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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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문학 비평가로서 그 이름이 제법 귀에 익은 것과는 달리 여지껏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한국 인문학계에 가라타니 고진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각종 비평집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는 서양 근현대 사상의 틀을 비서양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인류 보편의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탐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문학 비평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펼치는지 궁금하여 그나마 내가 평소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다룬 책 한 권을 골랐다. <윤리 21>은 기존의 철학자가 펼친 사상적 근거를 내세워 윤리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사회 비평이다. 그 영역이 일본 사회 중심이긴 하지만 전쟁과 혁명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터라 일반적으로 읽히고 있으며, 특히 식민 행위를 어떻게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를 논하는 만큼 우리로선 흥미로운 담론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한다면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른데, 저자는 여기서 20세기의 윤리를 돌아보고 21세기의 그것을 내다보고 있다. 양은 적은 편이지만 단락별로 다양한 논의를 담아 정리하기가 만만찮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평을 쓰려는 게 아니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책이 지닌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범죄자나 깡패가 등장하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람에 따라 호오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잔인한 행위가 스크린에 전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므로 누구든 영화를 보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주인공이 꾀하는 복수가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관객은 더욱 통쾌한 기분을 맛본다. 이것이 이른바 미적 판단이다. 그 근거를 칸트는 '무관심'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도덕적이고 지적인 관심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영화나 소설을 즐기는 것은 ㅡ 심지어 때로 현실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으로 훈련된 탓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덕과 이성의 체계를 뒤흔드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로부터 관심을 떼는 훈련을 한다. 잔인한 게임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그것을 부추긴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가 점점 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어쨌든 그것은 통상의 관심을 별도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므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영화의 호불호를 나누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를 오로지 잔인해서 싫다고 말한다면 관심을 배제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고, 폭력적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반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행위, 그러니까 관심을 괄호 안에 넣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괄호를 다시 푸는 행위다. 쉽게 말해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에 등장한 폭력적 행위가 단순한 오락에 그칠 뿐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과연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이것은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영화가 끝나면, 소설을 읽고 나면 사유를 멈추기 일쑤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자꾸만 그런 식으로 폭력에 길들여지면 인간의 윤리 체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에게 자유가 없었다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봐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당한 방어 행위로써 내가 상대를 해쳤을 때조차 내게 책임이 있고, 운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누가 도로로 뛰어들어 사고가 났더라도 보행자가 사망을 했다면 운전자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이야기다. 칸트는 도덕성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봤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선악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체에게 주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만큼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함께 작동한다.

 

윤리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볼 경우엔 모든 문제가 결정론적 인과성을 띤다. 악하면 죄를 짓는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과도 맥락이 같은데, 어떤 결과를 야기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그 원인을 진단하려고 애쓰는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윤리를 자유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의무가 그것을 좌우한다. 이때 의무 또는 지상명령은 국가나 공동체가 강요하는 규범이 아니고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이 경우엔 어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A이면 B이다'에서 A는 B를 규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구조론적 인과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책임은 물을 수 없다. 윤리가 선악의 문제라면 결국 A이면 모두 B가 되어야만 하는데,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지 않다. 가령, 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 아들도 반드시 폭력적인 것은 아니듯. 따라서 저자는 칸트의 말처럼 윤리는 자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범죄 영화에서 인물이 저지른 행위마다 그 원인을 딱 규정하는 식의 연출은 문제가 있다. 원인을 구태여 제시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짧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파헤치면서 결정론적 인과성에 목을 매는 건 되려 영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토록 윤리가 자유의 문제라는 게 명쾌하다면, 왜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저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로 종교, 자본주의, 정치를 꼽았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므로 '종교'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익을 취하는 건 곧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므로 사람 위에 '자본'이 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정치'가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세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도덕적 영역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서 나오는데, 그 명령은 죽은 자에서 비롯된다. 개인과 국가의 자유가 지상의 것으로만 이해될 때 윤리적인 문제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자유는 현전하는 타자만이 아니라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의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공공적 합의 혹은 간주관성은 칸트의 윤리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성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도덕 법칙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어떻게 21세기를 윤리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깊이 고찰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칸트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칸트의 '윤리'가 오해되는 대목을 찾아 참된 의미를 밝히면서 현대 사회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담론은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재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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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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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책이다. 의미심장하다. 요즘 주변에서 워낙 검열과 관련된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터라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여기서는 주로 프랑스 사회에서 일어나는 검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프랑스의 선진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그건 내가 괜스레 오해하고 착각한 탓(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탓)이지만, 프랑스가 아니라 프랑스 할아버지라도 검열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런데 이때 검열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법 검열이 아니다. 사법 검열의 정도는 나라마다 차이가 나는데, 그게 별로 심하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어디에서건 검열이 사그라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이 책이 전반적인 주제로 삼고 있는 내용처럼 이제 사법 검열이 자기 검열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전에 비해 검열의 종류가 많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알다시피 자동적이고 사적인 검열은 국가나 사회가 감시하는 것보다 훨씬 위력적이다. 여기서 여러 저자가 밝히고 있는 다양한 검열 가운데 인터넷 검열과 경제적 검열은 매우 흔하다. 그래서 최근에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검열 가운데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회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블로그 이웃 S 님에게 난데없이 집으로 통지서 한 장이 날아왔다. 예고도 없이 검찰청으로부터 '피의사건 처분결과 통지서'를 받았노라고 했다. 이른바 민간 사찰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이렇다 할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조사를 하고 통지서만 달랑 보낸 것이다. 그쪽에서 이유라도 명백히 밝히고 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법적 조항을 근거로 조사를 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왜'가 없었다.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황당하다는 하소연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유조차 제시하지 않는 이와 같은 일방적 통보는 아니다. 그의 하소연은 자연스레 본인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킨다.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온라인상에서 그런 일을 목도할 때면 사람들은 그 알량한 자유마저 행사하길 꺼리게 된다. 알게 모르게 스스로 검열을 하는 것이다. 한창 정부에 욕을 퍼붓던 네티즌들이 잠잠해진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게 바로 사법 검열의 힘이다. 사법 검열은 자기 검열을 낳는다.

 

최근 한 영화 감독이 작품을 만들다가 제작사로부터 갑자기 촬영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정을 듣자 하니 각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과 같은지 따져 묻고 싶지만, 일단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근데 그 각본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지 헛웃음이 나온다. 요즘 대기업 영화사는 시나리오가 나오면 사람들을 모집해서 자체적으로 모니터링을 거친다.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요소는 미련 없이 삭제한다. 웃고 우는 포인트까지 잡아 놓고 감독에게 대본을 넘긴다. 그래서 최근엔 대박을 치는 영화가 없다. 중박만 있을 뿐이다. 관객도 기대에 적당히 부응하는 영화를 보는 데 만족하는 듯하다.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하는 만큼 실패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의 역량을 조금도 발휘하지 못하는 구조로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의 모든 창작자를 모욕하는 행위다. 예술이 돈을 낳을 수는 있지만 돈으로 예술을 살 수는 없는 법. 그분은 한국영화 8, 90년대 르네상스를 이끌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최근에 흥행 성적이 부진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렵게 기회를 잡았는데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갈수록 경제적 검열이 자기 검열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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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 포 더 무비 - 고단한 어른아이를 위한 영화 같은 위로
신지혜 지음 / 시드페이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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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말을 내뱉고 어떤 영화는 말을 삼킨다. 어떤 영화는 말을 늘어놓고 어떤 영화는 말을 삼간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내는 말소리의 많고 적음과는 무관하다. 입술의 움직임이 없어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넘쳐도 도통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작품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영화가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좋은 작품을 만나려고 애쓴다. 그런데 말을 건네는 영화란 전적으로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나 기술적 완성도에 달린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특정 영화가 허락하는 감상은 누구에게나 똑같을 것이다. 훌륭한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저마다 다른 무늬로 서로 다른 빛깔로 빚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보고 꼭 버릇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점만 줄줄 벌이기 일쑤인 사람과 극장에 함께 가는 일은 몹시 짜증스럽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대목이 많아도 배울 점을 하나둘 발견하고 일견 나쁜 면이 있어도 남다른 요소는 기꺼이 끌어안는 사람과 영화를 보고 싶다. 특히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러한 태도와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영화가 건네는 말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친구 하나쯤 곁에 둔다면 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훨씬 더 즐겁고 흥미로울 것이다.

 

 

 

 

신지혜 아나운서는 회사 책상 앞머리에 오래도록 "방송은 목표, 영화는 꿈"이라고 써 놓았단다. 무려 15년 동안 CBS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 음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기 때문일 터. 방송 일정이 빡빡해 좀체 시간이 나지 않던 때 부산국제영화제를 가고픈 마음에 고작 하루 영화를 보고자 비행기로 내려갔다가 밤차를 타고 올라온 적도 있었다고. 새벽에 곧바로 출근해야만 하는 상황이 그 시간을 더 소중한 추억으로 만든 듯하다. 그런 열정은 특별히 영화계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오랜 시간 영화를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현재 그는 앞서 언급한 라디오 진행은 물론이고 매달 정기적으로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저자는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 늘 관객들에게 감상을 먼저 묻고 그 감상에서 가지를 뻗어 영화가 건네는 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대목을 찾고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목소리로 다시 듣고 새기는 일은 더없이 소중하다. 좋은 영화를 보고도 극장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세태에 영화가 인간과 삶에 얼마나 밀접한지 살피는 일은 재미와 감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책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영화가 건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영화에 감사하는 마음이 여기저기서 묻어나는데, 그것은 남다른 감상이나 특별한 사연에서 길어 올린 게 아니라 그저 우리가 영화를 보고 흔히 나누는 이야기에서 포착한 것이다. 따라서 언제고 유명한 평론집이라든가 영화 관련 수필을 집어 들었을 때 자신이 본 영화가 많지 않아 감상의 접점을 찾기 어려웠던 사람이라면 책장을 펼칠 때 반가운 마음부터 들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누구에게나 비교적 친근한 덕분이다. 대중적인 영화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아나운서답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풀고 있어 술술 읽힌다. 내용도 표현도 가까운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편안해서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영화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 누군가의 삶에 응원 한 조각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데, 그 소중한 말들을 주워 담고 그러모으려면 일단 영화가 허락한 감상을 마음껏 펼치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지혜를 넌지시 일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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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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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를 쓴 지은이는 한겨레가 영어 아닌 한국말로 놀이를 즐기듯 착하고 어여삐 말삶을 일구는 꿈을 헤아리고 스스로 영어를 예쁘게 받아들이는 길을 살피고 싶다고 말한다. 우선 이렇게 한국말과 한국글을 톺아보자고 목청을 높이는 책을 만나 반갑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전을 들추며 맞춤법을 익히는 나로선 훌륭한 말하기와 참다운 글쓰기를 늘 꿈꾸는 터라 이 책으로 나를 돌아보는 일이 무척 소중하다. 한자와 영어가 판을 치는 요즈음 날마다 되풀이되는 예사로운 말과 글을 저자처럼 낱낱이 살피는 일이란 알다시피 쉽지 않다. 거기에 견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영어를 입에 엄벙덤벙 올리는 일만큼은 나 역시 조심스럽게 여기고 있어 이러한 글은 나를 적잖이 괴롭힌다. 그러잖아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을 쓸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바람에 외려 처음에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부족한 탓이고 능력을 나무랄 노릇이지만, 낱말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을 겨를이 없는 때 옳고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있으면 갑갑해지기 일쑤다. 그럴수록 지은이처럼 보통 때 말을 쌀찌우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데, 다른 나라말을 너무 자주 접하며 사는 탓인지 그 깜냥이 좀처럼 늘지 않아 걱정이다.

 

책을 보고 내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을 갈무리하자면 이러하다. 힘이 닿는 데까지 한국말을 살려 쓰되 한자를 죄다 손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언어 표현을 넓히는 쪽으로 힘을 기울이고 싶은데, 그때 한자는 그 뜻만 잘 알고 활용한다면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글과 함께 몸집을 키운 한자는 긴 글월을 짧게 줄일 수도 있고 읽거나 쓸 때 그 표현을 더 매끄럽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기도 하므로 아예 내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듯하다. 대신 지은이가 주로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을/를 위()하여', '-에 관()하여' 등 오랫동안 써서 버릇처럼 입에 익은 말을 달리 부릴 수 있도록 한동안 애쓸 생각이다. 나는 한자로 이루어진 낱말보다 그것을 잇거나 엮는 표현이 더 껄끄럽다고 느낀다. 꼭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잘 몰라서 내버려둔 것을 가지 치듯 하나씩 가위질하면 조금 더 우리말을 곧게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지은이 역시 잘못된 문장을 놓고 한자와 영어가 쓰인 곳을 샅샅이 다듬으면서도 책을 이루는 큰 얼거리는 영어를 바로잡는 대목들로만 엮고 있다. 한자보다 영어가 우리말을 더 좀먹는다고 여기는 듯하다.

 

우리말이 영어로 물드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갈수록 겉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둘 영어를 섞어 말을 내뱉는 데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이를테면 타이밍, 다크, 대시, 더블, 디저트, 디테일, 라인업, 럭셔리, 레스토랑, 로망, 마스터, 마인드, 무브, 미팅, 베이스 캠프, 비즈니스, 센터, 스마일, 스케일, 스톱, 스푼, 시티 투어, 아지트, 에너지, 텍스트, 트라우마, 파티 등이다. 뭐 늘어놓자면 끝이 없겠지만 이것들은 책에 벌여 있는 보기 가운데 내가 곧잘 언짢아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낱말들을 우리말로 바꿀 때 사전만 있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게 슬프다. 나처럼 글을 쓸 때 인터넷에 있는 사전을 자주 쓰는 사람이라면 그게 다 옳은 것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예시랍시고 영어를 쓰는 일도 많고 한국말이긴 하나 같은 뜻을 나타내는 낱말을 겹쳐 뜻풀이를 해놓은 것도 수두룩하다. 이럴지니 상황이 좋아질 까닭이 없다. 그러나 모든 낱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이 까다로운 건 아니다. '숟가락'을 굳이 '스푼'이라 할 이유가 있을까? 마땅히 바꿀 만한 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쓰는 때가 아니라면 부지런히 본보기를 익힐 일이다.

 

제아무리 우리말과 우리글을 어여삐 여겨도 누구든 말이 헛나오거나 글을 잘못 쓸 때가 있다. 따라서 지은이가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스스로 말삶을 일구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것을 한꺼번에 고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허투로 말하는 일을 거두잡고, 아름다운 한국말을 끌어안고, 우리 넋과 얼을 생각할지어다. 끝으로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굵게 그었던 대목을 되뇌며 내 말과 글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다잡는다. 말은 생각을 잡아먹거나 살찌웁니다. 어떠한 말을 하느냐에 따라 내 생각은 나날이 야윌 수 있고 나날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삶은 말을 뒤흔들거나 가꿉니다. 어떠한 삶을 꾸리느냐에 따라 내 말은 날마다 어수선할 수 있고 날마다 싱그러울 수 있습니다. 말을 옳게 가누면서 생각과 삶을 옳게 가눕니다. 말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면서 생각과 삶 또한 아무렇게나 내팽개칩니다. 삶을 옳게 나눌 때에 생각과 말을 옳게 가눕니다. 삶을 함부로 내동댕이치는 사람이라면 생각과 말 또한 함부로 내동댕이치는 매무새에 익숙해지고 맙니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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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무언가를 속속들이 살펴보려면 그것으로부터 한발 떨어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란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다. 우리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면 유럽을 보는 것 못지않게 한국을 보게 된다. 무엇이 같은지 무엇이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일은 여행이 삶에 보탬이 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락과 휴식을 목적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고 할지라도 낯선 공기가 몸 안으로 스미기 시작하면 여행의 참다운 발견은 절로 눈을 뜬다. 그런데 그 풍경들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답을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먹고 마시는 일처럼 그때그때 이색적인 정보를 머릿속에 꾹꾹 눌러담기도 어렵고 특정 문화와 연결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저자처럼 특파원으로서 다른 나라에 머물며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그 나라의 문화를 꼼꼼이 살필 수 있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 정보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든 주관과 감상을 중심으로 하든 기행문은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문 서적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스위스 기행문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스위스에서 '따뜻한 경쟁'을 보고 들었다.

 

작년에 나도 스위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내 짧은 여행을 저자의 경험에 비하랴만 스위스가 다른 유럽 국가와 견주었을 때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구태여 땅의 경계를 인식하지 않았더라면 특별히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곳들과는 사뭇 다른 그 나라만의 독특한 풍경이 있었다. 아주 사사로운 것들조차 내 눈에 신기하게 비치는 것이 많았지만, 긴 여행길에서 귀한 정보를 살뜰히 읽거나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게으른 여행자가 으레 그렇듯 내일의 여정을 위한 휴식을 핑계로 미루거나 무시하기 일쑤여서 지금은 결국 어렴풋한 기억과 몇 장의 사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행하는 곳에 대한 공부가 꼭 출발하기 전에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더러 있다. 책을 읽다가 그림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문득 그때 그 기억이 스르르 떠오르는 순간의 환희가 그 자명한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때다. 이 책은 내가 스위스에서 물음표를 그렸던 일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그리하여 나로선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스위스 여행을 다녀와서도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체와 어투가 예리한 지적과 확고한 주장까지도 편히 받아들이게끔 하는데,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여행기로 여겨도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내가 품고 있었던 궁금증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기차를 타고 도심을 이동하거나 그 유명한 융프라우를 오를 때 책에서나 봤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유독 개인 살림집에 있는 정원과 화단에도 다채로운 꽃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산을 알록달록하게 수놓고 있었다. 목가적 전원과 잘 어울리는 터라 처음에는 그저 그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에 한껏 취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하나같이 예쁘게 꾸며 놓았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데가 있었다. 다들 집을 참 잘 가꾸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도시를 아름답게 설계하고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시민을 활용한 셈이다. 정원을 매만지는 일이 곧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라면 그들은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정원을 가꾸겠는가. 스위스에서 농업정책을 도맡은 정부 담당자는 국토라는 큰 화폭에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넓은 공원에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는 정원사와 같다. 좋은 정책 하나가 사람들을 두루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저자는 책에서 스위스를 여행하다 보면 푸른 초원 위에 소와 말, 양과 같은 가축들이 햇빛을 받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내 경험으로 봐도 그것은 참말이다. 스위스에는 자연 상태로 방목하면 보조금을 주는 법률이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축을 들판에 마구 풀어 놓은 데서도 스위스만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냥 노닥거리는 게 아니라 농가의 소득 증대를 위해 열심히 근무하는 것이다. 그 보조금 규모가 우리 돈으로 무려 가구당 연평균 5000~6000만 원 정도. 이곳과 그곳의 물가가 다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상당한 액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심지어 소를 방목하는 산비탈의 경사도에 따라 보조금이 차등 지급된단다. 그러잖아도 여행길에서 그것을 보고 산비탈에서의 방목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이 정도로 꼼꼼하게 지원할 줄이야. 관광산업과 농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영리한 정책이 돋보인다. 역시 스위스로군!

 

매년 5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는 한 달에 최소한 26일 이상, 해가 짧은 11월 1일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는 한 달에 13일 이상 초지에 방목하면 연간 마리당 180프랑(약 22만 원)을 준다. 암퇘지 두 마리를 매일 서너 시간씩 밖에 내놓고 키우면 1년에 360프랑(약 44만 원)을 주고, 닭 200마리가 낮 동안 자유롭게 닭장 안팎을 드나들며 모이를 주워 먹을 수 있게 하면 280프랑(약 34만 원)이 지급된다. 생태 친화적인 축사 시설을 갖춰도 돈을 준다. 가축이 2개 이상의 생활 공간을 오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고 최소한 15럭스 이상의 안정적인 자연광을 쬘 수 있도록 조명 설비를 갖추면 큰 소 한마리를 기준으로 연간 90프랑(약 11만 원)을 지급한다.

 

 

농업 활동이 이뤄지는 현장 자체를 관광 상품화한 사례도 있다. 책에서는 대표적인 행사로 매년 9월 마지막 주 토요일과 10월 첫째 주 토요일 아침에 커다란 워낭과 화사한 꽃으로 장식한 소들이 목동들과 함께 알프스와 주라 산맥에서 내려오는 하산 행렬을 제시했다. 고산지대 외에는 치즈를 생산할 수 없었던 기술적 한계가 스위스의 수직적 유목을 낳은 것이다. 작은 규모의 행사도 많아서 여름에도 볼 수 있다. 내가 여행한 시기가 7월이었는데 숙소에서 그런 행사가 있다고 귀띔해준 덕분에 산지로 올라가서 맑은 공기와 햇빛, 신선한 풀을 마음껏 즐긴 소들이 내려오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산 행렬이라 놓치기 일쑤인데 운 좋게 숙소 바깥에 있을 때였다. 화려한 꽃무늬 전통 복장을 한 목동과 소녀의 행진이 마을의 고요를 깨는 워낭 소리와 맞물려 여름날의 활기를 느꼈다. 이런 행사 역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꼭두새벽부터 소 떼를 기다리는 관광객이 있을 정도라니 관광 차원에서도 좋고 농사꾼에게 혜택을 줄 수 있어 농업 보호 측면에서도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스위스에서 내가 정말 의아했던 것은 마트들이 문을 하나같이 늦게 열고 빨리 닫는 점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해가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가까운 상점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일찌감치 문을 닫는 터라 먹을거리를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야식 따위는 즐길 수 없다. 또한 여행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고자 숙소를 나설 때가 많은데 간단한 요기라도 하려고 마트로 향하면 어김없이 문이 닫혀 있거나 영업을 준비하는 중이다. 작은 가게들은 크게 규정이 없지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형 마트와 중소형 편의점의 영업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서 개점과 폐점이 철저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편을 느끼지 않을 리 만무하다. 2010년 대형 마트의 영업시간을 한 시간 연장하는 발의안을 놓고 제네바 시민들이 주민 투표를 했는데, 반대표가 찬성표보다 훨씬 많았단다. 희한한 일이다. 분명 그들도 마트가 늦은 시각까지 문을 열면 좋을 텐데 왜 반대했을까? 이럴지니 여행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낱낱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010년 11월 28일 제네바 시민은 대형 마트의 영업시간을 한 시간 연장하자는 발의안을 놓고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반대 56.2%, 찬성 43.8%로 부결. 우파 정당이 주도한 이 발의안은 미그로와 쿱 등 대형 마트의 평일 폐점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가량 늘리고 소비자 편의를 고려해 일요일에도 개점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한 시간 더 여유롭게 장을 볼 권리보다는 노동자가 현행대로 퇴근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세상에나! 그러한 내용을 담은 발의안은 자주 나왔지만 번번이 부결되었다고. 이것이 이른바 똘레랑스 문화이다. 그들은 생산과 소비는 일관된 경제순환 과정의 두 측면일 뿐 각기 독립되어 있는 행위가 아니며, 소비자와 노동자의 관계 또한 각각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수시로 변한다고 인식한다. 한마디로 반대표를 던진 행위는 소비자와 노동자의 연대인 것이다. 만약 마트 직원이 한 시간 더 일을 해야 한다면 내가 장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연장되는 것이므로 나 역시 회사에서 일을 한 시간 더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먼 미래까지 내다본다. 스위스의 대형 마트는 작은 동네 가게와 영업시간을 적절히 조율하기도 한단다. 우리로선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제네바 지역 대형 마트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오전 8시~오후 7시, 목요일과 금요일은 오전 8시~오후 7시30분, 토요일은 오전 8시~오후 6시까지 개점하고 일요일은 쉰다. 대형 마트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문을 열고 일요일에 쉬는 대신, 동네 가게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에 쉰다. 같이 살자는 거다. 거기에 더해 토요일과 일요일엔 여기저지 마을 광장에서 우리나라의 5일장 같은 장마당이 펼쳐진다.

 

대형 마트 미그로와 쿱은 행정단위인 코뮌에 한 개씩 있는 게 일반적이며, 한국의 홈플러스나 이마트처럼 각종 편의 시설을 복합적으로 갖춘 매장은 도시 외곽에 있다. 그러니까 서울처럼 대형 할인점이 도심 곳곳을 차지하고서 소상인의 목줄을 누르는 일이 없다. 또한 우리의 편의점처럼 24시간 논스톱 운영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직원과 소비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지 않는다. 스위스에서는 장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회사원이 정시에 퇴근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우스갯소리는 아닌 셈이다. 스위스의 평화로운 공기는 그저 하늘이 내린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국가와 시민 모두 따뜻한 경쟁을 통해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는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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