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 본격 동네고양이 단편 만화집
다니 지음 / 프레스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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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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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이란 사이트가 있다. 이곳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문학사이트이다.


https://teen.munjang.or.kr/whatisteen

 


소설/시/수필/감상&비평 글을 올리면 현역 작가 분들이 멘토로서 피드백을 해주는 혜자로운 공간이다. '라떼는' 매주 장원을 뽑는 주장원 제도를 운영했었는데 현재는 주장원 없이 월장원만 간소화해서 운영하는 모양이다. 아마 많은 청소년들이 글을 혼자 쓸 거라 생각한다. 예중/예고에 진학하거나 사적으로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거나 과외를 받지 않는 이상 자신의 글을 봐줄 만한 문우, 선생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외로운 문학소년/소녀에게 글틴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과 비밀을 고백하는 고해성사의 장소이자 자신과 같이 글 쓰는 또래 친구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문학 '광장'이다.


내가 글틴에서 활동한 기간은 약 1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라떼는' 소설 부문은 무협소설을 쓰시는 '진산' 작가가 소설 멘토를, 유종인 시인이 시 멘토를 담당했던 걸로 기억한다. 추억여행 삼아 오랜만에 글틴 사이트에 접속해 내 10대 시절 발자취를 찾아봤다(아마 싸이월드에 박제된 흑역사를 보는 기분이 딱 이러려나). 비평/감상글과 시 부문에서 월장원을 한 번씩 수상했음을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으나 '중2병'에 '문학병' 말기라 진단받을 법한 서면 인터뷰를 보고 부끄러움에 호다닥 홈페이지를 종료했다.


월장원을 받을 당시 썼던 시의 소재가 바로 길고양이었다. 그즈음까지만 해도 도둑고양이와 길고양이가 함께 사용되었던 것 같다. 순간적으로 길냥이를 '도둑'이라 명명하는 인간주의적 시선에 낯선 이질감을 느껴서 아이디어를 착상했고, 문장력이나 이미지는 부족하지만 발상에 큰 점수를 받았던 것 같다.


현재 본가는 아파트이지만 빌라에서 오래 살았다. 2년마다 한 번씩 전세로 이사도 많이 다녔었고. 빌라 A, B, C동이 붙어 있는 구조였고, 입구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 주차장(이라 할 수 있는 공터)에 세워진 전신주 쪽이 쓰레기장이었다. 종량제 봉투에 담지 않은 쓰레기, 분리수거가 전혀 되지 않은 쓰레기, 물이 줄줄 흐르는 음식물쓰레기...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로 가장 큰 변화는 두 가지였다. 엘리베이터가 생겨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책 주문을 할 수 있게 된 것(빌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우리집은 4층이었다...), 그리고 쓰레기를 쾌적하고 깔끔하고 편리하게 버릴 수 있게 된 것.


그렇게 음식물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차장 쪽에 길냥이들이 많이 지나다녔고, 밤이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많이 났다. 당시에는 그게 고양이 울음소리인지 몰라 아기 울음소리인가 의심하고 걱정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TNR 수술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나는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왔던 사례처럼 길고양이를 학대하는 사건이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지 않길 기도했다. 그때 당시 내게 고양이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지만 종종 마음이 쓰이는 이웃 정도였다. 집사, 식빵 굽기, 뚱냥이, 치즈냥 등등 고양이 세계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이후 내 고양이관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사건은 팟캐스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창비에서 운영한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들었던 에피소드와 뒤섞였을 지도 모르겠다)에서 법학자 김두식 선생님이 황정은 소설가에게 문학-소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류의 묵직한 질문을 던지셨고, 황정은 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는 웹툰작가 강풀의 사례를 들면서 세상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고 가시적인 파급력을 지닌 매체는 문학이 아닌 트위터다. 대신 소설은 가장 느리게, 그리고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식의 글쓰기이기에 소설만이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길고양이 급식소. 길고양이 보호소. 길고양이를 보호하고 구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느슨한 연대를 이뤄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종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기존 세계관의 논리로는 잘 해석되지 않는 낯선 언어들의 조합, 그래서 내 상식을 뒤흔들고 사고방식을 새롭게 갱신할 것을 촉구하는 언어, 이미 미래에 당도해 있는 자리에서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에게 보내는 시차의 언어. 이런 '사회운동'을 실천하는 '활동가'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니 이런 활동가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길고양이에게 급식을 주는 활동을 하는 그룹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고양이 임시보호를 맡거나 길고양이에 대한 독립잡지를 만드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길을 걷다가 고양이를 마주치면 고양이 생선가게 못 지나치듯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 가능하면 쓰다듬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평소에도 동물 영상을 시청하고, 주변 지인들과 공유하고, 동물을 키우고,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 처음에 나는 잠시 소외감이랄까, 남들이 가지고 있는 빛나는 뭔가가 내게 결여돼 있다는 결핍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동물-특히 고양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키워갔다. 그렇게 나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인류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대에는 '짬타이거'들이 여럿 거주하고 있다. 수송관 님이 특히 고양이에 진심이셔서 수송부에 캣 타워를 설치하고, 고양이들의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계신다. 얼마 전에 사람을 정말 잘 따르고, 애교가 넘쳐 흘렀던 냥이가 운명을 달리해 직접 땅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나도 그 냥이를 엄청 애정했던 터라 슬펐다. 점심을 먹고 잠시 햇볕을 쬐며 쉬고 있으면 어느샌가 곁에 다가와 배를 뒤집고 누워 뒹굴뒹굴 애교를 부렸던 기억, 내가 야간근무를 서는 동안 상황실까지 내려와 냥이를 안고 올라갔던 기억, 선임에게 '억까'를 당하고 닦이던 시절 냥이를 쓰다듬는 동안 구겨졌던 마음이 펴지는 마법을 경험했던 기억, 점호시간이었나 연병장에 집합해 있는데 고양이가 사열대에 등장해서 '씬스틸러' 역할을 하고, 그런 고양이를 내쫓지 않고 교감해주는 간부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마음이 녹았던 기억... 부대에 인간, 그중에서도 군인들만 존재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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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났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작가가 반려인으로, 활동가로 살아가며 해온 생각과 관찰을 담아낸 만화이다. 길고양이 매거진 <매거진 탁>에 연재된 만화를 텀블벅 펀딩을 통해 단행본으로 엮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은이 다니는 프롤로그에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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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났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왜 고양이가 길에 있는지 궁금해졌고, 자연스럽게 다른 비인간 동물도 보이기 시작했다. 만화가 된 그간의 생각과 관찰들을 편안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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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이 책은 길고양이와 함께 하는 일상의 풍경, 그 풍경에서 만난 고양이와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고양이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부드러게 녹여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책의 배면에 깔린 문제의식이 나이브하거나 물렁물렁한 건 아니다. 무무 편집장이 쓴 에필로그는 이런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좀 분량이 되지만 전문을 옮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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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고양이 전문 출판사 프레스탁의 첫 단행본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길을 집 삼아 살아가는 동네고양이가 주인공이다. 집고양이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지만, 길에 사는 동네고양이는 쉽게 혐오와 학대의 대상이 되어왔다. 길을 걷다 보면 마주치는 이 오래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우리는 대체로 모른다. 동네를 집 삼아 살아가는 동물을 수 도날드슨과 윌 킴리카는 "야생이지만 인간 정착지 중심에 사는" 경계동물이라고 칭했다. 경계동물은 집에서 함께 살거나 야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네이웃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만나고 지나치기에 때로는 우연한 만남으로 가족이나 이웃을 맺는다. 프레스탁의 에디터이자 이 책의 작가 다니도 그렇게 고양이를 알게 되었다. 고양이를 알아가면서 귀여움 외에도 고양이가 가진 깊고 넓은 결을 발견하고, 고양이, 그리고 동물권의 관점에서 동네고양이와 관계맺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평행세계를 상상하기도 하고, 날씨가 궂는 날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을 그린 다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동네를 산책하듯이 생각에 잠겼다가 새로운 고양이의 모습을 보았다가 멍 때리다가 어느새 경쾌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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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선의만으로는 길고양이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 나도 한 번 동네에서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려 시도했으나 30분 정도 동네를 배회하다가 깨달았다. 이곳에 고양이를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애초에 일회적으로 주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길고양이 네이버 카페 게시글에서 읽고 배웠다. 그나마 종종 오르는 광교산의 정상에서 급식소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아야만 동물이 먹고 살 수 있구나 싶어 씁쓸했던 적이 있다. 기후위기, 인류세, 동물권...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로 부상했다. 더 이상 지구에서 현생 인류만을 위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고양이라는 타자, 비인간 존재와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지 이제 정치의 차원에서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예전에 흥미로워 보여서 킵해둔 논문의 링크를 남겨두는 걸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한다.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29974?mode=f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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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직접 만나러 갑니다 - 축구 대장 곽지혁의 사인 도전기
곽지혁 지음 / 영진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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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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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한창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12년 만에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하며 팬들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주었다. 나는 월드컵 경기를 라이브로 챙겨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2시면 취침에 들어가는 군의 특성상 특별히 'TV 연등'을 허용해줘야만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지금까지 월드컵 경기를 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상급부대의 지침으로 월드컵 경기 시청 여건을 보장해준 덕분에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 브라질전 모두를 시청할 수 있었다. 


 내 축구인생(?)은 2002년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꼬마 시절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를 함께 하면서 나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이면 운동장에 뛰쳐나가 공을 차기 시작했고,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고 2005년부터 EPL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한 날에도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으면 새벽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때 봤던 경기 중에 챔스 8강에서 승부의 쐐기를 박는 왼발 결승골을 작렬한 첼시전, 챔스 16강에서 피를로를 꽁꽁 묶어 맨유의 압도적인 압승을 이끌었던 AC 밀란전 등이 떠오른다. 

 

 30-40대에게 '해버지' 박지성이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이라면 10-20대에게 뭐니뭐니 해도 손흥민 선수가 우주최강슈퍼스타일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챔스권의 문을 꾸준히 두드리는 강팀으로 성장한 토트넘 팀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뛰면서,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EPL 득점왕, 푸스카스 상 수상 등의 걸출한 업적을 남겼다. 이번 월드컵이 사실상 손흥민의 최전성기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기대하는 팬들이 많았을 것이다. 손흥민은 안와골절 부상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신의 투혼을 보여줬고, 결국 팀을 기적적으로 16강으로 이끌었다. 항상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피치 위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와 달리 주장으로서 품격과 리더십을 보여줬으며 아이 같이 순수한 웃음과 눈물을 보여주는 손흥민 선수의 인간적인 매력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는 이의 열정, 꺾이지 않는 마음..! 스포츠의 결정적인 순간은 예술이나 종교가 영혼을 고양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때처럼 사람을 혼이 나가게 만들고, 미치게 만든다. 한 번 이 맛을 본 사람은 평생 이를 잊지 못하고 '신자'가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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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축구 직접 만나러 갑니다]의 저자 곽지혁은 이렇게 축구에 영혼이 빼앗겨버린 '성덕'이다. '축구 대장 곽지혁의 사인 도전기'라는 부제는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해준다. 손흥민, 기성용, 이청용, 이강인, 이재성, 서영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모하메드 살라, 안토니오 발렌시아, 페르난도 요렌테, 트렌트-알렉산더 아놀드... 세계적인 선수들을 직접 만나 사인을 받기 위해 그는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부터 주로 신혼부부들이 여행으로 찾는 스페인의 휴양도시 마요르카 등 전세계를 순례자처럼 주유한다. 경기장이나 훈련장, 혹은 선수들이 묵는 숙소에 미리 도착해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사인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고, 기대가 좌절돼서 실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선수들의 호의와 행운 덕분에 선수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실착 유니폼(경기 중에 실제로 입고 뛰었던 유니폼)을 받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어느 선수를 만나 사인을 받게 되기까지의 '썰'을 열거하는 식이라 책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찾아보니 저자는 더 이상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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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말에 가장 재밌게 본 예능 프로그램 중 '골때리는그녀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재밌었다. 기술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고, 미숙하고, 엉성한 플레이를 하는데 경기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여느 프로선수 못지 않게 진심에 넘친다. 이 낭만 과잉의 아마추어리즘이 직관적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검은리본' 아이린이 성장하는 과정이라든지, 패스-빌드업이 전혀 되지 않았던 팀원들의 손발이 조금씩 맞아떨어지는 모습이 자뭇 감동적이었다. 시즌2, 시즌3를 거듭하면서 골때녀들의 실력이 원숙해짐에 따라 더 이상 골때녀를 보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걸 배우는 초보자-초심자가 되어보는 것, 갓 태어난 송아지나 망아지처럼 위태롭게 자세를 잡고 조심스레 한 발짝씩 내디뎌보는 것, 순수한 무지 상태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순수한 배움의 기쁨을 느끼는 것, 몸으로 하는 일을 새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품고 있다. 가령 수령 같은 운동... 


 군대 와서 십 년 만에 축구를 다시 해봤다. 가슴이 터져라 미친듯이 뛰고, 서로 눈빛교환을 한 다음에 패스 플레이를 하고(크로스 홋은 컷백으로 넘긴 공을 슛으로 연결하고), 땀으로 온몸이 젖은 다음에 함께 음료수를 마시고 샤워를 하는 시간. 역시 축구는 재밌었다. 하지만 허리 힘이 약해져서 그런지 온힘을 실어 강하게 공을 차면 무리가 왔고, 같은 팀을 비난하거나 '꼽'주는 행태 때문에 축구를 안 하게 되었다. 헬스 같이 개인운동이 아닌 단체 협동 스포츠가 줄 수 있는 끈끈한 기쁨이 있는데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다른 종목으로 누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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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또한 해외축구 직관 경험이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홈구장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홈 경기를 본 것과 빌바오의 홈구장에서 유로파리그 조별리그 경기를 본 것. 스페인 여행 중에 조금은 충동적으로 직관을 결정했는데 결과적으로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 중계 화면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속도감, 현장감, 패스의 리듬(템포), 분위기가 있었다. 만약 중립팬이 아니라 내가 응원하는 팀이 상위라운드로 진출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판가름하는 '외나무다리' 결전이었다면 훨씬 가슴 쫄깃하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마드리드만의 특성인지, 스페인 축구문화가 그런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나이대가 조금 있는 팬들은 경기장에서 해바라기씨를 영화관에서 팝콘 먹듯 먹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관중석은 그야말로 해바라기씨 껍질의 잔해로 지저분messy하다. 그렇게 해바라기씨를 옴뇸뇸 먹었던 스페인 아저씨가 아센시오(레알 마드리드의 윙포워드)의 쐐기골이 터지자 이방인인 날 향해 활짝 웃으며 기쁨을 나눴던 장면이 떠오른다. 같은 팀을 응원하면 잠시나마 친구가 될 수 있는 경기장 ! 


  p.s 지하철역 개통이 완료되면 종종 수원종합월드컵경기장을 찾아야겠다. 이승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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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 완전한 휴식 속으로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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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의 수영장에서, 22살 때 싱가포르의 수영장에서.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구간에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습하는 두려움, 위로 폴짝폴짝 뛰면서 겨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전력으로 레일을 가로질러 수영장 옆면으로 향하는 몸부림,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급격하게 소모해서인지 산소가 부족해서인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화이트 아웃‘의 시간.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 초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캐리비안베이에 갔다. 메인 코스(?)인 파도풀을 재밌게 타고 나서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기구나 코스에서 놀던 중에 뒤따라가던 친구를 놓치고 물살의 힘을 못 이겨 다른 쪽으로 떠내려갔다. 변기물에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휴지처럼. 뒤돌아 역방향으로 열심히 물장구를 쳤지만 당시 내 근력으로는 물살을 거스를 수 없었다. 자아의 완전한 내려놓음, 나를 압도하는 힘에 대한 완전한 순종, 온전한 체념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었던 것 같다. 고요한 수면 아래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끔 만드는 마성의 힘을 지닌 물의 이중성. ‘맥주병‘이란 표현이 시사하듯 사람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 목숨을 잃게 만들 수 있는 물의 위력. 중력이 지배하는 평평하고 단단한 대지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물의 세계.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 탓인지 몰라도 물에 대한 호감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2015년 여름방학, 친구와 함께 한 달 정도 수영장에 다닌 적이 있다. 많은 수영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물 밖의 세계에서 물 속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찾아오는 정적이 너무 좋았다. 외부의 소리가 차단됨과 동시에 내면의 소란까지도 일순간에 잠잠해져 고요와 평정이 찾아왔다. 굳이 어렵게 명상을 할 필요가 있나 살짝 현타가 오기도 했다.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몰랐고, 물에 대한 공포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상관 없었다. 물 속에 몸을 맡긴 순간부터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거두고 단순해질 수 있었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수영장(대전 용운국제수영장) 물이 좀 달랐는지 몰라도 대충 누워도, 몸에 힘을 완전히 빼지 않은 상태에서도 몸이 떠올랐다. 그래서 배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배영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살짝 붙어 친구에게 교습을 받아 자유형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심이 깊어져 발이 닿지 않는 구간 직전까지만 딱 찍고 돌아오는 식으로 안전하게 수영을 즐겼다.

그때 기억 때문이었을까. 한창 슬럼프에 빠져 있던 시기에 수영을 배워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딱 <가능한 불가능>의 ‘할 수 있어 프로젝트‘마냥 한동안 별다른 성취나 배움의 기쁨 없이 지내면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증이 찾아와 의욕 상실, 무기력, 일상의 활력 저하와 생기 잃음을 겪던 차에 번득 ‘수영‘ 생각이 났던 것이다. 휴식과 놀이, 운동이라면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최고의 카드 ! 하지만 집 근처 마땅한 수영장이 없었으며 시간대가 안 맞는 이유 등으로 강습을 수강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로서의 물/수영장. 그런 수영을 소재로 한 그림과 더불어 휴식에 대한 에세이를 담은 책이란 설명을 듣고 <풍덩!>에 다짜고짜 ‘풍덩!‘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주말 동안 <풍덩!> 덕분에 주말을 주말답게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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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말한다. 모두가 지쳐있다고. 이는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축에 속하는 ‘과로사회‘인 탓도 크지만 사람들이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성과를 내기 위해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일에 중독된 영향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휴식의 욕구 자체를 억압하고 부정하거나(휴식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쉬면서도 죄책감을 느껴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법을 몰라 스스로 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쉬는 게 아닌 결과를 낳는다. 일반적으로 휴식 하면 ‘수면‘을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잠이 다시 노동을 하기 위한 재생산의 기능에 그친다고 했을 때 잠이 휴식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쉼‘ - 휴식은 일-수면-일-수면으로 무한반복되는 루틴에서 벗어나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리듬을 잠깐이나마 바꾸는 일,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심신을 충전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일례로 지친 몸을 침대 위에 내동댕이치듯 던져 자고 일어나도 피곤함이 가시지 않아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다. 수면이 생존을 위한 생명 에너지를 보존하고 충전하는 최소한의 휴식에 가깝다면 저자 우지현이 말하는 휴식은 ‘삶을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을 되살아나게 하고, 창조적인 영감이나 생각을 들게 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주는 행위. 이처럼 삶에서 휴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해 휴식은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하는 영역으로 주변화되어 있고, 성과지향/중독 사회에서 ‘나태함‘이란 도덕적 굴레를 덧씌워 휴식의 가치가 왜곡되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쉬어야 한다고, 휴식을 잘 하면 삶을 잘 살 수 있다고 설파한다.

글은 조금 심심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휴식을 옹호하고 권하는 힐링 에세이에 있을 법한 평이한 내용들이 부분적으로 보였다. 이런 약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인 이 책의 강점은 수영을 소재로 한 그림(무려 100여 점!)이 배치된 그림 에세이라는 점이다. 수영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19세기의 회화부터 동시대에 그려진 작품까지 수영을 소재로 한 다양한 그림들을 제시해 수영-휴식의 이중주를 유려하게 풀어낸다.

이 책은 수영과 휴식을 넘나든다. 수영 그림으로 채워져 있지만 수영만을 논하지 않는다. 휴식에 관해 말하지만 휴식만을 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화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미술책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수영과 휴식에 대한 산문집일 수 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그림을 감상하는 화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독자들의 몫이다. 어떤 종류의 책으로 다가가든 책을 보며 잠시라도 쉴 수 있다면, 책을 덮고 각자의 휴식을 즐기게 된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쁠 것 같다.(10p)

책에는 강렬한 햇빛 아래 여름바다를 만끽하는 작열하는 청춘의 이미지(마치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 속 청년들처럼)가 있고, 해수욕장에서 누워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람 없이 텅 비어 있는 수영장이지만 왠지 모르게 평온한 분위기를 풍기는 풍경이 제시된다. 수영장은 수영장대로, 해수욕장은 해수욕장대로, 개인 풀장은 개인 풀장대로, 인적이 드문 바닷가는 바닷가대로 뉘앙스는 다르지만 보편적인 휴식의 정념과 분위기를 풍긴다. 물이 인간을 헐벗음에 가까운 몸둥어리로 존재하게 만들어서인지 물 속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순수하게 동물에 가까워지는 듯하다. 물 속에서 움직이고, 지치면 밖으로 나와서 쉬고, 배가 고프면 뭘 먹고, 졸리면 자고... 자연적인 욕구를 강렬하게 감각하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삶. 휴식이 자연스레 몸과 마음에 깃들게끔 사람을 순하게 길들이는 물살의 손길.

아무래도 내년에는 수영을 꼭 배워야겠다. 그리고 잘 쉬는 법을 꾸준히 배우고 연습할 생각이다. 미술관에 가지 못하더라도 그림 에세이, 화집, 사진집이 대상과 나의 시선, 내면의 풍경만이 존재하는 ‘사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기에 또 이런 류의 그림 에세이를 찾아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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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혜 지음 / 제철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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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을 벌인 적이 언제였을까. 딱히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한 지 꽤 오래됐다. 2022년의 이탈리아어 공부하기 프로젝트는 중간에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고, 그나마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할 만한 프로젝트는 2019년 10km 마라톤 도전이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는 팟캐스트도 만들어보고(1인 독립제작으로 <마음짐승의 책 먹는 시간>이란 제목의 팟캐스트를 만들었으나 1화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네이버 카페를 활용해 독서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보기도 하고(원하나의 <독서모임 꾸리는 법>이 좀 더 일찍 나왔더라면 독서모임을 좀 더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 그래도 민음 북클럽을 통해 함께 한 ‘희곡읽기 모임‘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에서 주관한 각종 공부 모임이나 공모전을 중심으로 ‘안 하던 짓‘을 저질러보거나 남들과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보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동력 자체가 많이 떨어졌음을 체감한다. 일상의 권태로움에 적당히 무뎌지고 어느 정도 마비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군대에 오고 나니 별다른 재미와 성취 없이 쪼그라들고 있는 나 자신을 덩그러니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우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내 기분이나 감정이 어떤지 모른 채로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이상하게 짜증나는 순간이 잦아졌다. 친구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주지 않으면 먼저 전화하는 법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SNS와 블로그의 적당히 노출된 사적/공적 경계의 친밀성의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소통을 하고 연결감을 느낀다. 친구와 지인의 성장과 성취, 전진을 보며 질투심이나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모종의 경각심을 느끼긴 한다. 딜레탕트로서 책을 향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도 뭔가 멋진 일을 해내고 싶다고, 아니 멋진 일은 고사하고 어떤 일에 열중해서 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해보는 순간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그런데 각 잡고 글을 쓸라치면 온몸에 퍼져 있던 피곤함이 급 응축돼서 머리를 조여오고, 특별한 구성 작업 없이 초고(토고/토 나오는 원고)를 쓰고 나면 어느새 시간이 다 지나가 있었다. 비공개를 걸어둔 토고가 두 개 정도 쌓여야 하고 싶은 얘기가 명확해지고 초점이 맞춰지는데 너무 비효율적인 방식이라 습관 교정이 시급해보인다. 하지만 그동안 쓰레기 같은 걸 쓰느니 차라리 책 한 자라도 더 읽자는 마인드로 쓰기를 미뤄왔던 나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쓰기의 누락으로 인해 읽기/공부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었는지 생각하면 뭐라도 쓰고 있는 지금이 나아 보인다.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시점이었을까.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생각에 잠시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논문 주제를 픽스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과 정력을 엉뚱한 데 쏟아붓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애매해질 거라고 스스로 판결을 내려 기각시켰다.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고(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하루하루 어제와 다르게 성장한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다고, 어쩌면 그런 색다른 자극이 신선한 영감을 줄 지도 모른다고. 제도권 내에서 학문적 글쓰기를 통해 전문적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훈련을 하고, 결과물을 내는 일을 해내야 했고, 해내고 싶었으나 도통 실마리를 찾지 못해 헛발질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우울증에 걸려 자학에 빠지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라도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았고, 뭣보다 성취감과 보람,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시도한 도전 중 오직 달리기만이 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달리기 말곤 제대로 도전한 게 없기도 했고, ‘기록의 단축‘ ‘완주‘ 신체 능력의 향상 및 건강 변화 같이 가시적으로 체감하고 느낄 수 있는 성격의 성취였다.

그런데 사실 첫 완주에도 기록의 단축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별다른 목표를 설정해두지 않고 달리기를 즐기고자 하는 아마추어였기에 결과로부터 극적 감정이 도출되지 않았다.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책에서였나 방송에서였나 제현주 작가가 얘기했던 것과 비슷하게 내 몸을 기능적으로 좀 더 잘 쓰고 싶다는 욕구의 충족 -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갈 때의 속도감이 주는 쾌감 등 - 과 최초로 참여한 마라톤대회였던 철원 DMZ 마라톤대회에서 느꼈던 달리면서 자연풍경을 호흡할 때의 황홀경. 달리면서 보는 건물, 자연이 좋았다(사람까지 볼 여유는 없고). 숨이 차올라 호흡이 불편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확 숨통이 트이면서 계속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좋았다(러너스 하이까진 아닌 것 같지만 여튼 정상 궤도에 오른 것과 같은 기분이 정말 좋다). 결국 이렇게 정말 좋았던 순간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연처럼 찾아왔다. 대신 이건 있는 것 같다. 빛나는 순간이 출현하려면 어느 정도 과정이 두텁고 풍부해야 한다고. 시적 순간은 산문적 성실성의 토대 위에서 출현한다고. 그래서 이 산문적 성실성의 무게감과 부피 자체가 도전 자체를 멋지게 만든다고. 도전 성공이나 기록 달성에서 오는 희열과 카타르시스는 어쩌면 지난한 과정들을 마지막 결과를 위해 존재한 것인양 기승전결의 서사적 배치를 통해 극적으로 연출한 효과인 지도 모른다. 과정으로만 이뤄진 삶을 편집권을 쥔 서사적 자아가 어떤 식으로 편집하느냐에 따라 결과의 의미를 비롯해 과정 자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신은헤의 <가능한 불가능>은 일한 기억밖에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헛헛함에 시달리던 저자가 문득 ‘1년에 하나씩‘ 자신에게 불가능했던 영역에 도전해보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9년 동안 지속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서른 살에는 운전면허 따기(운전기술 익히기), 서른한 살에는 피아노 치기(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인 히사이시 조의 ‘summer‘ 완주하기), 서른두 살에는 영어 공부하기, 서른세 살에는 수영 배우기, 서른네 살에는 하와이에서 살아보기 ... ‘광고‘밖에 몰랐던 워커홀릭(책에서 그려지는 저자의 모습은 어느 정도 일밖에 모르는 바보, 일중독자에 가까워 보인다)은 우연한 계기에 절친과의 내기(50만원을 따기 위한!)에서 지지 않기 위해 운전면허 따기 프로젝트를 완수하게 된다. 그렇게 ‘1년에 하나씩‘ 불가능했던 걸 가능하게 바꾸는 ‘할 수 있어 프로젝트‘가 9년 동안 이어진다. 저자의 30대를 꽉 채운, 카피라이터로서 신은혜가 아닌 자연인 신은혜로서 써내려간 삶의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스토리.

무슨 도전이든 거의 실패 없이 척척해내는 유능한 저자의 성공담, 이었다면 지루했을 텐데 자신의 세계를 차근차근 확장해나가고 내실을 다져가는 성장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독서는 나도 뭔가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다는, 나만의 ‘할 수 있어 프로젝트‘를 작당모의해보고 싶다는 욕망의 씨앗이 심어지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무슨 도전을 하더라도 이 도전을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동참할 수 있으며 도전의 시작과 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의 존재가 새삼 크게 다가왔다. 혼자였다면 분명 ‘어차피 난 안 돼‘하고 좌절했을 순간에 오기와 ‘억텐‘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친구(와 내기)의 존재 ! 2022년 ‘이탈리아어 배우기‘ 프로젝트는 거의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2023년에는 꼭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해서 성공적으로 완수해내리라. 이제 만 나이가 상용화되는 만큼 저자처럼 내년을 서른 살의 프로젝트 기점으로 삼아보련다. 프로젝트의 기술은 불가능했던 어제(작년)에서 가능한 오늘(올해)로 시간의 간격을 벌리는 데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에서 오늘로 점프해서 착지했을 때의 변화. 달라진 나 자신을 감각하는 편집의 기술. 하루하루 경험치를 쌓고 퀘스트를 깨나가는 게임의 주인공처럼 레벌업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가능한 불가능>을 재밌게 읽을 거라 생각한다.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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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 - 시각예술가 박혜수 작가 노트
박혜수 지음 / 돌베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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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0시간 동안 가야 할 비행기 안에서 내 옆자리에 앉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 있을까요?

박혜수 작가가 진행하는 ‘토론극장 : 우리_들‘의 4막 ˝I need somebody not anybody˝(토론설계자 : 김현경)이 던지는 질문은 이상과 같다. 박혜수 작가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강연소개는 다음과 같다.

왜 현대인들은 외롭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다가가지 않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그 누군가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아무도 아닌 사람’에 대해 어떤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가? 혹은 등을 돌리며 거리를 두는가?
사회적 거리조절에 사용되는 다양한 체크리스트를 살펴보고, 그 뒤에 숨은 사회적 무의식을 분석한다.
(http://www.phsoo.com/uri/1603)

운 좋게도 이 토론극장 4막에 관객으로 직접 참여했었다. ‘10시간 동안 가야 할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을 사람‘ 10시간(시간), 비행기 옆자리(장소), 사람... 장소가 비행기 옆좌석으로 설정된 이유는 간단하다. 핸드폰 사용이 금지된 일종의 성소이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앞으로 ‘스마트폰‘으로 대체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스마트폰의 강력한 몰입에 따른 자아의 유폐는 오프라인 상에서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군대에서 동기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누는 시간대는 취침시간이다. 밤 시간대 자체가 텐션이 살짝 가라앉으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며 감정을 해소하게끔 만들지만 캄캄한 방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상황이 대화에 집중하고 몰입하게끔 만든다. 최근에 읽은 권여선의 <실버들 천만사>에서 단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모녀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말자는 규칙을 세운다. 또 다른 책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화장실 등) 대화의 흐름이 끊겨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핸드폰을 보지 않는 사람을 만나라(?) 대략 이런 뉘앙스의 내용을 읽었다. 과거에 나는 그런 편이었지만 다들 핸드폰을 보는데 나만 안 보면 살짝 소외되는 것 같기도 하고, 중간에 SNS나 메신저를 확인하는 재미가 존재하긴 해서 핸드폰을 보는 사람이 되었다. 핸드폰을 본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짓지 않고, 그저 과잉 연결-접속된 현대사회에서 오롯이 한 사람에게 시간과 관심, 의식을 쏟아붓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희소한 일이 되었는지 생각할 뿐이다.

10시간이면 꽤 긴 시간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에야 각자 갈 길을 가게 되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사이라 하더라도 꽤 긴 스침이라 할 수 있겠다. 10시간 동안 챙겨온 책을 읽고, 노트북이나 아이패드에 저장해놓은 드라마를 몰아볼 수 있고, 잠을 청하는 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야 많지만 시간이 잘 가는 걸로 따졌을 때 대화만한 활동이 또 없다. 거기에 10시간의 비행은 앞으로 안 볼 사이, 다시 마주칠 확률이 희박하다는 전제가 주는 산뜻함과 가벼움에 더해 꽤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충분한 물리적 부피를 구성한다. 모종의 예의 바른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좌석에서 사회적 차원의 이동/연결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냐, 아니면 그 무관심의 막을 걷어내고 상대방과 말문과 안면을 트고 어떤 ‘사이‘가 될 것이냐. 앞선 질문에 사람들의 답변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인상, 취미(스포츠), 습관. 인상은 전체적인 외형에서부터 세부적으로 보면 체격(너무 체격이 큰 사람이 옆자리에 앉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피력되었다), 향기(후각은 가장 즉물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자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자체적인 차단이 어려운 감각이라 굉장히 타당한 지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도 패션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려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패션은 정체성이자 아비투스이자... 취미가 빠지면 섭하다. 소개팅 단골 질문이기도 한 취미 영역에서 마이너한 취향이 통하는 이를 발견하면 사람들은 곧잘 운명의 상대를 발견한 양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의 무기와 키누처럼, 젊은 날의 우리들처럼. 내 영혼의 본모습, 내 진가를 알아줄 수 있을 거라고 믿음에 차게 된다. 아무튼 취미 영역에서 ‘스포츠‘가 가장 많이 거론된 건 스포츠가 이 시대의 ‘부족‘을 이루고 구분짓는 단위로 기능해서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 택배 배달을 하던 리키(맨유팬)가 라이벌팀을 응원하는 택배 수취인과 정답게 (?) 욕설을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스포츠는 집단적인 열광으로 종래의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는 소속감과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적‘과 ‘우리‘의 선명한 구분을 통해 다소 본능적인 무리 짓기를 가능하게 한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증언이 이를 반증한다. 습관. 비행기 옆좌석은 물리적으로 상당히 근접해 있는 영역이다. 그만큼 다리를 떤다거나 하는 사소한 습관이 상대방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앞선 질문에 어떻게 답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군 생활을 하며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 군생활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을 설정할 것인지에 대해. 처음에는 ‘~~한 ‘ 사람이 새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는 식의 긍정적 가정법을 주로 했다면 지금은 ‘~~한‘ 사람이 안 왔으면 좋겠다, ‘~~한‘ 사람과는 같이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쪽으로 욕망의 형식이 변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과 부정의 조건문을 각각 설정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 같다.

~~한 사람이면 좋겠다(딱히 군대 한정이라기보다 사회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까지 포괄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조롱, 편견을 일삼지 아니 하는 사람
-예의바른 사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몸에 익어 있는 사람
-지적인 사람, 책이나 영화, 사회 이슈 등에 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잘하는 사람(운동을 같이 할 수 있고, 그 사람에게 운동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 - 내가 좋아하는 운동인 달리기를 같이 할 수 있는 러닝 메이트도 좋고, 내게 헬스 운동법을 알려주는 헬스 선생님도 좋다. 현재 곁에 둘 다 있어서 너무 만족스럽다
-해외축구, 특히 EPL에 관심 있는 사람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에게 붙잡혀 있다 보면 기가 너무 빨린다. 티키티카가 잘 되는, 말의 리듬과 온도가 비슷한 사람과의 대화는 편안하고 즐겁다. 잘 들어주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 말을 가려서 하는 사람, 말을 아끼는 사람. 가끔 텐션이 올라가면 희희낙락 소란스럽게 수다를 떠는 것도 파티처럼 흥겨운 재미를 선사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는 이에겐 침묵이 값지다(ECM의 슬로건처럼). 조용하게 큰 울림을 선사하는 말을 구사하는 사람.

~~한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자기 기분과 감정만 생각하는 사람.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사람. 상대방의 기분과 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언행하는 걸 개의치 않는 사람.
-자신의 지위니 권력만 가지고 대우받으려고 하는 사람.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쌔서 남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사람.
-겉과 속이 심하게 다른 사람. 소문을 퍼뜨리고, 편가르기를 하고, 갈등과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
-가면(사회적 자아)과 실제 자아의 괴리가 커서 왔다갔다 하는 변동 폭이 심한 사람. 자신은 원래 괜찮은 사람인데 남이 원인을 제공해서 나이스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자기정당화를 하는 사람.
-소수자 차별, 여성혐오, 물신 숭배, 능력주의, 그러니까 너무 보통의 K...

한편 군생활을 하며 좀 더 강화된 생각이 있다면 넓고 얕은 인간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다. 마음을 나누는 사이의 친구와 진심을 담은 대화를 나누고 소통했을 때 뭔가 마음이 채워지고 충만해지는 영혼의 부풀어오름을 경험한다. 이는 거의 숭고하기까지 한 고귀한 체험이지만 속되고 비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재밌는 짤을 공유해주는 사람, 꿀알바-유용한 정보나 소식을 전달/공유해주는 사람, 새로 알게 된 맛집에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식성이 비슷하고 먹는 양이 비슷한. 특히 술의 영역에 적용되는 부분), 여행 메이트(여행 취향-스타일은 또 특수 영역이기에...) ... SF의 상상대로 이런 관계가 세부적으로 상품화돼 소비 가능한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면(부분적으로 이미 현실화된 현재이기도 하고) 그때 우리는 우정을 어떻게 재발명할 수 있을까, 지킬 수 있을까. 사실 난 인간관계에 있어 회의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쪽에 가까울 것 같다. 의식적 차원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길 원하고, 상대방과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깊은 신뢰를 공유하고 친밀성을 나눌 수 있길 욕망하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 모종의 공포와 불안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언제라도 별다른 이유 없이 상대방이 날 떠날 수 있다는 생각,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에는 별다른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관계 또한 생명체처럼 변화를 겪다가 수명이 다해 소멸할 수 있다는 것,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특별한 사건사고 없이 남남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가끔 친구에게 묻고 싶어진다. 너에게 난 어떤 존재인지, 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가 앞으로도 잘 지내는데 혹시나 필요한 게 있지 않은지, 평소에 내게 서운했거나 말하지 못한 게 있지 않은지... 미술작가 박혜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질문을 묻지 않고, 누군가로부터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예술가가 대신 묻고 들은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전시를 하는 작업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으로.

“너는 네가 좋으니?”(서문 7-8)
당신은 어떤 꿈을 포기했나요?(1 꿈의 먼지)
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과 사연을 남겨주세요.(2 실연 수집)
첫사랑을 기억하시나요?(3 사랑과 실연의 얼굴)
10대의 나, 80대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4 미래가 두려운 사람들)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5 애도 일기)

작가가 직접 서술한 작업의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심리적 접근 방식의 설문 조사와 분석을 거친 뒤 다양한 예술작품들로 발표하고 있다. 이미 이슈화된 사회문제의 결과보단 그 원인인 개인의 심리를 분석함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사용한다. 한편으로 이런 작품들은 매우 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왜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공공장소, 게다가 현실의 고단함은 다 내려놓고 편하게 쉬고 싶은 미술관에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39)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진심은 감추고 “사람들이”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매달려왔다. 마치 자신은 그 문제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게다가 외로움과 우을증,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심리적 문제는 혼자서 해결이 어렵다. 누구나 다 조금씩 가지고 있는 이 병을 밖으로 꺼내서 함께 고민하여 ‘누구나 겪는 일’로 인식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내적 영역에서 발견하고 개인의 문제로 변환하여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다. 문제의 발견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해결은 대화를 통해 공론화시켜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 ‘대화’ 프로젝트의 목적이다.(41)

자신(자아)에 대한 앎,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살피고 해석하며 돌보는 자기 돌봄의 능력, 그리고 마음에 어떤 상처가 새겨졌는지 알아채고 고통을 마주하며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회복의 능력. 나는 이런 앎과 능력, 힘에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다. 박혜수의 작업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랄까. 이 책의 목차에서 가장 끌렸던 부분은 2부 실연 수집(‘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과 사연을 적어주세요‘)이었다. 이별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채 도망쳐왔기 때문에 매듭 지어지지 않은 감정의 실타래가 자꾸 풀려나와 지금의 내 기분과 마음에 엉키곤 한다. 지금의 외로운 감정이 옛 연인과의 추억과 얽혀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지금의 슬픈 감정이 사귀는 동안 잘해주지 못했거나 상처주었던 기억들과 얽혀 우울하게 가라앉히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 부끄러운 기억, 행복했던 기억, 비참했던 기억, 서글펐던 기억, 모든 기억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되 집착적으로 붙잡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레 기억과 망각의 흐름에 맡기기. 내 현재를 이루는 중요한 과거인 만큼 내 일부인 기억을 안고(기억 안아주기, 화해하기) 함께 살아가기. 사랑을 좀 더 잘 사랑하기 위한 삶의 여정에서 만난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후회와 그리움을 살아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제대 이후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될지,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상의 극장에서라도 이별을 완성시키고 싶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다, 거기서 그래도 꽤 예쁘게 사랑했었던 나도 그녀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박혜수의 책을 읽으며 나 혼자만의 심리 드라마로 그칠 수 있었던 기억을 남들의 것과 나란히 놓고 보며 사회적 시선의 자리에서 그려지는 좌표의 성좌, 지도의 지형을 통해 우리의 안부를 묻는 기술을 배우고, 혼자 자문자답할 때 보이지 않던 부분이 타자라는 차원을 통해 인식되고 감지되는 앎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고, 앎을 생성하는 일이 예술이 지닌 고유한 역량일 것이다. 앞으로 ‘묻지 않은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을 주고받고자 할 때, 고심하여 진심 어린 메시지를 작성하는 것 못지 않게 이를 전달하고 주고받을 무대-극장의 배치와 연출에 힘쓸 필요가 있겠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을까‘에 더해 ‘어디에서 어떻게 물을까‘까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고 싶은 질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묻지 못한 질문들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어서, ‘우리‘를 ‘우리‘로 현전시키게끔 할 대화의 물꼬를 틀 말들이 찾아와서 뜻 깊은 독서였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토론극장에 방문할 수 있길. 사람들이 저마다의 토론극장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우리‘를 상호보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길.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 없이 자신을 좋아하고, 신이 선물해주신 인연에 감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고 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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