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캠핑 여행 - 아이와 함께 떠나는 새로운 제주 여행법
이지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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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적 경쟁심.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에 나오는 표현이다.

시위 한 번 나가보지 않은 내가 민주화 운동으로 국가 유공자증까지 받은(동생 황광우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황지우 시인의 발 끝에도 못 미칠 테지만 내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이만한 표현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아니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좋은 사람이 도덕 교과서에서 말하는 선한 사람인지, 타인에게 이로운 사람인지 불분명했으나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타인에게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군요.' '~는 참 사람이 좋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런 말을 듣고도 표정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적정 수준의 수줍음을 느끼고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좋은 사람보다 '좋음'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좋음의 화신. 

  

 돌아보니 나는 생각보다 윤리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의식이 강한 만큼 잘 지키진 못한다. 이 윤리 의식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아버지'에 가까운데 내 경우 아버지가 정말 산처럼 커다랬던 것이다. 그렇다고 칸트 같은 도덕주의자는 아닌데 무엇이 윤리적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회의적 윤리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은 존재sein가 아닌 당위sollen의 목소리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충동에 충실하고, 자유롭게 사고/행동하는 예술가형 인간에 대해서도 예술가의 그 '좋음'- 칸트가 천재라고 말한 인간 유형으로서의 장점에 매료되어 예술가를 닮고자 했다. 하고 싶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면에서 '하고 싶다'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해야 한다에 파묻힌 삶. <삶이라는 직업>. '아버지'를 죽이라는 데 정말 죽여도 되는 걸까? 그게 옳은 걸까? 망설이다가 은근슬쩍, 어물쩍 넘어가버린 모양새. 좋음과 옳음의 세계. 이 감옥으로부터 나를 구출해내는 것이 내 과제였다. 


 제주 캠핑 여행에 대해 리뷰를 쓰는 데 왠 뜬금없는 자기고백이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주. 바로 이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뽑힌 남쪽 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제주에 딱 한 번 가본 적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솔직히 말하면 거기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풍경을 보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숙소에서 잠들기 전 진실게임 비슷한 사춘기 소년들의 고백 시간에 흥을 돋구기 위해 평소 나답지 않은 소설을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써냈다는 것, 희미하게 기억나는 건 20대 후반의 아름다운 외모의 음악을 가르치셨던 담임 선생님이 두 남학생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내게서 멀어지는 모습- 담임선생님을 짝사랑했던 레파토리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애증이 있던 관계여서 그랬는지 그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학생을 멀리서 바라보는 내 모습. 황병승 시인이 선언의 천재라면 난 관조의 수재 정도는 됐을 것이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사춘기 소년의 감정구조라는 게 어떤 성절의 것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관조란 불가능한 능력에 가깝다. 어려서 (미리) 늙어버렸다는 시인들을 보면 또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추상과 형이상학의 세계와 친했던 나도 '소녀' 앞에선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감정 대신 감각을 발명하는 법을 일찍 깨쳤더라면 그때부터 시나 소설을 끄적였겠지...). 어쨌든 나는 멀리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습관이다. 


 그 이후로 제주도를 찾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찾게 된 건 작년 봄 즈음이었던 것 같다(제주도에 간 것은 아니다). 강정 해군기지 찬반 논란. 친구의 블로그에 인혁당 사건 같은 어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서 보도연맹 사건 같은 어휘들을 접하게 됐다. 나는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류에 대해 나름의 논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나의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에 대해선 잘 모른다. 활발하게 논의가 되던 시기에서 한 발짝 뒤로 눌러나 있던 것도 컸지만 한꺼번에 모든 문제들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대신 용산참사 같은 경우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등을 이용해 공부했고-그나마 이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밀양 송전탑의 경우 1달 정도 함께 했던 '나눔 문화'라는 단체를 통해 많이 배웠고, 강정의 경우 3권의 책, 1편의 논문, 이런저런 기사, 칼럼, 강정 docu jam,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만난 미라클 여행기 등을 통해 가장 넓고 깊게 공부했다. 강정 해군기지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한 공부였는데 마음과 감정이 앞서서 글 수준이 아주 개판이 되었다. 현장에 직접 가보지 않고 자료만 가지고 쓰는 글의 한계도 있었을 테고, 강정을 여전히 사회의 문제로 다뤘을 뿐 내 문제로 다루지 못한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존재sein가 아닌 당위sollen... 


 오멸 감독 덕분에 알게 된 4.3 사건과 강정으로 제주도는 내게 관광지보다 피의 역사를 간직한 섬에 가까워졌다. 물론 아름다운 이미지가 완전히 증발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고등학생 즈음 SBS 다큐멘터리에서 제주도를 자전거로 혼자 여행하는 여대생을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 나는 그때 무의식적으로 포카리 스웨트 광고를 연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산토리니 섬과 제주도는 그렇게 내 무의식 속에서 동급이 되었다. 아니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여대생의 존재가 제주도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왠지 제주도로 여행가게 되면 그녀 혹은 그녀 같은 매력쟁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맞다. 바람이 많은 섬이라 그런지 이야기만 들어도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것이다. 그 판타지의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켜 <제주 캠핑 여행>을 '예습'했다. 


 역시나였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을 즐기면서 한 장 한 장 읽을 수 있었다. 캠핑은 경제적으로 부담되고, 같이 갈 사람도 없기 때문에 실질적 도움은 지금 당장 되기 힘들었지만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정보도 제공돼서 제주도 상상여행에 핍진성을 더할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연환경, 멋진 볼거리... 같이 갈 사람만 있다면 공사판을 뛰어서라도 자금을 마련하리! 


 제주여행에서 좋았던 점은 미술을 공부한 저자가 감각적인 스케치로 사진을 대신했다는 점(이 장점은 제주도 캠핑 여행 놀이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볼거리-먹거리 등 여행서가 갖춰야 할 기본사항을 충실히 갖췄다는 점, 여행다닐 때 들고 가기 좋은 크기/무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표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아, 제주. 그런데 최근 제주를 다녀온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멸 감독의 <지슬>의 부제가 끝나지 않는 세월2였는데 제주도의 피의 역사, 고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은데 실상 광화문 세월호 시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도덕적 경쟁심. 이걸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난 성자/순교자가 될 그릇은 아니다. 대신 내 나름대로 고민하고, 사유하고, 대화하면서 길을 찾을 것이다. 그 누구/무엇을 위한 경쟁심이 아닌 나를 위한 도덕적 경쟁심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충분히 좋은 재료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투사/순교자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해선 의식 있는 시민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한 명의 투사/순교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여러 명이 나눠서 진다면 한 명이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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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바나나 2014-09-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조금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지라.
책에 관해선 사진이 아닌 감각적인 스케치라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적'이라는 거^^
칼비노 전집의 관한 정보는 감사합니다.
근데 그때까지 사고 싶은 욕구, 읽고 싶은 욕구를 자제할 수 있을지^^

rendevous 2014-09-03 23:33   좋아요 0 | URL
사실 전집 류는 한 권, 한 권 모아가는 재미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말이죠 ^^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한 권 한 권 모으다간... 가계 경제가 흔들릴 지도 모르지마 이탈로 칼비노 전집 정도라면 용돈 아껴서 한 권씩 모아도, 혹은 지름신 강림으로 한꺼번에 장만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