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I Wis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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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기적을 꿈꾸며 산다. 새해를 맞아 소원을 비는 것이 비단 어린아이들만은 아니지 않은가. 저마다 가슴 속에 작은 소망 하나쯤 만들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날 거라고 믿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은 그게 삶의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 또한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인생이라는 게 좀처럼 본인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터라 내 소원을 꿀꺽 삼키고 마는 달님이 얄미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기적의 가능성을 말하면 한낱 지각없는 시절의 몽환을 늘어놓는 것쯤으로 여기기 일쑤다. 심지어 아이들이 품는 간절한 희망도 인생의 경험이 부족한 데서 오는 철모르는 짓으로 보거나 성장의 과정에서 으레 겪는 하나의 진통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런데 크고 작은 기적을 꿈꾸며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는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결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

 

코이치와 류스노케 형제는 부모의 이혼으로 각각 떨어져 산다. 가고시마에서 엄마와 함께 사는 형 코이치는 후쿠오카에서 아빠와 살고 있는 동생 류스노케와는 달리 재결합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상황에 속이 탄다.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활화산이 폭발한다면 예전처럼 가족이 한데 모여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 거란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한 줌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열차가 교차하는 곳으로 떠나기 위해 초등학생으로서는 쉽지 않은 여행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새로 개통한 신칸센 열차가 서로 스치는 순간에 파생되는 에너지가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꿈꾸는 것은 형제만이 아니다. 그들의 친구들도 제각각 염원하는 것이 없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들은 다 같이 뜻을 모아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여행길에 오른다.

 

 

운명의 순간을 고대하며 집을 나서던 날 코이치는 책상에 놓인 가족 사진 하나를 응시한다. 가족이 화목했던 그날의 기운을 얻고자 그는 동생과 함께 입었던 노란색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는다. 그때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 나는 그 애틋한 마음에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필경 아이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데 저 간절한 마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다행히 그들이 여행을 떠나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다른 의미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덕분이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경쾌해 내 마음까지 가뿐했다. 아마도 아이들은 일상의 순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기적의 경험을 선물하고 있는지 체감하는 듯하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소한 사물들ㅡ아이스크림, 코스모스, 100엔짜리 동전 등이 잇따라 나열될 때 그 의미가 도드라진다.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어렵사리 여행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의 도움이 종종 눈에 띈다. 온전히 그들만의 힘으로 별 탈 없이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믿음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자의 어떤 낭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현실주의는 본래 꼬리를 물 때가 있다. 소망스러운 낭만주의와 범상스러운 현실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데가 있다. 이는 아이들이 경찰의 손에 이끌려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 속에서 늘상 자신감이 다소 부족했던 한 소녀의 용기와 손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어느 노부부의 아량이 별안간 손을 맞잡는 데서도 느낄 수 있다. 기차가 교차할 때 나오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그 아이들의 순수한 믿음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코이치는 밍밍하기 그지없던 가루칸 떡에서 점점 은근한 단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가족의 권유로 설탕을 더 넣은 것도 아니건만 어떠한 연유로 그 녀석의 입맛이 변하고 있는 걸까? 어제의 시간은 인생이라는 혓바닥에 소금기를 남기는 법. 그것은 맨 마지막에 먹는 과자 부스러기가 맛있는 원리와도 같다. 어쩌면 시간의 기적이란 그런 것이다. 할아버지께 동생은 아직 어려서 그 맛을 잘 모른다며 우쭐대는 코이치를 보노라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빚어낸 작은 깨달음이 놀랍게도 인간이 꿈꾸는 기적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들도 잊어버리기 십상인 일상의 기적에 대한 참된 의미를 영화는 우리가 흔히 철없다고 여기는 코흘리개의 세상에서 발견하고 있다.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들의 그것에 비해 순수할 뿐 결코 부족한 게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세계는 곧 세계다.

 

영화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드러낼 때, 그것은 지금 이 세계가 충분히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마땅히 이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세계를 아름답게 비출 수 있는 남다른 순수를 뽐낸다. 그래서 코이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시간의 기적을 말할 줄 아는 감독의 마음이 투과되어 더할 나위 없이 반짝거린다. 아이들의 행성에 호롱불이 켜지는 점등의 순간은 코이치의 아빠가 무심코 던졌던 '세계'라는 단어의 의미가 혼자만의 헐한 시간에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새 슬며시 찾아온다. 그 소중한 깨달음에 힘입어 아이들은 생의 비등점에서 더 힘차게 끓어오를 것이다. 시간의 기적을 믿는 이들에게 인생의 먼지란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에 묻은 화산재일 뿐이다,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그리 지저분하지도 괴롭지도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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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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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흥미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추어 보는 것은 언제나 설렌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 시대의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때 굵직한 사건도 훨씬 깊이 이해된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그러한 사적인 이야기는 사건과 사건을 부드럽게 잇는 구실을 한다. 이 책도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통해서 계몽주의 전체를 이해하는 데 어떤 밑거름으로 작용하길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엔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였던 장-자크 루소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흄이 벌인 18개월 간의 일이 각색되어 있다.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의 개인적인 역사를 각각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의 상상력에 날개를 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루소의 역사에는 그나마 익숙하지만 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서 그 정도의 흥미를 실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산실이던 살롱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점이 새로웠다. 

 

이 책은 도서, 논문, 편지, 일기, 회곡록 안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탁월한 각색이라 할 만하다. 두 명의 저자 스스로 두 인물의 처절한 싸움을 그리는 것이 전문이라 말할 정도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복원한 옛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재미를 자아낸다. 다만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이 두 철학자의 만남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감정과 성격이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으로부터 호기심을 자아낼 수는 있지만 과연 그러한 것들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실제로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이 과연 결정적인 장면이었는지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상이나 학문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기억할 만한 성질의 것들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루소와 흄에 정통하지 못한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의 흥미는 단순한 수다에 그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유념해야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데 동의하나 이야기의 가치를 논하자면 긍정적이진 않다. 은밀한 스캔들의 가치가 흥미라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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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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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이 기승을 부려 너도나도 먹고 사는 게 힘들다고 느끼는 이때 복지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어느 쪽이 좋은지 아리송해지곤 한다. 그리스발 위험으로 유럽 전체가 휘청한다는 뉴스는 그렇게 개방적 자유시장주의의 그림자를 슬쩍 가릴 수가 있다. 세계가 모두 손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국가라고 마냥 사는 게 편하겠는가마는, 한 국가의 위기가 곧 다른 국가의 위기로 빠르게 이어지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 토마스 게이건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이 자조 섞인 목소리가 다시 태어나면 미국에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 노동 전문 변호사로 일하면서 그가 사회 취약 계층의 입장에 서 있는 게 이 책의 주장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이는 저자 스스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의 말처럼 모든 나라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다. 다시 말해, 모든 국가의 위기는 우리의 위기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고백하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유럽의 가시적인 위험보다 미국의 비가시적인 위험이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낀다. 의료 민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더니 문제가 정말 심각했다. 스스로 일어날 힘도 없는데 만날 미국만 따라하다가 가랑이 찢어지게 생겼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유머와 재치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 오로지 식사를 하고 테니스를 치는 장면만 줄기차게 나열되는 것에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한 채 일도 안 하고 마냥 빈둥거리는 유럽인을 생각했다는 저자의 말이 재밌다. 아마 이야기를 소비하기에 바쁜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다 사회의 특성이 묻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유쾌한 이야기에 여러 번 공감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가 베를린에서 살 때 유럽과 미국의 차이를 실감했던 내용들이 재밌는 일기처럼 적혀 있어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 같다. 재밌는 제목만큼 술술 읽히는 이 책은 청자를 배려한 화자의 말하기가 돋보인다. 거기서 앞서 언급한 그 아리송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정도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야근을 하는 동안 복지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저녁 식사를 위해 요리를 한다. 카페에 들러 하루를 정리하며 차를 마신다. 클럽에 들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트레스를 푼다. 돈 조금 더 벌면 뭐하나. 식사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는 어느 유럽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게 백번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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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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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시기에 놓여 있든 대중운동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종교운동이나 사회혁명 등을 거친 끝에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했더라도 대중운동이 서서히 마침표를 찍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그 대중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라 할 수 있는 강력한 행동의 물결, 맹목적 신념과 판단, 일편단심에 가까운 충성심 따위의 것들은 대중의 마음에 더 빈번하게 일고 있다. 우리 눈앞에 있었던 일들만 생각해봐도 그러하다. 촛불집회는 어떠했는가. 촛불의 상징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단결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이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됐는가. 그것은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원인을 일일이 파악할 수도 없겠지만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론은 운동의 본질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는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20세기에 있었던 여러 대중운동을 관통한 삶을 살았던 그는 집단 동일시에 관한 심리 연구서로 알려진 바로 이 <맹신자들>을 1951년에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노동자로서의 삶에 머물지 아니하고 사색과 독학을 통해 세계적인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책은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굉장히 단정적인 어투로 쓰인 점이 인상적이다.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대중운동이 활발했던 그 당시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적 논의를 제안하는 차원의 글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 이 책은 종교적·이념적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규명한 고전이 되었다. 이 책이 올해 발간되었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가치가 유효하다는 것을 말한다. 

대중운동의 특성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의 성분을 낱낱이 분석한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중운동을 노동자로서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벅찼을 저자가 이토록 차분하고 냉정하게 분석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읽어 나갈 때 본문에서 말하는 '현재'가 1951년이라는 것이 서문에 언급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시기를 딱히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대전과 같은 특정 사건을 언급할 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대중운동과 맹신자에 대한 개념은 시대를 불문하고 비슷한 속성을 띤다. 더구나 그는 대중운동의 사례를 열거하여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도 일반적인 특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말의 군더더기를 없앴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서술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점들이 불필요한 특수성을 없애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상가의 단상을 나열한 책들은 그것이 낱개로 유의미하기는 해도 단상과 단상이 한데 엮이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단상들의 모음이 하나의 의미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가령, '가난한 사람'을 설명하는 5장에서 23, 24번의 단상은 각각 두 개의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었을 따름이지만 그 장의 맥락을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라서 잘 어울린다. 물론 모든 단상이 그렇게 유기적인 모양새는 아니나 대체로 이야기가 흐르는 리듬이 깔끔한 편이다. 나는 이 시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이 책 속의 날카로운 문장 하나하나가 그것을 읽는 자의 현실에 가닿아 적잖은 사유를 끌어낼 것이라 확신한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아마 밑줄을 그을 펜이 필요할 것이다.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 깊고 기쁨 충만한 전인적 공동체 안에 그들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기 때문이다. / P.67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하고 판에 박힌 생존 방식의 한계가 명확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보다는 눈앞에 무한한 기회가 펼쳐져 있는 사람들이 애국심, 인종적 결속, 심지어는 혁명의 선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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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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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 그런지 부쩍 시가 읽고 싶어질 때가 잦다. 그래서 요즘 책장 속에 들어 있는 시집을 꺼내어 시 몇 편을 소리 내어 읽다가 이런저런 공상을 펼치곤 한다. 시를 가슴에 새기는 일은 이렇듯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 법이다. 철학적 시 읽기라고 해서 어려울 것은 없다. 시나 철학이나 본인의 내면을 응시하고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원래 시는 철학적인 존재고,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철학을 한다. 어쩌면 내가 시를 읽다가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리거나 다음 시를 읽기 전에 갖는 작은 공백 또한 나 나름대로 철학을 펼치는 시간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시를 안 읽다는 거다. 소설가는 아는데 시인은 모른다. 내가 그런 인간이 되고 있다는 게 부끄럽다. 인간의 삶에서 시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거늘. 아마도 강신주는 흐리멍텅해지고 있는 눈들을 보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철학적 시 읽기를 통해 기꺼이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철학을 일상에 녹여 내는 솜씨가 뛰어난 저자 자신도 시 읽기가 괴롭다고 고백하면서 독자를 나직하게 위로한다. 물론 그 괴로움은 고통이 아님을 책을 읽어 나가면서 눈치챌 수 있다. 사실 그는 이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신나게 펼친 바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가 즐거움에서 괴로움을 논하게 되었다고 해서 시 읽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에게 즐거움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즐거움이다. 그래서 좋은 시를 소개하고 그 시의 세계관을 아우르는 철학을 설명하는 이 책을 읽는 일은 즐겁다. 저자의 수고로움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전작에 해당하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었다. 내가 그 책을 만난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사정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는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가 영 내키지 않아서 한 카페에 들어갔다. 북카페인지 몰랐는데 책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침 내가 앉은 자리에 가장 가까이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집어서 읽기 시작했다. 세 시간 남짓 꼼짝 없이 그 책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읽고 생각하고 읽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방금 전에 읽었던 그 시들을 하나씩 음미하고 있었다. 그 책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접근하기에 쉽지 않은 시들로 많이 구성되었다. 시와 연결되는 철학자의 사상이 짧은 시간에 이해하기는 다소 어려운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은 까다롭고 난해한 철학마저 술술 읽히도록 써놓았다는 것이다. 높임말을 쓰고 있다는 데서 저자가 자신의 위치와 자세를 낮추고 있음을 느낀다. 이해를 높이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음은 그가 정말 일대일로 상담을 하는 양 진심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감각에 호소하는 시의 언어와 두뇌에 호소하는 철학의 언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들을 통해 하나씩 그 괴로움의 즐거움을 풀어 놓는다. 함축적인 시어의 결을 온전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시를 소리 내어 읽고 저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시 가운데 아직도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한용운의 시를 읊는 것으로 긴 사유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행복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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