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100쇄 기념 스페셜 에디션)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집에는 #미술관련책 이 2권 있다. 그중 한 권이 #방구석미술관 1권이다. 아마 당시에는 시리즈로 나올 예정이 없어서 그랬던건지, 1권이라는 표현이 없었다. 그런데! 방구석미술관 2권이 나왔을 줄이야. 하. 시리즈는 다 모아야 적성이 풀리는 나인지라, 방구석 미술관 2권도 냉큼 집에 들였다.




일단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고 2권을 들고왔는데, 막상 펴보니, 오옷? 개인적으로 1권보다 더 마음에 드는 주제였다. 바로 ‘한국의 현대미술’!!


물론 방구석미술관 1권의 주제였던 서양미술도 꽤 좋았지만, 그래도 난 한국인인지라 ㅋㅋㅋㅋ. 한국 근대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자주 접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근대화가과 관련된 장소도 몇번 가보기도 했다보니. 이미 한국 근대화가에 대한 관심도는 맥스! 



 이 책에 실려있는 한국 근대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옥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 총 10 명이다. 이 열명 중에서도 내가 제일 관심이 있던 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세 명. 물론 다른 화가들도 관심이 가는 건 같았지만, 그 중에서도 왜 이 세명을 골랐는가 하면, 아무래도 극명하게 대조대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중섭은 그를 둘러싼 환경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졌고, 가족과 만나기를 희망하다가, 그 희망이 꺾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주변에는 사기꾼들만 득실거렸고, 결국 그는 삶에 지쳐 사랑하는 가족과는 만나지도 못한 채 본인의 생의 불꽃을 꺼버렸다.



나혜석은 분명 당시로 따지면 깨인 생각을 가진 신 여성이었다. 가부장제를 반대하고, 남편에게 평생 자기만을 바라보고, 전처의 자녀와 시어머니와는 별거를 해달라고 요청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불륜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두번이나. 이건 무슨 말로도 미화를 하면 안되는 것이며, 그녀는 그녀 스스로 가족들을 배신한 것과 다름없다. 배신의 결말, 나혜석은 집에서 쫓겨났다. 자식도 볼 수 없었다. 응당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행려병자로 죽었다. 



김환기는 위 두 사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랑하는 김향안과 결혼 후,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했다. 여느 화가들이 그렇듯, 재정상태가 궁핍했지만 그들은 똘똘뭉쳐 이겨냈다. 이 부분이 재정환경이 힘들어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과는 다른 행보이다. 뿐만 아니다. 두 사람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을 때, 둘이 같이 유학을 간게 아니라, 아내인 김향안이 먼저 떠났다. 그녀는 먼저 프랑스에 도착해, 오로지 남편 김환기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찾아다녔다. 유학길에서 외도를 한 나혜석과 다른 점이다. 김환기와 김향안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고, 그 힘으로 힘든 환경을 헤쳐나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


우리에게는 ‘소’ 그림, ‘은박지’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중섭. 그의 일생을 이 책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상에서 조선어를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한글로 그림을 그리던 열여덟의 중섭은 “원통하다. 이렇게 안타까운 것을 어떻게 하느냐”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는 중섭의 작품 속 서명에서 ‘ㅈㅜㅇㅅㅓㅂ’을(1945년 이전까지는 ‘ㄷㅜㅇㅅㅓㅂ’)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서명을 한글 외에 다른 언어로 쓰지 않았습니다. p 018



그가 그림 속 서명을 한글로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일제강점기,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대였음에도 그는 한글을 놓지 않았고, 한국적인 마음을 놓지 않았다. 처음보는 이중섭의 모습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이 최악이었던 상황.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밝고 희망찬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의 편지에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화가로 성공해 꼭 재회하겠다는 의지, 한국의 화가로서 한민족의 정수를 자신의 예술에 담아 세계에 전하겠다는 포부가 절절히 담겨있습니다. p 031


 


통영에서 중섭은 소를 포함해 많은 걸작을 남깁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합니다. 이미 심신이 기진맥진해져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중섭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 품에 안아야 했죠. p 036



1951년 이중섭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후에, 제주도에서 한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이중섭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이 때가 제일 행복한 때였다. 1954년, 형편이 더더욱 안좋아져,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 가족과 다시 만날날을 기다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정말 먹고 살 밥도 구하기 힘들 정도였고, 실제로 가족 부양조차 힘들어질 정도였지만, 그 가족 덕분에 희망을 품고 살았다.


그림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거라던 실날같은 그의 희망이 끊어졌다. 희망이 끊어지자 그의 그림도 변했다. 희망을 품고있었던 이중섭이 그린 소는 굳센 기강을 드러냈다면, 희망이 사라진 이중섭이 1956년에 그린 소는 기운이 다하여 겨우 서있는 모습이다.


전쟁후 사회적 시스템이 안정되기 이전에 전시를 강행한 화가에게 돌아온 건 그 빈틈을 노린 비열한 자들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내려가 남은 작품들로 전시를 열어 보았지만, 판매 성과는 보잘것없었죠. 이렇게 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전시는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p 040


내가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어!


놀고 공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단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 세상을 위하여


또 자신을 위하여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고


이 꼴이 뭐야?


이중섭 평전 中 


이런 이중섭의 모습을 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화가란 그림을 그려 밥벌이를 해야한다지만, 그조차도 힘들다면 잠깐이라도 붓을 내려놓고 먹고 살 궁리를 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그의 바람대로 그림으로 밥벌이가 가능했다면 좋겠다마는,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으니까. 한 집안의 가장이던, 가족을 사랑했고, 가족과 함께하길 바랐던 가장 이중섭이, 먹고 살수 있을 만큼이 될때까지 화가 이중섭을 버리고 노가다라도 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잠깐이라도 붓을 내려놓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했다면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 물론 대신 우리가 아는 근대화가 이중섭은 사라졌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중섭은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가족과의 행복을 그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하는..



나혜석


내가 알고 있는 나혜석은 조선 말, 가부장적인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집안이 부유해 신교육을 받았던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위치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가부장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던 나혜석은,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여성이라 생각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그녀가 생전에 머물렀던 장소에서 그렇게 나혜석의 이름을 알게되었고, 막연하게 비련한 여성이라 생각했었다.


이제 혜석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여성,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99%의 사람들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살아가고 있던 그때, 혜석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신여성의 삶을 스스로 살며, 조선 여성들에게 신여성의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대에 여성과 남성의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소개하는 삶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죠. p 059



무엇보다 나혜석은 글도 썼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글을 말이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나혜석 <경희>《여자계》 中



지금이야 일처일부가 당연한 일이고, 첩을 두는 놈은 썩을놈이고, 불륜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행태이지만, 조선시대에서는 그게 너무 당연했던 일인지라, 나혜석처럼 이렇게 말하는 여성이 나올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해석은 다른 글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부부사이 평등한 관계를 주장하고, 자녀들도 성별게 관계없이 평등하게 키우자고 합니다. ‘조선 여자도 사람 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해석의 주장. 그녀는 <이상적 부인>, <잡감> 등을 기고하며 자신의 여권론을 펜을 통해 조선사회에 침투시키기 시작합니다. p 062



당대 기준으로는 정말 별났던 신여성 나혜석을, 끊임없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박우영. 


나혜석이 결혼 조건으로 ‘일생을 나만 사랑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박우영의 전처의 딸과, 시어머니와는 별거하게 해달라’ 였다. 나혜석을 열렬히 사랑했던 박우영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이 조건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은 박우영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심지어 아이를 낳았음에도 조선 최초(?) 워킹맘의 삶을 이어간다. 심지어 워킹맘의 삶을 요즘말하는 4컷툰에 그려 기고도 한다. 심지어는 본인이 낳은 삼남매를 ‘별거를 요청했던’ 시댁에 맡기고 해외 유학길에 떠났다. 물론 이는 남편 박우영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그런 우영을 배신했다. 


남편 박우영과 같이 유학길에 올랐던 나혜석, 남편이 업무차 베를린으로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홀로 파리에 남아 미술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녀는 박우영의 친구인 최린과 외도를 해버린다. (최린: 민족대표33인이었으나, 훗날 변절하여 매국노가 된다)



그렇게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첩을 여럿둔 남성들을 비판하고, 남편에게 자기만을 사랑하라는 조건을 달았던 나혜석이, 남편의 친구와 외도를 했다. 외도는 미화시키면 안되고, 미화시켜서도 안된다. 그녀는 본인 스스로 외도를 함으로써, 그녀가 말하던 모든 것들은 싸그리 물거품이 된 거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남편 박우영은 이 사실을 참아주었다. 사람은 한번은 실수를 할 수 있으니. 하지만...



호화롭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자마자 촌구석에서 갑자기 맞이한 궁핍. 여기서 혜석은 다시 최린을 떠올립니다. 당시 최린은 천도교의 수장으로 국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죠. 혜석은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구할 요량으로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맙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최린의 측근을 통해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내용으로 왜곡되어 우영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p 081



나혜석은 또다시 최린을 만난다. 정확히는 최린에게 다시 구애의 편지를 보낸다. 이로써 박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했고, 나혜석이 본인을 포함하여 자식들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혜석은 변명할 여지도 없고, 나혜석을 동정할 여지도 없다. 그녀 스스로 자초한 파국이니까.


이후 그녀는 혼자였다.


나혜석. 그녀는 모든 것이 헐어진 자신의 마음속에 최후의 빛과 색을 채우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죠. 세상과 단절에서 오는 고립감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우는 시간이 누적되며 그녀는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생략) 우영은 경찰을 통해 혜석이 대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혜석은 개성에서 여학교의 선생을 하고 있는 딸 나열이 머무는 집에도 찾아갔지만, 이미 우영의 당부를 들은 집 주인의 만류로 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p 093



1948년 차디찬 칼바람이 불던 12월 어느 날,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자제원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추정 연령은 65~66세. 그러나 실제 나이는 53세 였습니다. 연고지와 이름을 묻는 의료진에게 여인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12월 10일 무연고자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이었습니다. p 095



혼자가 된 나혜석의 삶은 쓸쓸함과 아픔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를 동정하기엔, 그녀는 너무 큰 죄를 지었다. 본인 스스로 내뱉었던 말들을, 본인 스스로가 무너뜨렸고, 본인 스스로가 가족들을 배신했다. 그렇게 나혜석은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사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우리 4남매도 크게 다쳤다. 다 부상자요 불구자 신세가 됐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80대 노인이 된 아들 김진이 회고하며 한 말입니다. (생략) 아버지 김우영 역시 세상의 수군거림 속에 남은 생을 의욕없이 살았다고 기억합니다. 딸인 나열 역시 “나혜석 같은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무책임함을 동생 진에게 토로했습니다. p 096



그녀는 나열을 보자마자 두 손을 와락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네가 혜석이 딸이야?” 라고 묻습니다. 알고보니 그 여인은 과거 해석과 3.1운동의 초기 확산을 함께했던 박인덕이었습니다. (생략) 나열은 극구 사양했지만 ‘어머니 친구는 어머니나 다름없다’는 박인덕의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의 무게를 느끼며 휘청이게 되죠. 그 이후 인덕은 나열에게 미국으로 전액 장학금 유학을 제안합니다. p 097



남아있는 나혜석의 가족들도 그 삶이 불행하긴 마찬가지였다. 자기 부인이, 자기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살아낸 시간이었으니까. 물론 나혜석이 죽은 뒤, 나혜석의 자녀들은 자기들을 버린줄 알았던 엄마 나혜석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흔적에 도움을 받게된다. 그렇게 나혜석은 죽어서나마 그토록 바라던 자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외로울지언정, 아무리 궁핍할지언정, 나혜석이 한눈팔지 않고 오롯이 자기길만 갔다면, 어쩌면 나혜석은 이토록 비참힌 말로가 아닌, 지금보다도 훨씬 더 이름있는 화가가 되었을거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뒤엎는다.



김환기


앞서 이중섭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저 암울하고 암울했던 내 머릿속을 아주 개운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준 화가가 바로 김환기다. 진짜 와, 이 책 속에서 단비같은 존재였달까....흑흑흑


둘의 결혼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혼에 세 명의 자식까지 딸린 환기를 동림의 집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환기의 집안 역시 과부인 동림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렇지만 이런 난관이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둘의 결합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집안의 반대 앞에 동림은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김향안. 환기의 성(김)과 환기의 아호(향안)을 받아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p 239



앞서 이중섭이나 나혜석처럼, 김환기도 그 시작은 비슷했다. 한국사에서 제일 암울했던 시기에, 부유했던 집안에서 성장하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미술을 공부하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까지도 굴곡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후 부터, 김환기는 앞의 그 둘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전에 김환기가 사랑하던 사람, 김향안을 먼저 알아야 한다. 김환기는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고, 김향하는 사별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돌싱(?)이 된 둘이 만나게 된 과정은 생략하고, 만나게 된 후 사랑에 빠지자 양 쪽 집안에선 당연히 결사 반대! 김환기 집안에선 한번 결혼한 여자는 반대했고(정작 자기 아들인 김환기는 이혼경력에, 심지어 애가 셋인데?), 김향안 집안에서는 애가 딸린 집안에 시집간다는 점에서 반대했다(이건 좀 이해가 가는 부분). 



하지만 기어이 김환기와 김향안은 결혼을 했다. 전처의 자식 및 시어머니와는 별거를 요구한 나혜석과는 달리, 김향한은 김환기와 전처 사이의 딸들과 시어머니에게도 참 잘 한것으로 보여진다. 거기다 남편인 김환기가 미술에 매진할 수 있도록 생계를 도맡았다. 


세 딸과 시어머니의 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향안, 그녀라고 남편의 수집열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향안은 그것이 환기가 ‘조선의 미’를 탐구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이해하고 있었죠. 사실 이해를 넘어 향안은 백자항아리가 가진 특유의 오묘한 멋과 미를 환기와 함께 공감하며 진심으로 즐겼습니다. p 241



뿐만아니라, 김환기가 미술에 매진하면 할 수록 집안의 재산이 거널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김향안은 끝까지 김환기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심지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자, 본인도 미술을 공부하며 진심으로 즐겼다. 이러니 남편 김환기는, 더더욱 부인 김향안을 사랑하고 아낄 수 밖에.


향안은 다음날 바로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발급받습니다. 사실 환기뿐 아니라 향안 역시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했죠(그래서 향안은 전쟁 중에도 틈틈이 불어를 독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던 1955년 4월, 향안은 홀로 파리로 향합니다. 환기가 파리에서 화가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죠. 파리에 도착한 향안은 환기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손에 쥐고 파리에 있는 수많은 화랑을 두루 돌아다니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합니다. p 248


혼자였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애정, 신뢰, 존의로 언제나 변함없이 환기를 신실하게 지지해주는 향안이 있었습니다. 환기의 예술이 잘 자라도록 말없이 지켜주는 부처같은 향안. 환기는 그런 아내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글쓰기 대신 박화점에 나가 일하는 아내를 기쁘게 하고자 환기는 하루종일 서서 자신의 예술세계가 도닳살 수 있는 궁극의 지점까지 가기 위해 모든 혼을 아낌없이 불사릅니다. p 256


거기다 김환기의 미술 지원을 위해, 김향안은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고, 심지어는 본인이 먼저 프랑스로 날라가 김환기가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뒤, 김환기를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앞서 나혜석은 유학을 떠나서, 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을 버리고, 외도를 선택한 모습과는 매우 대비되는 부분이랄까.



환기가 가장 사랑했던 그 행위를 차곡차곡 이어가며, 향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아이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뉴욕, 파리, 브라질, 한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전시를 엽니다. (생략) 그렇게 아이들을 건강하게 장성시킨 엄마는 2004년 비로소 환기 곁으로 향합니다. p 264



그래서 그런걸까? 나같은 미술 문외한이 본 김환기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애정이 담뿍 담겨있는 것 같다. 언뜻 보면 차가울 것만같은 파란 배경의 달항아리 그림 조차도 정말 따듯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던 희망을 잃어버린 이중섭의 그림이나, 나혜석의 그림과는 매우 대조된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걸까?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知性)이다. -김향안



한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대에,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세 사람. 우여곡절끝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세 사람. 이렇게 시작이 비슷했던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이 세명은 시작은 같았지만 끝은 달랐다. 이중섭과 나혜석의 끝은 불행했고, 김환기의 끝은 행복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서로 다른 인생의 회오리로 빠지게 했을까. 



대체 이중섭의 무엇이 가족을 바다건너 보내버리는 선택을 하게 했고, 나혜석의 무엇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외도를 선택하게 한걸까. 그들은 왜 김환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가족을 곁에 두는 선택을 하지 못했던걸까? 대체 무엇이 그들을 불행한 길로 이끌었던 걸까?


그게 무엇이든, 이중섭, 나혜석과는 달리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하지 않고 곁에 두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삶을 살았던 김환기는 눈 감는 그날까지 행복했고, 사랑하는 김향안이 있었기에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김환기를 만났을 이중섭과 나혜석.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길을 가면서도 다른 길로 들어선 김환기를 보며,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회고했을까?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