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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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예술의 전당 토월 극장에서 리어왕 공연을 보았다. 이 공연은 극단 미추의 2008 정기공연으로 올린 것으로 이병훈이 연출하였고 리어왕 역으로는 정태환이 맡았다.

토월극장, 극단 미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주는 중후한 무게는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고전이 전하는 무게는 무대장치에서부터 전해졌다. 무대장치는 갈색마루바닥과 갈색발이 전부였지만 그 색은 고전의 이미지를 단순한 장치는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배우들의 의상이 인상 깊었는데 고전의상을 복원하기 보다는 인물 각각의 성격을 잘 들어내는 의상이었다. 공연 중 글로스터의 적자 애드가는 알몸 연기로 열연을 하였는데 그가 이 역을 맡게 된 대에는 몸매가 한몫했을 것 같다. 그 만큼 배역에 신경을 썼다는 거다.

리어왕은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 줄거리조차 기억에 없었다. 다만 폭풍 속에서 장면만이 어련 풋 떠오를 뿐이었다. 공연 관람 후 다시 책을 읽었는데 공연관람 당시 보다 더 큰 박수를 보냈다.

김정환 번역 리어왕이 원전에 가깝게 번역하였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워 공연을 보지 않았으면 이해가기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이런 글을 토대로 그런 공연을 하다니 공연예술이 얼마나 대단한가? 새삼 깨닫는 계기였다.

한편으로는 공연을 보면서 미쳐 다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내용을 책을 통해 다시 읽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꽤 많았는데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바보광대 : 지금 처녀인 여자, 그러면서 나의 떠남을 비웃는 여자는, 오랫동안 처녀 못하지, 물건들이 더 짧아지지 않고서야.( 52쪽 )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의미 없는 광대의 헛소리, 사실 리어왕에는 미친 리어왕과 거지로 변장한 애드가, 바보광대가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떠들어댄다. 하지만 이 대사는 헛소리라기보다는 셰익스피어가 글을 당시에는 통용 되는 은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시대적 간극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원전에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역자의 의도리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것이 ‘리어왕’이다. 리어왕은 딸들의 말을 믿고 자신의 영토 상속한다. 리어왕의 의도는 단순하고 순수했지만 결과는 부모형제간에 살육을 불러오는 비극에 불러온다. 고전은 시대를 막론한 보편성을 지닌 다는데 리어왕이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세치 혓바닥으로 놀리는 말을 믿지 말라, 늙을수록 재산이 필요하다,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이런 것도 틀릴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리어왕을 볼 때 참 잔인하다는 것이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배려한다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저주를 퍼부을 수는 없다.



리어 : 그렇겠지 경

들으라, 자연이여, 들으라, 친애하는 여신이여, 들으라!

그대의 목적을 연기하라. 정말

이 짐승이 열매 맺게 하려는 의도라면!

심으라, 그녀 자궁 속에 불임을!

그녀 안에 든 증식의 기관을 말려 버리라,

그러면 결코 없으리로다. 그녀의 타락한 몸에서

아이가 솟아 그녀를 존경하게 될 일은! 굳이 낳아야 한다면,

악의에 찬 아이들을 만들어 주라, 그것이 살아

위협을, 자연에 어긋난 고통을 그녀에게 가하도록!

그것이 그녀 청춘의 이마에 주름을 낙인찍게 하라.

흘러내리는 눈물로 수로를 파게 하라, 그녀 두 뺨에,

그녀 모성을 온갖 심려와 인자한 행동을

비웃고 또 경멸하라, 그러면 그녀가 느끼리로다.

독사 이빨보다 더 모진 고통은

배은망덕한 새끼들 두는 것임을! 떠나자, 멀리! (퇴장) (46쪽)



이 대사로 딸에 대한 리어왕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는 백배 이해할 수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리어왕은 저주를 자신을 배반한 두 딸에게만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말로는 하지 않겠다는 코델리어에게도 냉혹한 처사를 보였다. 리어왕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혜로운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분별력 없는 변덕쟁이다. 게다가 자신의 편의대로 왕위를 물려주고도 권위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욕심쟁이다. 두 딸에게 배은망덕을 얘기하기 전에 부모로서의 자혜와 지혜가 부족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리어왕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인간다운 면을 보이는 인물은 애드가이다. 다음은 애드가의 대사인데 이런 비극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자비이자 희망이다.



애드가 : 용서는 서로 하자꾸나.

나도 너 못지않게 피를 보았으니, 에드먼드,

비록 더 많은, 더 많은 악행을 네가 내게 했지만.

내 이름은 에드가, 네 아버지의 아들이다.

신들은 공명정대하지, 그리고 우리가 즐기는 악덕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역병을 내린다.

그분이 너를 만드신 그 어둡고 사악한 곳이

값을 치르게 했다. 그분께 그분의 두 눈으로


리어왕이 가장 이성적인 말을 할 때는 오히려 광인일 때였다.


리어 : 그리고 비참한 거지는 똥개가 무서워 줄행랑을 치지? 거지 서 너는

보는 게야. 권위의 위대한 상을, 개의 공무에 복종하는 거지.

너 매질 담당 관리 놈, 네 피비린 손을 멈추지 못할까!

왜 그 창녀를 때리려는 게야? 네놈 등을 벗겨야지.

네놈이 할딱할딱 정욕을 퍼질렀던 그녀를

퍼질러 쌌다고 네가 매질하다니 고리대금업자가 사기꾼을 목매다누나.

누더기 옷 틈새로 작은 악행이 보이는 건 살이야.

법복과 모피 가운은 모든 것을 숨긴다. 죄악에 금칠을 해 봐.

그러면 정의의 강건한 창도 맥없이 부서진다.

누더기를 씌우면, 난쟁이 지푸라기도 그것을 꿰뚫지.

·······, (150쪽)

애드가 : 오, 조리와 부조리가 뒤섞였어!

광기 속 이성이로다!



리어왕은 권력의 자리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을 광인이 되어서 느끼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미친 후에야 비로소 이성을 발휘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대사는 저작거리에서 나도는 말처럼 천박하고 잔인하다. 품위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우리 전통극인 마당극과 탈놀이였다. 마당극과 탈놀이는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그 입담이 거칠다. 이런 거칠면서도 재기발랄한 대사가 셰익스피어 혼자 썼다는 것이 놀라웠고, 대극장에서 품위를 갖추고 관람해야할 것 같은 셰익스피어 작품과 우리 전통 극이 닮았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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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행진 - 야누시 코르차크 양철북 인물 이야기 1
강무홍 지음, 최혜영 그림 / 양철북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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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행진』은 폴란드 고아들의 아버지이자 어린이 인권의 주창자로 추앙받는 야누슈 코르착의 이야기다.

코르착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의사가 되지만 자신이 병원에 일하는 순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거리에 버려진 채 굶주려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의사를 그만두고 ‘고아들의 집(돔 시에로트)’이라는 고아원을 맡는다.

그는 아이들에게 낡은 고아원을 깨끗하게 고치고 끼니를 꼬박꼬박 먹을 수 있게 했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코르착은 아이들이 스스로 서로를 존중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고아원에 ‘어린이공화국을 세운다, 어린이 공화국에서는 잘잘못을 가리고 벌을 주는 사람도 아이들 자신이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이들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렸다. 아이들은 재판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를 존중했다. 그곳은 ‘인간의 존엄함을 가르치는 가장 아름다운 학교이며 둥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9년 9월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침략해 들어온다. 독일군은 유태인을 ‘게토’라는 지역을 정해 머물게 했는데 고아원의 유태인 아이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코르착과 아이들은 ‘게토’로 이주하여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이들이 굶주림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코르착은 아이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구걸을 하여 근근이 연명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이들 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지쳐 주린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을 일삼았다. 하지만 고아들의 집 아이들은 아무도 먹을 것을 훔치지 않았다. 오히려 코르착이 새로 데려온 아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친절해 대했던 것이다. 그런 들이지만 날로 가혹해져가는 독일군의 만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온다.

독일군은 유대인을 가스실에 모아 놓고 대량학살을 자행했는데 고아들의 집 아이들도 끌려가고 만다. 코르착은 도망가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 코르착은 200명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초록 깃발은 들고 여름휴가를 떠나듯 기차를 타러 행진한다. 코르착은 기차 안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안고 64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초록 깃발을 들고 가스실로 향하는 기차를 타러 떠나는 아이들 생각만으로도 전율이 흐르는 장면이다. 책 뒤쪽에 실제 사진과 함께 코르착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고아들의 집’ 어린이 오케스트라

게토 시절에도 코르착은 아이들이 두려움을 잊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고아원에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회를 갖곤 했다. 또 거리로 나가 아동보호소 아이들을 돌보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가운데서도 늘 고아원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고 공하고 돌봐 주었다. 1942년 5월 독일군의 학살이 절정으로 치닫던 무렵, 코르착과 아이들은 게토에서 타고르의 희곡(우체국)을 공연했다. 오른쪽은 공연 초대장.



우리는 책을 통해서 가끔 숭고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을 만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의 부피 노인이 그렇고 동화 작가 권정생이 그렇다. 오늘 나는 거기에 한 사람의 더 하고 싶다. 그들은 이론을 설하기보다 행동으로 참 사랑을 실천한 성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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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와 핑크소상 - 마법의 소원상자
막심 빌러 지음, 유혜자 옮김 / 살림어린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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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와 핑크 소상에서 벨라는 마법을 쓸 줄 아는 주인공 소녀를 말하고 핑크 소상의 소상은 소원 상자의 준말이다. 분홍색 바탕에 기괴한 그림이 그려진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작가와 ‘소상’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막심 밀러’ 어디서 들어 본듯 한 저자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약력을 살펴보니 낯설다. ‘소상’이란 단어도 ‘작은 상인’이란 뜻이 아니라 ‘소원 상자’의 준말 이란다.

벨라는 예쁘고 달리기를 잘 할뿐만 아니라 마법을 쓸 줄도 안다. 그런 벨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법 책을 살펴보며 놀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몇 달 후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벨라는 또래 소녀답지 않게 신중하다. 소원 상자를 갖게 되면 끊임없이 소원을 말해 버릴 것 같다고 걱정을 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굳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벨라의 소원은 여행과 여동생을 갖는 것이다. 벨라와 핑크 소상은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바다 속을 여행하다가 마법 책의 주인을 찾아간다. 마법사의 구슬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고 마법 책을 돌려준다. 그러자 갑자기 벨라와 핑크 소상은 로봇들이 사는 세상에 도착하여 로봇들에게 쫓기다 집으로 돌아온다.

정신없는 여행이 끝나자 핑크 소상은 사라지고 벨라는 더 이상 소원상자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여동생이 생기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기로 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이루어지는 소원 상자라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것 일 게다. 그러나 소원 상자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 준다고 해도 모든 일인 순조롭게 풀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벨라는 쉽게 소원을 이루기보다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마음 깊이 정성을 다해 빌기로 했다. 그래야 여동생이 태어나 말썽을 부려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벨라와 핑크 소상’은 7살~8살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선물을 나누어준다고 철썩 같이 믿는 나이나 혹시 부모님이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의 아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 나이는 쯤 이면, 소원 상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나이이면서 쉽게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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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이양호 지음, 박현태 그림 / 글숲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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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그럼 뭐야? 글쎄? 책은 다 읽었는데 그 정체가 모호하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은 예수와 같은 존재라는 건지,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모든 아이들을 뜻하는 건지 모호하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하며 오히려 우리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바리데기나, 콩쥐팥쥐 이야기와 흡사하다.

백설공주를 우리 전래동화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할머니가 이야기해 주듯 구어체로 자분자분 ‘새하얀 눈 아이’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백설공주라는 이름부터 잘 못 번역되어 자리 잡았다고 한다. 독일식 감성으로 해석하려면 ‘새하얀 눈 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백설공주라는 잘 못된 번역으로 전래동화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새하얀 눈 아이’는 순고한 정신을 지닌 아이를 의미하는데, 반해 백설공주로 번역되어 공주라는 신분과 외적인 미가 강조되어 공주 콤플렉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다. ‘새하얀 눈 아이’와 ‘백설공주’ 그 느낌이 참 많이 다르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는 난장이들 보호 속에서 살다가 백마 탄 왕자가 와 구해주는 그야 말로 예쁘기만 하면 인생 피는 동화 속 주인공으로 모든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저자 들려주는 ‘새하얀 아이’는 숲 속에서 외톨이가 되어 험난한 여정을 헤쳐 나와야 한다. 예쁜 외모만으로는 곤란한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에게 잘 못 알려진 ‘백설공주’를 새로 옮겨 원전이 갖고 있는 의미대로 또는 독일의 정서에 따라 꼼꼼히 따져가며 재해석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치와 달랐던 점과 의문점이 있었다.

기대치와 달랐던 것은 전래 동화가 아동들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에 관한 책일 거라 기대했는데 내 생각과는 달랐다. 전래동화가 지닌 전형적인 스토리가 선악에 대한 명확한 구분, 악에 대한 철저한 징벌에 있기 때문에 아동들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 그와 관련된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역으로 인한 전래 동화의 의미를 바로 잡고자 하는 책 이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의문점은 독일의 전래동화하고 꼭 독일의 정서대로 읽어야 하는 가? 라는 것이다. 저자는 오역으로 아이들이 공주 콤플렉스가 생겼다고 주장하는데, 오히려 동화 속에서나마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쁜 공주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를 것과 양탄자를 타고 요술램프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가 말이다. 현실과는 다르지만 이직 어리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상상의 일부일 뿐인데 너무 잣대를 대고 분석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설화나 신화를 보면 서로 떨어져 있는 나라지만 비슷한 소재와 구조를 지닌 이야기가 다르게 전해오고 있다. 각각의 나라마다 개별적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지만 가까운 나라끼리 전해시고 점점 퍼져나갔을 수도 있고 그런 과정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변형해 갔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독일 전래동화라고 해서 원전이 전하는 그대로를 우리가 받아드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문을 갖기도 했지만 독일 전래동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은 매우 신선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할머니 무릎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서를 지녔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서 순수 우리말을 쓰려고 애쓴 흔적이 역역했는데 처음에 껄끄럽고 어색했는데 자꾸 들으니 익숙하고 나도 모르게 따라 쓰게 되는 경험을 가졌다. 우리말인데도 자주 쓰지 않으면 억지스럽게 느껴지고 자주 쓰며 자연스러운 게 글이고 말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쓴 저가가 좋아하는 동화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그걸 알면 저자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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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버들 2008-09-2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와의 대화에 다녀왔는데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다른 작가분들도 그렇겠지만 '이양호'작가님도 자신이 작고 있는 것에 1%정도만 책으로 보여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말씀하시는 톤이 진지하셨고 진정성이 담겨 있어 좋았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 어감 하나 하나에 깊이 있게 생각하는 분이란 생각,
책에서 느껴졌던 고집이라까, 안 좋게 얘기하면 아집이라고 느껴졌던 것이 오해였다는 생각,
그렇다고 모든 포용한다 이런 개념은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이다. 또는 이것에 가깝다. 그리고 요것만은 지켜야한다 정도의 부드러우면서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 말씀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말이 좀 꼬였나요.
어쨌든 생각했던 것 보다 굉장이 신선했고 진실된 분이라 우리에게 없는 부족한게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기운 듬뿍 받았으니 책에 주신 말씀대로 뜻 깊은 삶을 살아야 겠지요. ^^
 
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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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시작 되었는가? 라는 질문은 인간이 언제부터 동물들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부터 시작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생성되어 있었던 경이로운 철학사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철학의 탄생』정말 흥미로운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 그러니까 철학이 탄생 즉, 시작 당시의 모습이 ‘시작’이라는 말처럼 어설프지 않다는 것에 있다.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어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뉴턴 이후이다. 근대이후 철학에서 분리된 과학은 세분화를 걸치면서 발전해 왔다. 이런 세분화의 시작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학풍이고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을 분류하기 보다는 통합해서 보았다.


‘자연을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로, 하나의 전체로 관찰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조화로운 전체를 이렇게 인위적으로 분할하여 그 한 부분을 격리시키고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비쳤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는 이런 일은 부적절한 뿐만 아니라 아마도 오만함을 드러내는 처사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는 조화로운 우주 현상에 개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생각은 현대에 들어 새롭게 해석되어 조명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장외익 교수가 내 놓은 ‘온 생명’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아무리 작은 단위의 생명이라고 해도 또는 아무리 큰 단위의 생물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살수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장외익의 이론의 근거이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물질 분절해서 관찰하고 연구하는데 집착하였는데 앞으로는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받아 드리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외익 교수는 과학과 철학을 결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학의 과제라고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과 많이 닮아 있다. 모든 생명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과학이론은 장외익 뿐만 아니라 차이는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처럼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유가 근대 이후 또는 현대 과학자들의 이론과 얼마나 닮아 있다. 이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는 놀라운 과학적인 직관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명료하게 규명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오늘날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 이후의 철학에서 근대 이전의 철학과 과학은 어두운 터널을 헤매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토마스 쿤은 과학적 혁명을 통해 그 시대(또는 여러 시대를 걸쳐)에 통용되는 과학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이를 토마스 쿤은 정상과학이라고 명명한다. 정상과학으로 인정받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은 수많은 가설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중 정상과학으로 인정받는 것은 극히 일부이다. 이『철학의 탄생』에선 정상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가설과 연구 성과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므로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적 사유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저자는 리처드 파이먼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하다.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먼은 추측을 표명하는 적은 비과학적인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추측은 다만 불확실할 뿐이다. 아무런 추측도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과학적인 일이다. 추측은 표명되어야 한다. 외삽법에 의한 예측만이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가설이란 앞서 나가면서 관찰을 이끄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원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오로지 관찰될 수 있는 수치로만 이론을 만들어내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이 관찰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론입니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론들만 난무한다면, 그 또한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이나 철학은 상상력과 직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의 철학자들이 직관과 추측이 근대 이후 과학기술로 밝혀졌다는 사실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모든 생물은 물로부터 시작되었고 인간 역시 물고기들 사이에서 태어나 육지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 알려진 진화론에 대해 당시에 벌써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공기라는 개념과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고 태양으로 인해 수증기의 상승으로 비로 내린다는 등의 초보적이긴 하지만 과학적인 추론에 따라 기상학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 처럼 소크라테스의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유는 과학기술의 부족으로 실험 결과를 증명하지는 못하고 상상력과 직관에 의존해 사물과 현상을 규명하였지만, 상당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그리스 철학과 타 지역의 철학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정신적 발전들은 시기적으로 서로 일치하며, 사유를 통해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 또한 같았지만, 그 발전들은 각각 상이한 입장에서 시작되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거대한 중국 제국에서는 정의로운 정치 질서 안에서 인간들이 서로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려는 실천적인 고민이 지배적이었다. 인도에서는 인생의 심오한 의미에 대한 최초의 질문들을 제기하는 종교적 고민이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국가도, 종교적인 성직자 집단도 없던 그리스에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인간의 경이감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되었다.” 자연의 조화 앞에서 그리스인 느꼈던 놀라움과 경이감-이것이 세계의 시초와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결정적인 질문은 서양 철학과 과학의 합리적인 기초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고 도시에 유럽과 동양사이의 정신적인 괴리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고착시켰다. 그리고 이 괴리로부터 온갖 다른 결과들이 초래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놀랍도록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사유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경이로움을 표한다. 반면, 『철학의 탄생』의 저자가 보여주는 그리스철학의 위대성에 놀라면서 동양철학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내가 모를 무궁무진한 세계가 동양철학에도 숨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과학자들에 의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이론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을 알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 참으로 가변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증명이 만능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오늘의 세태가 허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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