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거 봤어? - TV 속 여자들 다시 보기
이자연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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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독특한 이 책 『어제 그거 봤어?』는 에세이다. 그냥 일상 에세이가 아닌, TV 속 매체들을 문화적으로 비평한 에세이다. 보통 문화비평은 어떤 관점으로 비평했느냐, 즉 비평가의 가치관이 매우 중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해당 매체를 왜곡하여 비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비평은 꼭 비평가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책 속의 저자는 TV 속 매체를 비평, 그러니까 어떤 관점으로 해석을 했느냐 하면 바로 ‘여성주의’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여성주의’를 표방한 책들이 정말 많다. 대게 건강한 가치관으로 쓴 책이지만, 어떤 책들은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본 ‘여성주의’를 쓴 책들도 있다. 문제는 해당 책을 읽기 전까지 어떤 책이 건강한 책인지, 어떤 책이 비뚤어진 책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 혹여나 비뚤어진 책을 읽게 된다면, 되려 읽다가 그들의 비뚤어진 여성주의에 적대감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섣불리 책을 고르기도 읽기도 꺼려진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여성주의’ 관련 책을 단 한 권도 안읽었다는건 아니다. 그저 요즘나온 여성주의 책들을 안읽는다는 것 뿐이다.



현대가 아닌, 산업혁명 시절의 여성인권주의자들이 쓴 글은 당연히 읽었고, 그녀들의 이야기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과거에 압도적인 차별을 당했던, 당시 시대상황에 따른 여성차별의 피해자들이기도 했으니까. 같은 의미로 우리 땅에 살며,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과거 여성들의 이야기도 자주 읽었다. 그녀들은 비뚤어진 주자성리학에 매몰된 사회의 피해자들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이 외에는 요즘 나오는 ‘여성주의’ 책들은 왠만하면 읽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비뚤어진 ‘여성주의’ 책을 골라서 배제하기도 어렵고, 내 가치관에 부합하는 책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건강하지 않다고, 비뚤어졌다고 생각하는 ‘여성주의’ 관점은 오로지 여성 ‘만’을 위한 책을 말한다. 난 여성‘만’을 위한 책을보면, 여성을 차별했던 사람들과 그 책의 저자들이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무성이든 모두가 다 같이 사는 사회인데, 여성‘만’을 위한 책은 또 하나의 차별이 아닐까?



뭐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며 오로지 내 가치관에 입각해서 읽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고, 또 어떤 부분은 조금은 편향적이게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책을 읽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사회에 깔려있는 여성에 대한 편향적인 인식이 너무 당연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들을 긁어주기도 해서 개운한 면도 있었다.



그때 두 명의 남성이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앉았다. 방송인 조우종과 스포츠해설가 한준희였다. 아무래도 방송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코너가 시작되었다. 바로 강부자의 역량 테스트. 그러니까 강부자가 축구해설을 할 역량이 되는지 남성 두 명이 친절하게 테스트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의문이 스쳤다. 강부자가 축구와 함께한 세월이 어언 몇십 년 인데, 같이 맞히는 퀴즈도 아닌 역량 테스트가 꼭 필요한걸까? 그렇다면 저들은 강부자를 평가할 역량이 되는 걸까? 하지만 그는 보란듯이 테스트를 쉽게 풀어나갔다. 그러다 어떤 문제에서는 원성 반 농담 반의 말을 남겼다. “뭐야 이거(너무 쉽잖아). 날 너무 무시하는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우종보다 최신 업데이트된 정보를 전하는 여유까지 보였고, 조우종은 축구를 본 지 꽤 되었다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p 029 (마이 리틀 텔레비전2)



나 역시 강부자 배우님이 나왔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2』를 본방으로 봤었다. TV를 보았을 당시에는 크게 생각을 못했던 부분을, 저자는 콕 집어서 이야기한다. 저자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해당 프로그램은 강부자 배우님을 출연시키면서, 노인 여성의 재발견이라는 것을 크게 부각시켰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정말 재발견이 맞나 싶었다. 제작진들은 강부자 배우님이 정말 축구에 대해 잘 아는지 역량 테스트를 한다며, 젊은 남성 두명을 캐스팅했다. 그들은 강부자 배우님이 축구를 사랑한 기간보다도 어린 남성들이었다. 심지어 그들과 강부자 배우님이 같이 있으면서 오간 대화를 보면, 전문가라고 캐스팅 된 그들보다 강부자배우님이 훨씬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왜 강부자 배우님은 그 두명에게 역량테스트를 받아야 했던걸까? 이런 상황을 정말 노인 여성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여성은 당연히 축구를 모를 것이라고, 노인 여성이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잘못된 사회적 인식이 이런 방송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이런 방송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방송들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재확산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며, 오히려 재밌다는 식으로 방송을 소비했다. 그래서 여자가 축구, 야구, 농구 등 체육종목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신기하다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을 읽은 요즘의 사회인식은 그때보다는 변했다는 점이다. 여성 체육선수들도 많이 부각되고, 체육을 향유하는 여성들도 사회 전면에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마리텔2가 바로 지금 이때 이런 방송을 했다면, 어느정도는 뭇매를 맞았을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이런식의 방송은 만들 생각조차도 없어질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건 사회가 조금이나가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의미일테다.



시즌 20의 ‘이름 없는 집안일을 해요’편에서는 오로지 봉미선에게만 주어진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형만이 보리차를 홀랑 다 마셔버리고 새로 끓여두지 않아 미선이 대신하고, 그 죗값으로 형만이 설거지를 했지만 남은 식탁 정리를 하지 않아 역시나 미선이 대신 치운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미선의 발목을 붙잡는다. “신발 정리나 신문 묶기, 떨어진 휴지 채워 넣기, 밥 먹은 식탁 정리나 보리차 올리기, 그런 것들이 이름 없는 집안일 입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을 주부가 하고 있죠.” 미선은 이 방송을 보며 크게 꺠닫는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건 눈 앞에 선명히 보이는 일이 아니라, 구석구석 손길을 기다리는 작은 일이었다는 것을. 사실을 알고 나서도 미선은 여전히 화장실 거울에 튄 치약 자국을 지우고 세제를 리필한다. 가장 놀라운 건 짱구가 미선에게 묻는 말이다.



“그동안 엄마가 (화장실에) 휴지를 채워두었어요? 자기 발로 걸어들어오는 줄 알았어요.” p 052 (짱구는 못말려)



이 챕터를 읽고 나도 모르게 찡했고,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짱구엄마, 봉미선의 모습은 전형적인 우리네 엄마의 모습이니까. 미선은 처음부터 짱구 엄마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집안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미선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봉미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엿한 한명의 사람이었다. 그저 ‘짱구엄마’라고 치부하면 안되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선을 그냥 짱구엄마로 인식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엄마도 그냥 내 엄마라고 인식했다. 아빠에게는 집안의 가장, 기둥이라는 번지르르한 명함을 달아주었지만,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걸 당연하다 생각했고, 집안 청소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집안에서 일어난 소소한 모든 일들은 당연히 엄마가 하는 일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내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하면서도 귀찮은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알게되었다. 아, 이 모든 일들을 우리 엄마는 우리가 안보이는 곳에서 묵묵하게 하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이 당연히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혹자는 이렇게 챙겨주는 엄마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좋은 자세가 아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는 건 엄마가 아니라, 그 집 구성원 모두의 일이란 것을 인식해야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 모든 일들이 엄마의 일이라고, 은연중에 터득해왔다. TV속에서 보이는 엄마들의 모습이 그래왔으니까. TV 속 매체들이 은연중에 계속 엄마는 이래야 한다고 시청자들을 세뇌시킨거라해도 다름이 없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아마 과거에서 내려온, 그릇된 주자성리학의 문제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지금, 그릇된 주자성리학에서 벗어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난 거 같은데, 왜 우리는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걸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듯, 우리 엄마들도 ‘○○엄마’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불리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배타미와 차현 그리고 송가경. 세 여자가 살아가는 세상엔 온통 여자뿐이다. 검블유는 기본 설정값이 여성일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지 촘촘하게 상상해 냈다. 이 말은 여성이 물리적으로 많이 등장한다는 의미를 넘어 이야기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 또한 여성이라는 뜻이다. (생략) 극에서 가장 다정하고 친절한 성정을 가진 인물은 바로의 남자 대표 브라이언이다. 지금까지 남녀 각각에게 잘 어울린다고 여겨진 통상적인 것들을 정확하게 반전시켰다. 이야기는 낯섦과 이질감을 전해준다. 그리고 시청자는 왜 이런 모습이 낯설게 다가오는지 의문을 품게된다. p 087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검블유는 정말 이질적인 드라마였다. 드라마 전반적으로 주체성을 가진 인물들은 거의 여성이었고, 심지어 주인공들도 전부 여성이었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여성이고, 사건을 헤쳐나가는 것도 여성이었다. 심지어 권력있는 여성이 룸싸롱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접대부로 젊은 남자들을 부르는 씬도 있었다. 정말 놀라웠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주체성을 가진 인물들은 남성이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헤쳐나가는 것도 남성이고, 룸싸롱에 앉아서 접대부를 부르는 사람들도 남성이었으니까.


 


매우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 드라마가 너무 신박했고, 근데 또 드라마 자체도 워낙 수작이라 계속 본방사수를 했다. 쎈 언니들을 보며 응원했고, 대리만족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다. 우리가 이질감을 느끼고,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바로 이 지점 말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의 성격이 정해져있다. 검블유는 아주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구성되었고, 진행된 드라마다. 이 말은 즉, 지금까지 방영된 수 많은 드라마에서 남성 캐릭터과 여성 캐릭터 성격을 고착화시켰다는 말이며, 우린 그것을 아무런 비판없이 보았다는 것이고, 그게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검블유라는 드라마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쯤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대체 어느정도까지 세뇌가 된걸까. 대체 언제부터 드라마에서 나오는 남성 캐릭터는 이래야하고, 여성 캐릭터는 이래야한다는 그런 가이드라인이 생겨나게 된걸까.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추억의 얼굴을 한, 하지만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즐겼지만 이제는 차마 들어줄 수도 없게 된 것들. 쿨의 <남녀해석>은 성차별을 죄의식 없이 일반화했고, god의 <관찰>은 관음 그 자체다. 2PM의 <10점 만점에 10점>은 여성 외무 평가의 끝판왕. 노래 속에 내재된 일상적인 여성혐오가 고막을 파괴한다. 반면에 땅바닥에 앉아 김밥에 라떼를 곁들여 먹는 언니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니.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는 우리 오빠들이 과거의 노래 가사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틀렸다는 걸 그들은 알 필요도, 관심도 없으니까. p 143 (캠핑클럽)



나 역시 저자와 같은 이유로 더이상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 심지어 그런 노래들이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올때는, “대체 왜 이런 노래를 들었지?” 라는 생각도 했으니까. 예컨데, 위 노래들 말고도, 태양의 <나만 바라봐>도 같은 이유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라디오 채널을 돌리기도 했다. 무슨 이런 이기적인 노래가 다있나 싶었으니까.



생각해보면 90~00년대, 내가 신화에 미쳐서 여기저기 쏘다닐 때, 그 당시만해도 어떤 노래를 들어도 크게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여자의 외모 평가를 하고, 여자를 구속하고 뭐 이런 노래들이 많이 흘러나왔음에도, 신나는 멜로디에 홀려서, 혹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나는 조금 달라졌다. 세상이 변한건지, 아님 내가 변한건지, 성인이 된 후로 노래 가사들을 하나하나 곱 씹어보게 되고, 곱 씹다보니 불편해진 노래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매일매일 엠넷을 틀며, 보고 들었던 최신가요들을 지금의 나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내가 이런 노래들을 불편해한다는 그 사실이다. 만약 지금까지도 이런 노래들이 불편하지 않고, 열광하며 소비했다면, 건강한 정신을 가지진 못했다는 이야기가 될테니. 



<SKY캐슬>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씩 겹쳐 보면 하나의 공통된 키워드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가정폭력’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로부터 공부할 기회를 뺏기고 경제척으로 착취당했던 한서진, 친할머니와 아빠에게 무시받는 엄마를 지켜봐온 강예서, 남편의 폭행을 묵인했던 이명주(아들 박영재를 서울의대에 합격시켜 SKY 캐슬 안에서 워너비맘으로 꼽혔던 여성), 고농축 가부장적 남편에게 순응해야하는 노승혜, 아빠의 강압적인 교육열에 못 이겨 하버드대 거짓 입학을 꾀한 차세리,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에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건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p 233 



<SKY캐슬>은 사회적 희생자로 여전히 여성을 지목했고, 이러한 참혹한 사건들은 철없는 중년 남성을 성숙하게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남성들이 공통적으로 말했던 가족, 행복, 소중함 같은 단어들은 여성 피해자들의 슬픔의 크기와 견줄 수 없어 비통하기만 하다. p 236(스카이캐슬)



이 챕터는 조금은 아쉬운 챕터였다. 나 역시 스카이캐슬을 열씸히 보았고, 그 안에서 나오는 수 많은 가족들에게 보이는 가정폭력을 느꼈었다. 다만 저자는 이 가정폭력에 대해 이야기할때, 대부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의 케이스만 꼽았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스카이케슬에서, 가정폭력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더 있었다. 바로 노승혜의 두 아들들. 노승혜의 두 아들도 가부장적인 부친에 순응하며, 정서적 학대를 받아왔다. ‘가정폭력’이라는 키워드로 이 드라마를 이야기하려 했다면, 노승혜의 두 아들도 분명 포함이 되어있었어야 했는데,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제외되고 말았다(조금 더 들어가면 강예서 아빠 역시 본인의 모친에게 정서적 폭력을 당한채, 성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다시 이야기해보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란, 여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 구분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이 ‘가정폭력’을 키워드로 썼다면, 아무리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썼더라도 피해 여성들과 같은 위치에 있던 피해 남성들도 같이 언급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해당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이 저 챕터를 읽는다면, 가정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여성이고, 가정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아주 위험한 일반화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일반화는 절대 있어서도 안되고, 해서도 안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여성이 될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가해자 역시 여성이 될 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절대 이를 놓쳐선 안된다.



뭐, 이런 소소한 부분들을 제외한다면, 아주 다행히도 이 책은 내가 우려하던 그런 책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려할 만큼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쳐있지도 않았고, 성별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심어주지도 않았다(물론 독자로 하여금 해석이 다를순 있다). 오히려 내가 잊고 있었던 사회적 문제들을 다시 떠올리게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TV 속 매체들을 비판없이 소비하고 향유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은 읽어보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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