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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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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는 걸 목표로 한다는 이 책이 겨냥한 사람들을 우선 훑어 보자. 조국, 안철수, 박원순, 문재인 등 최근 정치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거기에 진중권, 류승완, 김제동과 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적 사건에 실질적으로 연관된 분부터 시작해서 시대와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분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인 인터뷰라 하겠다. 변명이든 희망이든 마지막에는 지금 정계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맛깔나게 끌어내고 있는 진행자 한홍구, 서해성 덕분에 발 딛고 서 있는 사회를 향한 통찰력이라고는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책의 끝머리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구어체의 사용과 거칠고 투박한 표현도 한몫한다. 이 집 저 집 어르신들 찾아 다니면서 정치나 사회에 대한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한계는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 한 사람의 생각을 깊게 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를 향한 다양한 시선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애초의 목적에 맞게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뉴스나 신문에서 자주 혹은 간혹 접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현안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또 다른 해석을 엿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한겨레 창간 22주년을 맞아 기획된 프로젝트로 그간 연재된 50회 분량의 내용을 한꺼번에 묶은 것이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겨레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는 취지에 딱 들어맞는 내용만 추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실은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가수들의 경연에 순위를 매기는 예능프로그램에 너나 할 것 없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한 기준과 공정한 진행을 바라는 것을 보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증과 욕구가 정치판이 아니라 예능판에서 보일 때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거침 없는 '직설'을 통해서 한심한 나라꼴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사람들의 '직설'이 조금 더 본질을 꿰뚫을 수 있길 책이 바라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바란다. 적어도 그러한 직설은 분노하는 이들에게 그저 말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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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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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물리학과 양자전기역학을 연구한 리처드 파인만은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손꼽힌다. 형식적인 것을 거부하고 창조적 사고를 펼친 것으로 유명한 그는 역사의 시계를 앞당기는 놀라운 이론과 경이로운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QED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웠으며 나노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양자 물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계산 방법을 고안해 내는 등 양자 역학을 한 단계 도약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험실에서 평생을 보낸 괴팍하거나 기괴한 천재들과는 달리 그는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호기심이 많아 다방면에서 활동을 한 덕분에 모험가이자 예술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파인만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천재라 칭한 기사를 보고 뜨악해 한 적이 있었다는 재밌는 일화에서도 그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물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대중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물리학자였다. 늘 적극적으로 삶에 부딪치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그러한 점들이 파인만의 전기를 만화로 엮는 시도를 하게 된 이유가 아닌가 싶다.  

훌륭한 과학자의 삶으로부터 도전정신을 본받고 유쾌한 지적 에너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춘 이 책은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운 과학적 내용과 사적인 삶에 해당하는 부분을 교차로 편집하고 있다. 어느 정도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전문적인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러한 구성은 과학자의 전기를 그나마 지루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 과정에서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주요 흐름도 이해할 수 있고, 양자 역학에 관해서 부분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음은 알찬 소득이다. 무엇보다 그가 어떤 식으로 그토록 기발한 생각을 했는지 만화의 특색에 알맞게 잘 포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가 한 권의 만화로 축약되었기 때문에 대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리처드 파인만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만화에 실린 이야기를 곱씹는다. 

1918년 5월 11일 뉴욕시 퀸즈의 작은 마을 파 락어웨이(Far Rockaway)에서 출생하였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파인만이 어렸을 때부터 단편적인 대답보다는 많은 질문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어린시절 라디오를 수리하거나 금고와 자물쇠를 여는 일이 취미였으며 드러머, 화가로서의 재능뿐만 아니라 유머와 재치도 출중하였다. 1939년 MIT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과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전쟁 후인 1945년 코넬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조교수로, 1950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코넬대학교 시절부터
양자전기역학()을 연구하였으며 이후 재규격화이론을 완성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파인만 다이어그램(Feynman diagram)은 그가 직접 고안한 것으로 이론물리학에 널리 이용되었다. 1950년 이후에는 액체 헬륨의 이론을 연구하였다. 1964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상을 수상하였으며 1965년 양자 전기역학의 재규격화이론 연구의 업적으로 J.S.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20세기중 거시적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된다면 미시적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은 파인만으로 대표된다. 파인만은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형식과 권위를 거부하고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유지했던 과학자이다. 1988년 암으로 투병하던 중 69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출처]
리처드 파인만 [Richard Phillips Feynman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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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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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뷰는 얼마전에 있었던 칸국제영화제에서 한 영화 감독이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유대인의 폭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즉각 퇴출된 사건과 연결을 지었다. 최근의 사회적 사건에 비춘 폭력의 문제를 통해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본다.

어떤 이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주변에 있는 자그마한 땅을 소유하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 땅에 있던 사람들은 오래도록 핍박을 받으며 살았다. 그 집단으로부터 A는 간접적인 영향에 있었고 B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A와 B는 절친한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며 서로의 학문적 지식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A가 독립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회주의의 정신을 적극 인정한 반면, B는 그 혁명이 폭력으로 무장한 것이라는 데 극구 반대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투쟁에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A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어떤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자고 주장했고 B는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땅을 되찾으려던 그 집단은 B에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A와 B는 서로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고 결국 갈라섰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나는 한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인 어 베러 월드>. 거기서 주인공 안톤은 A와 B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상황에 따라서 A가 되기도 하고, B가 되기도 한다. 두 개의 상황을 나란히 전시하다가 마침내 B가 A를 끌어안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라스 폰 트리에와 수잔 비에르는 덴마크영화학교 출신으로서 덴마크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그들이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대하는 방식과 관점에 있어 대립하고 있다. 수잔 비에르는 라스 폰 트리에가 주창한 도그마 운동에 가담했다가 곧 다른 길을 걸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수잔 비에르에 대해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곧잘 싫어하는 티를 내곤 했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자국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외국어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로서는 그 영화 속에서 A와 B가 손을 잡는 것이 일종의 가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영화에 폭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자면, 라스 폰 트리에는 B보다 A에 훨씬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수잔 비에르가 영화를 통해 폭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거듭 B를 이상적으로 보는 것이 마뜩잖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과거를 반성하는 척하면서 세계 평화를 논한다는 식의 비판. 그런 상황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작년에 논란을 일으켰던 <안티크라이스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파괴의 끝을 보여주는 <멜랑콜리아>를 들고 칸영화제를 다시 찾았다. 내용상 별 관계가 없는 어떤 기자의 한 질문에 수잔 비에르를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펼치다가 그만 유대인의 폭력을 옹호하는 식의 발언을 했다. 그때 주연배우 커스틴 던스트는 사색이 되었다. "이봐요, 여기는 다름 아닌 프랑스라고요!"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농담 한 마디 하려다가 완전히 덫에 걸리고 만 라스 폰 트리에는 결국 칸에서 퇴출됐다.  


 

좌 : 알베르 카뮈 / 우 : 장 폴 사르트르  

 

자, 이제 고백해야겠다. 즉각 그를 쫓아낸 상황에서도 칸영화제가 어떠한 고민을 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칸은 프랑스다. 유럽의 다른 영화제였어도 논란의 크기가 줄지 않았겠지만 프랑스는 이 문제를 대하는 시선이 좀 남달랐을 것 같다.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힘이 센 나라는 프랑스이고, 독립을 요구한 집단은 알제리인이며, A는 장 폴 사르트르고, B는 알베르 카뮈다. A와 B는, 그러니까 사르트르와 카뮈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학문적 사상을 공유하다가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뜻을 달리한 이후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폭력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세계 평화에 기여했으며 각각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써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잦은데 대부분 양가론을 취한다. 다만 그들을 거론하는 순서로 누구의 입장을 더 존중하는가 정도의 차이만 보일 따름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냐, 카뮈와 사르트르냐. 당시에는 사르트르가 웃었지만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구조를 전복하는 데 폭력을 휘둘렀던 이들은 결국 폭력으로 망했다. 한평생을 자신의 지적 여정의 길에서 고민했던 사르트르는 폭력 없는 정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을 죽기 전에 다소 완화한다.

칸영화제는 라스 폰 트리에를 퇴출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커스틴 던스트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이는 물론 심사위원들의 결정이겠으나 칸이 최종적으로 그녀에게 상을 수여한 것을 놓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프랑스가 결코 사르트르를 외면할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을 말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천재적인 문학 능력으로 위대한 저서를 많이 남긴 사르트르가 조금 더 인정을 받는 편이다. 학계에서도 대부분 사르트르와 카뮈 순서로 그들을 언급한다는데, 이는 그들의 명성을 말해준다. 감독은 내쫓았어도 배우는 인정한 것이 내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의 면모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와 수잔 비에르가 영화라는 매체에 폭력을 투영하는 방법에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는 것을 사르트르와 카뮈의 사상적 차이에 빗대어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결코 옳은 비유가 아닐 것이다. 다만 폭력에 관한 두 개의 시선이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참 씁쓸하다. 수잔 비에르 역시 영화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잖나. 영화적 미학을 위해 폭력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라스 폰 트리에든 폭력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수잔 비에르든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각자의 매력이 되어 취향에 따라 즐기면 그만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답 없음에 울적해진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은 아직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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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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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강남 좌파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사용했다. 강남 좌파란 보수 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 진보 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로 사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 않은 이들을 뜻한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보 정치인 가운데 강남 좌파가 아닌 사람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좌파든 우파든 모두 강남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꼭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강남 좌파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좌우를 막론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학력이나 학벌,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필수적이므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좌파가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강남 좌파 자체를 무조건 비판하는 건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겠다는 우파의 정치적 책략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우므로 강남 좌파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진정한 소통의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노무현,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등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서 강남 좌파의 실체와 배경을 상세히 소개한다. 사적인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언론 자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정치와 관련한 저서에서 그들에 대한 평가를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특정 당이나 좌우의 입장과 관계하지 아니하면서도 각각의 인물이 안고 있는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차후 대선을 위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여서 그것이 과거에 대한 분석에 그치지 아니한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이 지닌 문제가 결국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종국엔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 정치인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제시하는 데에 이른다. 그러나 벽 대신 다리를 세우자는 마지막 말에 방점이 찍힌 것 같지는 않다. 그것에 비해 강남 좌파의 등장과 어원을 필두로 주로 다수의 정치인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강남 좌파가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가 무엇인지 그간의 이야기를 재정립하고 집대성한 결과물에 해당한다.  

무거운 이야기도 재밌게 할 줄 아는 저자의 역량이 복잡하고 다변화하는 정치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유시민과 문재인에 대해서 유독 비판적인 자세를 심하게 드러내는 것은 전체적인 균형에 어긋나는 느낌이다. 노무현 정신을 겉으로만 계승하는 문제에 관한 지적은 좋으나 저자의 사적인 주장이 그 두 챕터에서 특히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학벌 좌파와 입시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다소 추상적인 것은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은 강남 좌파가 지닌 진짜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적합하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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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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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대중문화가 정치적인 함의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 이택광은 한국사회에 문화비평이라는 행위가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그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일상에 파묻혀 있는 불편한 정치성을 발굴해서 제 몫을 찾아주는 것이 문화비평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에 대한 전면적인 사유가 응당 필요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아마 많은 이들이 수긍할 것이다. 이 책은 그가 지금껏 발표한 비평글을 한 데 엮은 것이다. 거의 시간 순서대로 취합한 덕분에 그가 각종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현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봤는지 읽어내기가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더구나 세 개의 장을 철학과 비평,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인물 순으로 구성한 것은 아직까지 문화비평이 낯선 독자들에게도 그 개념을 쉽게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비평이라는 것이 제 아무리 어떤 확고한 근거를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사유에서 비롯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보다 저자의 생각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비평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소개하는 초반의 글들은 본격적인 비평에 앞서 기본적인 사유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과도 같다.

요즘은 전문적으로 칼럼을 쓰는 사람만 비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비평의 형식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대다. 그것도 온라인 상에서 쉽고 빠르게 얼마든지 글을 쓸 수가 있다. 따라서 어쩌면 문화비평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저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비평의 기본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의 생각을 참된 형식에 알맞게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 비평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는 것이므로 부담스럽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기 이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면서 그리 낯설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할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연유에서 비평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이택광은 '주이상스'라는 개념을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신세경(지붕뚫고 하이킥), 월드컵 응원녀, 작가 김수현, 마빡이, 소녀시대 등 아주 가벼운 소재에서도 집요하게 정치성을 끄집어내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사유는 있어도 새로운 사유는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우리가 그간 접했던 개개의 사건이 줄지어 나오는 터라 내용을 읽는 데 따른 부담을 느끼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기준을 토대로 나 아닌 누군가가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일을 다시 내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내 생각과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내겐 무척 재밌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비평의 재사유를 통한 즐거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신문 기사나 칼럼을 통해 여러 형태의 비평을 접하고는 있지만 오랜 기간 문화비평을 한 저자의 일관된 시선으로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을 새로이 정립하는 시간을 가진 것은 비평글의 참맛을 느끼는 일이었다. 저자처럼 우리도 누구나 자신만의 비평적 잣대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홍수처럼 넘치는 각양각색의 사회 현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길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그 잣대를 잘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정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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