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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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조선판 요괴열전이다. 심지어 무려 실록에도 기록된 요괴들의 이야기다. 조상님들 두루마기 입고, 갓을 쓰던 그 시절에 무슨 요괴야? 그냥 단순히 상상아니야? 라고 하고 싶지만..... 놀랍게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 말이다. 



엄청나게 유명했던, 단순히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별에서 온 그대』, 『푸른바다의 전설』 의 모티브도 전부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에서 나왔다. #별에서온그대 모티브는 《조선왕조실록》, #푸른바다의전설 모티브는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서 나왔다.



자 그럼 본 책을 리뷰하기에 앞서, 맛보기용으로.... #별그대 #푸른바다전설 에 대한 이야기를 스윽 펼쳐본다.


"간성군(杆城郡)에서 8월 25일 사시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태양이 비치었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는데, 우레 소리가 나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갈 즈음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니, 푸른 하늘에서 연기처럼 생긴 것이 두 곳에서 조금씩 나왔습니다. 형체는 햇무리와 같았고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멈추었으며, 우레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났습니다.


원주목(原州牧)에서는 8월 25일 사시 대낮에 붉은 색으로 베처럼 생긴 것이 길게 흘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갔는데, 천둥 소리가 크게 나다가 잠시 뒤에 그쳤습니다.


강릉부(江陵府)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차 커져 3, 4장(丈)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했습니다.


춘천부(春川府)에서는 8월 25일 날씨가 청명하고 단지 동남쪽 하늘 사이에 조그만 구름이 잠시 나왔는데, 오시에 화광(火光)이 있었습니다. 모양은 큰 동이와 같았는데, 동남쪽에서 생겨나 북쪽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매우 크고 빠르기는 화살 같았는데 한참 뒤에 불처럼 생긴 것이 점차 소멸되고, 청백(靑白)의 연기가 팽창되듯 생겨나 곡선으로 나부끼며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우레와 북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다가 멈추었습니다.


양양부(襄陽府)에서는 8월 25일 미시(未時)에 품관(品官)인 전문위(全文緯)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듯 하더니 곧 1장 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크기는 한 아름 정도이고 길이는 베 반 필(匹) 정도였는데, 동쪽은 백색이고 중앙은 푸르게 빛났으며 서쪽은 적색이었습니다. 쳐다보니, 마치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도는데, 모습은 깃발을 만 것 같았습니다. 반쯤 공중에 올라가더니 온통 적색이 되었는데, 위의 머리는 뾰족하고 아래 뿌리쪽은 짜른 듯하였습니다. 곧바로 하늘 한가운데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흰 구름으로 변하여 선명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 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두 조각이 되더니, 한 조각은 동남쪽을 향해 1장 정도 가다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한 조각은 본래의 곳에 떠 있었는데 형체는 마치 베로 만든 방석과 같았습니다. 조금 뒤에 우레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끝내는 돌이 구르고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그 속에서 나다가 한참만에 그쳤습니다. 〈이때 하늘은 청명하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0권, 광해 1년 9월 25일 계묘 3번째기사 - 강원도에서 일어난 기이한 자연현상에 대해 강원 감사 이형욱이 치계하다


위 기사가 별그대의 모티브가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아주 멋진 외계인 김수현을 만날 수 있.ㅇ.....ㅋㅋㅋㅋㅋ 흠흠흠. 위 기사는 말그대로 기이한 자연현상을 기록한 것인데, 이 자연현상에 현대인들이 상상을 한스푼 첨가하여 멋진 판타지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요괴에 대한 기록도 실려있는 《조선왕조실록》인데,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한 기사 쯤이야!



김담령이 흡곡현의 고을 원이 되어 일찍이 봄놀이를 하다가 바닷가 어부의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어부에게 무슨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부가 대답했다.


“제가 고기잡이를 나가서 인어 여섯 마리를 잡았는데, 그중 둘은 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넷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나가서 살펴보니 모두 네 살 난 아이만 했고,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으며 콧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귓바퀴가 뚜렷했으며 수염은 누렇고 검은 머리털이 이마를 덮었다. 흑백의 눈은 빛났으나 눈동자가 노랬다. 몸뚱이의 어떤부분은 옅은 적색이고, 어떤 부분은 온통 백색이었으며, 등에 희미하게 검은 무늬가 있었다. 남녀의 음경과 음호 또한 사람과 똑같았으며,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주름 무늬가 있었다. 이에 무릎에 껴안고 앉히자 모두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며, 사람을 대하여서도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하얀 눈물만 비 오듯 흘렸다. 김담령이 가련하게 여겨 어부에게 놓아주라고 하자, 어부가 매우 애석해하며 말했다.


“인어는 그 기름을 취하면 매우 좋아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습니다. 오래되면 부패해 냄새를 풍기는 고래 기름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요.”


김담령이 뺴앗아 바다로 돌려보내니 마치 거북이처럼 헤엄쳐 갔다. 김담령이 무척 기이하게 여기자, 어부가 말했다.


“인어 중에 커다란 것은 크기가 사람만 한데 이것들은 작은 새끼일 뿐이지요.”



- 어우야담 만물편:인어- (돌베게, p 764)


위 야사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다. 이 일화를 찾을라고 간만에 책장에서 벽돌책인 어우야담을 꺼내서 읽었다. 후... 


다만 여기서 함정인 것은 어우야담 속 인어를 구출해준 김담령,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이민호가 맡았던 김담령은 실제로는 그리 착한 원님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위 야사와 드라마 판타지로 인해 완전 착한 인물인줄 알았던 김담령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여러번 나올 정도로 부패한 조선의 관리였다^^.....


여기까지가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리뷰전 맛보기! 이제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저자가 머릿말에서 말했듯이 이 책에는 실록에 실린 총 20여 종의 괴물(또는 요괴)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실록에 대한 기록과 당대 상황을 서술하며, 진짜 괴물이었는지를 추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건....조선괴물지도! 



실록을 보면 이 괴물들이.. 전국 방방곡곳에서 나오는데, 독자들이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한반도 지도상에 각 지역별로 괴물들이 출몰(?)위치를 표기한 것이다. 이런건 책 페이지 말고도, 별도 족자형식(?)의 부록으로 줘도 좋을 것 같은데...ㅋㅋㅋㅋㅋ



조선의 괴물지도


1. 전쟁으로 쇠락한 지네호텔: 오공원 (충청도)


2. 천하의 전우치를 골린 여우: 흰 여우 (전라도)


3. 풍년과 흉년을 예언한 행운의 편지: 삼구일두귀 (전라도)


4. 가뭄과 홍수보다 혹독한 농부의 적: 강철 (경상도)


5. 남해를 붉게 물들인 별: 천구성 (경상도)


6. 고래기름보다 좋은 인어기름: 인어 (강원도)


7. 왕건으로 이어지는 용의 계보: 용손 (경기도)


8. 부처가 된 세조의 경고: 생사귀 (전라도)


9. 성종의 관심을 끈 땅속 귀신: 지하지인 (서울)


10. 중종을 떨게 한 연산군의 그림자: 수괴 (서울)


11. 인종이 죽자 나타난 검은 기운: 물괴야행 (황해도)


12. 사도세자를 향한 저주: 도깨비 (전라도)


13. 정조의 마음을 어지럽힌 사슴과 곰: 녹정과 웅정 (경상도)


14. 조선이 빅풋은 벽곡의 달인: 안시객 (강원도)


15. 바다 건너 거인의 나라: 거인 (강원도)


16. 행운의 상징, 불행의 상징: 금두꺼비 (강원도)


17. 전쟁을 끝낸 사슴 발의 여인: 녹족부인 (평양)


18. 코끼리, 얼룩말 그리고 불가살이: 박과 맥 (평안도)


19. 호랑이를 떨게 한 사자: 산예 (함경도)


20. 만인의 피를 마신 뱀: 만인사 (함경도



 풍년과 흉년을 예언한 행운의 편지: 삼구일두귀 (전라도)


조선판 행운의 편지(?) 주인공 삼구일두귀. 머리는 하나요, 입이 세개 있는 요개라는 뜻이다. 전라도지방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내용대로라면 삼구일두귀가 처음 내려온 곳은 함평이 아니라 능성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구일두귀는 능성의 한 부잣집에 내렸다. 이상한 모습에 겁먹은 부자는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우호를 표하기 위해 밥을 대접하는 듯 하다. 삼구일두귀는 밥을 한 동이나 먹었다. 당시 유행한 이야기에서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는 것은 종종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듯 싶다. p 045


확실히 옛날엔 팩트체크(?)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더라, 한양에서 멀디 먼 전라도에서 일어나는 요괴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들테니, 장계를 받는 그대로 실록에 기록했다는게 딱 느껴진다. 허허허허. 실록이란게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아주 중요한 보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쓴거고, 사람이 쓴만큼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뭐 여튼 너무나 생소한 삼구일두귀라는 요괴. 그냥 생소한 요괴로 끝나면 거기서 끝날텐데, 실록엔 그 뒷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런 내용이!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문이 퍼진 과정이 꽤 흥미롭다. 특히 149세 먹은 승려라는 인물의 행적이 눈길을 끄는데, 8월 3일자 기록은 앞서 5월 26일자 기록보다 이를 더욱더 자세히 소개한다. (생략) 즉 나이 많은 승려가 직접 전라도에 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 운남성 원광사라는 절에 살던 어느 노인이 149세가 되어 세상을 뜬 후 그 혼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혼백은 미래에 난리가 난다고 예언한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 중에 무당이 있는 것을 보면, 무당이 굿하는 중에 혼백이 씌웠다고 하면서 말이나 노래로 사람들에게 전한것일지 모른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예언이 편지로 전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편지에는 예언 외의 다른 말도 쓰여 있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믿지 않으면 눈이 먼다.


- 여기 적힌 내용을 한 번 전하면 한 몸이 재난을 피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두 번 전하면 집안이 재난을 피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세 번 전하면 태평한 시절을 본다. p 047~049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7명에게 보내야~’ 라고 하는 한때 엄청 유행했던 그 행운의 편지가 무려 5백년 전 조선에서도 성행했었다니!!!!!!!!!!


유행은 돌고돈다더니, 이런 거까지도 돌고도나보다.




가뭄과 홍수보다 혹독한 농부의 적: 강철 (경상도)


나에겐 일요 웹툰(합격시켜주세용/이온)에서도 종종 만나서 익숙한 깡철이가 나왔다!!! 완전 반갑반갑 !!!! 웹툰에선 용이 되기 위한 선발과정에 참가한 이무기............이무기인가, 이무기사촌인가, 뭐 여튼 그런 격의 캐릭터로 나온 깡철인데!!! 크 ㅋㅋㅋㅋㅋㅋㅋㅋ


조선 후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괴물을 꼽는다면 단연 ‘강철’이라고 생각한다. 강철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로 소, 말, 용 등을 닮았다고 묘사된다. 괴물 이야기치고는 기록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고,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강철 이야기는 한 두해 동안 잠깐 돌고 만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이상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이수광, 이익, 이덕무 같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들도 짧게나마 강철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다. p 055



강철 이야기는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 싶다. 물론 완전히 맥이 끊겨버린 것은 아니다. 18세기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한 괴물 이야기였던 만큼, 흔적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최근까지 전승된 민속놀이로, 농사를 망치는 재해를 쫓아달라고 기원하는 ‘꽝철이 쫓기’가 있다. 《한국민속신앙사전》에 실린 사례를 보면 경상북도 일대의 농민들이 꽹과리와 징을 치며 산 능선을 돌았다고 한다. 꽝철이가 산 능선에 앉는 버릇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꽝철이를 쫓고 풍년을 빈 것이다. 꽝철이는 조선시대 기록에 등장하는 강철의 발음이 변형된것으로 보인다. 다른 민속놀이에서도 강철을 용이 못 된 이무기 비슷한 것으로 보고, 꽝철이, 깡철이 등 변형된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p 056



이렇게 보면 강철은 어떤 특정 자연 현상을 상징하는 괴물이라기보다는, 농사를 허망하게 망치는 재해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홍수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강철을 폭우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가 유행하고, 가뭄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강철을 열기와 메마름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가 유행한 것 아닐까. p 059



웹툰에서도 깡철이가 뜨겁고(?) 불을 잘 쓰던데, 오. 진짜였어!! 심지어 조선시대에 제일 핫했던 친구였어!! 특히 농사가 흉작일때는 더더더욱 핫하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친구였어!!!! 하지만 그것도 다 한철. 농업이 주였던 조선과는 달리 현재 대한민국에선, 깡철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T_T..


심지어 농촌인구가 줄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 마저 줄어들고 있으니. 조만간 깡철이도 사라질듯 싶다. 주거형태 변화로 인해 우리나라 가택신들이 사라졌듯이...




고래기름보다 좋은 인어기름: 인어 (강원도)


위에서 드라마 #푸른바다의전설 및 어우야담으로 언급했던 인어이야기! 무려 출처는 강원도다. TMI이긴 하지만, 춘천에 있는 할머니댁에 갈때마다 의암댐에 인어상을 매번 봤었다. 그 당시에는 왜 뜬금없이 서양의 인어(?)가 왜 춘천에 있지? 라는 물음표가 엄청 떠다녔었는데. 이게 다 이유가 있던거였다니..! 아 물론 강원도에서 발견된 인어들은 우리가 아는 서양의 이쁜 인어공주가 아닌, 중국의 교인쪽에 가까웠던 것 같긴 하지만;;


조선시대 이야기에서 인어는 신비롭고 고결한 바다의 왕족(서양인어)도 아니고, 선원들을 유혹하는 마법적인 매력을 지닌 괴물(세이렌)도 아니다. 좀 희귀할 뿐이지 그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다. 낚시꾼에게 붙잡히고, 어부는 ‘기름 짜는 것’으로 인어의 쓸모를 말한다. 얼굴은 사람처럼 생겨 김담령에게 깊은 동정심이 우러나게 할 정도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인어를 대하는 태도는 여느 물고기를 대하는 태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고래기름은 상하면 냄새나지만 인어기름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p 083



조선의 인어 이야기가 이 한 편 뿐인 것은 아니다. 역시 《어우야담》에 짧게 실린 것으로 성격이 좀 다른 이야기도 있다. 간성, 그러니까 지금의 강원도 고성에서도 인어 한 마리가 잡혔는데, 피부가 눈처럼 희고 여성처러 ㅁ생겼으며, 장난을 치니 깊은 정이라도 있는 듯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 놓아주니 다시 돌아오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다고 한다. 여성 인어가 남성 뱃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유럽권에서 유행한 인어 이야기와 좀 더 비슷해보인다. 강원도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인어를 목격했다는 사례가 있다. 예를들어 18세기에 활동한 학자 위백규의 《격물설》에는 “근년에 어부가 인어를 잡았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확한 장소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주로 호남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하면, 전라도의 남해안이나 서해안이 배경이지 않을까 싶다. p 084



인어이야기가 널리 퍼진 데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중국 고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고전에는 예로부터 ‘교인’이라고 하는 바다에 사는 사람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교초’라는 매우 신비로운 옷감을 짠다거나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문학의 소재로 좀 과할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작가들도 시를 지으며 교인이나 교초 같은 말을 즐겨 썼다. p 086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후기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울릉도의 ‘가지어’를 바다에 사는, 사람과 비슷하지만 사람은 아닌 동물로 소개한다. 가지어는 울릉도, 독도에 사는 바다사자의 한 종류인 강치를 일컫는 말인듯 하다. 《동사강목》이 강치를 어린아이와 비교하고 기름짜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수염이 있다는 것도 강치의 모습과 닮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인어 이야기는 뱃사람들이 강치의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나 귀여운 모습을 신기하게 여겨 말을 전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p 089



조선이나, 옆나라 중국이나 양쪽 모두 ‘고래기름보다 인어기름이 낫다’라는 말이 꾸준히 나온 것을 보면 인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나보다. 다만 당시에는 과학 연구가 발달하지 못했기에 ‘사람과 비슷한 물고기’로 보았을 뿐이랄까?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발견된 인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도 저자와 비슷한 생각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말한 인어는 독도의 강치같은 바다사자는 아니었을까하고.



하지만 인어가 사라졌듯, 강치도 사라졌다.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일본놈들은 마구잡이로 강치를 사냥해서 강치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강치 지방은 기름으로 이용하고,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하고, 살아있는 생물은 서커스용으로 학대했다. 그렇게 우리 동해안에 살았던 강치는 인어전설만 남긴채 사라졌다는 슬픈 이야기.




왕건으로 이어지는 용의 계보: 용손 (경기도)



지금까지 기록에 남아있는 요괴들은 대체적으로 자연환경이나, 생소한 동물을 비유한 거라고 한다면... 용손, 즉 용의 자손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용의 자손, 어쩌면 지금도 성씨를 바꿔서 근근히 살아남았을수도 있다. 이렇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한반도에서 용의 자손이 약 5백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기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나라, 왕건이 세운 ‘고려’를!


용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 또는 유럽이나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활용할 법한 소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동안 용의 자손, 즉 ‘용손’이 있다는 괴물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친숙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려시대에는 임금이 바로 용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p 096



용손은 천명이 다하고, 선리는 부창해 영화하도다. 천년 전에 그 징조가 심히 밝았도다. 하늘이 열어주어 우리 임금이 점치었또다. 아름답다! 천만 년의 태평을 열어놓았도다.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이요, 높고 높은 화악이로다. p 097 (인용 《태종실록》)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해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 했다. 그 후 작제건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으로 화해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해 우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아니했다. p 104 (인용 《세종실록》)



정말로 1,000년 전에는 서해에 용이 살았고, 그 딸이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근거는 없지만 용의 딸이라는 저민의의 정체가 사실 해적은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본적이 있따. 왕건의 할아버지뻘이라면 장보고가 해적을 물리치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다. 특히 장보고가 몰락한 후 해적은 신라의 중요한 사회 문제였다. 거타지 이야기에도 선원들이 옛 백제 땅 출신 해적들을 방비하괒 고민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작제건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저민의는 용의 딸이 아니라, 용의 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해적이었을 수 있지 않을까. 저민의가 이끄는 해적 무리가 다른 무리와 파벌 싸움을 벌이다가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데, 화살을 잘 쏘는 작제건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상대편을 물리친 사건이 용손 이야기로 신비롭게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p 105



그러니까 한마디로 작제건이라는 사람이 서해용왕의 딸과 결혼해서 아이를 나았는데, 그 아이가 왕륭이다(1대용손). 왕륭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왕건(2대용손)이다. 즉 왕건의 할머니가 용이고, 왕건은 용의 손자라는 이야기. 이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대대손손 왕씨가 왕이되니, 왕씨가 용손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심지어 야사에 따르면 고려 말 우왕은 본인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 왕씨 혈통이 맞다며 겨드랑이에 있는 용의 비늘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이렇든 저렇든 한 나라를 세우는 왕 치고 출생의 비밀이 없는 왕은 없으니, 고려 왕씨의 용손 전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는게 맞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저 이야기가 정말 진실이라면,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 땅에는 용손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조선초 살아남아 성씨를 바꾼, 고려왕씨의 후손은 현재도 살아있으니, 그들 모두가 용손이 아닌가! 물론 용의 피가 1천년의 세월만큼 엄청엄청 옅어졌겠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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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1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어가 안 예뻐서 ㅎㅎㅎ 그러고 보면 산해경에도 인어아저씨가 나오지 서양쪽의 인어공주 모습은 없는듯합니다. 곽재식작가님 정말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나 지식이 많은 듯 해요. 책도 재미있게 쓰시고 ~ 저도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피로님 *^^*

피로 2022-02-24 11: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산해경에서 나오는 인어아저씨가 고대 한반도에서 알고 있는 인어였쬬 ㅎㅎ
현대에 와서 서양의 인어공주 이야기가 흘러들어오면서, 우리 머리속에 인어의 모습이 공주님으로 고착된것같아요 ㅎㅎ

mini74 2022-03-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 축하드려요 ~~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피로님^^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