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100쇄 기념 스페셜 에디션)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집에는 #미술관련책 이 2권 있다. 그중 한 권이 #방구석미술관 1권이다. 아마 당시에는 시리즈로 나올 예정이 없어서 그랬던건지, 1권이라는 표현이 없었다. 그런데! 방구석미술관 2권이 나왔을 줄이야. 하. 시리즈는 다 모아야 적성이 풀리는 나인지라, 방구석 미술관 2권도 냉큼 집에 들였다.




일단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고 2권을 들고왔는데, 막상 펴보니, 오옷? 개인적으로 1권보다 더 마음에 드는 주제였다. 바로 ‘한국의 현대미술’!!


물론 방구석미술관 1권의 주제였던 서양미술도 꽤 좋았지만, 그래도 난 한국인인지라 ㅋㅋㅋㅋ. 한국 근대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자주 접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근대화가과 관련된 장소도 몇번 가보기도 했다보니. 이미 한국 근대화가에 대한 관심도는 맥스! 



 이 책에 실려있는 한국 근대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옥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 총 10 명이다. 이 열명 중에서도 내가 제일 관심이 있던 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세 명. 물론 다른 화가들도 관심이 가는 건 같았지만, 그 중에서도 왜 이 세명을 골랐는가 하면, 아무래도 극명하게 대조대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중섭은 그를 둘러싼 환경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졌고, 가족과 만나기를 희망하다가, 그 희망이 꺾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주변에는 사기꾼들만 득실거렸고, 결국 그는 삶에 지쳐 사랑하는 가족과는 만나지도 못한 채 본인의 생의 불꽃을 꺼버렸다.



나혜석은 분명 당시로 따지면 깨인 생각을 가진 신 여성이었다. 가부장제를 반대하고, 남편에게 평생 자기만을 바라보고, 전처의 자녀와 시어머니와는 별거를 해달라고 요청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불륜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두번이나. 이건 무슨 말로도 미화를 하면 안되는 것이며, 그녀는 그녀 스스로 가족들을 배신한 것과 다름없다. 배신의 결말, 나혜석은 집에서 쫓겨났다. 자식도 볼 수 없었다. 응당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행려병자로 죽었다. 



김환기는 위 두 사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랑하는 김향안과 결혼 후,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했다. 여느 화가들이 그렇듯, 재정상태가 궁핍했지만 그들은 똘똘뭉쳐 이겨냈다. 이 부분이 재정환경이 힘들어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과는 다른 행보이다. 뿐만 아니다. 두 사람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을 때, 둘이 같이 유학을 간게 아니라, 아내인 김향안이 먼저 떠났다. 그녀는 먼저 프랑스에 도착해, 오로지 남편 김환기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찾아다녔다. 유학길에서 외도를 한 나혜석과 다른 점이다. 김환기와 김향안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고, 그 힘으로 힘든 환경을 헤쳐나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


우리에게는 ‘소’ 그림, ‘은박지’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중섭. 그의 일생을 이 책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상에서 조선어를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한글로 그림을 그리던 열여덟의 중섭은 “원통하다. 이렇게 안타까운 것을 어떻게 하느냐”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는 중섭의 작품 속 서명에서 ‘ㅈㅜㅇㅅㅓㅂ’을(1945년 이전까지는 ‘ㄷㅜㅇㅅㅓㅂ’)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서명을 한글 외에 다른 언어로 쓰지 않았습니다. p 018



그가 그림 속 서명을 한글로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일제강점기,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대였음에도 그는 한글을 놓지 않았고, 한국적인 마음을 놓지 않았다. 처음보는 이중섭의 모습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이 최악이었던 상황.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밝고 희망찬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의 편지에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화가로 성공해 꼭 재회하겠다는 의지, 한국의 화가로서 한민족의 정수를 자신의 예술에 담아 세계에 전하겠다는 포부가 절절히 담겨있습니다. p 031


 


통영에서 중섭은 소를 포함해 많은 걸작을 남깁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합니다. 이미 심신이 기진맥진해져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중섭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 품에 안아야 했죠. p 036



1951년 이중섭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후에, 제주도에서 한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이중섭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이 때가 제일 행복한 때였다. 1954년, 형편이 더더욱 안좋아져,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 가족과 다시 만날날을 기다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정말 먹고 살 밥도 구하기 힘들 정도였고, 실제로 가족 부양조차 힘들어질 정도였지만, 그 가족 덕분에 희망을 품고 살았다.


그림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거라던 실날같은 그의 희망이 끊어졌다. 희망이 끊어지자 그의 그림도 변했다. 희망을 품고있었던 이중섭이 그린 소는 굳센 기강을 드러냈다면, 희망이 사라진 이중섭이 1956년에 그린 소는 기운이 다하여 겨우 서있는 모습이다.


전쟁후 사회적 시스템이 안정되기 이전에 전시를 강행한 화가에게 돌아온 건 그 빈틈을 노린 비열한 자들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내려가 남은 작품들로 전시를 열어 보았지만, 판매 성과는 보잘것없었죠. 이렇게 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전시는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p 040


내가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어!


놀고 공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단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 세상을 위하여


또 자신을 위하여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고


이 꼴이 뭐야?


이중섭 평전 中 


이런 이중섭의 모습을 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화가란 그림을 그려 밥벌이를 해야한다지만, 그조차도 힘들다면 잠깐이라도 붓을 내려놓고 먹고 살 궁리를 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그의 바람대로 그림으로 밥벌이가 가능했다면 좋겠다마는,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으니까. 한 집안의 가장이던, 가족을 사랑했고, 가족과 함께하길 바랐던 가장 이중섭이, 먹고 살수 있을 만큼이 될때까지 화가 이중섭을 버리고 노가다라도 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잠깐이라도 붓을 내려놓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했다면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 물론 대신 우리가 아는 근대화가 이중섭은 사라졌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중섭은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가족과의 행복을 그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하는..



나혜석


내가 알고 있는 나혜석은 조선 말, 가부장적인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집안이 부유해 신교육을 받았던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위치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가부장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던 나혜석은,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여성이라 생각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그녀가 생전에 머물렀던 장소에서 그렇게 나혜석의 이름을 알게되었고, 막연하게 비련한 여성이라 생각했었다.


이제 혜석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여성,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99%의 사람들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살아가고 있던 그때, 혜석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신여성의 삶을 스스로 살며, 조선 여성들에게 신여성의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대에 여성과 남성의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소개하는 삶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죠. p 059



무엇보다 나혜석은 글도 썼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글을 말이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나혜석 <경희>《여자계》 中



지금이야 일처일부가 당연한 일이고, 첩을 두는 놈은 썩을놈이고, 불륜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행태이지만, 조선시대에서는 그게 너무 당연했던 일인지라, 나혜석처럼 이렇게 말하는 여성이 나올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해석은 다른 글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부부사이 평등한 관계를 주장하고, 자녀들도 성별게 관계없이 평등하게 키우자고 합니다. ‘조선 여자도 사람 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해석의 주장. 그녀는 <이상적 부인>, <잡감> 등을 기고하며 자신의 여권론을 펜을 통해 조선사회에 침투시키기 시작합니다. p 062



당대 기준으로는 정말 별났던 신여성 나혜석을, 끊임없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박우영. 


나혜석이 결혼 조건으로 ‘일생을 나만 사랑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박우영의 전처의 딸과, 시어머니와는 별거하게 해달라’ 였다. 나혜석을 열렬히 사랑했던 박우영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이 조건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은 박우영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심지어 아이를 낳았음에도 조선 최초(?) 워킹맘의 삶을 이어간다. 심지어 워킹맘의 삶을 요즘말하는 4컷툰에 그려 기고도 한다. 심지어는 본인이 낳은 삼남매를 ‘별거를 요청했던’ 시댁에 맡기고 해외 유학길에 떠났다. 물론 이는 남편 박우영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그런 우영을 배신했다. 


남편 박우영과 같이 유학길에 올랐던 나혜석, 남편이 업무차 베를린으로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홀로 파리에 남아 미술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녀는 박우영의 친구인 최린과 외도를 해버린다. (최린: 민족대표33인이었으나, 훗날 변절하여 매국노가 된다)



그렇게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첩을 여럿둔 남성들을 비판하고, 남편에게 자기만을 사랑하라는 조건을 달았던 나혜석이, 남편의 친구와 외도를 했다. 외도는 미화시키면 안되고, 미화시켜서도 안된다. 그녀는 본인 스스로 외도를 함으로써, 그녀가 말하던 모든 것들은 싸그리 물거품이 된 거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남편 박우영은 이 사실을 참아주었다. 사람은 한번은 실수를 할 수 있으니. 하지만...



호화롭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자마자 촌구석에서 갑자기 맞이한 궁핍. 여기서 혜석은 다시 최린을 떠올립니다. 당시 최린은 천도교의 수장으로 국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죠. 혜석은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구할 요량으로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맙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최린의 측근을 통해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내용으로 왜곡되어 우영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p 081



나혜석은 또다시 최린을 만난다. 정확히는 최린에게 다시 구애의 편지를 보낸다. 이로써 박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했고, 나혜석이 본인을 포함하여 자식들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혜석은 변명할 여지도 없고, 나혜석을 동정할 여지도 없다. 그녀 스스로 자초한 파국이니까.


이후 그녀는 혼자였다.


나혜석. 그녀는 모든 것이 헐어진 자신의 마음속에 최후의 빛과 색을 채우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죠. 세상과 단절에서 오는 고립감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우는 시간이 누적되며 그녀는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생략) 우영은 경찰을 통해 혜석이 대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혜석은 개성에서 여학교의 선생을 하고 있는 딸 나열이 머무는 집에도 찾아갔지만, 이미 우영의 당부를 들은 집 주인의 만류로 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p 093



1948년 차디찬 칼바람이 불던 12월 어느 날,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자제원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추정 연령은 65~66세. 그러나 실제 나이는 53세 였습니다. 연고지와 이름을 묻는 의료진에게 여인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12월 10일 무연고자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이었습니다. p 095



혼자가 된 나혜석의 삶은 쓸쓸함과 아픔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를 동정하기엔, 그녀는 너무 큰 죄를 지었다. 본인 스스로 내뱉었던 말들을, 본인 스스로가 무너뜨렸고, 본인 스스로가 가족들을 배신했다. 그렇게 나혜석은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사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우리 4남매도 크게 다쳤다. 다 부상자요 불구자 신세가 됐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80대 노인이 된 아들 김진이 회고하며 한 말입니다. (생략) 아버지 김우영 역시 세상의 수군거림 속에 남은 생을 의욕없이 살았다고 기억합니다. 딸인 나열 역시 “나혜석 같은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무책임함을 동생 진에게 토로했습니다. p 096



그녀는 나열을 보자마자 두 손을 와락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네가 혜석이 딸이야?” 라고 묻습니다. 알고보니 그 여인은 과거 해석과 3.1운동의 초기 확산을 함께했던 박인덕이었습니다. (생략) 나열은 극구 사양했지만 ‘어머니 친구는 어머니나 다름없다’는 박인덕의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의 무게를 느끼며 휘청이게 되죠. 그 이후 인덕은 나열에게 미국으로 전액 장학금 유학을 제안합니다. p 097



남아있는 나혜석의 가족들도 그 삶이 불행하긴 마찬가지였다. 자기 부인이, 자기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살아낸 시간이었으니까. 물론 나혜석이 죽은 뒤, 나혜석의 자녀들은 자기들을 버린줄 알았던 엄마 나혜석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흔적에 도움을 받게된다. 그렇게 나혜석은 죽어서나마 그토록 바라던 자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외로울지언정, 아무리 궁핍할지언정, 나혜석이 한눈팔지 않고 오롯이 자기길만 갔다면, 어쩌면 나혜석은 이토록 비참힌 말로가 아닌, 지금보다도 훨씬 더 이름있는 화가가 되었을거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뒤엎는다.



김환기


앞서 이중섭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저 암울하고 암울했던 내 머릿속을 아주 개운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준 화가가 바로 김환기다. 진짜 와, 이 책 속에서 단비같은 존재였달까....흑흑흑


둘의 결혼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혼에 세 명의 자식까지 딸린 환기를 동림의 집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환기의 집안 역시 과부인 동림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렇지만 이런 난관이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둘의 결합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집안의 반대 앞에 동림은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김향안. 환기의 성(김)과 환기의 아호(향안)을 받아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p 239



앞서 이중섭이나 나혜석처럼, 김환기도 그 시작은 비슷했다. 한국사에서 제일 암울했던 시기에, 부유했던 집안에서 성장하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미술을 공부하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까지도 굴곡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후 부터, 김환기는 앞의 그 둘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전에 김환기가 사랑하던 사람, 김향안을 먼저 알아야 한다. 김환기는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고, 김향하는 사별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돌싱(?)이 된 둘이 만나게 된 과정은 생략하고, 만나게 된 후 사랑에 빠지자 양 쪽 집안에선 당연히 결사 반대! 김환기 집안에선 한번 결혼한 여자는 반대했고(정작 자기 아들인 김환기는 이혼경력에, 심지어 애가 셋인데?), 김향안 집안에서는 애가 딸린 집안에 시집간다는 점에서 반대했다(이건 좀 이해가 가는 부분). 



하지만 기어이 김환기와 김향안은 결혼을 했다. 전처의 자식 및 시어머니와는 별거를 요구한 나혜석과는 달리, 김향한은 김환기와 전처 사이의 딸들과 시어머니에게도 참 잘 한것으로 보여진다. 거기다 남편인 김환기가 미술에 매진할 수 있도록 생계를 도맡았다. 


세 딸과 시어머니의 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향안, 그녀라고 남편의 수집열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향안은 그것이 환기가 ‘조선의 미’를 탐구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이해하고 있었죠. 사실 이해를 넘어 향안은 백자항아리가 가진 특유의 오묘한 멋과 미를 환기와 함께 공감하며 진심으로 즐겼습니다. p 241



뿐만아니라, 김환기가 미술에 매진하면 할 수록 집안의 재산이 거널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김향안은 끝까지 김환기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심지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자, 본인도 미술을 공부하며 진심으로 즐겼다. 이러니 남편 김환기는, 더더욱 부인 김향안을 사랑하고 아낄 수 밖에.


향안은 다음날 바로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발급받습니다. 사실 환기뿐 아니라 향안 역시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했죠(그래서 향안은 전쟁 중에도 틈틈이 불어를 독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던 1955년 4월, 향안은 홀로 파리로 향합니다. 환기가 파리에서 화가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죠. 파리에 도착한 향안은 환기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손에 쥐고 파리에 있는 수많은 화랑을 두루 돌아다니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합니다. p 248


혼자였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애정, 신뢰, 존의로 언제나 변함없이 환기를 신실하게 지지해주는 향안이 있었습니다. 환기의 예술이 잘 자라도록 말없이 지켜주는 부처같은 향안. 환기는 그런 아내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글쓰기 대신 박화점에 나가 일하는 아내를 기쁘게 하고자 환기는 하루종일 서서 자신의 예술세계가 도닳살 수 있는 궁극의 지점까지 가기 위해 모든 혼을 아낌없이 불사릅니다. p 256


거기다 김환기의 미술 지원을 위해, 김향안은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고, 심지어는 본인이 먼저 프랑스로 날라가 김환기가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뒤, 김환기를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앞서 나혜석은 유학을 떠나서, 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을 버리고, 외도를 선택한 모습과는 매우 대비되는 부분이랄까.



환기가 가장 사랑했던 그 행위를 차곡차곡 이어가며, 향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아이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뉴욕, 파리, 브라질, 한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전시를 엽니다. (생략) 그렇게 아이들을 건강하게 장성시킨 엄마는 2004년 비로소 환기 곁으로 향합니다. p 264



그래서 그런걸까? 나같은 미술 문외한이 본 김환기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애정이 담뿍 담겨있는 것 같다. 언뜻 보면 차가울 것만같은 파란 배경의 달항아리 그림 조차도 정말 따듯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던 희망을 잃어버린 이중섭의 그림이나, 나혜석의 그림과는 매우 대조된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걸까?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知性)이다. -김향안



한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대에,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세 사람. 우여곡절끝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세 사람. 이렇게 시작이 비슷했던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이 세명은 시작은 같았지만 끝은 달랐다. 이중섭과 나혜석의 끝은 불행했고, 김환기의 끝은 행복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서로 다른 인생의 회오리로 빠지게 했을까. 



대체 이중섭의 무엇이 가족을 바다건너 보내버리는 선택을 하게 했고, 나혜석의 무엇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외도를 선택하게 한걸까. 그들은 왜 김환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가족을 곁에 두는 선택을 하지 못했던걸까? 대체 무엇이 그들을 불행한 길로 이끌었던 걸까?


그게 무엇이든, 이중섭, 나혜석과는 달리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하지 않고 곁에 두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삶을 살았던 김환기는 눈 감는 그날까지 행복했고, 사랑하는 김향안이 있었기에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김환기를 만났을 이중섭과 나혜석.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길을 가면서도 다른 길로 들어선 김환기를 보며,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회고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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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한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은 - 오직 나의 행복을 위한 마음 충전 에세이
삼각커피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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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요즘이다. 취업준비하랴, 대출금 갚으랴, 가족들 건사하랴, 회사생활하랴, 온갖 주변 상황에 끌려다니다보면 내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인 요즘이다. 그렇게 ‘나만 힘든게 아니니까’ 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버텨간다(물론 예외는 있음). 나 역시 버티는 쪽이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는 강철이 아니다. 이렇게 계속 참고, 버티다보면 언젠간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한없이 무너져, 정말 깊고 깊은 땅굴에 처박혀 헤어나오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기 전에, 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내 스스로를 위로해줄 시간이 필요하다.



『살 만한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은』


내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우선 책 한 권 읽는 것부터 시작하자. 우리와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와 같이 험난한 일상에서 고군분투하는, 그 속에서도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저자처럼.


 



어느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서 대출을 받아 욜로 생활을 하는 20대에게 서장훈이 한 말이 기억난다.


“지금 네가 돈이 없어도 젊음을 핑계로 이해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네가 50대가 되어서도 지금처럼 대출을 받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간다면 결국 주변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모두가 널 피할지도 몰라. 난 15년 동안 농구를 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어. 내가 가장 행복한 게 뭔지 알아?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해도 된다는 것. 그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줄 몰라.”


틀린 말 하나 없다. 지금 안 힘들면 앞으로 더 힘들 것이다. p 038




저자가 말한 저 방송을, 채널을 돌리다가 본 적이 있다. 진짜 그야말로 “욜로하다가 골로간다”라는 말을 그 20대는 몰랐던 듯 싶었다. 비단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정말 내 생각보다 더 많은 또래 친구들이 앞뒤 생각없이, ‘욜로’를 외치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어차피 살기 힘든 세상이니, 그냥 즐기면서 살겠다는 그들의 이야기가 썩 나쁘지많은 않고, 어느정도 이해도 된다. 취업도 힘들고, 집 사는 것도 힘들고, 이래저래 다 힘드니 그런말이 나올 수 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정답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한다. 하지만 괜시리 말했봤자 서로간에 의만 상하고, 애초에 옆에서 조언을 해서 들을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앞뒤 안가리고 욜로를 하지도 않았을거고. 그렇게 욜로욜로 외치는 사람들은, 직접 욜로하다가 골로가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음...안차릴수도. 



뭐, 한켠으로는 앞뒤 생각없이 욜로욜로하며 즐기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다. 그들이 욜로욜로 할때도 난 꾸준히 회사에 출근하고, 일하며, 월급받고, 저축하며, 소비는 최대한 절제하며 살아왔으니까. 이렇게 문득 내 삶을 돌아보니, 우와. 난 정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왔구나? 그렇다고 가정형편이 어려운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난 자립심이 강했고, 왠지 놀면 안될것 같고, 공부든 일이든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고, 뭘 하든, 뭘 사든 내가 번 돈으로 해야 할 것 만 같았다. 대체 왜 난 이렇게 스스로를 절제하고, 통제하며 살아왔을까? 생각해보니 답이 참 쉽게 나왔다. 



우리 부모님은 나와 남동생을 키우기 위해, 언제나 일을 하셨다. 흔히들 말하는 맞벌이부부였다. 특히 엄마는 우유배달을 꽤 오랬동안 했었는데, 그 기간동안 나 역시 엄마 따라서 우유배달을 했다. 자의로 할 때도 있었지만, 타의로 할 때도 분명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초,중딩이 엄마따라 우유배달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다. 특히 뙤양볕이 내리찌는 여름이나, 칼바람이 불어재끼는 겨울은 더더욱. 거기다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생각을 안한적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혼자 우유배달을 하면 너무 힘들테고, 끝나는 시간도 더 길어질테니(와, 나 이렇게 보니 효녀인듯). 무엇보다 우유배달을 하면 엄마가 용돈을 주니까(ㅋㅋㅋ)! 하, 이때부터 난 (자의반, 타의반)그렇게 자본주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초딩때부터 시작한 우유배달은 시간당 오백원의 용돈을 시작으로, 중학생쯤 되니, 어느새 내 시급은 이천원까지 올라서, 나름 용돈벌이도 쏠쏠했다. 엄마가 주는 용돈(시급ㅋㅋ)이 오르면 오를수록, 타의보단 자의로 우유배달을 하게되었달까? 내 서랍속에 쌓이는 돈을 보며,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참맛을 느꼈다. 그리고 그 즈음 알았다. 돈 버는 일은 정말 고된 일이라는 걸. 편하게 돈 버는 일은 없다는 걸!



다 커서 또 하나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경제관념을 확실히 체득하도록 하면(돈은 노동의 댓가로 받는다는 것, 돈벌기 어렵다는 것) 그 아이는 다 커서도 최소한 제 몫은 제가 챙기게 된다는 점이다 (나처럼!!!). 고로 난 미래의 내 자식도,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노동의 댓가로만 용돈을 줄 생각이다. 그래야 본인 스스로 경제관념도 생기고, 본인 스스로 저축하고, 본인 스스로 소비를 절제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를 수 있을테니.



달에 꼭 나가는 지출액을 계산해 보고 기준을 초과하면 당장 사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것들을 다음 달로 미루고 조금 참는다. 다음 달이 되면 과거에는 꼭 사야 할 것 같던 것도 충동적인 마음일 때가 많아서 구매 욕구가 사라진다. 입이 당겨 생각나는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거나 먹는 횟수를 줄이고, 정말 먹고 싶으면 할인을 받아 주문한다. 쇼핑은 한 사이트에서만 주문해 적립금을 모아 활용하고, 간단한 물품은 지역화폐를 써 캐시백을 받는다. p 045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도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내겠지 하며 안일하게 미루기만 했다. 그렇게 미룬 일들을 처리하느라 체력과 정신이 바닥나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때그때 조금 더 움직여서 미래의 내가 질 짐을 덜어준다. p 074



여튼 그렇게 오랫동안 우유배달을 한 경험 덕분에 난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갔을 땐, 학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열공해서 장학금도 받고, 뭐 그랬다. 남들은 학자금대출 받아서, 대학을 졸업할 땐 빚지고 졸업한다는데, 나는 아득바득 장학금 받고, 알바하고 해서 졸업할땐 통장에 어느정도 돈을 쌓아두고 졸업했다. 졸업해서는 남들과 똑같이 관공서 인턴을 하면서,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 뿌려대기. 그렇게 나와 1도 맞지 않는 제약회사에 취업을 해서도, 열씸히 일했고, 받는 족족 저축에 저축에 저축했다. 아니 그렇다고 급여를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난 뭣도 모른 사회 초년생이어서, 파견직으로 입사했었으니까(파견직은 정말 사회 악같은 제도라고 생각함)^^. 근데 뭐 내가 일을 참 잘한것도 있었고(자화자찬 플렉스), 파견직으로 두기엔 나름 강점인 능력도 있었고, 그래서 스무스하게 정규직이 되었고, 스무스하고 지금까지 십년넘게 다니는 중이다(하지만 중간중간에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퇴사고비가 참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예정이지만).



여튼 이렇게 관공서 인턴 월급, 회사 월급 등 처음부터 월급의 70%~80% 정도를, 월급 당일에 적금 및 청약, 연금저축 등 자동이체를 걸어놨기에, 내 손에 떨어지는 돈은 얼마 안되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남는 돈 안에서 내 나름대로는 합리적으로 소비! 엄마랑 같이 사니 일단 주거비용 굳었고, 자연히 식대도 굳었고(평일 점심은 회사에서 제공)! 거기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공단 내에 있다보니, 주변에서 외식할 식당도 없고, 그 흔한 카페도 없고. 와, 이렇게 보니 내 회사 주변 환경이, 돈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이렇게나 도와주었네? 아, 물론 인터넷 쇼핑이라는 복병이 있긴 했지만, 잘 절제한 내 자신을 매우 칭찬하며, 그렇게 난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 덕분에 오로지 내 돈으로 결혼도 하고, 신혼여행도 가고, 심지어 대출 1도 없이 내 집 마련까지(나보다 나이많은 옛날 아파트였지만)! 솔직히 이 땐 엄청 우쭐했다. 충분히 우쭐할만하지 않은가? 또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무려 20대 후반에!! 자차보유하고(물론 아빠차에 연식 오래된 아방이지만! 보험등 차량유지비로 내 소비계획을 휘청거리게 한 장본인이지만T.T), 대출 없이 ALL 내 돈으로 내 집 마련한 사람은 1도 없었으니까. 실제로 우리 엄마빠도 날 자랑스럽게 여겨, 실제로 여기저기 많은 자랑을 하셨다. 아마 지금도 제몫은 스스로 잘 챙기는 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을까? 라는 과한 자신감ㅋㅋㅋㅋㅋㅋ



물론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20대를 즐기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수는 없다는 걸 이미 우유배달을 하던, 어린나이에 깨달았기에(뭐래니 ㅋㅋㅋ). 나와는 1도 맞지 않던 제약회사를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다니고 있는게 아닐까싶다. 물론 중간중간에 회사를 때리치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내가 이 회사를 퇴사하고, 원하는 일을 도전했을 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안정적인 월급에 길들여진 직장인은, 이렇게 리스크가 큰 도박은 겁이난다. 그냥 계속 일개미로 살아갈뿐...하..



확실한 건! 난, 또래친구들이 젊음을 즐기던 20대에, 미래의 나를 위해서 열씸히 일하고 돈을 모았다. 물론 나 역시 그들처럼 젊음을 즐기고 싶었고, 놀고 싶었고, 여행가고 싶었다. 안 그럴리가 있나?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만끽할 기회를 미래의 나에게 넘겼을 뿐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20대를 보낸 과거의 나 덕분에, 지금의 나는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돈이 좋다’는 말을 조금 수정해서 돈을 가치 있게 사용하면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돈으로 얻은 여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라지게 만든다. 시간적 여유를 얻었고,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매출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세상은 살 만하구나 하며 오랜만에 긍정적인 생각도 했다. p 274



가끔은 신랑이 나를 보고 우스갯소리로 자본주의 노예라고 하지만(물론 내 스스로도 자본주의 노예라고 생각중이지만ㅋㅋ), 자본주의 노예면 어떤가? 남들처럼 욜로하다가 골로가느니, 자본주의 노예로 살면서, 먹고 싶을 땐 먹고, 여행가고 싶을땐 여행가고, 가끔은 충동구매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걱정없이 밥 한끼 사주고! 



물론! 어딘가에는 자본이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집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행복이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편하게 밥 한끼 사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건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여행가고 싶을 때 여행가는 것, 바로 그런 거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자본이 있어야한다. 내가 너무 세속적인 사람인걸까? 뭐, 세속적이면 어떻고, 자낳괴면 어떠하리. 내 행복에는 자본이 필요한 것을!



그래서 난 평생 자본주의 노예로 살 생각이다(그런 의미에서 제발 로또대박좀T_T).




어떤 선택을 하든 포기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그러니 삶의 방향과 목표가 흔들릴 때, 각각 다른 기준에서 해 주는 조언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게 아니라 어느 한쪽의 의견일 뿐이라고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누군가의 성공한 사례는 예시일 뿐, 나는 그 사람이 아니기에 똑같은 성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선택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p 235



이쯤되면 내가 원하는게 뭐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랑은 맞지 않은 회사에 붙어 있기로 선택한 건 나였고, 20대에 놀지 않고, 열심히 일하기를 선택한것도 나였으며,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기로 선택한것도 나였으니까. 해서 가끔은 한창 놀 나이에, 놀지 못한것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말그대로 선택의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20대에 노는 것을 포기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즐겁게 살 수 있는게 아닌가! 



앞으로도 난 수 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 설 테고, 그 선택으로 후회를 하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당장은 후회할지라도, 분명 미래의 나를 위해 선택일거라고 난 100%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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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고 색다른 여행 - 재밌고 힐링이 가득한 여행지
이종원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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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말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새해가 된 2020년,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 우리나라 역시 코로나19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역을 위해, 안전을 위해, 자의로, 타의로 집 안에서 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몇달만 버티면 코로나19가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또 1년이 지난, 2021년. 코로나19는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이제 사람들에게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야 어떻든지간에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는 종식되지 못했고, 지금도 계속 확산되고 있으며, 전 국민 백신 접종도 까마득하다. 이제와서 정부를 탓해봤자, 입만아프니 여기서 생략.


우리는 이제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한다. 생각해보면 작년에 사적인 외출은 자제했을지언정, 회사로 출근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재택근무라는 건 TV에서나 나오는 정말 제대로 된 대기업 이야기니까. 그렇게 1년간 멀쩡하게, 코로나19가 활개를 치는 그 와중에도 나와같은 직장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꾸준히 출근을 했다. 심지어 회사에, 내 주변에, 지금까지 확진자도 없다. 이쯤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모두가 회사에 출근하는데, 여행이라고 못할게 무엇인가? 내 스스로 안전하게, 방역만 잘 지키면 여행을 갈지언정 문제가 없지 않을까?



메르스와 사스를 이겨냈기에 코로나 역시 잠시 스쳐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일년을 넘게 지구인들을 괴롭히고 여행 산업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 우리가 백신 접종을 마쳐도 다른 나라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비행기 트랩에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해외여행은 당분간 주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우려하는 바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순 없다. 코로나블루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엔 여행만한 확실한 치료제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는다면 코로나 시대를 받아들이고 이에 맞는 비대면 여행과 이색 테마 여행이 필요하겠다.



그래서 난 조금씩 여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여행지가 곳곳에 널려있다. 내가 다니는 여행지들도 대게 사람들이 거의 없는 여행지가 태반이니까. 물론, 여기에 단점이 있긴 하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여행지는 그만큼 편의시설이 없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런 불편함만 조금 참으면, 우리는 코로나19가 만연한 이 시기에도, 충분히 안전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아, 여기서 구분해야하는 게, 안전한 ‘여행지’랑 안전한 ‘여행방법’ 이다. 안전한 ‘여행지’를 선택후, 그 여행지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솔직히 조금 찜찜하다. 대중교통은 얼굴도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다. 그 속에서 내가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 만큼 방역에 철저한지 알 길이 없다. 심지어는 마스크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까지도 뉴스에서 마스크를 안쓰고 대중교통에 올랐다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교통은 아직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안전한 여행지로 향하는데, 안전한 여행방법은 바로 ‘자차’다. 나만 탈 수 있는 내 차만큼 안전한 공간은 없다. 물론 뚜벅이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럼 안전하게 여행을 즐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방법중 하나가 이 책 속에 있다. 바로 “차박”이다. 차박은 내 차로 돌아다니면서, 숙박도 내 차에서 하는, 그야말로 안전에 극치인 여행방법이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차박’이라는 단어가 정말 생소했을 90년대에서 200년대 초반까지, 가족과 차박을 꽤 많이 했다. 아부지가 커다란 (냉장)화물차를 운전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부지의 커다란 화물차, 냉장컨테이너는 여행다닐 땐 하나의 집이 되었다(tvN 예능 #바퀴달린집 의 하위호환이랄까 ㅋㅋ).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 혹은 바닷가에서, 화물 컨테이너를 열어두고 그 안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밤에는 컨테이너 한쪽 문만 열어두고 잠을 자기도 하고, 혹은 운전석 뒤에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화장실은 당연히 휴게소를 이용한다. 어쩌면 조금은 불편할지도 모르는 차박이라는 여행방법은, 그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어느 장소에서든, 아주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아이러니 한 점은, 어렸을때 그렇게 자주 하던 차박을, 성인이 된 후에는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 하하하하. 물론 언제든 차박을 할 수 있게, 승용차 뒤에서 잘 수 있는 에어매트까지도 구비했지만, 그럼에도 나랑 신랑은 숙박만큼은 호텔을 찾아다닌다T.Tㅋㅋㅋㅋ


아! 코로나 시국에 맞춰 호텔 고르는 법도 이야기해보면(관통사 자격증 소지자 으쓱으쓱ㅋㅋㅋ),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하는 최소 3성급 이상 호텔을 찾으면, 어느정도 안전은 보장될거라 본다.



일단 왜 저렴한 모텔이 아닌, 호텔을 이야기하느냐? 라고 물어본다면. 그 답은 이렇다. 모텔업은 ‘신고’만 하면, 누구든 영업을 할 수 있는 반면에, 호텔은 조건을 충족해서 ‘허가’를 받아야만 영업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허가된 호텔에 별이 달려있다면, 호텔이 그만큼 관리가 되고 안전하다는 이야기다.

(모텔은 공중위생관리법에 따라 관리되며, 호텔은 그보다 더 높은 관광진흥법에 따라 관리된다)



★호텔 별 등급제★

1성급 호텔: 깨끗한 객실과 욕실, 조식 가능

2성급 호텔: 깨끗한 객실과 욕실, 최소한의 F&B 부대시설을 갖춤

★★★3성급 호텔: 깨끗한 객실과 욕실, 1개 이상의 레스토랑, 로비, 라운지, 부대시설을 갖춤

★★★★4성급 호텔: 고객에게 맞춤 서비스 제공, 품격, 2개 이상의 레스토랑, 연회장, 국제회의장, 24시간 룸서비스

★★★★★5성급 호텔: 최상급 수준 시설, 품격, 뛰어난 품질의 침구, 3개 이상의 레스토랑, 24시간 룸서비스



호텔에 별이 달렸다는 건 한국관광공사에서 그 호텔이 안전 및 위생, 편의를 얼만큼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증도장을 찍어주는 것이다.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가성비보단 안전을 택하는 사람이라면 최소 별 3개 이상 호텔에 숙박하는 게, 코로나 시국에 맞는 숙박 방법이 아닐까?



근데.. 내가 아*다 VIP여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최소 3성급 이상 호텔들도 할인 많이 때려서 꽤 저렴하던데.....!!!!! 라는 뭐 그런 이야기.




​이번엔 책 속에서 안전한 ‘여행지’를 찾아볼까? 


수 많은 안전한 여행지가 이 책속에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직접 가 보았던(!), 진짜 정말 내 기준으로 안전하다고 느낀(!!) 여행지를 꺼내볼까 한다.





1. 경기 북부에 위치한, 임진강이 흐르는 연천! 수도권에서 꼽을 수 있는 정말 안전한 여행지 중 하나이다. 완전 극성수기(5월 어린이날 연휴)에 가도 사람 구경이 정말 어렵다. 덕분에 여행지를 통채로 빌려서 여행한 느낌이 든달까?



그중 가장 멋진 곳을 꼽으라면 연천 동이리에 있는 임진각 주상절리. 여름에는 수직 절벽이 초록 덩굴로 감싸이며 가을에는 담쟁이와 돌단풍이 붉게 물들게 되는데 일 년 중 10월 중순이 가장 볼 만하다. 이렇게 절벽이 석양에 물들어 붉게 보인다고 해서 ‘임진강 적벽’ 이란 별칭을 얻었다. p 077



연천하면 역시 임진강변을 따라 있는 주상절리가 최고다. 자매 여행지(ㅋㅋㅋ) 포천 한탄강 주상절리도 장난아니게 멋지고, 사람도 별로 없다. 뻘소리이긴 하지만, 왜 포천이 자매여행지인고  하면.. 한탄강이 흐르는 포천, 임진강이 흐르는 연천, 이 두 강이 흐르는 곳에 있는 주상절리(!!!) 뭔가 감이 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흐흐흐흐. 임진강과 한탄강이 흐르는 곳은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무려 국가가 인증한(!!) 절경을 보여주는 지질공원이 바로 연천의 임진강 주상절리와, 포천의 한탄강 주상절리라는 것!



사람도 없는데, 광경은 멋지니, 맘 편하게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얼마나 이 얼마나 좋은가!



참고로 연천에는 고구려성인 당포성, 호로고루성, 은대리성이 있는데, 여기도 정말 사람 보기 어려운 곳이다. 참 멋진 곳인데, 사람들이 정말 없다. 근데 또 사람이 없는 만큼 편의시설도 없다는 건 함정 ㅋㅋㅋㅋ. 아 !!!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릉의 무덤이 바로 여기 연천에 있다. 근데 역시나 사람들 발길이 없는 곳22222.



2. 명실공히 대한민국에서 핫한 여행지 강원도 동해안. 하지만 강원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대게 고속도로가 끝나는 속초나 강릉에 제일 많고, 그 다음이 동해안 따라 내려가는 아랫동네다. 상대적으로 강릉 위쪽, 그러니까 휴전선에 가까워질수록 관광객의 발길이 줄어든다. 왜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집으로 돌아갈 길이 멀어지니까. 하하하.



그렇게 동해를 품고 있으며 강원도 끝에 있는, 휴전선이 있는 지역이 바로 강원도 고성이다. 남해를 품고 있는 경남 고성이 아니니 주의.



강원도 고성군 죽암면 문암항에는 능파대라는 타포니 지형을 만날 수 있다. (생략) 하얀 파도와 움푹 팬 바위가 볼 만해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외계 행성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p 100



분명 동해라는 푸른 바다를 끼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관광객은 많지 않다. 내가 고성을 찾았을 땐 분명 연휴였는데(아마도 추석연휴였던듯)!!! 뉴스에서는 강릉, 속초 관광객이 절정이라는데, 왜 내가 있는 고성은 사람이 띄엄띄엄이었는지. 아 물론, 고성 내에서도 그나마 관광객이 많은 곳, 적은 곳이 갈리긴 한다. 예컨데 김일성 별장이 있다는 화진포 해수욕장은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다. 물론 고성을 방문한 관광객 대비해서지, 속초나 강릉과 비교하면 아주 한적하다. 하지만 그나마도 무섭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면, 위 책에 나온 ‘능파대’가 제격이다. 정말 능파대는 사람 보기가 어렵다. 뿐만인가? 능파대를 품고 있는 문암 해수욕장도 당연히 사람이 없다. 



푸르른 동해를 가고 싶은데, 사람 많은게 걱정이라면, 고성 문암 해수욕장을 추천한다. 옆에 있는 타포니 지형인 능파대 구경은 당연한 말이고. 진짜 능파대 올라가면, 여기가 지구가 맞는지 잠시 의구심이 들정도로 신기한 지형이기도 하고 ㅋㅋ



3. 내가 제일 최근에 갔던 여행지가 바로 서천이다. 서천을 다니며 스탬프 투어를 했는데, 스탬프를 여행지들도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적어서, 아예 사람이 없는 곳도 있었고 해서 가끔 마스크를 내리고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젤 돋보적인 장소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한, 판교마을.



판교마을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을 뽑으라면 2층의 적산가옥인 장미사진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살던 집으로 일본어로 ‘천황폐하 만세, 쌀주세요’를 외쳐야 쌀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11명의 일본인이 지역 경제권을 장악하고 동면 5,515명을 쥐락펴락했다고 한다. 1층은 쌀집과 장미사진관이 사이좋게 나눠 쓰고 있다. 다락방에 오르면 판교마을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감시탑 역할을 했으리라. p 145



서천 스탬프 투어와는 별개로, 판교마을 자체 스탬프 투어가 있는데, 이야. 판교마을 골목골목이 일단 2021년 같지가 않다. 마을 중간에 적산가옥이 여러채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적산가옥은 2층 다락이 거의 허물어져가는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허물어져가는 그 적산가옥이 바로, 책 속에 있는 장미사진관이다. 장미사진관을 보고 있노라면, 그 건물이 세워질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왠지모르게 눈 앞에 펼쳐진다고나 할까?



근데 새삼 놀라운 사실. 이렇게 일제 적산가옥이 남아있는 군산 근대문화 거리나, 인천 근대문화 거리는 항시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반면 서천 판교마을은 음...... 그냥 동네주민만 있다. 근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서천 판교마을은 관광지처럼 정비가 되어있는 장소는 아니다. 여타 근대문화 거리는 관광객들이 좋아할만한 카페도 있고, 요즘 세대를 노린 식당들도 있지만, 판교마을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교마을을 여행지로 손꼽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판교마을을 걷다보면, 이 동네의 역사적 상처가 보인다. 그 상처를 이겨내며, 살아가는 판교마을 주민들이 보인다. 그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살아가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난 판교마을이 가슴에 남았다.



5. 많은 사람들이 ‘바다’ 하면 동해안을 떠올린다. 실제로 여름만 되면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들이 넘처난다. 하지만(!!!) 난 허를 찔러, 수도권에서도 가까운 서해안을 찾는다. 서해안은 갯벌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전혀! 서해안에도 많은 해수욕장이 있고, 그 해수욕장 중에서도 사람이 없는 곳도 정말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서해바다를 끼고 있는 수목원도 만날 수 있다. 태안 천리포 수목원 이야기다.



천리포수목원은 국내 최초의 사립수목원이다. 여타 수목원보다 규모가 작을지 몰라도 수종만은 1만 5천여 종에 달한다.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 아름다운 수목원’에 선정되었다. p 164



내 나름대로 여러 생태공원도 가보고, 산림욕장도 가보고, 수목원도 가봤지만, 지금까지 최고로 꼽는 곳이 바로 태안 천리포수목원이다. 바다와 수목원이 함께 있을거라고는 생각치 못했기 때문에, 그 모습에 또 한번 놀랐고, 그 설립자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두번 놀랐다. 주한미군사령부에 속했던 이 외국인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진심이었고, 한국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에게 진심이었다. 그 외국인은 모래만 있던 천리포 해변의 부지를 사들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을 일궈냈다. 그렇게 한국에 귀화한 그의 이름은 ‘민병갈’ 박사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분만큼 한국 땅에 자라는 식물에 진심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아! 천리포 수목원 관람 꿀팁이 있다면, 수국이 한창 피는 여름에 갈 것! 정말 인생사진을 수십장 건질 수 있다. 겸사겸사 천리포 수목원 해안산책로도 최고다. 만약 인적이 드문, 제대로된 해수욕장을 가고 싶다면 태안 구례포 해수욕장도 추천! 완전 극성수기인 7말8초에 가도 사람 하나 없는 해수욕장이다. 멋진 해송 산책로까지 있는데, 왜 사람이 없는지 의문이랄까?



이 책에는 위에 말한 안전한 여행지 말고도, 다른 테마의 여행지 리스트도 있다.


색다른 여행지, 포토존 명소 여행지, 한국에서 즐기는 해외여행지까지.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있는 이 여행지들을 확인하려면, 역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는 점. 후후후후후후. 흔하디 흔한 유명 여행지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여행지, 안전한 여행지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이 책 『안전하고 색다른 여행』을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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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개 공간으로 읽는 조선사 - 개국의 환희부터 쇠망의 통한까지
신병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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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위즈덤 하우스 책은 왠만하면 안 읽는 편이었다. 역사를 왜곡하는 작가의 책도 스스럼없이 출판하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굳이 위즈덤 하우스에서 출간한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신병주 교수님이기 때문에. 진짜 오롯이 신병주 교수님이 쓴 책이기 때문에, 굳이 책을 구입했고, 읽었다. 



기존에 난, 과거에 조선사 관련된 역사, 교양책을 워낙 많이 읽었기 때문에 왠만하면 조선사 책은 안사려고 하고, 실제로 꽤 오랫동안 사지 않았다. 어차피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고, 새로이 알게되는 내용도 그리 많지 않고, 뭐랄까, 대체로 조선사 관련 책을 읽으면 일단 기본적으로 왕이나 사건 중심 이야기가 태반이고, 민중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으며, 그 시절에 대한 비판보단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지’라거나, 미화시키는 등의 내용이 많아서 더 멀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누가 썼느냐에 따라 다른가보다. 신병주 교수님이 쓴 이 책은 분명 조선사지만, 왕이나 사건 중심이 아닌, 어디까지나 ‘공간(장소)’ 중심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슬쩍 슬쩍 나타나는 비판들. 역시, 책을 잘 골랐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책을 읽으며 내가 다녀왔던 곳을 다시한번 떠올리게 되는 효과였달까? 물론 이 효과는 나같은 사람 한정이겠지만.




2020.03.28 경복궁 답사


경복궁 건설에는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 건국한 나라인 만큼 왕실이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정신이 반영됐다. 실제로 <태조실록>에 따르면 경복궁 전체 규모는 755칸, 경복궁의 중심을 이루는 전각은 365칸 정도였다고 하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의 규모가 7,200여 칸임을 고려하면 처음 창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태조의 최측근 정도전 또한 “궁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아름다운 게 되는 것”이라 하여 검소함을 강조했다. p 019 ~ 020



“궁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백성을 힘들게 한다”는 정도전의 말은, 조선 초기 경복궁 건설을 비롯하여 조선의 왕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태조는 경복궁을 정도전이 말하는대로 검소하게 지었고, 이방원이 창덕궁을 지을 때도 비슷한 규모로 지었으며, 중간중간 전각 보수가 있거나 새로운 전각을 만들 때도 그 규모내에서 끝냈다. 물론 사치와 방탕을 즐긴 조선의 왕도 있긴 했으나, 궁궐 건설 규모를 따지자면 오롯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대규모 궁궐공사를 주도한 조선 말 고종을 따라갈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으리으리한 경복궁과, 조선 초 처음 지어졌던 경복궁은(임진왜란때 소실되기까지도) 엄청난 거리가 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대규모의 경복궁은 오로지 조선 말 고종 때,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원래 경복궁을 10배 이상으로 부풀려서 지은 것이다. 경복궁만 그런게 아니고, 다른 궁궐들도 추가보수를 하였으며, 심지어 평양에 360칸 궁궐 공사까지 진행했으니, 궁궐 건축에 있어서 고종을 따라갈 조선의 왕은 없을 것이다.



고종 때의 대규모 궁궐 공사는, 정도전의 말을 그대로 현실로 만들었다. 대규모 궁궐공사는 조선의 재정을 바닥으로 치닫게 했고, 그 재정을 채우기 위해 삼정의 문란으로 살기보단 죽기를 택하던, 삶이라는게 없었던 백성들에게 더욱 큰 짐을 지게 하였다. 그 모든 걸 감수하고 대규모 공사를 진행했다면, 고종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는 시도라도 보여야 했는데, 그 조차도 없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의 그림자다.




2019.06.15 구) 러시아공관 답사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경운궁을 확장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종은 미관파천, 영관파천, 불관파천 등을 시도하여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외세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p 296




고종이 도망갔었던 러시아 공관, 그 흔적은 아직도 서울에 그대로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러시아 공관의 흔적이, 힘없는 조선을 지키려 애쓴 왕이 피난했던 곳이라 하였다. 지금 정권까지도 고종이라는 임금을 독립을 위해 애쓴 ‘개혁군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본 러시아 공관은, 고종이 ‘황제’자리에 눈 멀어, 세계정세 조차 읽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에 이권을 팔며, 오롯이 자기 안위 지키는데만 급급했던 장소였다. 내가 본 러시아 공관은 그랬다.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고종을 비판하면, 그 사람은 졸지에 ‘매국노’가 되었다. 어딜 감히 망국의 불쌍한 왕, 독립을 위해 애쓴 왕을 건드리느냐고. 너는 매국노고, 식민사학에 찌들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하나보다. 요즘들어 점점 고종의 민낯이 하나하나 까발려지면, 그 비판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조차도 고종의 그림자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자기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그 모든 행동들이 하나하나 까발려지기 시작했고, 고종으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죽어갔는지, 고종이 을사늑약 당시에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지, 그 모든 게 말이다.



고종을 비판하는게 이해가 안된다면, 다 필요 없이, 딱 하나만 보면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자,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 헌법’을. 


고종이 직접 선포한 대한제국 헌법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계정세를 읽지 못했고, 얼마나 자기 안위를 위해 행동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니까.


대한제국 헌법을 보고서도 고종을 비판하는게 이해가 안된다면, 그 사람은 독재자 밑에서 살아야 할 사람일 것이다.




2017.10.14 사릉(단종비 정순왕후릉) 답사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며 불교에 의지한 채 외롭고 고달픈 삶을 이어 갔다. 현재 종로구 창신동에 소재한 자지동천 바위 글씨가 그 흔적을 보여주는데,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라는 뜻의 자지동천은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흰 옷감을 자줏빛으로 염색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편 동대문 근처에 형성된 영니시장의 유래에 대해서도 정순왕후가 초목근피로 연명하며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여인들이 정순왕후에게 채소라도 공급해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p 071~072



단종비 정순왕후. 그녀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다. 그녀가 단종비로 선택된 이유는 수양대군의 입김이었다. 그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수양대군의 동생인 영응대군의 러브스토리까지 올라가야하니, 그건 각설하고. 수양대군은 영응대군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영웅대군부인 송씨의 조카를 선택하여, 자신의 조카인 단종과 결혼을 시켰다. 



그렇게 조카며느리이자, 한 나라의 왕비를 제 손으로 올린 수양대군의 뒷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가 알고있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유배보내고, 죽였다. 조카 며느리도 당연히 폐서인이 되었고, 궁에서 쫓겨났다. 궁에서 쫓겨난 여인의 삶이란,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없는 삶이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 그녀를 돕기 위해 동묘에서 채소를 팔기 시작했다. 채소를 팔아 정순왕후를 돕기 위함이다. 지금은 핫플레이스로 유명한 동묘 앞 벼룩시장 유래이기도 하다.




2019.05.02 창경궁 답사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고 법전은 명정전이다. (생략) 명정전은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남향이 아닌 동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창경궁이 크기나 품격에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한 등급 낮은 형태를 취한 것도 이곳이 왕이 아닌 왕실 여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p 097



창경궁을 갈 때마다 느끼는 위화감이 있다. 창경궁의 형태는 경복궁과도 다르고, 창덕궁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창경궁이 경복궁이나, 창덕궁 처럼 왕을 위해 만들어진 궁궐이 아닌, 왕실 여성, 정확히는 대비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궁궐이라서 그렇다.



성종이 즉위했을 때, 세상에나 대비가 무려 세명이었다. 참고로 대비란, 전 왕들의 정실부인(중전/왕후)을 말한다. 아니, 그렇다면 성종 전에 왕의 부인이 세명이나 살아있었다고? 그렇게 장수를 했다고?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네버! 전혀 아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시점부터, 이미 조선의 왕위 계승은 정통성이 없어졌다. 장자계승? 그딴건 멍멍이나....



뭐, 시작은 좋았다. 세조는 자신의 장남인 의경세자에게, 사후에 왕위를 넘기려 하였다. 하지만 의경세자 요절! 그럼 다음 왕위 계승권자는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왠걸? 세조 사후 왕위는 세조의 차남이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에게 돌아간다. 세상에나, 예종이 재위 후 얼마 못가 죽었다. 예종이 죽었으니,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이어야 한다. 아니 근데 이게 또 무슨일? 다음 왕위는 예종의 형이었던, 세자시절 죽었던 의경세자의 차남 잘산대군에게 돌아간다. 잘산대군이 바로 성종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종에게는 윗어른으로 모셔야할 3명의 대비가 생기게 된 것이다. 자기의 생모인 소혜왕후(의경세자/추존왕 덕종비), 숙모인 안순왕후(예종비), 할머니인 정희왕후(세조비). 이 세 여성을 위한 궁이 급하게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만들어진게 바로 창경궁. 창경궁은 정말 오롯히 3명의 대비를 위해 만들어진 궁궐인 것이다.




2018.08.04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답사(류성룡 종택)


유성룡은 <징비록> 서문에서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골 구석에서 목숨을 부쳐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왕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아니겠는가?”라 하여 임진왜란 때 좌의정, 병조판서, 영의정 등의 중책을 맡았으면서도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뜻에서 <징비록>을 남겼음을 밝힌다. p 155 



서애 류성룡. 그는 임진왜란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자신의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니, 그 유명한 『징비록』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참상과, 어찌 보면 본인의 치부일수도 있는 당시 위정자들이 얼마나 문제였는지를 집필하며, 후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깨우쳐, 후환을 경계하길 바랐다. 



다만 『징비록』에서는 선조를 ‘너그러우신 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왕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어도 이를 정당하게 비판할 수 없는 왕조국가의 한계를 보여준달까. 이렇든 저렇든, 제일 슬픈사실은 류성룡이 이렇게 책까지 집필하며, 징비를 외쳤지만 후대인들은 징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위정자들은 임진왜란 때보다도 문제가 더더욱 많았다. 그렇게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불과 50년도 채 안되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참상을 마주한다.




2017.12.31 예산 화순옹주 열녀문 답사



사도세자의 비극이 일어난 현장이 창경궁 문정전이었던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당시 이곳에는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1757년(영조 33)에 승하한 후로 그녀의 혼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조는 임시로 문정전을 휘령전이라 하고 죽은 왕비의 혼전으로 삼았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와서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곳을 비극의 장소로 삼은 것이다. p 228



영조는 그토록 사랑했던 딸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자살한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영조는 “그의 절개는 곧다고 이를 만하나, 나로 하여금 장치 비참한 지경을 보게 할 것이니, 어떻게 마음을 잡겠는가” 라면서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조 즉위 후 화순옹주는 열녀로 인정받았다. 정조는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무덤 근처인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열녀문을 세웠다. 이 홍문은 왕실 유일의 열녀문이다. p 232



요즘 새로 한 방송사에서 조선후기 과부 ‘보쌈’에 대한 드라마를 방송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무려 조선 왕실의 옹주. 대충 스토리는 시집을 간 조선의 옹주가 남편이 죽은 뒤 과부가 되었는데, 보쌈을 당해버렸다. 옹주가 시집갔던 집안은 보쌈당한 자신의 며느리이자, 조선의 옹주를 죽은 것으로 꾸며버렸다. 그러니까, 죽은 남편을 못 잊어서 옹주가 따라 죽었다고. 그러자 백성들은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옹주를 가르키며, 역시 왕실 여성은 다르다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 사회에서 죽은 남편을 따라, 부인이 자결하는 것은 유교의 ‘덕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조선 왕실은 이렇게 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이 나온 집에는 #열녀문 을 세워주었고, 그 집안을 우대해주었다. 그냥 우대해준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우대해주었다.



이렇게 조선에서 과부의 재가를 막아버리고, 과부가 남편따라 죽는 것을 극찬하기 시작한 건, 여성의 권리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 조선 성종(인수대비) 때 부터였다. 성종은 성종대로,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는 인수대비대로 여성의 권리를 옥죄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작하였고, 그 결과 임진왜란 직후엔 조선 여성에겐 많은 것이 금기시 되었다. 그 모습이 드라마 ‘보쌈:운명을 훔치다’에서 보이는 광경이다.



이후 조선에선 수 많은 과부들이 남편을 따라 죽었다. 자의도 있었겠지만, 과반이상은 타의에 의해서였다. 대다수의 양반집 과부들은 시댁 또는 친정집 식구들 손에 자결당했고, 시댁은 열녀가 나왔다고 열녀문이 세워지고, 친정은 열녀를 배출했다고 치켜세워지곤 했다(드라마에서 옹주가 시집간 집안이 옹주를 죽음으로 꾸민 것처럼). 우리가 조선의 열녀문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되는 이유다.



물론 그 드라마에도 허구는 있다. 해당 드라마는 광해군의 딸을 새로 만들어서 이야기를 끌고왔고, 그녀의 가짜 죽음(?)에 열녀문이 내려지며, 그게 조선 왕실 최초의 열녀문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 왕실의 최초 열녀문은 광해군 이후로도 한참 지난, 조선 후기 영조의 딸 화순옹주 열녀문이다. 



그렇다면, 화순옹주가 시집간 집안에서 옹주를 자결시켰다? 아니, 그렇지않다. 실록에 따르자면, 적어도 화순옹주의 죽음은 ‘자의’에 의해서였다. 오히려 옹주의 아비였던 영조는, 어떻게든 딸이 살길 바랐다. 영조는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자, 제발 미음이라도 먹으라고 사정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결국 화순옹주는 계속 식음을 전폐한채로, 남편을 따라간다. 영조는 이 사실을 너무 슬퍼하여, 오히려 딸에게 열녀문을 하사하지 않았다. 남편을 따라 수절을 한건, 열녀로써 본받아 마땅하지만, 아비인 자신보다 먼저 죽어버린 것은 불효라고 하였다. 그 정도로 영조는 딸의 죽음을 슬퍼했다.



자 여기서 영조의 모습을 보자. 영조는 사위가 죽자, 남편을 따라가려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딸을 보며 제발 미음이라도 먹고, 살기만 해달라고 애원했던, 딸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에게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영조는 자신의 어린 손자가 보는 앞에서, 자기 아들 사조세자를 아주 잔혹하게 죽여버린다. 



딸을 사랑해 마지 않던 아버지. 손주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잔혹하게 죽인 아버지. 이 두 아버지는 같은 사람이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왕 ‘영조’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열녀문은, 영조가 죽인 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세웠다. 이 열녀문이 조선 왕실 최초이자 마지막 열녀문이다.



생각보다 내가 다녀왔던 장소가 많이 나와서 놀랐다. 내가 그만큼 많이 싸돌아다닌건지, 아님 우연찮게 내가 다닌 장소가 이 책에 많이 나왔던건지. 뭐 어느쪽이든, 오랜만에 내가 다녀왔던 역사적 장소에 대해 떠올렸고, 당시에 내가 쓴 여행기를 다시 읽으면서, 내가 이때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장소를 갔다왔는지 생각했다.



확실한 건, 어떤 역사적 장소든, 그 장소를 가보아야만 보이는게 있다는 것. 그래서 난 역사여행을 멈출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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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서점의 오월 -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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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뉴스에서 화두가 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미얀마 군부 쿠테타’다. 미얀마 군부가 민주화를 열망하는 미안먀 국민을 탄압하며 학살하는 행동, 왠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건과 매우 오버랩된다. 한때는 광주사태로 매도되었던 바로 그 사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직후)당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전국에 계엄을 선포하고, 광주를 고립시킨 뒤, 민주화를 열망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러한 광주의 비극과 신군부의 행태를 미얀마 군부가 그대로 답습한 것이, 바로 작금의 미얀마 군부 쿠테타라고 할까?



각설하고, 이제 곧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41주년이 된다. 이 때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41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죽어갔던 그들이 열망한 ‘민주화’가 늦게나마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보자면, 이 날은 민주화를 기념할 ‘41주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신군부세력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씨를 비롯한 학살자들이 사죄를 하지 않는 이상, 이 기념일은 계속 반쪽자리 기념일이겠지만(물론 사죄한 분들도 콩나듯 있습니다만).



서론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오늘 서평의 주인공인 책 「녹두서점의 오월」 때문이다. 이 책의 집필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다. 이 책의 집필자들의 가족 역시도 5.18 유공자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수 많은 이름들 모두 5.18 항쟁 당시 죽었거나, 혹은 실종되었거나, 혹은 살았으나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혹은 5.18 피해자의 유족들이다. 



뉴스에서 5.18에 대해 가타부타 떠들어댄들, 당시의 피해자들 증언만큼 사실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5.18 관련 현장을 답사한다 한들, 당시의 피해자들이 겪었던 참상을 1%라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까? 아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을 집필한 공동집필자들의 상황일지를 하나로 모으면,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이 어땠었는지, 그야말로 카메라로 쭉 찍은 것 마냥 이어진다.





5.18 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났나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중정 안가에서 군사독재를 이어가던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되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이제 제대로된 민주국가가 들어설 것이라 희망하였지만, 그 희망은 전두환을 필두로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산산히 짓밟혔다. 전두환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하나회 출신 장교들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으니 그게 바로 12.12.사태다.



1980년, 전국의 대학생들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 민주화를 요구하며 학생운동을 전개한다. 특히 5월에 들어서 이 학생운동은 더욱 거세졌고 서울, 대구 , 광주, 부산, 인천, 목포 등 모든 도시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바로 여기서부터 광주 5.18이 시작된다.


1980년 5월 13일, 전국의 대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틀 뒤인 5월 15일,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시위를 중단한다(서울역 회군). 본인들의 시위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되서였다. 그러나 광주에 있는 전남대는 시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전남대가 시위를 중단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를 위한 걱정 때문이었다. 다만 그 결과가 달랐을뿐. 서울 대학생들이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되서 시위를 멈췄다면, 전남대생들은 신군부가 민주화의 열기를 무시하고 쿠테타를 일으켜, 빨갱이 사냥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시위를 진행한 것 뿐이었다.



광주에 있던 녹두서점은  당시로 말하자면 이른바 금서를 유통하는 것은 물론,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민주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과 그의 아내 정현애는 정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본인들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녹두서점을 민주화운동의 상황실로 사용한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광주에 7공수여단 33대대와 55대대를 투입한다. 동시에 신군부는 예비검속을 진행하였고, 녹두서점의 주인 김상윤도 5월 17일 예비검속되어 505 보안대로 잡혀들어갔다. 하여 5월 18일 당시부터 이후의 사건 진행사항은 김상윤을 제외한 그의 아내 정현애, 남동생 김상집, 처제 정현주, 여동생 김현주, 김현주와 결혼한 엄태주 등이 민주화운동 중심에 서게된다.




※예비검속: 빨갱이(간첩)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말함. 이승만 정권 당시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수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됨(제주43, 거창학살 등).



그 날의 증언


5월 18일 자정(정현애)


생각해보니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잡아갈 것 같았다. 또 남편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주어야 다른 사람들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p 051



5월 18일(김상집)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바로 내 뒤에서 “윽”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공수부대원들의 욕설이 들렸다. 그들은 무조건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을 휘둘렀다. 총검을 찌르고 곤봉을 훅훅 휘두르는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정신없이 청운학원 뒷골목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리려고 돌아섰는데, 도망쳐 온 일행 중 바로 내 뒷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 찔렸어” 그러고는 순간 ‘푹’하고 고꾸라졌다. p 157



나는 시위대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황을 안내하면서 소식이 닿는 주변인들에게 호주머니에 칼을 가지고 다니라고 말했다. 공수들이 길에서는 물론 집 안까지 쳐들어와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를 두들겨 패서 실신시킨 다음 짐짝처럼 차에 던져 실었기 때문이다. 공수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곤봉에 맞아 기절하면 어디론가 끌려가 암매장될 수 있으니까. p 159



5월 18일, 공수부대는 전남대 교문앞을 막으며,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렸으니 귀가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돌아가지 않고 하나, 둘 모이더니 300명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정현애)


방금 9시 뉴스에서 ‘광주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있다. 군인들의 희생이 많다. 민간인 부상자는 두 명 정도 났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폭력 앞에서 살기 위해 항의하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다니! 수없이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곤봉에 맞아 쓰러진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부상자가 고작 두 명이라니! 주택가의 함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보도에 기가 막힌 시민들이 터뜨린 분노의 탄식이었다. p 077



5월 19일, 신군부는 광주에 11공수여단을 추가로 증파한다. 이로써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 55대대와 11공수여단 61대대, 62대대, 63대대가 들어왔다. 이 모습만 보자면, 광주에 대테러가 일어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자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학살부대였다. 이들은 광주를 고립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5월 20일(정현애)


나중에 이름을 전옥주로 바꾼 전춘심은 시위에 참여한 이유가 동생 때문이 아니라 조카 옷을 사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시민들의 참상을 보고 시위 차량에 올라 방송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후일 마이크를 잡았던 전춘심은 계엄사에서 간첩으로 몰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p 084



5월 20일(김상집)


갑자기 MBC 방송국 건물 뒤쪽 1층에서부터 4층까지 불길이 확 솟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화염병의 화력만으로는 그렇게 한거번에 불길이 솟을 수가 없었다. 분명 군인들이 MBC방송국에서 철수하면서 방화한 것이라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생략) 그동안 잔인한 공수들만 봤던 시민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왔을까’하는 마음에 그들이 끌고 온 장갑차와 탱크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도청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장갑차로 시위대를 밀어붙였다. 



5월 20일, 신군부는 또 한번 11공수여단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 16대대, 직할대를 추가로 증파한다. 이로써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총 3,400여명. 광주시민들은 너나할 것없이 모두 금남로로 나왔고,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저항하는 시민들도 시시각각 불어났다. 특히 이 날은 택시운전사들도 시민 투쟁대열에 동참하여, 그 유명한 자동차 시위행렬을 진행한다. 



광주시민들은 군인들이 설마 자국민에게 발포를 하지는 않을 거라며, 믿고 있었지만. 이날 군인들은 광주 세무서, 조선대 앞에서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들어 발포하였다. 


5월 21일(김상집)


나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단 발포 후 군용트럭이 시내에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운동권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있는 동안, 시민들은 어느새 지원동 탄약고와 화순탄광의 무기고를 털어 단단히 무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무장한 시민들이 공수들을 응징하기 위해 광주 시내로 진입한 것이다. p178



5월 21일, 신군부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광주사태는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방화, 선동에 기인한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1시경에는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공수부대는 일제히 총을 들고 무차별 발포를 시작한다. 이런 공수부대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꾸리기 시작했다.



5월 22일(가두 방송:김상집 with 윤상원, 김광섭)



광주시민 여러분!


살인마 전두환 일당은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민주일정의 약속을 어기고 5월 18일 자정을 기해 제주 일원까지 비상계엄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을 예비검속했습니다. 


전두환 일당은 이미 5월 17일 밤에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에 공수들을 투입하여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했습니다.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어제는 대낮에 수만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공수들은 집집마다 난입하여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구타하여 초주검으로 만들고, 팬티만 입힌 채 끌어가고 있습니다. 총으로 쏘아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 죽인 사람들을 군용차에 싣고 어딘가에 암매장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당하고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인마 전두환 일당과 공수들에 대항하여 총을 들고 싸웁시다. 그리하여 공수들을 광주 밖으로 몰아냅시다.



계엄군이 물러난 22일, 광주의 치안은 ‘시민군’이 맡았으며, 그 흔한 도둑질조차 없었다. 오히려 추후에 있을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며 ‘시민군’과 광주 시민들은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 시간대에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은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를 원천봉쇄하며, 이 곳을 통과하려고 하는 시민군을 보면 무차별 사격을 하고 있었다.



5월 23일(정현애)


나는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을 경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하고 성명서 문안을 작성했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오판하여 북한이 휴전선을 넘어온다면 광주 시민들이 앞장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곘다는 내용이었다. p 111



5월 25일(김상집)


당시 수습대책위원회는 광주시민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강제로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을 해제하면 곧바로 계엄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광주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시민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총기 회수 결사반대’를 외치며 궐기대회에 참여했다. <투사회보>에 실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글은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궐기대회에서 낭독할 때마다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 인사들이 총을 드는 것을 막무가내로 반대했다. p 200



5월 25일까지 계엄군들은 계속 광주 외곽에 있었다. 계엄군이 물러 난, 광주는 공식적으로는 무정부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래없이 평화로웠고, 질서정연한 시민의 모습을 보였다.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등은 시 자체에서 해결하고, 병원에서 혈액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시민들이 몰려와 헌혈을 앞다투어 하는 등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기까지 했다.



하루가 지난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한다. 도청안에 있던 시민군은 계엄군 진입이 임박했다는 것을 예상하고 많은 사람들을 내보냈다.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십시오


시민군 윤상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청 밖으로 내보내고, 끝까지 도청을 지킨 시민군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장엄하게 산화하였다.



5월 27일(정현애)


어떻게든 ‘간첩’으로 몰려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서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엇던 터라, 나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YWCA에서 서점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북한 방송을 들었구먼”


방을 뒤지던 군인이 라디오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윤상원이 서울에서 사용했던 고물라디오 였다. p 143



5월 27일, 계엄군은 광주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을 차단했다.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광주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한 뒤, 도청 방송실에서 최후의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계엄군은 도청진압작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계엄군이 작전을 개시 한 지 약 1시간 30여 분만에 도청은 진압되었고, 광주 시내는 초토화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 5.18에 대해서, 바로 여기까지만 알고 있을 확율이 높다. 광주 5.18을 주제로한 각종 매체들이 대부분 여기까지만 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뒷이야기를 알기 위해서.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작전 그 후.


대한민국 군인이 자국민을 학살하던 그 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예비검속당하여 사전에 끌려간 사람들을 비롯해서 말이다. 녹두서점의 주인 김상윤의 죄명은 내란주동자, 김상윤의 아내 정현애의 죄명은 폭도였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게 아니었다.



-내란주동자 김상윤


잡혀 들어온 이양현이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있는 방으로 오게 되어 여러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이 죽게 된 과정도 자세히 들었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과 이양현은 민원실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계엄군이 도청 뒷담을 넘어 습격하는 바람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총을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바로 솜이불을 펴 그 위에 윤상원을 엎드리게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섬광이 번쩍하며 불꽃이 퍼진 것으로 보아 화염방사기를 쏜 것 같다고 했다. p 228



내가 3과로 옮길 무렵 신군부는 소위 광주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배후 조종에 의한 내란으로 몰 것인지, 아니면 아예 북한의 지령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할 것인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울 보안대 본부에서 특수공작 총괄임무를 맡고 내려온 홍성률 내령이 ‘광주를 빨갛게 색칠하면 영원히 화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고, 이를 신군부가 받아들여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가 철회되었다고 한다. p 229



이제 각본은 명확히 드러났다. 광주사태는 김재둥의 배후 조종으로 일어난 일이고, 정동년은 김대중의 뜻에 따라 그에게 받은 자금을 활용해 윤한봉, 김상윤, 김운기를 포섭해 광주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정동년은 이미 5월 17일 김대중에게 자금 500만원을 수령한 사실을 자백헀고, 양강섭의 자백으로 선거자금 53만원을 김상윤에게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김대중-정동년-윤한봉-김상윤-김운기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확보된 셈이다. p 239



신군부는 광주항쟁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리려고 했던 원래 그림은 ‘빨갱이’였다. 광주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철회되었다. 대신 차선책으로 당시 민주인사 중 한명이자, 전두환의 눈엣가시였던 김대중(15대 대통령)과 엮어서 ‘내란죄’라는 그림을 덧칠하였다.



-폭도 정현애


유치장에 잡혀 온 여성들이 한 일들은 매우 다양했다.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 시민군에게 김밥을 나누어 준 아주머니, 수배자를 숨겨주다가 들어온 여성들도 있었다.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여성 선교사도 있었다. 강진에서 잡혀 온 여성은 여관에서 “광주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더라”고 말했다가 ‘유언비어죄’로 잡혀왔다. p 263



수사관들은 “사형수가 다섯 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전두환의 수사방침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 남편이 사형당하는 것은 아닐까. p 265



군인들은 우리에게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한 후, 우리를 상무대 강당으로 데려갔다. 강당에는 그날 석방될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군인들의 일장 연설을 듣고 상무대를 나섰다. 연행된 지 꼭 100일 만이었다. 나를 마중 나온 시부모님과 친정어머니는 “일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며 위로해주셨다. p 270



서점은 이제 구속자 석방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 구속된 사람들의 아내이거나 누나들이었다. p 272



그러나 군사법정은 증거물을 모두 기각시켜 버렸고, 증인들을 재판 3일 전에 모두 정보기관에 강제로 끌려간 분들도 모두 수모를 겪으며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또한 신군부는 증인으로 채택된 극소수의 증인들도 회유하거나 크게 위협을 가한 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 나온 증인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구속자들과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당시는 너무 황당하여 증인들에게 몹시 화가 났으나, 나중에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p 276



군인들에게 잡혀갔던 많은 사람들이 비밀유지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은 내란 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군사재판에서 사형, 무기징형등의 형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뒤 많은 이들이 풀려났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자유롭지 못했다. 평생 참혹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하고, 평생 눈 앞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잔상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전두환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을 비롯하여 그 측근들은 아직도 떵떵거리며, 권력을 쥐고 5.18을 왜곡하고 있다. 




“이 기록유산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죽음을 조사하고 묘사하기조자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인권 침해에 대하여 설명하며 극도의 역경과 박해를 넘어선 인간승리에 대한 기록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됩니다. 인류의 양심과 기억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아있어야 합니다.”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당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로슬린 러셀이 한 말이다. 과연 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기억하는 5.18에는 잊힌 부분은 없는걸까, 왜곡된 부분은 없는걸까. 이제 스스로에게 답을 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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