 모든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의식적으로 속이려 들지는 않지만 허무맹랑한 이론으로 결론을 맺는 논법은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출된 결론이 옳은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래도 양반들은 기죽는 일이 없지요. 만약 사람들이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다른 논리로 반박을 한다면 그는 예를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고, 미심쩍어 하는 사람을 석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설득시켰따고 스스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p 056



우리는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토의를 했는데, 코레아인들이 일본인들을 왜 눈엣가시처럼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 원인 중 코레아 내의 모든 비경작지와 모든 국내 자원을 일본인들이 유용할 수 있따는 일본 당국의 발표가 제일 컸다. 코레아 사람들은 땅에 대한 애착심이 무엇보다도 강하다. 농업은 생명의 원천이라 만약 농사가 다른 민족의 손에 의해 행해진다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종말이 다가온다는 증거였다. 일시적 점령이라는 게 결국 강탈로 끝날 것이고, 보호를 받는다는 처지에서 대일본제국에 합병이 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p 081



일본인 대위의 말에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그가 하는 말이 대부분이 사실이라 반박불가하다는게 슬플따름이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 답게, 선비들은 죽은 자의 말이나 되뇌이며,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몰락한 양반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대게 몰락한 양반이라할지라도, 양반놈들은 앉아서 글자만 읽을뿐이며, 그 양반들의 부인이 삯바느질등의 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니까. 뿐만인가? 이놈의 양반들은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송시열^^). 정신승리는 또 얼마나 잘하나. 겉으로는 청나라에 조아리면서, 뒤로는 명나라를 계승했다며 몰래몰래 제사를 지내는 꼴이라니(역시나 송시.ㅇ...). 



일본놈들은 이런 조선의 양반네들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혼마 규스케가 쓴 「조선잡기」만 읽어도, 일본놈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기전에 얼마나 철저하게 조선의 문화와 생활습관 등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국에서는 근대화 개혁을 차근차근 시행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조선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시간에 일본놈들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수단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던거다.





 


 



한양에 도착한 아손은 통역꾼인 윤산갈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내 꽁무니를 바싹 쫓는 윤산갈을 대동하고 코레아의 이 신기한 수도에서 나는 첫 번째 산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엠버얼리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거리는 사람은 전혀 없었으나 길 찾기가 쉽지 않았따. 꽤 넓은 몇 개의 거리들이 시내를 관통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완전한 미로를 방불케 했다. 큰길의 대부분이 최소한 60미터 이상의 폭을 가지고 있었고,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그 폭이 원래 6미터가 안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의 한 가운데로는 하수도 역할을 하는 도랑이 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 주위로 점점 작은 건물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급기야 짐을 실은 두 마리의 소과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p 096



서울의 광채가 다른 지방을 절대적으로 압도하고, 모든 코레아 사람이 꼭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서울 내에서만 궁과 임금의 눈길을 끄는 것이 용이하고 또 눈길을 끌게 됨으로써 공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또한 공직자의 신분으로서만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획득할 수 있다. (……) 지방의 백성들은 과세 부담이 큰 반면, 서울 사람들은 완전한 세금 면제를 받는다. 서울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조합을 형성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있지만, 지방은 직인제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각각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관의 권력 남용이나 일반사람들의 사기에 대처할 방도가 없다. p 107


역시 예나 지금이나 수도는 수도인가보다. 심지어 저때는 서울 살면 세금이 완전 면제라니. 이러니 사람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들어가려하지!!




 



아손은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조선의 여성’에 대한 내용에 할애했다. 그도 그럴것이 스웨덴을 비롯한 서양에선 조선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미 두세기나 앞선 18세기 프랑스 여성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뭐, 동서양의 막론하고 여성의 인권이 한참 뒤쳐져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나 달랐다. 



조선 못지않게 오랫동안 왕정이 이어진 서양권에서는 여성이 한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왕의 정부로 권력을 잡고 있던 경우도 많았다. 일반 백성조차도 여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저 참정권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달랐다. 한 왕조가 무너질때마다 혹은 왕이 무능할때마다 그 곁에 있는 여자를 탓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나마 천년전에 있었던 신라의 여성군주들을 보며,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은 그릇된 주자학에 매몰되어,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오롯이 대를 잇는 도구였고, 정쟁의 도구였으며, 언제든지 쉽게 버릴 수 있는 ‘패’였다.



1592년 일본의 히데요시가 코레아를 침략했을 때 수많은 남자들이 목숨을 잃어 조정에서는 모든 남자 노비를 노비의 신분에서 면제시켜주고, 그 이후로는 단지 여자만 노비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제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남자는 노비로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여자는 아직도 많은 수가 노비의 신분에 얽매여 있다. 대개의 경우 여자 노비는 남자 친척의 죄에 대한 대가로 자청해서 노비가 되었거나 노비 신분을 상속받은 사람들이다. p 164



노비가 되는 네 번째 경우로, 한 여자가 너무 가난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할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잘사는 이웃을 찾아가 집과 옷, 연료,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을 노비로 제공한다. 이상한 것은 자유의사에 의해 노비가 된 여자들의 지위는 일반노비들보다 한층 낮다는 것이다. 일반 노비들은 돈으로 자신의 자유를 다시 살 수 있는 반면에 자유의사로 노비가 된 여자들은 이럴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p 165



코레아 여성들에게 지워지는 가장 큰 의무는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최대의 염원이며, 항상 여자 측에 책임이 돌아가게 마련인 자식 없는 결혼 생활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딸들을 매우 일찍 시집보낸다. p 178



학교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코레아 여성의 교육은 기껏해야 가사를 돌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층 계급 여서으이 대부분은 한글에 숙달해있으며, 그 중 소수는 수박 겉핥기식이기는 하지만 한문도 깨친다. 중산 계급의 여자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예외적인 일에 속하고, 비천한 계급의 여성들 중에서 다만 점쟁이나 무기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다. p 184



나는 결혼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코레아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에 대해 취하는 공경스러운 태도를 두 눈으로 목격한 후, 여성이 어릴 적을 빼놓고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찌 않고 낮은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인 전의 여자들은 누구누구의 딸이라든지 누구누구의 누이라고 일컬어진다. 혼인한 후에는 친정 사람들은 그녀가 시집간 도시의 구역 명이나 마을 또는 동네 이름을 따서 그녀를 호칭하고, 그녀의 시부모는 그녀가 혼인 전에 살았던 곳의 이름으로 며느리 이름을 대신하여 부른다. p 187



아손이 이렇게 조선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많은 글을 쓴건,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그 어떤 조선의 전통보다도 조선의 여성들의 모습이 실로  ‘문화충격’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스웨덴에서 자신의 아내나 딸, 누이,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호칭한다고 상상해보라! 스웨덴 여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따. 그녀들은 단지 불평과 불만에 차 있으며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고 있다. p 188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위인들 중에서 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그 여성 위인들 중에서 그녀들의 당호가 아닌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되는가? 



자,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시대가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들은 많다. 물론 옛날에 비하면 정말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네 엄마들을 보자. 우리 엄마들은 본인의 이름은 잊힌채, 아직까지도 ‘ㅇㅇ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번엔 조선 왕실이다. 아손은 독일인 의사인 분쉬박사를 만났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분쉬 박사가 갑작스레 앓아누운 태자비(순명효황후 민씨)를 진찰하려 하였으나, 조선정부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분쉬박사의 진찰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픈여자라도 외간남자와 얼굴을 맞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조선의 관습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분쉬박사는 태자비의 진찰을 거부당하고, 대신 조선의 남성 의원이 태자비를 진찰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태자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코레아에서 가장 의술이 좋다는 남자 의원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 의원은 환자가 누워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대신 벽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아 진찰을 해야했습니다. 가는 비단 줄을 환자의 손목 주위에 바짝 감아 벽 사이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의원의 손에 전달되었고, 이런 식으로 그 의원은 진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의원은 조그마한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태자비의 아픈 배를 진단할 수 있었는데, 의원의 손이 태자비의 배에 직접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겹의 비단 헝겊과 그 위에 또 솜으로 누빈 일곱 겹의 두꺼운 이불을 태자비의 배위에 얹혔습니다. 결국 이 남자 의원은 자신의 동료 여 의원들이 내린 결론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악귀가 태자비의 배를 처소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속에서 악귀가 빠르게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른 손을 써서 악귀를 몰아내지 않으면 수습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섞인 진단이었습니다. 의원은 그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성문 중 한 문짝에서 빼온 나무로 탕약을 끓이도록 처방을 내렸는데, 아침마다 환자가 이 탕약 한 그릇을 마시면 나을것이라고 했지요.” p 199



아무리 조선의 왕실 의원이라도 남성은 남성. 당연히 제대로 된 진찰은 하지 못했고, 심지어 진찰뒤 병명이라는게 ‘악귀’에 쓰여있다는 것이다.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이 ‘악귀’라니. 심지어 처방전이 성문의 문짝을 탕약으로 끓여서 마시게 하라니. 이건 뭐 건강한 사람도 죽어나겠다. 결국 태자비는 죽었다.


황족일 경우 그 시신은 깨끗히 씻기고 수의가 입혀진 다음 적어도 다섯달 동안은 서늘한 방에 보관된다. 그동안에 장례식에 드는 비용에 충당할 목적으로 온 나라에 걸쳐 돈이 모금되는데, 대게 스웨덴 돈으로 200~300만 크로나는 족히 된다. 동시에 수천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장례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제작하고,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파견된다. p 202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든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 내 두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p 210



태자비가 죽었으니, 당연히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오죽하면 아손은 그 광경을 수차례 사진으로 담았고,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거라고 했을까. 물론 일반적인 왕정시대였다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동원에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어야할 시대니까. 하지만 태자비 장례식이 거행된 날은 다름아닌 1905년 초이다. 



대한제국의 왕실의 위험을 세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을 갈아넣어 태자비 장례식을 거행한 같은 해 11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아손이 본 태자, 그러니까 순종은 참으로 못생겼었나보다. 아니 근데 지금의 내가 봐도 못생기긴했다. 고종도 뭐. 분명 조선 초기만해도 세자가 잘생겼니, 왕이 잘생겼니 하는 말들이 실록에 꽤 남아있었는데. 언제부터 조선 왕실의 외모 유전자가 후퇴했나. 역시 완전한 방계로 틀어버린 선조때부터였을까, 으흠. 아님 또 다른 방계로 틀었던 철종때였을까. 참 아이러니하다.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보였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 통역관이, 나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장군의 신분으로서 코레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했다. 대답하기가 꽤 난처한 질문이었따. 불현듯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생각나서, 코레아 군대의 질서 정연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주신 지고한 황제 폐하이자 코레아 군대의 대원수를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잊을 수 없을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외교적인 답변이 황제의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p 219



고종과 대면한 아손을 보면, 고종의 답정너 성격이 아주 제대로 나타난다(반대로 아손의 처세술도ㄷㄷ). 그러니 자기 부친이 하려던 개혁마저 다 뒤로 엎어버렸겠지. 저러니 민비와 손붙잡고 무당말에 휘둘리며, 척족들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줬겠지. 다시한번 느끼지만 고종은 오롯이 자기의 권력과 무사안위만 중요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종이 자신의 무사안위에 급급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의 백성들-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나태한-은 그동안 속수무책인 채 손만 벌리고 서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황제와 황태자를 1년씩이나 가두어두다시피 했을 때도 나서서 멍에를 벗기기는 커녕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못한 가련한 백성이었다. 이런방식으로 왜국(난쟁이족)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조선 안에서는 이제 사실상 왜족이 군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의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방법은 조선 민족의 수천 년 전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하게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p 255



전통적으로 문자는 양반네들의 전유물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글공부를 할 수 없었다. 배움이 무기인데, 나라에서 나서서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기를 들 수가 없었다. 뿐만이랴? 양반네들의 세금탈취에 허리 필 세도 없이 일만해야했던 그들이었다. 그런 백성들이 작정하고 들어온 일본인을 상대할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만약 이 십자가들이 보존될 수만 있다면, 이것들은 일본인들이 코레아를 강점한 동안에 저지른 가장 악랄한 행위에 대한 경종이 될것입니다. 바로 이 하얀 십자가가 서있는 곳은 세 명의 코레아 농부들이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데 대한 항거의 뜻으로 최근에 완성된 철로를 부수려다가 발각되어 무참히 총살을 당한 장소이지요. 이 십자가 세 개에 몸이 묶인 세 명의 불쌍한 ‘죄수’들이 여기에 서 있었고. 땅이 울퉁불퉁한 저쪽에 일본 군인들과 그들의 지휘관이 정렬해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발사 명령이 떨어졌고 군인들은 57발의 총탄을 날렸습니다. 코레아인들은 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지요. 또한 시체를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시체는 이곳에 엿새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매장하기 위해 시체를 옮길 때는 독수리와 육식 조류들이 얼굴을 파먹어 신분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서서 이 비극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코레아에서 본 일본인의 인상은 일본에서 받은 그들의 인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물의 외면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p 267



정말 충격적인건, 이 책에 일본인이 조선의 백성들을 총살하는 사진이 무려 4컷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가련한 조선의 백성들, 왜 일본인에게 총살을 당했어야했나? 그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일본인들이 강제로 조선 땅을 빼앗아가서, 항의하고 싶어도 항의할 방법이 없어서 철로를 부수려고 했는데 일본인에 발각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그들을 사로잡아서 십자가 기둥에 묶고, 57발의 총탄을 달렸다. 3명을 죽이는데 57발의 총탄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총으로 난사를 했다.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갈동안, 조선의 위정자라는 것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휴....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가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암울한 역사 속에서 ‘리더’로 뽑으면 안될 사람들을 가릴 수 있는 눈은 나름대로 생겼다고 자부하는데 말이다. 매번 우리나라의 리더가 될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 왜 뽑으면 안될 사람만 수두룩한지. 대선 이후 다음 5년도 우리나라는 왠지 암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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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22-02-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놀랍네요. 예전에 일본이 조선을 연구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조선을 은근히 칭찬하더군요.. 아마 자기들끼리는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욕하고. . 하지만 당시 양반 문화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네요. 꼭 읽어 보겠습니다. 일단 제 페이퍼에 남아 두겠습니다.

피로 2022-02-19 09:26   좋아요 0 | URL
왕조시대에는 귀족문화와 같은 양반문화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세계가 발달하면서.... 변해가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선말 양반문화가 더더욱 공고해졌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ㅠㅠ...
 
가끔 집은 내가 되고 - 나를 숨 쉬게 하는 집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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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조금 특이하다.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세이인데, 이게 마냥 흔히 볼수 있는 에세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독특하다고 해야하나? 대부분의 에세이가, 저자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힐링을 주거나 위로를 주는 경우가 태반이다. 정확히는 본인이 좌절했던 경험을 극복하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다르다. 엄밀히 따지면, ‘공간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아님 ‘내 집 마련일기’? 라고 해야하려나. 그러니까, 이 책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젊은이들의 꿈!인 내집마련 고군분투기 인 것이다. 




저자는 원룸부터 시작해서 전세를 전전하며, 내집이면서 내집아닌 남의집살이의 설움을 느꼈다. 분명 내 집인데 집 꾸미는 것 하나 쉽게 할 수 없음에 슬퍼했다. 내 집을 내가 원하는대로 꾸미는 방법은 단 하나, 내 명의로 집을 사는 것. 그렇게 저자는 본인의 소비습관을 바꾸고,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모두가 원하는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물론 비싼 땅에 지어진, 비싼 집은 아니다. 도심 한켠에 있는 구축, 작은 아파트. 하지만 저자는 그 곳에서 본인만의 공간을 꾸려나간다. 



사계절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나무가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고 꽃이 되었다가 낙엽이 지고 결국 앙상한 가지만 남는 모습은 계절의 변화를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집에 옹래 머물며 차분히 공간을 관찰하면 굳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실내애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창문 앞이 뻥 뚫린 새 집에 살면서 계절에 따라 해의 위치가 바뀌고, 실내에 드는 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시간이 몹시 흥미로웠다. p 065



과거에, 그러니까 내 집이 아닌 엄마집에서 살았을 땐, 집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1도 해본적이 없다. 일단 창 밖을 내다보면 옆 동의 아파트가 보였고, 아래는 차가 쌩쌩다니는 도로였다. 따라서 계절감이 느껴질만한 그 무엇이 1도 없었다. 물론 아파트 단지내에 심겨있는 나무들이 보이긴 했지만, 당시의 나에겐 나무가 관심사가 아니기도 했고. 뭐, 언제나 방에 틀여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했으니 계절감이라곤 1도 느끼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결혼 후 온전한 내 집에서 살고 보니, 집에서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던 내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별로 햇볕이 들어오는 시간이 달랐다. 뿐만인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우리집 뒷산도 여러 색깔의 옷을 입은 것마냥 패션쇼를 해댔다. 집안에만 있어도 온전히 계절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겨울엔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소한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고, 여름엔 여름느낌나는 인테리어를 하게 된건 덤이다.



생각해보면 엄마집에서도 조금만 관심을 두었다면, 계절감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을텐데 말이다. 이런 차이는 아마도...내집이냐 아니냐에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또래와 비교해 독립을 일찍 했고, 모든 걸 부모님 도움 없이 스스로 해왔기 때문에 자취 생활에서만큼은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을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방이 없는 것과 있는 건 엄청난 차이였다. 각 방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부터 정해야 했고, 원룸에 오래 거주했기에 가구가 워낙 단출해 새집에 맞춰 새로운 가구를 들여야했다. p 076



온전한 내 집을 갖게 되면, 집에 대한 애정도가 달라진다. 내 집에 대한 애정이 높아지니, 당연히 내 집을 어떻게 꾸밀지도 신경쓰게 된다. 여기는 이런 가구를 놓고, 저기는 저런 가구를 놓고, 이쪽에는 화분을 놓고, 저쪽에는 책을 꽂고 등등등. 엄마집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던 나만의 인테리어가, 내 집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걸 샀다는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기본 인테리어가 괜찮은 널찍한 집에 살게 되니 좁은 집에 끼어 살 때보다 인테리어에 대한 욕망이 더욱 커졌다. 지난날엔 일정 수준 이상은 아예 포기하고 지냈다면, 이 집에서는 어딘가 아주 조금만 바꾸면 훨씬 나아질 것 같은데 집주인이 아니라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답답했다. 나의 갈중을 해결해줄 방법은 가구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사고 싶었으나 사지 못했었던 브랜드의 가구를 사거나 한 번도 놓아보지 않았던 유형의 가구를 두며 집을 꾸며나갔다. p 078



결혼 후 난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서 신혼집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 유년시절에 살던 구축 아파트를, 엄마에게 제값주고(^^...1원 한푼까지 다 받아가는 우리 엄마..) 그대로 사서 가지고 있다가, 결혼 후에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갔다는 뭐 그런 이야기? 솔직히 그 집은 너무 오래된 집이다보니, 신혼집으로 살기엔 문제점이 많긴 많았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이 담겨있던 집이었기에, 남들에겐 불편한점도 나에겐 너무 익숙했던지라 사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



다만... 워낙 오래된 집이다보니,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흔히 나오는 ‘재건축’ 이라는 문제로...... 내 집임에도 마음껏 꾸밀 수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T_T. 언제 부실지 모르니 가구도 당연히 사지 않았다. 인테리어? 역시나 하지 않았다. 정말 이 집을 오늘 부실지, 내일 부실지 모르는 시한부였기에, 가전이나 가구를 섣불리 살 수가 없었다. 결국 신랑이 자취할때 쓰던 소규모 가전제품들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고, 덕분에 우리 신혼집엔 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다. 이거 참.. 좋은건지 나쁜건지^_T...



대출조차 끼어있지 않았던, 오로지 내가 열씸히 내돈 모아 마련한 100% 내 집이었는데, 내 마음대로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집 살돈 모으는 건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재건축’ 그 한 단어 때문에 의도치 않는 내 집마련 저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건축을 하게되면 추가금이 나오는건 당연지사니 말이다. 그뿐만인가? ‘재건축’을 위해 내 집을 부시게 되면, 나는 그 동안 다른 집에 들어가 있어야하니 그에 대한 비용도 당연히 필요해진다. 



동경하는 게 생기니 욕심이 생겼고, 욕심은 목표가 되었다.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저지를 용기가 생겼다. 살아지는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지만, 주체적으로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하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보니 목표는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목표를 만들고 그걸 달성하는 데서 보람을 얻고, 한 단계씩 성장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나는 전셋집을 얻는 과정에서 커다란 목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돈을 쓴는 방법도 바뀌었다. 커다른 목표들을 위해. p 085



그렇게 내 첫집은 ‘재건축’을 이유로 부셔졌고, 나는 급하게 아주 자그만 신축빌라에 전세로 들어갔다. 어차피 2년 지나면 재건축 아파트가 지어질거라 생각했으니, 전세를 구하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않았었다. 하지만 소오름돋게도,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재건축이라는게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게 아닌데, 중간중간에 문제가 엄청 생기는지라, 2년안에 끝날 수 있는게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난 그 2년안에 재건축이 끝날거라 믿고, 별 생각없이 눈에 보이는 전세집을 들어간거다. 후..... 



결과론적으로 내 첫집 재건축은 중간에 사건사고가 많아서,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전세로 들어간 신축빌라는 하 ㅋㅋㅋㅋ 왜 빌라살면 안된다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재건축은 세월아 네월아, 전세로 살고있는 신축빌라는 진짜 개쓸...ㄹ.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서, 여기저기 청약을 많이 시도했다. 내 자신이 또 대견한게, 내 청약통장은 무려 중딩때(^^)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통장이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서도 꾸준히 청약통장에 돈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학생때는 달달이 2~3만원 입금이 고작이었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알바를 시작하면서 월 정기 입금금액을 10만원으로 올렸다. 취업이후로는 중간중간에 더 많은 돈을 입금할 때도 있었다. 거기다 이와 별개로 적금도 참 열씸히 들었던 내 자신 칭찬해!



어느새 내 청약통장에 있는 돈은 N천만원. 거기다 무수히 많은 청약 도전 끝에 하나 성공! 그 집이 지금 사는 집이다. 뭐, 이 집도 말이 많긴 오지게 많다. 분명 대규모 단지의 아파트였고, 건설사 브랜드만 보고 ‘개이득!!!’ 이었는데, 알고보니 도시 재개발 조합이 시행하는 곳이었다. 하. 내 첫집 재건축으로 조합에 이가갈렸던 난데, 청약 당첨된 아파트도 조합아파트였다니. 근데 이 사실을 입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후 난 정말 건설사 브랜드가 좋아도, 조합 아파트는 절대 입주하지 말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다는건 안비밀. 왜냐고? 대다수의 조합아파트는 조합에서 남겨먹는게 많아서, 아파트 건축에 사용하는 자재가 구려진다. 뿐만아니라 조합장이 과하게 해쳐먹어서, 조합장만 수시로 변경되거나, 공사가 연기되는 등 정말 좋은게 하나도 없다. 재건축 조합과, 재개발 조합을 연달아 겪은 내 경험이랄까.



내가 지금 사는 집은 완공된지 2년되었는데, 곳곳에 부실시공으로 문제가 많고, 심지어 아직까지 등기가 안났다. 분명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이랄까? 헌데 대부분의 조합아파트가 부실시공과 등기지연 문제를 가지고 있다(그땐 몰랐지...T_T). 



재건축 중인 내 첫집은, 내가 세 번째 집에 들어오는 동안도 무기한 연기되고 건설사 바뀌고 등등 여러 사건사고등으로 n년이 지나서야, 건물이 올라갔고, 올해 중으로 준공예정이다.



내 첫집과 지금 사는 집 사이에 낑겨살던 신축빌라 전세집은 ㅋㅋㅋㅋㅋ 역시 빌라는 살게 못된다.


 



 



뭐, 지금 집까지 오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찌저찌 난 내 집에서 살고 있다. 물론 내 첫집과 다르게 지금 집은 대다수가 은행지분(^^..)이지만 뭐, 대출도 자산이라니까?! 그려러니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집’이라는 것. 내 첫집과는 달리 부서질 걱정도 없기에,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데로 인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집 거실에는 소파도 TV도 없다. 소파가 있을 법한 자리에는 검은색 철제 다리를 가진 라운지 체어 두 개가 있고, 반대편 벽면은 빔을 쏘기 위해 아무것도 없이 비워놓았다. 여태 자취를 하면서 한 번도 소파와 TV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갑자기 그러면 소파와 TV를 사야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TV를 보지 않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눕다시피 편하게 기대거나 아예 노워 있는 건 소파보다 침대가 훨씬 편했다. p 131


내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한건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광파오븐을 사는 것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는 신랑이 자취하면서 쓰던 아주 작디 작은 저려미 친구들인데다가, 너무 오래사용해서 거의 혹사(?)시키는 기분까지 들게했던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을 보내고 새 친구들을 만나는데 얼마나 기쁘던지T_T!!! 특히 건조기, 와 건조기는 신세계였다.



가구는...... 남들 다 하는 소파를, 나는 사지 않았다. 나는 본투비 눕눕에 익숙한 사람이라, 소파를 사봤자 결국 바닥에 누워있을게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소파를 둘 자리에 책장을 두자(!) 라는 마음에, 거실 양쪽 벽면에 책장을 설치했다. 완벽한 거실의 서재화랄까. 여기서 함정은 우리집에 있는 제일 작은방에도 2개의 벽면에 책장을 설치해버렸다는 것. 우리집은... 서재가...두곳이나 된다ㅋㅋㅋㅋㅋ



이 외에도 사지 않은 것들이 꽤 된다. 정말 혹사시킨 것 같아서 보내준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혹사중이기 때문에! 고로 난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들어간 돈이라곤 위 가전 4종, 거실과 작은방 벽면 붙박이 책장 설치정도? 세상 많은 시간을 들인건 명실공히 붙박이 책장이다. 내 책들이 오래오래 꽂혀있는 공간이니까! 후후후.




 



새 집에 입주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나? 내 심신에 문제가 심각해졌을 무렵, 난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당시엔 식물의 ‘ㅅ’짜도 몰랐지만, 초록색을 보며 힐링하겠다는 생각으로 식물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 엄청난 식물공부가 시작되었다.



환기가 어렵고 베란다가 없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오랜 시간 다짐했다. 언젠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 꼭 식물들을 집안에 두겠다고. 가구도 다 들어오지 않은 집에 나는 식물부터 들였다. p 150



일주일에 한 번 식물들을 베란다로 옮겨 물을 줬고, 햇빛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분갈이를 위해 배양토를 몇 킬로그램이나 구입했고, 액체  비료나 흙에 섞는 영양제도 샀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은 서툴다는 것을 무섭게 증명하듯 입주 한 달이 지났을 때쯤부터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p 153



생각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식물이 자라는 건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방법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반응이 느려 인내가 필요했다. p 154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식물관련 책은 1도 안읽었었는데, 식물을 키우다보니 식물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집에 맞는 식물이 어떤 식물인지도 하나둘 깨우쳤고, 내 식물들이 왜 죽어가는지도 알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물키우기 2년차. 이제 나에게 분갈이는 껌이고, 비료주는 것도 껌이고, 식물 번식도 나름대로 자신있다. 그럼에도 간혹 죽이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집에 식물이 있으면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조금 더 책임감이 생기고, 조금 더 환기와 채광에 신경을 쓰게 되고, 조금 더 행복해진다. p 155



문제는.. 식물을 키우면서 채광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을 거실 창가에서 키우다보니, 거실 창 커테은 언제나 묶여있다. 식물을 키우기 전에는, 거실에 있는 내 책들 색 바랠까봐 언제나 커튼을 쳐놨었는데. 결국 난 식물을 얻고 책의 색바램을 지키지 못했다. 흑흑흑.



그리고 깨달았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는 책을 두면, 책이 상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우리집에선 책과 식물을 분리할 공간이 없다는 더 슬픈 사실을T_T.



결국... 이사가 답인건가....하..



내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가꾼 집, 깨끗하고 쾌적한 집, 애정이 담긴 집에 사는 사람은 당연한 수순으로 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농도가 짙어지고 집에 머물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안도감과 편안함 같은 감정들이 차오른다. p 182



지금까지 여러 집에 살면서 확실히 알게 된건, 내 집, 내 공간에 대한 내 애정이 나를 바꾼다는 사실이다. 나는 옛날부터 자타공인 집순이였다. 다만 과거엔 그저 나가기 귀찮아서 집순이였다면, 지금은 아니다. 지급은 내 집이 너무 좋아서 나가기가 싫다. 집안에만 있어도 놀거리가 넘처나고, 볼거리가 넘처나고, 무엇보다 가만히만 있어도 편안한 이 공간을 두고 밖에 나갈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누군가는 집안에만 있는 게으른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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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님의 파란만장만 집 장만기에서 결론은 조합아파트 가지마라네요 ㅎㅎ 피로님의 힘듦이 느껴지는데 읽는 저는 넘 재미있었어요 ㅎㅎ

피로 2022-02-07 13:34   좋아요 1 | URL
헛, 맞아요 ㅋㅋㅋ 결국 결론은 조합아파트는 절대 안된다!! 라는 점이죠..ㅎㅎ
 
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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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간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틴어수업」의 속편이 나왔다. 「라틴어수업」이 저자가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면, 이번에 발간된 「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신학교를 다녔던 저자가, 종교에 대한 생각을 엮은 책이다. 정확히는 종교를 포함했지만, 그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과거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난 종교를 따지자면 무신론자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지않고, 무속에서 말하는 귀신도 믿지 않는다. 뭐, 하지만 관심사가 관심사인지라 소름돋게도 난 국내 무속신앙 책도 읽었고, 전 세계의 신화와 관련된 책도 거진 다 섭렵했다. 물론 너무 잡다하게 읽어서 그런지 머리속에 남는 건 없지만. 즉, 나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믿지않고, 믿을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학문으로써 혹은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함으로써의 종교는 공부하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 신학교를 다닌 본인이 깨우친 종교,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 종교를 믿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쓴다고 했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써는 약간의 물음표가 떠다니거나, 이 책을 덮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자의 전작인 「라틴어수업」을 읽어보았고, 물론 저 한권뿐이지만 저자가 어떤식으로 글을 쓰는지를 아주 대충은 느낄 수 있었고, 적어도 내가 혐오하는 방식의 종교를 옹호하는 글은 없을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 추측은 맞았다. 이 책은 전작처럼 인문학책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 모습을 이해하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이정표를 제시해주니 말이다.


최근 우연히 <나의 아저씨>라는 TV 드라마를 알게 됐습니다. 꽤 많은 사람이 드라마 속 40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보며, 자기 주위에 ‘저런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지는 않아서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삶에서 보고 배울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요. p 026



나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누군가를, 이 혼란한 삶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생각의 어른’을 바란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생각의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인간의 성장에 비유한다면,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어가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p 028


아, 슬프게도 나 역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 주위에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뿐만아니라, 나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하던 그들 역시 진정한 ‘어른’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 주변에는 진정한 ‘어른’이 없다. 물론 나 포함해서 말이다.



그저 미성년이 아닌 나이이며,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나이, 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있을 뿐, 딱 거기까지다. 그러니까 다들 몸만 크고 나이만 먹었을 뿐, 생각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근데 이게 내 세대만 그러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회사 동료들을 보자. 내 또래도 있으나, 나보다 한참 윗 세대, 심지어 정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세대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진정한 ‘어른’은 없다. 다들 남탓하기 바쁘고, 남의 공은 자기 껏으로 가로채기 바쁜 사람들 뿐이다. 그럼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라고,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은 없다. 서로 비방하고 헐뜯기 바쁘고, 국민을 위한다는 쇼맨십만 보이니 말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더더욱 진정한 ‘어른’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나 역시도 왜 내 주변엔 ‘어른’이 없는 건지 슬퍼했으니 말이다.



헌데,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 ​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완전 정곡. 나는 진짜 ‘어른’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내 스스로 그런 어른이 될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내 뒷 세대들도 이런 나를 보며, 진정한 어른이 없다는 사실에 한탄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세게 와닿았다. 어차피 내 윗세대에게 진정한 ‘어른’을 바라는건,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는 변화를 싫어하는 그들에게는 무리한 일이며,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내 스스로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 내 뒷 세대들만이라도 지금 내가 겪는 이 일들을 겪지 않게끔 하는 것.





어떤 시대든 장점과 단점이 공존합니다. 어느 시대라고 특별히 거룩하거나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다른 문제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는 지나간 역사나 인류 문명의 자산에 쌓인 데이터를 통해 통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역사는 똑같지는 않아도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참조할 만한 가장 좋은 예가 되어주지요. 그것이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일 겁니다. p 100



내가 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과거보다 더 나은 오늘, 내일로 향하기 위해. 단지 그 하나뿐이다. 그렇다고 역사에 기록된 모든 시대가 전부 잘났느냐? 그건 아니다. 일단 지금인 민주공화정시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왕조시대였다. 철저한 신분사회였고, 신분간의 계층이동은 불가했다. 뭐 오늘날에도 보이지 않는 신분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할말 없지만, 적어도 왕조시대였던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살기 좋아진게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수 많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대게 반복되었다. 분명 시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거의 비슷했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에 살고 있던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 귀하신 양반네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그놈의 양반운운하며, 어떻게든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픈 역사가 반복대는 와중에 무언가를 깨우쳤던 한 양반, 류성룡. 그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징비록’을 집필했다. 대부분의 아픈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권력층들의 부패와 무능, 외교에 대한 무지였으니, 앞으로의 역사에서는 이런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징비’하라는 의미로 책을 집필한것이다. 하지만 이런 ‘징비록’ 조차도 부패와 무능에 찌든 권력층에게는 하등 소용이 없었다. 이후로도 아픈역사는 반복되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민주공화정 시대인 지금은 어떠한가? 이 땅에서 한국전쟁 이후로 서로의 목숨을 죽고죽이는 ‘전쟁’은 사라졌으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외교, 정치, 사회, 경제 아주 전반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 피해는 역시나 국민들에게 가중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고 있기에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한다. 왕조시대에는 부패와 무능에 찌든 권력층을 끌어내릴 수 없었으나, 민주공화정 시대는 다르다. 적어도 국민들이 깨어있다면, 권력층을 끌어내릴 수 있고,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전 세계에 알릴 수도 있다. 뭐, 그렇다고 부패한 권력층이 스펙타클하게 바뀐다는 건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비록 오랜시간이 걸릴지언정 변할거라는 희망이 있다.



우선 종교의 자유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본권으로 여기에서 헌법상의 다른 기본권이 파생합니다. 세속주의 헌법을 채택한 우리나라 헌법 제20조도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사실 종교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 둘로 나뉩니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합니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서 종교 의식, 종교 선전, 종교 교육, 종교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합니다. 다만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의 기본권이나 사회 공동체 질서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됩니다. p 131



우리나라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해서 누구는 불교를 믿고, 누구는 천주교를 믿고, 누구는 개신교를 믿고, 누구는 원불교를 믿는다. 또 누군가는 나처럼 종교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가 믿는 게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지탄해서는 안되며, 서로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유독 특정 종교에서, 그 특정 종교를 믿는 아주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길이 없다. 심지어 그 종교를 앞에서 정치까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 종교가 과거에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때, 당시의 선교사들은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 종교가 믿는 신 역시 대한민국 땅에서 자신을 믿는 일부 신자들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우리나라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국가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국교로 삼지 않으며, 누구도 종교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상식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가진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으려면 상대의 종교적 신념도 존중하는 것이 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생략…)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혹은 종교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신에게 기쁨을 주는 종교적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자 오만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고 말했던 의미를 그리스도교뿐만아니라 모든 종교 공동체가 모른 척 하지 않아야 합니다. p 136



난 종교, 신, 귀신 그 어느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교 사찰 답사를 좋아한다. 개화 당시에 한반도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지역 곳곳에서 최초로 세워진 성당 답사를 좋아한다. 제주에 남아있는 우리의 무속신앙 흔적을 찾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외에 한국 땅에 있는 개신교의 흔적을 찾는 것은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마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개신교의 민폐와 부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세계사에서 배웠던 개신교는 종교개혁이래 구교(천주교)에 반발하며, 파생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고 배웠다. 분명 역사속에서 배운 개신교는 학문으로써 배움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개신교는, 글쎄. 내가 역사에서 배운 프로테스탄트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 개신교 신앙에 심취한 일부 신자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며 비난한다. 뿐만인가? 그저 신을 찾는 독실한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정말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가져가는 행위도 있다. 오죽하면 부자교회, 세습교회라는 말까지 나올까. 거기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결탁까지. 이런 현상 역시 내가 역사속에서 배운 프로테스탄트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난 이래뵈도 초등학교 땐 교회를 몇년간 다녀봤고(친구따라), 중학교때는 성당을 다녀봤고(친구따라), 고등학교는 심지어 천주교학교인 미션스쿨을 다녔다. 뭐, 그와 별개로 어렸을 때부터 사찰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사찰에서 모셨다(친가 불교). 그러니까 이유야 어찌했든 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종교는 나름대로 겪어본 셈이다. 뭐 이 과정에서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종교를 믿고, 구원을 청하느니, 그럴 힘으로 나 자신을 믿고, 내가 번 돈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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