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 4 - 진실과 비밀 땅의 역사 4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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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땅의역사 4권을 읽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박종인 기자님의 글은 책이든, 연재기사든 무엇이든 좋으니 제발 널리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대게 빛나는 역사, 역경을 이겨내거나 힘든 시기를 목숨 받쳐서 지켜낸 영웅들의 이야기가 태반이다. 물론 이런 빛나는 역사는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애국심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는 빛나는 역사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생각치 못한 많은 부분을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빛나는 역사만 배우는 어떤 사람들은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만 중무장한채 ‘내 나라가 이런 나라야’, ‘내 조상이 이런 사람이야’ 라며 으스대기도 한다. 대게 이런 경우는 빛나는 역사만을 배운채, 징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징비하지못한 제일 큰 이유는, 빛나는 역사를 불러오기 전 어두웠던 내 나라의 문제를 몰랐기 때문이고, 영웅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힘든시기를 불러 일으킨 내 조상들의 이기심과 권력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두웠던 역사를 모르고, 혹은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징비하지 못하였고, 개선하지 못하였으며, 오로지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만 똘똘뭉쳐,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아픈역사를 되풀이했다.



일본의 야욕을 수차례 인지했음에도 무시하여 임진/정유재란이라는 7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 임진왜란 이후 불과 백년도 안되서 잘못된 선택으로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또 다시 초토화된 한반도, 수차례 근대화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차버리고 우물안에 갇친 채 부정부패한 노론의 정치로 무력하게 일본의 식민지배를 불러드린 조선말기.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던, 또 다른 우리의 조상들이 징비하지 못하여 아픈 역사를 되풀이한 결과이다.


‘역사는 나비가 만든다.’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 날개가 일본을 움직였다는 뜻이다. 말차에 대한 집착은 다완에 대한 집착을 불렀고 다완에 대한 욕심은 전쟁을 통해 다기 원천 기술자들을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데려가도록 만들었다. 조슈번으로 끌려간 도공 이직광은 훗날 조선으로 돌아와 동생 이경을 데리고 조슈로 돌아갔다.(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서 제회했다는 논의도 있다: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일어일분학』 47권, 대한일어일문학회, 2010) p 047



조선 중기, 우리의 역사를 바꾼 ‘나비’는 다름아닌 대륙(송나라)에서 제조한 말차였다. 



송나라로 유학을 갔던 일본 승려 에이사이는 그 곳에서 말차를 맛보고, 말차에 매료되어 일본으로 가져간다.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명나라는 말차를 금지하고 엽차를 장려했다. 그렇게 대륙의 말차문화는 사라졌으나, 일본에선 승려 에이사이를 시작으로 말차문화가 융성했다. 말차문화가 융성하자, 덩달아 차를 담을 찻잔, 즉 아름다운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아름다운 찻잔을 찾던 일본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에선 막사발로 취급받던 도기가, 일본에선 매력적인 찻잔으로 변모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은, 아니 한반도는 오랜기간 도자기를 구워왔다. 조선은 백자로 유명했고, 그 이전 시대 고려는 청자로 유명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고대 일본의 스에키 토기는 한반도 가야계 도래인에 의해 전래된 새로운 도자 기술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반도의 도자기술은 월등했고, 일본은 그런 한반도의 도자기술이 탐날 수 밖에 없었다.



1592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우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정벌을 외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선 다성으로 추앙받는 센노리큐에게 다도를 배웠고, 다도를 즐겼다. 각설하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싸그리 잡아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포로송환을 시작했을 때, 대다수의 도공들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일까?



1697년 어느 봄날, 그 광주에서 도공 39명이 한꺼번에 굶어 죽은 것이다. 도공은 그 직업이 천한 공업인지라 신분은 천민이거나,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천민 취급을 받는 ‘신량역천’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그릇을 굽는 업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p 107



1542년에 편찬된 『대전후속록』은 사기장은 대대로 업을 세습한다고 규정했다. 숙종 때는 아예 관요 주변에 마을을 만들어 전속 장인들로 관요를 운영했다. 도공들에겐 직업 선택은 고사하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심지어 이들이 만드는 도자기는 오로지 국가를 위한 것이며, 개인 판매용 그릇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한 도자기 제조만으로는 살길이 막막하므로, 몰래 개인 판매용 그릇을 굽기도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범죄였지만, 도공들의 생존이 걸린일이었기에 암암리에 묵인, 진행되곤 했다.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도공들이 관요에서 도주할 경우 곤장 100대에 징역 3년을 받았다. 실제로 곤장 70대만 맞아도 장독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조선의 도공들은 죽어서야 관요를 떠날 수 있었다. 조선에서 도공은 천하디 천한 소모품이었고 천민이었다.



그런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서 받은 대우는 어땠을까? 일본은 도공들에게 사무라이 신분을 주었으며, 장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며 도자기를 굽게 하였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게된 조선 도공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대우를 받았고,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며, 본인들이 만든 도자기가 하나의 작품을 인정되는 것을 보았다. 조선에선 아무개에 불가한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도자기 장인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은 뒤 도자기 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아니, 추앙받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던 조선의 도공들은, 후손 대대로 지금까지도 도자기를 굽고 있으며,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전 세계로 수출되면서 중세 일본을 부유하게 해주었다.



일본 근대화 작업인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은 대부분 이들 조슈, 사가, 사쓰마 세 번에서 나왔다.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수입한 ‘내열기술’은 용광로 건설에 기초가 됐고, 자기를 만들어 판 돈은 그 시설을 만드는 자금이 됐다. 1996년 사가번 도자기 마을 아리타에서는 이런 내용이 담긴 역사서를 펴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 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p 048



그들은 자신들을 인정해준 일본에서 끊임없이 도자기를 만들었고, 그 도자기는 중세일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도자기를 굽던 ‘내열기술’을 발전시켜 용광로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 도공이 만든 도자기를 밑천삼아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개혁의 밑천을 마련하고, 훗날의 동아시아 재패를 위한 군수물자의 밑천도 마련한다.



조선백자는 고려청자와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아귀가 맞이 않는 기록들이 몇 있다. 우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 ‘백자꽃무늬병’은 영국제다.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 금색으로 박혀 있는 ‘백자오얏꽃무늬탕기’ 제조사는 일본 ‘노리타케’이고 제조연도는 1907년이다. p 104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은 도공들을 천대했다. 영조는 영조는 기교와 사치 폐단을 막기 위해 사치스런 도자기 생산을 금지했고, 정조는 도공들에게 사적인 용도로 그릇을 제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조선의 도공들은 굶어 죽어갔다.



조선에 남은 조선의 도공들은 그저 아무개였고, 천민이었고, 소모품이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장인으로써, 기술자로써, 전문가로써 인정받았다. 이것이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려하지 않은 이유다. 이것이 같은 조선의 도공과,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보유했던 조선과 일본의 결말이 달라진 이유다.


서기 1771년 6월 2일, 양력 7월 13일 여름 아침이었다. 태양 볕 아래 경희궁 중간 문인 건명문 앞에는 남정네들이 우글거렸다. 사내들은 모조리 발가벗고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아침부터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거의 죽게 된 자들이 100명 가까이 되었다. 자빠져 있는 사내들은 ‘책쾌’와 ‘상역’이다. 책쾌는 서적 외판 상인이고 상역은 통역관이다. p 077



우리가 쓰는 한국어는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지만, 제일 효율적이고, 문자 탄생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문자 ‘훈민정음’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책을 읽고 쓸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조선이란 나라에서는 서점이 없었다. 서점이란 책을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인데, 성리학적 이념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성리학에서 반하는 상업행위를 천대했다. 고로 성리학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을, 성리학에서 반하는 행위로 사고팔면 안되었다. 그래서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세종이 기껏 문자를 만들었으나, 백성들은 이 문자를 지식과 정보의 취득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니, 책을 판매하는 책쾌들이 나타났다. 백성들이 책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책쾌를 통하여 책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 때에 이르러, 이런 책쾌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여버린다. 



영조가 책쾌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청나라에서 발행된 『강감회찬』에 전주 이씨 왕실이 고려 역적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하필 이 거짓정보를 담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것이다. 그냥 거짓정보도 아닌 조선 왕실을 능욕하는 거짓정보가 담긴 책을 말이다. 그래서 책을 유통하는 자, 책을 읽은자 모두를 잡아다가 죽였다. 책도 싸그리 불태웠다. 영조는 책쾌 금지령을 내렸다. 책쾌를 통해 책을 구할 수 있었던 백성들은, 더이상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아주 완벽하게 문자와 책은 권력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1481년 두보의 시를 번역한 『두시언해』가 출간됐다. 과거 시험에 필수적인 ‘표준 번역’교과서였다. 『맹자언해』를 비롯한 『사서언해』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서들은 앞서 사진에서 보이듯,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아니었다. 한문은 그대로 둔 채 한국어 어순으로 정렬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읽을 수 없는, 표준 해석을 위해 사대부 지식인이 찾아 읽는 전용 교과서였던 것이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순수 언문으로 돼 있는 반면, 이들 고급 지식은 백성들이 접근할 방법이 없는 닫힌 책들이었다. p 080



그렇다면 영조 이전엔 백성들이 책을 많이 접하고, 고급지식을 접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것도 아니었다. 훈민정음이라는 언어가 나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유교적인’  생활을 위한 단순한 지식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고려는 좀 달랐을까? 아쉽게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고려 역시, 문자는 권력층의 전유물이었다. 



서양에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인해 수천, 수만권의 성서가 발행되었고,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종전엔 값비쌌던 책이 인쇄술과 종이의 발전으로 책값이 저렴해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서양 사람들은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고, 점점 발전해나갔고, 그렇게 산업혁명, 시민혁명이 우리보다 몇백년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서양이 빠르게 근대사회로 나아간 이면에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자’와 ‘책’이 있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고려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문자를 만든 조선, 그들이 만든 인쇄술과 문자발명은 오로지 빛나는 역사일뿐일까?


정묘호란 종전 때 후금은 조선 왕자 한 명을 볼모로 요구했다. 인조는 원창부령 이구에게 급히 왕제 원창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은수저, 은병, 은잔을 바리바리 싸주며 대신 볼모로 가라고 명했다. ‘부령’은 종5품으로 명목만 있는 종실이다. p 164



인조는 즉시 먼 왕실 친척인 능봉수 이칭에게 능봉군 군호를 내려 자기 동생으로 삼았다. 먼 친척에서 순식간에 왕제가 된 이칭은 다음 날 역시 고속 승진한 심집과 함께 산성을 내려갔다. 후금 진영에서 적장 마부대가 말했다.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다.” 정묘년 왕제 원창군이 가짜였음을 후금은 알고 있었다. p 166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능양군, 인조.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으나, 그를 몰아낸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가야했다. 인조가 선택한건 사대, 즉 친명. 당시 명나라는 지는 해였고, 청나라는 뜨는 해였지만 인조에게 그런건 없었다. 자기가 몰아낸 광해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야했고, 무엇보다 인조과 함께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은 친명을 외치는 사대주의를 중요시하는 서인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을 처들어왔다. 정묘호란이다. 이때 인조는 청나라와 형제국의 협약을 맺었다. 뿐만 아니라 왕자를 청으로 보냈어야했는데, 가짜 왕자를 만들어 청으로 보냈다. 그렇게 가짜 왕자를 두번이나 만들어 청나라로 보냈고, 청과 맺은 협약을 두루 깨버리며 청나라의 뒷통수를 쌔게 내려친다. 청나라는 다시한번 조선으로 처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귀결되는 과정이다.



최명길은 1681년 숙종 때 뒤늦게 문충공 시호를 받았다. 100년 뒤 정조가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강화를 감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1653년 효종 4년에 완성된 『인조실록』에는 그가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며 동시에 ‘소인’이라고 기록돼있다.(『인조실록』) 한 사람을 두고 극명하게 갈린 평가다. 또 많은 사람은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고 척화파 김상헌을 절개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조선 사람들이 잠자리를 편히 자고 자손을 보존할 수 있음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그에게 힘입은 자들이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박세당, 『서계집』) 누가 그를 간신으로 낙인찍었고, 왜 우리는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는가. p 285



인조와 서인정권은 명나라를 숭상했다. 그런 명과 싸우는 청을 오랑캐라고 얕보았다. 그러다 청나라에게 두번이나 침략당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해하자는 주화파가 있었다. 주화파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을 직시했다. 그렇기에 화해와 항복을 주장했다. 척화파는 죽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와 화해는 있을수 없다며, 명나라의 원수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외쳤다. 조선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던 말던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백성들의 목숨은 하등 의미가 없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대적하였고, 결국은 주화파의 뜻대로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한다. 가정이지만, 인조의 항복이 더 늦어졌다면 조선은 그 이름조차 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리는 척화파를 절개의 상징으로 배웠다. 주화파는 간신배와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이후로도 조선의 권력을 잡은건 척화파의 후손들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척화파의 구심점은 다름아닌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이었다. 언제나 대명의리를 외치며, 내 편에겐 한없이 온화했으나, 남의 편에겐 ‘사문난적’이라고 매도했던 송시열이다. 



왠만한 조선 후기 사대부 묘소 앞 비석에는 ‘숭정기원후 ㅇㅇ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숭정’은 1644년 망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연호다. 명 멸망과 함께 ‘숭정’ 또한 사라졌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기원후’라는 꼬리를 달고 부활했다. 망한 나라 연호를 계속 쓰겠다는 것이다. 또 비석에 적힌 글은 ‘조선’이 아니라 ‘유명조선’으로 시작한다. ‘유명조선’은 ‘황제국 명나라 제후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언제나 크고 짝은 글에 숭정 연호를 기록해 존주지의(천자국을 존숭한다는 뜻)을 나타냈는데, 사람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사람을 더럽게 여겼다.(『숙종실록』)’ p 171~172



1644년 명이 멸망했다. 5년 뒤 인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이다. 북벌이 비현실적임이 드러나면서 새 논리가 탄생했다. 명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이 그 중화를 계승했다는 ‘조선 중화’ 이념이다. 명이 부활했으니 오랑캐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조선은 명나라 연호 숭정을 쓰고, 비석에는 ‘명나라 제후국 조선(유명조선)’을 굳이 명시하게 되었다. p 176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국력을 실감했다. 오랑캐인 청나라를 이기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방식을 바꿨다. 바로 ‘정신승리’.


조선은 명나라를 계승한 제후국이니, 명나라와 다름없다. 고로 명나라가 다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니 청나라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이론이다. 그렇게 조선의 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신승리를 하며,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그해(1704년) 11월 숙종은 후원 깊숙한 곳에 제단을 만들고 이름을 대보단이라고 정했다. 이름대 3월 9일 숙종은 대보단에서 임진왜란을 구원한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p 206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제단은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있다. 청나라에 들키면 안되기에, 그들끼리 모여서 몰래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숙종이 이 제단을 만든 이유다. 숙종보다 먼저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다. 현재 괴산에 있는 만동묘다. 이 사실을 안 숙종은 깜짝 놀랐다. 황제의 제사는 명의 제후국 왕인 조선의 왕만 지내야하는데, 일개 신하가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창덕궁에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단을 만든것이다. 다만 청나라에 걸리면 안되므로, 들키지 않게 아주 깊은 곳에 만들었을 뿐이다.



조선은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조공을 하고, 청나라에서 왕 책봉을 받으면서,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명나라를 숭상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모순적인 행동을,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지속해왔다.


정조는 “명나라 은총으로 명장이 된 이순신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정조실록』) 대보단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충신과 관리들을 모두 잡아다 처치하라고 명했다.(『정조실록』) 그리고 1796년 3월 3일 대보단 정례 춘계 제사 때 정약용과 주고 받은 시가 맨 앞에 나온 ‘우리 동방만 희생과 술의 제향을 드리는구나’였다. 세상은 그러하였다. 조선 정치 엘리트 집단을 집단 감염시켰던 시대는 정조를 넘어 실용주의자 정약용 그리고 그 이후까지 오래도록 퇴치되지 않았다. p 210



우리가 개혁군주라 칭하는 정조 역시 ‘대명숭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은, 명나라의 은총으로 명장이 된것이라 하였다. 실용적 학자였던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 역시 명나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바로 조선후기의 그림자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슴아프도록 쓰라린 경험이 ‘반복’되는 건, 처음 겪은 후에 징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징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고, 잘못을 모르니 개선하지 못하고 방비하지 못해서, 쓰라린 경험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반복’되는 대다수의 원인은 징비하지 못한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이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위해선,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직시해야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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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거 봤어? - TV 속 여자들 다시 보기
이자연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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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독특한 이 책 『어제 그거 봤어?』는 에세이다. 그냥 일상 에세이가 아닌, TV 속 매체들을 문화적으로 비평한 에세이다. 보통 문화비평은 어떤 관점으로 비평했느냐, 즉 비평가의 가치관이 매우 중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해당 매체를 왜곡하여 비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비평은 꼭 비평가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책 속의 저자는 TV 속 매체를 비평, 그러니까 어떤 관점으로 해석을 했느냐 하면 바로 ‘여성주의’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여성주의’를 표방한 책들이 정말 많다. 대게 건강한 가치관으로 쓴 책이지만, 어떤 책들은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본 ‘여성주의’를 쓴 책들도 있다. 문제는 해당 책을 읽기 전까지 어떤 책이 건강한 책인지, 어떤 책이 비뚤어진 책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 혹여나 비뚤어진 책을 읽게 된다면, 되려 읽다가 그들의 비뚤어진 여성주의에 적대감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섣불리 책을 고르기도 읽기도 꺼려진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여성주의’ 관련 책을 단 한 권도 안읽었다는건 아니다. 그저 요즘나온 여성주의 책들을 안읽는다는 것 뿐이다.



현대가 아닌, 산업혁명 시절의 여성인권주의자들이 쓴 글은 당연히 읽었고, 그녀들의 이야기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과거에 압도적인 차별을 당했던, 당시 시대상황에 따른 여성차별의 피해자들이기도 했으니까. 같은 의미로 우리 땅에 살며,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과거 여성들의 이야기도 자주 읽었다. 그녀들은 비뚤어진 주자성리학에 매몰된 사회의 피해자들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이 외에는 요즘 나오는 ‘여성주의’ 책들은 왠만하면 읽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비뚤어진 ‘여성주의’ 책을 골라서 배제하기도 어렵고, 내 가치관에 부합하는 책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건강하지 않다고, 비뚤어졌다고 생각하는 ‘여성주의’ 관점은 오로지 여성 ‘만’을 위한 책을 말한다. 난 여성‘만’을 위한 책을보면, 여성을 차별했던 사람들과 그 책의 저자들이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무성이든 모두가 다 같이 사는 사회인데, 여성‘만’을 위한 책은 또 하나의 차별이 아닐까?



뭐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며 오로지 내 가치관에 입각해서 읽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고, 또 어떤 부분은 조금은 편향적이게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책을 읽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사회에 깔려있는 여성에 대한 편향적인 인식이 너무 당연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들을 긁어주기도 해서 개운한 면도 있었다.



그때 두 명의 남성이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앉았다. 방송인 조우종과 스포츠해설가 한준희였다. 아무래도 방송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코너가 시작되었다. 바로 강부자의 역량 테스트. 그러니까 강부자가 축구해설을 할 역량이 되는지 남성 두 명이 친절하게 테스트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의문이 스쳤다. 강부자가 축구와 함께한 세월이 어언 몇십 년 인데, 같이 맞히는 퀴즈도 아닌 역량 테스트가 꼭 필요한걸까? 그렇다면 저들은 강부자를 평가할 역량이 되는 걸까? 하지만 그는 보란듯이 테스트를 쉽게 풀어나갔다. 그러다 어떤 문제에서는 원성 반 농담 반의 말을 남겼다. “뭐야 이거(너무 쉽잖아). 날 너무 무시하는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우종보다 최신 업데이트된 정보를 전하는 여유까지 보였고, 조우종은 축구를 본 지 꽤 되었다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p 029 (마이 리틀 텔레비전2)



나 역시 강부자 배우님이 나왔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2』를 본방으로 봤었다. TV를 보았을 당시에는 크게 생각을 못했던 부분을, 저자는 콕 집어서 이야기한다. 저자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해당 프로그램은 강부자 배우님을 출연시키면서, 노인 여성의 재발견이라는 것을 크게 부각시켰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정말 재발견이 맞나 싶었다. 제작진들은 강부자 배우님이 정말 축구에 대해 잘 아는지 역량 테스트를 한다며, 젊은 남성 두명을 캐스팅했다. 그들은 강부자 배우님이 축구를 사랑한 기간보다도 어린 남성들이었다. 심지어 그들과 강부자 배우님이 같이 있으면서 오간 대화를 보면, 전문가라고 캐스팅 된 그들보다 강부자배우님이 훨씬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왜 강부자 배우님은 그 두명에게 역량테스트를 받아야 했던걸까? 이런 상황을 정말 노인 여성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여성은 당연히 축구를 모를 것이라고, 노인 여성이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잘못된 사회적 인식이 이런 방송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이런 방송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방송들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재확산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며, 오히려 재밌다는 식으로 방송을 소비했다. 그래서 여자가 축구, 야구, 농구 등 체육종목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신기하다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을 읽은 요즘의 사회인식은 그때보다는 변했다는 점이다. 여성 체육선수들도 많이 부각되고, 체육을 향유하는 여성들도 사회 전면에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마리텔2가 바로 지금 이때 이런 방송을 했다면, 어느정도는 뭇매를 맞았을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이런식의 방송은 만들 생각조차도 없어질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건 사회가 조금이나가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의미일테다.



시즌 20의 ‘이름 없는 집안일을 해요’편에서는 오로지 봉미선에게만 주어진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형만이 보리차를 홀랑 다 마셔버리고 새로 끓여두지 않아 미선이 대신하고, 그 죗값으로 형만이 설거지를 했지만 남은 식탁 정리를 하지 않아 역시나 미선이 대신 치운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미선의 발목을 붙잡는다. “신발 정리나 신문 묶기, 떨어진 휴지 채워 넣기, 밥 먹은 식탁 정리나 보리차 올리기, 그런 것들이 이름 없는 집안일 입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을 주부가 하고 있죠.” 미선은 이 방송을 보며 크게 꺠닫는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건 눈 앞에 선명히 보이는 일이 아니라, 구석구석 손길을 기다리는 작은 일이었다는 것을. 사실을 알고 나서도 미선은 여전히 화장실 거울에 튄 치약 자국을 지우고 세제를 리필한다. 가장 놀라운 건 짱구가 미선에게 묻는 말이다.



“그동안 엄마가 (화장실에) 휴지를 채워두었어요? 자기 발로 걸어들어오는 줄 알았어요.” p 052 (짱구는 못말려)



이 챕터를 읽고 나도 모르게 찡했고,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짱구엄마, 봉미선의 모습은 전형적인 우리네 엄마의 모습이니까. 미선은 처음부터 짱구 엄마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집안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미선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봉미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엿한 한명의 사람이었다. 그저 ‘짱구엄마’라고 치부하면 안되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선을 그냥 짱구엄마로 인식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엄마도 그냥 내 엄마라고 인식했다. 아빠에게는 집안의 가장, 기둥이라는 번지르르한 명함을 달아주었지만,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걸 당연하다 생각했고, 집안 청소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집안에서 일어난 소소한 모든 일들은 당연히 엄마가 하는 일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내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하면서도 귀찮은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알게되었다. 아, 이 모든 일들을 우리 엄마는 우리가 안보이는 곳에서 묵묵하게 하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이 당연히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혹자는 이렇게 챙겨주는 엄마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좋은 자세가 아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는 건 엄마가 아니라, 그 집 구성원 모두의 일이란 것을 인식해야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 모든 일들이 엄마의 일이라고, 은연중에 터득해왔다. TV속에서 보이는 엄마들의 모습이 그래왔으니까. TV 속 매체들이 은연중에 계속 엄마는 이래야 한다고 시청자들을 세뇌시킨거라해도 다름이 없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아마 과거에서 내려온, 그릇된 주자성리학의 문제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그릇된 주자성리학에서 벗어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거 같은데, 왜 우리는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걸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듯, 우리 엄마들도 ‘○○엄마’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불리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배타미와 차현 그리고 송가경. 세 여자가 살아가는 세상엔 온통 여자뿐이다. 검블유는 기본 설정값이 여성일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지 촘촘하게 상상해 냈다. 이 말은 여성이 물리적으로 많이 등장한다는 의미를 넘어 이야기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 또한 여성이라는 뜻이다. (생략) 극에서 가장 다정하고 친절한 성정을 가진 인물은 바로의 남자 대표 브라이언이다. 지금까지 남녀 각각에게 잘 어울린다고 여겨진 통상적인 것들을 정확하게 반전시켰다. 이야기는 낯섦과 이질감을 전해준다. 그리고 시청자는 왜 이런 모습이 낯설게 다가오는지 의문을 품게된다. p 087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검블유는 정말 이질적인 드라마였다. 드라마 전반적으로 주체성을 가진 인물들은 거의 여성이었고, 심지어 주인공들도 전부 여성이었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여성이고, 사건을 헤쳐나가는 것도 여성이었다. 심지어 권력있는 여성이 룸싸롱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접대부로 젊은 남자들을 부르는 씬도 있었다. 정말 놀라웠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주체성을 가진 인물들은 남성이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헤쳐나가는 것도 남성이고, 룸싸롱에 앉아서 접대부를 부르는 사람들도 남성이었으니까.


 


매우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 드라마가 너무 신박했고, 근데 또 드라마 자체도 워낙 수작이라 계속 본방사수를 했다. 쎈 언니들을 보며 응원했고, 대리만족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다. 우리가 이질감을 느끼고,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바로 이 지점 말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의 성격이 정해져있다. 검블유는 아주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구성되었고, 진행된 드라마다. 이 말은 즉, 지금까지 방영된 수 많은 드라마에서 남성 캐릭터과 여성 캐릭터 성격을 고착화시켰다는 말이며, 우린 그것을 아무런 비판없이 보았다는 것이고, 그게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검블유라는 드라마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쯤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대체 어느정도까지 세뇌가 된걸까. 대체 언제부터 드라마에서 나오는 남성 캐릭터는 이래야하고, 여성 캐릭터는 이래야한다는 그런 가이드라인이 생겨나게 된걸까.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추억의 얼굴을 한, 하지만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즐겼지만 이제는 차마 들어줄 수도 없게 된 것들. 쿨의 <남녀해석>은 성차별을 죄의식 없이 일반화했고, god의 <관찰>은 관음 그 자체다. 2PM의 <10점 만점에 10점>은 여성 외무 평가의 끝판왕. 노래 속에 내재된 일상적인 여성혐오가 고막을 파괴한다. 반면에 땅바닥에 앉아 김밥에 라떼를 곁들여 먹는 언니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니.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는 우리 오빠들이 과거의 노래 가사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틀렸다는 걸 그들은 알 필요도, 관심도 없으니까. p 143 (캠핑클럽)



나 역시 저자와 같은 이유로 더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 심지어 그런 노래들이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올때는, “대체 왜 이런 노래를 들었지?” 라는 생각도 했으니까. 예컨데, 위 노래들 말고도, 태양의 <나만 바라봐>도 같은 이유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라디오 채널을 돌리기도 했다. 무슨 이런 이기적인 노래가 다있나 싶었으니까.



생각해보면 90~00년대, 내가 신화에 미쳐서 여기저기 쏘다닐 때, 그 당시만해도 어떤 노래를 들어도 크게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여자의 외모 평가를 하고, 여자를 구속하고 뭐 이런 노래들이 많이 흘러나왔음에도, 신나는 멜로디에 홀려서, 혹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나는 조금 달라졌다. 세상이 변한건지, 아님 내가 변한건지, 성인이 된 후로 노래 가사들을 하나하나 곱 씹어보게 되고, 곱 씹다보니 불편해진 노래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매일매일 엠넷을 틀며, 보고 들었던 최신가요들을 지금의 나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내가 이런 노래들을 불편해한다는 그 사실이다. 만약 지금까지도 이런 노래들이 불편하지 않고, 열광하며 소비했다면, 건강한 정신을 가지진 못했다는 이야기가 될테니. 



<SKY캐슬>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씩 겹쳐 보면 하나의 공통된 키워드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가정폭력’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로부터 공부할 기회를 뺏기고 경제척으로 착취당했던 한서진, 친할머니와 아빠에게 무시받는 엄마를 지켜봐온 강예서, 남편의 폭행을 묵인했던 이명주(아들 박영재를 서울의대에 합격시켜 SKY 캐슬 안에서 워너비맘으로 꼽혔던 여성), 고농축 가부장적 남편에게 순응해야하는 노승혜, 아빠의 강압적인 교육열에 못 이겨 하버드대 거짓 입학을 꾀한 차세리,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에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건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p 233 



<SKY캐슬>은 사회적 희생자로 여전히 여성을 지목했고, 이러한 참혹한 사건들은 철없는 중년 남성을 성숙하게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남성들이 공통적으로 말했던 가족, 행복, 소중함 같은 단어들은 여성 피해자들의 슬픔의 크기와 견줄 수 없어 비통하기만 하다. p 236(스카이캐슬)



이 챕터는 조금은 아쉬운 챕터였다. 나 역시 스카이캐슬을 열씸히 보았고, 그 안에서 나오는 수 많은 가족들에게 보이는 가정폭력을 느꼈었다. 다만 저자는 이 가정폭력에 대해 이야기할때, 대부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의 케이스만 꼽았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스카이케슬에서, 가정폭력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더 있었다. 바로 노승혜의 두 아들들. 노승혜의 두 아들도 가부장적인 부친에 순응하며, 정서적 학대를 받아왔다. ‘가정폭력’이라는 키워드로 이 드라마를 이야기하려 했다면, 노승혜의 두 아들도 분명 포함이 되어있었어야 했는데,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제외되고 말았다(조금 더 들어가면 강예서 아빠 역시 본인의 모친에게 정서적 폭력을 당한채, 성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다시 이야기해보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란, 여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 구분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이 ‘가정폭력’을 키워드로 썼다면, 아무리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썼더라도 피해 여성들과 같은 위치에 있던 피해 남성들도 같이 언급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해당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이 저 챕터를 읽는다면, 가정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여성이고, 가정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아주 위험한 일반화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일반화는 절대 있어서도 안되고, 해서도 안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여성이 될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가해자 역시 여성이 될 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절대 이를 놓쳐선 안된다.



뭐, 이런 소소한 부분들을 제외한다면, 아주 다행히도 이 책은 내가 우려하던 그런 책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려할 만큼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쳐있지도 않았고, 성별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심어주지도 않았다(물론 독자로 하여금 해석이 다를순 있다). 오히려 내가 잊고 있었던 사회적 문제들을 다시 떠올리게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TV 속 매체들을 비판없이 소비하고 향유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은 읽어보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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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3 - 군상(群像): 나라를 뒤흔든 사람들 땅의 역사 3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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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땅의역사 3권이 나왔다. 기자님께서 매주 기사로 연재를 하고 계셔서, 언제고 다음 시리즈가 나올거라 생각은 했지만(.....는 사실 내 간절한 바람이었지만ㅋㅋ), 진짜로 3권이 눈앞에 뙇!!!!!! 크흡, 드디어 왔어요 왔어, 땅의 역사 새 시리즈가 나왔어요 ㅠㅠㅠㅠㅠㅠ!! 


이렇게 또 내 책장엔 박종인 기자님의 책 한권이 늘어나고여..히히ㅣ히히..


​이 책은 #박종인 작가님이 말했듯이 수험서로는 불량하고, 교양서로는 불온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사책에 실린 자긍심 가득찬 이야기나, 흔히들 읽는 역사 교양서에 있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이 책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긍심 가득찬 이야기 이면에 있는 어두운 이야기,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었으나 찬란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르치지 않는 이야기, 정말 백성을 위한 일을 하였으나 권력에서 배재되었다는 이유로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당대의 권력자들, 세력가들 손에 의해 지워진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다. 



사람은 내 자신의 어두운면이든, 역사속의 어두운면이든 그 무엇이든지간에 어두운 면을 마주봐야만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인지를 바로 잡고 바른 길로 나아갈수 있다. 그래서 꼭 알아야만하고,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향기 풍기는 군자, 세상에 없다 

백성이 밥 한 그릇 먹으면 벼슬아치들 침 흘리며 달려든다

매화에 황금열매가 달리면 갑질로 거둬들이고 걸핏하면 매질이다

이 모두 매화탓이니 어찌 베어버리지 않겠는가

-땅의 역사3 p 021 - 패관잡기 「작매부」, 


시골 사람(야인:野人) 하나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 고을 사람이 떠들석하게 ‘유자가 왔다, 유자가 왔다’ 하기에 보니 선생이었다. 유자가 무엇인가.” 그가 답한다. “음양의 변화와 오행의 분포, 초목의 크고 시듦, 귀신의 정과 유며으이 이치까지 통달해 아는 사람이다.” 야인이 대답했다. “자신이 어질다 자처하고 남을 대하면 남이 허여하지 않고, 자신이 지혜롭다 자처하면 남이 도와주지 않는다. 위태하구나.” 야인은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정도전,『삼봉집』 권4) 백성은 밝고 지혜로웠다.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새 세상을 꾸미게 되었다. p 047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집필했다. 조선의 통치시스템과 철학이 다 들어있다. 민본이다. ‘임금이 높다면 높고 귀하다면 귀하다. 그러나 만민은 지극히 많다.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정도전, 『삼봉집』) p 049


태조 이성계의 무덤, 건원릉. 그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성계의 공신들과 역신이 실려있다. 헌데 공신과 역신의 명단 모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삼봉 정도전이다. 



공민왕의 남자였던 정도전. 썩어빠진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도전. 그가 원했던 개혁은 책상머리에서 말로만 하는 개혁이 아니었다. 나주 유배시절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진짜 백성을 위한 개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그였다. 개혁을 위해서는 기득권의 권력을 빼앗아야 했고, 부패된 행정제도를 바로잡아야했고, 빼앗긴 백성들의 땅을 돌려주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정도전은 이성계라는 인물과 손을 잡았고, 하나씩 하나씩 개혁을 위해 앞장섰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디자인했고, 설계했다. 이성계가 조선의 초대 왕이 되었으나, 왕은 절대권력의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을 위하는 나라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해했고, 공감했기에 정도전의 개혁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정도전은 명실공히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아비와 달랐다. 정도전의 개혁에 공감은 하였으나, 그에게 왕은 절대권력의 자리였다. 이방원은 칼을 들었고, 그 칼에 정도전의 피가 뿌려졌다. 해서 정도전은 역신이 되었다.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었으나, 조선왕조가 끝나가는 오백여년간 그 이름자 하나 섣불리 꺼내어서는 안될 역신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의 이야기다. 이방원은 본인이 처단한 정도전의 개혁을, 직접 이어갔다. 다만 그 중심이 ‘왕’에게 있을뿐. 



2021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정도전이 맞았는지, 이방원이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에는 왕조시대가 당연한 흐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부터 조선이 끝날때까지, ‘왕’으로써 권력을 휘두른 조선의 왕들을 보았을 때, 정말 왕에게 권력을 다 주는게 맞았을까 싶을때가 있다. 그렇다고 또 정도전의 주장처럼 재상중심 정치를 한다고 했을때, 과연 조선 오백여년간 올바른 재상들이 나올수 있었을까?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당장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역대 총리(재상)들의 행실을 보자. 올바르게 정치를 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나? 어떤 이들은 앞장서서 국민 학살을 주도했고, 또 어떤 이들은 말로써, 몸짓으로써 국민들을 죽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탕평책과 문치로 나라는 화려하게 포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성은 신음했다. 가난으로 신음했다. 가난은 학정과 수탈에서 나왔다. 1787년 경상우도로 암행을 다녀온 어사 이서구가 이렇게 보고했다. ‘환곡은 생판으로 빼앗는 것과 같아서 환곡이 없다면 참으로 낙토가 될것이라는 말이 있을정도다. 참 불쌍하다.’ 그래서 환곡을 바치고 나면 백성은 자루를 거꾸로 털어 끼니를 충당하고, 세금은 지방관 개인 돈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1878년 5월 4일 『정조실록』) 이서구는 환곡과 군정, 노비에 얽힌 문제들 조목조목 보고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내놓았다. p 068


​우리는 정조시대를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일컬으며, 그를 칭송한다. 나 역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그런 정조를 칭송하기전에, 알아야될 사실들이 분명히 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바로 시작되서, 백성들이 못된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했다? 아니, 그렇지않다. 못된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한건 정조 사후부터 시작된게 아니라, 이미 훨씬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그래서 암행어사인 이서구가 백성들의 수탈현장을, 사실 그대로 보고서로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렸던 거다. 그러면 이 때 백성들을 향한 수탈이 멈춰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탐관오리들의 모진 수탈에 백성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평등사상을 추구하는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를 용납하지않았고, 실제로 정조 때부터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정조에게 천주교는 그저 성리학 체제를 뒤흔드는 불온한 종교였다. 그렇게 천주교 교리가 담긴 서적들을 싸잡아 불태웠고, 심지어는 저잣거리에서 백성들에게 싼 값에 책을 팔았던 책쾌들마저 싸그리 잡아들였다. 문자는 권력이었고, 권력은 양반과 왕실의 전유물이니, 한낱 백성들 따위가 문자를 알아서는 안되었다.



정조는 인재등용을 위해 부패한 과거제가 아닌, 초계문신제를 이용하여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다.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 등 대게 실용주의 노선을 탔던 사람들이 초계문신제로 등용된 인물들이다. 이 당시 정조에게 등용된 사람 중에는 안동김씨 김조순도 있었다.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한마디로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다. 정조 사후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실용주의 노선을 탔던 사람들을 정계에서 쫓아내고, 유배보냈다. 정조가 인재라고 등용했던 김조순, 정조가 선택한 남자 김조순. 그렇게 안동 김씨의 시대가 열리며, 세도정치의 포문이 열렸다.


국가를 자기 재산 내지는 금고로 생각했던 세도가들은 금고를 털어내듯 가렴주구와 학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나라는 빈털터리였다. 예정대로 민란이 폭발했다. p 088



전북 정읍에는 피향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는 흩어져 있던 각종 선정비들이 모여 있다. 앞에서 볼 때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위풍당당한 관찰사 이서구의 선정비다. 왼쪽 끝은 현감 조규순의 선정비다. p 070


세도정치의 시작은, 조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말과 같다.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들은 시체에도 세금을 매겼고, 왈왈거리는 개에게도 세금을 매겼다. 온갖 세금에 백성들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키거나 둘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은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백성들을 수탈한 탐관오리들이, 본인들의 선정비를 건립하게 했다. 정읍에 세워진 조규순의 선정비도 그런 맥락이다. 조규순은 동학농민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부친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망해간 이유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 때문인걸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주자학이라는 학문에 매몰되어, 사농공상 계급에 따라 중함을 나누었다. 공자왈 맹자왈- 죽은 자의 글을 외는 사람들이 제일 귀했고, 그다음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었다. 공과 상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천대했다. 그렇게 과학을 천대했고, 상업을 천대하며 조선은 스스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거다.


1745년 5월 12일 영의정 김재로가 영조에게 물었다. “지난번 연경에서 들여온 책들과 측후기와 규일영(태양 관찰용 망원경)과 지도를 아직 폐하께서 관상감에 내리지 않았나이다.” 영조가 답했다. “태양빛을 직접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규일영은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이 되니 이미 명하여 깨뜨려버렸다. 책과 지도도 모두 물에 풀어 씻어버렸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두 ‘찬탄하였다.’.  (『영조실록』) p 135


영조가 외국에서 들어온 책과 망원경을 없애버린지 약 백년 뒤 일본에서는 굴절망원경을 개발했고, 심지어 태양을 관찰애 태양흑점지도를 작성했다. 동시대에 조선의 고종은 일식이 일어나자, 태양이 사라졌다며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이미 세계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고, 한반도 반대편에선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다. 



고대에 한반도에서 문화를 전해받던 옆나라 일본은 전국시대 즈음부터(임진왜란 전후) 이미 우리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전국시대의 패장인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학문과 각종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단행했으나 역시나 네덜란드와는 교류를 지속하였고, 그와 별개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과거부터 상업을 천대하지 않았고, 과학 역시 천대하지않았다. 



임진왜란 발발전, 명종 때 대마도인이 조선에 조총을 건네주었으나, 조선은 1도 신경쓰지 않았다. 시계를 조금 더 앞으로 돌리면, 일본은 서양의 조총을 처음 접하고, 조총을 국산화하기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일본은 조총 국산화에 성공했고, 그 조총을 대마도인이 조선에 가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무시했다. 1592년 그렇게 일본 조총부대가 한반도에 쳐들어왔다. 



조선이 망하기 시작한 시간은 세도정치 보다 더 앞, 상업과 과학을 천시한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상황(아편전쟁)을 바라보는 조선과 일본 지도부의 시각은 달랐다. 일본 막부 고문인 경제학자 사토 노부히로는 “천지개벽 이래 미증유의 사건”이라며 “그 옛날 십만 몽골 강병을 물리쳤듯, 포대를 쌓고 실탄을 터트려야 한다”고 막부에 주장했다. 5년 뒤인 1845년 3월 28일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이정응은 조선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無事矣무사의.” ‘아무 일 없다’는 뜻이다.(『승정원일기』) p 151


조선은 개혁군주라 불리는 정조 때 부터 천주교 박해를 지속하였고, 이는 서양의 보복으로 돌아왔다. 병인박해로 프랑스군이 처들어오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 이후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 교역을 위해 강화도로 왔는데, 제너럴셔먼호와 조선백성들이 충돌하였고, 조선백성들은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지른다. 이로 인해 미국군이 처들어오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이 두 전쟁에 대해 조선은 이겼다고 말하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과연 이긴 전쟁이 맞을까? 최신갑옷과 최신무기로 중무장한 외국군과 여러겹 천으로 덧댄 옷을 입은 조선군. 조선군은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갔고,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다. 그 외국군들이 뱃머리를 돌려 자국으로 돌아간건, 조선이 끝까지 개항을 하지 않고 버텼기 때문에 학을 떼며 돌아간 것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겼다며 정신승리를 할뿐이었다. 외국군들의 총에 죽어나간 자국 군인과 백성들에겐 눈을 돌린채.



신미양요가 있은 불과 4년뒤 강화도에 일본의 운요호가 들어왔다. 그렇게 조선은 일본에 강제 개항이 되었고, 결국엔 일본에 의해 나라가 사라졌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 미국이 독립을 지켜주리라 확신하는 고종 최측근 이용익에게 메켄지는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까닭이 있는가.” 국가가 해주지 않는 그 독립과 자강을 이제보니 의병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p 181


이회영 가문은 서울 명동과 경기도 양주에 있는 땅을 팔았다. 이상룡 가문은 99칸 임청각을 문중에 팔았다. 김대락 가문은 내앞마을 삼천 석 땅을 팔았다. 내앞마을 친척이자 훗날 ‘만주 호랑이’라 불린 무골 김동삼 또한 초가삼간을 내놓고 만주로 갔다. p 227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지고, 왕공족이다 조선귀족이다 하며, 권력자들이 바뀌어버린 나라의 사람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어떤 양반들은 조선귀족자리를 버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조선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던, 나라의 보호조차 받지 못했던 민초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공족, 조선귀족을 자처한 사람들은 일본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움직인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심지어 그들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이름만 바꿔서, 계속 같은 짓거리를 반복했다.


해방이 되었다.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락의 종증손 김시중이 말한다. “면천한 노비들이 농사지은 좁쌀도 먹고 소주 양조장에서 술 만들고 남은 수수껍질 얻어서 사카린 섞어서 퍼마시고 온 가족이 아침부터 취해 자빠지기도 했다. 중학교 월말시험 볼 때는 월사금 안 낸 아이는 교실 밖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울컥해서, 왜 울 할배가 만주에가서….”


지역과 신분과 노선으로 갈등을 빚는 운동가들을 보면서 이회영은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했다. 이회영은 1932년 밀정으로 변절한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체포돼 고문사했다. 김대락은 1914년 만주에서 죽었다. 이상룡 또한 1932년 길림에서 죽었다. 김동삼은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돼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었다. 김대락의 누이이자 이상룡의 처재이자 자결순국한 이중업의 아내 김락은 3.1운동 때 고문을 받고 실명으로 고통받다 1929년 죽었다. p 230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에 미군정이 들어오고, 일제강점기에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미군정을 배후로 다시 권력을 움켜졌다. 일제강점기 때는 밀정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을 앞세우며, 노선갈등을 빌미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한용운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금동서를 물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라든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백년 부패한 정치와 현대 문명에 뒤떨어져 나라가 망한것이다.” 일본의 압제에 의해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p 276


조선이라는 나라를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분명히 나쁜 놈들이고, 그들이 지금까지 하는 짓꺼리도 분명 나쁜 짓이고 욕을 해도 시원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본의 패악이 조선의 위정자들의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이 제대로 된 정치를 했다면, 나라의 부국과 강병을 위해 정치를 했다면, 조선이 그렇게 처절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백성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계를 돌려 2021년.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조선을 망국 기차에 태웠던 그들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지금도 세상에는 힘으로 호령하고

말로 치국을 하는 자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참으로 난세가 아닌가.

-땅의 역사 3, p 079



어딘가에서 듣기를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로 나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적어도 난 역사를 통해 배우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특히 국가를 위해 일하고,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공직에 있는 말단 공무원부터, 고위급 관료들, 그들 중 역사를 통해 배우고, 더 나은 미래, 바른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매일매일 챙겨보는 방송이 뉴스인데, 심지어 그 뉴스도 여러 시각으로 보기 위해, 여러 방송사의 뉴스를 고루고루 돌려가며 보고 있는데. 어쩜 하나같이 듣기만해도 기분 좋아지는, 행복한 그런 일은 없는건지. 난세에 영웅난다는데, 지금이 난세 아닌가? 영웅은 대체 언제나오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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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휴가 - 교황과 달라이라마의 5일간의 비밀 여행
롤런드 메룰로 지음, 이은선 옮김 / 오후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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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독특한 소설을 읽었다. 시작은 가톨릭교도라면 누구든 우러러보는 교황이 모두가 모르게 5일간(!!) 비밀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자신의 사촌이자 수석보좌관인 파올로에게 제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비밀여행의 동행자는 불교도라면 누구든 성스럽게 생각하는 달라이라마, 교황에게 여행을 제안 받은 파올로, 그리고 파올로와 이혼한 전처 로자. 이렇게 4명이다. 




일단 교황이 아무도 모르게, 쥐도새도 모르게, 바틴칸 궁을 떠나 5일간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부터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그 동행자가 불교도의 수장인 달라이라마라니? 가톨릭과 불교계의 수장이 같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아이러니한테, 극비에 진행한다는게 과연 가능할까. 이 비밀여행을 진행시켜야할 교황의 사촌이자 수석보좌관 파올로는, 가뜩이나 추기경출신이 아닌 상태에서 수석보좌관이 된 케이스라, 바티칸 내에서도 미움을 잔뜩 받고 있는데 말이다. 


따지고 들자면 장애물은 끝도 없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꿈은, 행복한 결혼생활이나 성공적인 육아나 영원한 구원과 같은 야심만만한 발상에는 비이성적인 믿음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체 모를 낙관주의에 취해 모든 게 잘 되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p 035


현실을 우선시 하는 파올로 입장에선 교황과 달라이라마의 비밀여행은 매우 리스크가 큰, 어쩌면 본인의 생명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인데, 그는 결국 이 여행에 앞장선다. 어차피 인생은 장애물 천국이니까! 



이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건 말 그대로 ‘비밀여행’. 그 누구도 교황을 알아봐선 안되고, 달라이라마도 알아봐선 안되며, 교황과 달라이라마를 납치했다고 대서특필 될 파올로를 알아봐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파올로는 전처 로자에게 SOS. 로자는 미용업계에선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실력가였으니까. 그렇게 교황의 비밀여행 멤버는 교황, 달라이라마, 파올로, 로자 총 4명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점이, 교황과 달라이라마, 파올로가 분장한 모습이다. 속세를 떠나 성스러운 인물로 대표되는 카톨릭계의 수장인 교황은 돈 많고 부유한 사업가로 변장했다. 역시나 속세를 떠나, 해탈의 경지에 있는 불교계의 수장인 달라이라마는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록스타로 변장했다. 교황의 수석보좌관이자 이탈리아 토박이인 파올로는 무려 지중해를 건너온 보트피플,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에게 무시와 혐오를 받는 난민으로 변장했다.



속세를 떠나서 어딜가나 추앙받던 교황과 달라이라마는 자본의 극치에 있는 사람이 되었고, 누가봐도 지적인 이탈리아인 파올로는 무시와 혐오가 일상인 난민이 되었다. 이들의 변장에서부터 교황이 주도한 이 여행이, 정말 쉬기위한 여행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두 분 다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믿으시는거죠? 어린아이들이 죽고, 사람들이 암과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생해도 조물주가 저 위에서 세상을 관장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됐건 부처님이 됐건 누가 됐건.” p 083 (로자)


거기다 동행인인 로자는 독자인 나처럼 종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교황과 달라이라마를 앞에두고 로자는 하고 싶은말을 가감없이 그대로 내뱉는다.  



달라이라마는 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렌즈로 덮여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과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뭐가 더 중요하겠어요? 정신없이 돈을 많이 벌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이번 생애에서 깨달음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것, 둘 중에서 말이에요.” p 094



“우리는 남들을 보고 소설을 써요. 저 여자는 이래, 저 남자는 저래, 봐, 저 여자는 늘 이렇잖아, 저 남자는 늘 저렇잖아. 이런 식으로 혼자 소설을 쓰기 때문에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하죠. 화가 나거나 할 때는 자존심이 고개를 드는지 살펴요. 알았지요?” p 110~112


그런 로자의 질문에 달라이라마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불편한 기색없이 대답을 한다. 이 대답을 들은, 나와같은 독자를 대변하는 로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적어도 나는 조금이나마 생각이란걸 하게되었다. 분명 나도 돈을 많이 벌고 소유하는 것에 방점을 둔 사람이다. 풀소유를 하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그 생각이 조금씩 변했다. 정말 풀소유를 하면 행복한건가?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요즘에 더 행복한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자살율이 전 세계 1위를 찍을까. 왜 하루하루 중대사건사고가 일어날까. 왜 이렇게 분노에 찬 사람들이 늘어나는걸까. 


우리에게는 스승이 주어졌다. 나와  교황과 10억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달라이라마와 수많은 추종자들에게는 부처가. 그밖에도 소크라테스, 모세, 마호메트, 아인슈타인. 이런 스승들이 한 방향을 가리켰지만 우리는 그쪽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호흡이나 땅이 쩍 갈라지는 것이나 위치 추적이 불가능한 전자로 이루어진 100만개의  소용돌이치는 우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현재 종이장처럼 얇은 얼음 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건너는 중이고 언젠가는 그 속으로 빠져서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다 이해한다고, 세상을 어느 정도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p 126



역사 이래 수많은 스승들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류애를 말하고, 또 말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는 그저 ‘소유’를 쫓으며 살아간다. 아니, 말이 살아가는거지 실상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그 목적을 ‘소유’에 둔다. 



수많은 스승들의 바람과는 달리 소유가 삶의 미덕이 되면서, 소유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죄의식이 옅어지고, 소유를 위해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서 죄의식이 옅어졌다. 그렇게 오롯이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들로 머리속을 채운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나는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고, 마리아를 믿는다고. 대체 이 모순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걸까. 차라리 나는 돈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솔직하고 순수해보일지경이다.


하지만  고문과 살해를 당한 성인들은 어떤가? 능지처참과 화형식을 당하고 화살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힌 성인들은 어떤가? 예수님은 어떤가?  그건 어떤 업보였을까? 요제프 스탈긴 같은 사람은 어째서 별다른 고통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자연사했을까? 티베트의 수많은 승려들이 중국인 이교도들에게 고문을 당한 이유는 뭘까? 아이들이 암으로 고통 받거나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천국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얼룩진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는 뭘까? p 162 


다시 책 속으로 돌아오면, 교황과 달라이라마, 로자와 여행을 하던 파올로의 관념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파올로는 가톨릭을 가정에서 태어나, 계속 가톨릭을 믿는게 당연한 삶이었다. 심지어 사촌이 교황이 되었고, 그 사촌을 따라 본인은 교황의 수석 보좌관이 되었다. 타인이 보면 누가봐도 성공한 가톨릭교도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본인이 믿어 의심치 않던 종교의 모순을 조금씩 깨닫고, 그 속에서 ‘왜?’을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시기, 질투어린 시선이나, 교황의 측근이라는 부러움을 샀던 그가, 난민에게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혐오를 받기 시작했다. 



이 여행을 시작한건 분명 교황이지만, 이 여행에서 제일 큰 깨달음을 얻은 건 파올로,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일것이다.



“내 생각에는 젊은이들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네. 그들은 위선을 기가 막히게 간파하지. 심지어 교회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가난한 계층에 대해 계속 어쩌고저쩌고 떠들면서 금색 제의를 입고, 금으로 만든 성배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난방비로 수백만 유로가 들며 전 세계 대다수 인구가  구경조차 한 적 없을만큼 으리으리한 대성당에서 의식을 거행하잖나.” p 198


물론 이 여행을 시작한 교황, 달라이라마도 파올로와는 다른 그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여행은 교황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 아니다. 달라이라마도 이유없이 그 여행에 동참한게 아니다. 알고보니 각각 다른 이유가 있었고, 또 그 이유가 서로 일치했다. 달랐으나, 같았고, 같았으나 다른 이유. 다만 이 책을 읽는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그 내용은 리뷰에서 전부 배제했다. 소설은.... 스포일러만큼 무서운 적이 없으니까!



확실한건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생각났다. 아마존 에디터가 왜 최고의 책이라 극찬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저 바라는게 있다면, 이 책이 영화화 되는 것!



교황과 달라이라마, 파올로가 바티칸을 몰래 탈출하는 장면이 영상화 된다면 긴박한 추리극이 펼쳐진것처럼 쫄깃할 것이다. 그들이 재해현장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과, 여행길에 만난 매춘부와 식사를 하는 장면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부셔줄것이다. 



와, 뭐라고해야할까. 추리나 스릴러가 아닌, 일반 문학을 읽은 것도 오랜만이지만, 그 와중에 서양권 문학을 읽은건 더더욱 오랜만인데, 이렇게 일반 문학을 감명깊게 읽은 건, 보자.......... 내 생에 처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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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없이 메이저 없다 - 풀꽃 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편지 아우름 50
나태주 지음 / 샘터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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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시인 나태주. 시와는 거리가 먼 나지만 유퀴즈에서 나태주 시인이 출연한 모습을 보니, 한 번은 이 분의 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시집을 통채로 읽어보기엔, 아무래도 시를 음미할 줄 모르다보니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나, 나태주 시인님의 에세이가 나왔다. 이 에세이 안에는 나태주 시인님의 시도 곳곳에 들어있어서, 시를 읽어보고 싶지만, 시집을 통채로 읽기에는 조금 부담이 느껴지는 시 초보자에게도 딱 좋은 구성인듯 싶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냥 에세이가 아니다.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단 하나의 주제가, 에세이 전체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풀꽃 시인이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20대에게, 30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에세이로 엮어서 내곤 한다. 하지만 그런 에세이 중에서 진정 가슴에 남는, 우리를 위로하고, 위안을 주고, 격려를 해주는 책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대부분의 책이 젊은 세대가 왜 힘들고 아픈지, 그 현실은 직시하지 않은채, 그저 다 커가는 과정이다, 성장통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한다, 힘내라,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라, 등등등. 누구나 할 수 있는 입 바른 이야기만 나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태주 시인이 쓴 이 에세이는 그런 에세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뭐라고 해야할까? 모든 글에서 진정한 ‘어른’의 위로가 느껴진다.



난 지금까지 본인이 어른이라고 대세우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 속에 진짜 ‘어른’은 없었다. 꼰대들만 있었을뿐. 어쩌면 진정한 어른은 내 꿈속에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주변에는 본인이 어른임을 내세우는, 나이만 든채 미성숙한 사람들만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난 나태주 시인은, 내가 꿈속에서 그리던 진정한 ‘어른’ 이었다.



그는 내가, 우리들이, 수 많은 젊은 세대들이 어떤 현실에 힘들어하고, 어떤 현실에 아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현실이 되어버린 걸 같이 마음아파하고, 어른으로써 이런 현실을 만들게 되버린 것을 미안해한다. 하지만 이미 이런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더라도 이런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그는 진심을 다해 한 마디 한마디를 써 내려갔다. 거기다 모든 문장들이 딱딱하지도 않고, 가르치려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 수록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럴까? 같은 말이라도 나태주 시인이 하는 말에는 설득력이 있고,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 나태주 시인의 글을 읽으면 왠지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진다.



나를 키운 것은 마이너입니다. 결핍입니다. 부족함입니다. 실패가 나를 키웠고 마이너 요인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해 주었습니다. 그 무엇도 좋은 것, 반반한 것, 자신 있는 것, 내세울 만한 것, 자랑스러운 것이 못 되었지만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p 029


우리 부모님께선 나를 키울 때 적어도 지금까지 경제적인 문제로 강하게 제지를 하거나, 밥을 굶기거나 하신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걸 응원하면 응원하셨지, 경제적인 문제로 반대를 하신적도 없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 부모님은 항상 밖에 나가 힘들게 일을 하시며, 돈을 벌어야 했지만.



오히려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들어서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금수저, 흙수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흔히 말하는 금수저에 대한 내용을 보다보니, 그들의 생활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솔직히 현타도 많이 왔다. 우리는 아등바등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먹고 싶은거 덜 먹고, 사고 싶은거 덜 사서 학자금을 내고,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어떻게든 대출 받아서 내 명의로 된 집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데 금수저라 불리는 그들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금수저라 불리는 그들은 언제나 편하게 남이 벌어오는 돈을 쓰는 편에 속했고(예컨대 대기업 자제들), 지위가 높은 부모님 파워로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돈이 많은 부모님 덕택에 대출 1도 없이 본인 명의 집을 사는건 아주 쉬운일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를 깨달았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TV속에서 금수저들이 나올때마다 언제나 그랬다.



“나를 키운 것은 마이너입니다. 결핍입니다. 부족함입니다.”



하지만 위 문장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분명 나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흙수저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과 달리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채우기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왔다. 실패를 마주해도, 어떻게든 일어설 수 있었고, 그 실패를 양분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민폐끼치지 않고, 내 스스로 앞가림을 하는 내 삶. 항상 부족했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 아닐까?  



내가 금수저들에게 느꼈던 박탈감은 그야말로 내 감정 낭비였다는 것을, 난 이미 내 스스로 부족함을 잘 채워가며,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공은 꼭 외형적으로 보아 그럴듯한 성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타인의 평가나 인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긍정과 인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은 또 만족감과 행복감과 통합니다. 만족과 행복이 없는 성공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p 049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내 삶이 내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떵떵거릴만한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말하는 유망 직종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내 삶에 만족하고, 내 삶이 충분이 행복하니까. 어찌되었던 퇴근하면 쉴 수 있는 포근한 집이 있고, 그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웃으며 밥을 먹을 수 있다. 



성공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꾸니, 내 삶도 충분히 성공한 삶이란걸,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재물을 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how’ 보다는 ‘무엇 what’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란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여기서 편법이 생기고 지름길이 생기고 정직하지 못한 삶이 있었습니다. 불법만 아니면 불의한 일이라도 괜찮다는 참 나쁜 인식들이 싹트게 된 것이지요. p 063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물을 때도 너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묻지 말고 너 커서 어떻게 살래, 하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 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도 ‘무엇 what’에서 ‘어떻게 how’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보다 더 가지런해지고 덜 고달파지고 덜 공소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p 064



내가 그동안 돈이 많아야, 혹은 ‘사’짜 돌림의 전문 직종을 가져야 성공한거라고 생각했던 건,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조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해야한다고, 서울 4년제에 들어가기 위해선 무조건 공부를 해야한다고, 학교에서 무수히 들어왔던 이야기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기, 횡령, 갑질 등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자. 대부분 내가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성공’의 기준에 부합한 사람들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분명 그들은 내가 되고 싶었던 ‘성공’한 사람들이고, 사회적으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인데, 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한번에 받는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니 나태주 시인의 말을 다시 곱씹게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물을 때도 너 커서 무엇(what)이 될래, 하고 묻지 말고 너 커서 어떻게(how) 살래, 하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부탁하고 넘어갑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생을 포기하지 안겠다는 말이 그말입니다. 인생은 의외로 길고 먼 길입니다. 아름답고 좋을 때도 있습니다. 현재의 처지가 힘들다고 처음부터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인생한테 미안한 일이고 죄짓는 일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한 발자국씩 노력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라고만 말하고 싶어요. 



어쨌든 함께 갑시다. 가는 데 까지는 가봅시다. 그러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나이 든 사람의 말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p 103



요 근래 죽음과 가까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에세이를 여러 차례 읽었다. 그 책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죽음이 있는데, 다름 아닌 스스로를 포기하는 죽음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힘든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난다. 그만큼 세상에 절망만 가득해서일까 싶기도 하고, 내가 사는 이 나라는 정말 희망이 없는걸까 싶기도 해서 서글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쯤은 웃을 날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 날을 믿고 기다리면서 버티다보면 진짜 한번 쯤은 웃을 날이 오지 않을까? ‘아, 그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하루 쯤은 있지 않을까?



“어쨌든 함께 갑시다. 가는 데 까지는 가봅시다. 그러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나이 든 사람의 말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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