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 3호 : 전기, 삶에서 글로 교차 3
주아 외 지음 / 읻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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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 3호에 실린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의 서평을 읽었다. 글쓴이는 [자기배려의 책읽기], [자기배려의 인문학]의 저자인 강민혁이고, 과거에 작성된 저자 약력을 보면 은행원으로 일하신다고 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은 분들 중 20대 후반-30대 중반 즈음에 불현듯 삶이 철학과 포개져 읽고 쓰는 삶을 살게 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이인‘ 작가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 걸까. 그리고 철학자들은 왜 철학을 하는 걸까.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의 말에 그 저의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동안 나는 플라톤에서부터 니체, 푸코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고, 내가 읽고 좋았던 작품이면 뭐든 친구들과 함께 읽었다. 그때마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읽고 함께 철학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필자 강조)이라는 것을 말이다. 친구들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설명해 주는 플라톤, 니체, 푸코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들의 텍스트를 악착같이 읽어 내고, 그 세계를 향유하는 기쁨은 엄청나다. 그런 순간이 되면, 어디 써먹을지 모르는데, 왜 이 어려운 글을 읽느냐는 볼멘소리가 쏙 들어가고, 오로지 책읽기가 주는 쾌락에 빠져 더 이상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강민혁에게 철학은 무엇보다 쾌락과 기쁨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 모든 철학자들은 이런 욕망을 근원적으로 공유하고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어원을 ‘지혜를 사랑하는 것‘, ‘지혜와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풀이한다. 서평에서 강민혁은 철학자를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득도한 자‘, 세속에 초연한 초인적, 초월적 인물이 아니라 고정된 지혜/진리로 환원되지 않은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길 주저하지 않고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더 좋은 앎을 얻기 위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 내게 철학자는 이런 이미지에 가까워서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란 표현에 밑줄을 그었다. 소중히 여긴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소중한 A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 이를 어느 철학책에서는 ‘좋은 것‘과 ‘옳은 것‘의 대비, 이익과 지혜(진리)의 대비로 풀어내기도 했다. 일반적인 학문-지식은 대개 그 자체로 삶의 문제에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과학적 지식이 우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비존재/없음이 아니라 존재/있음이 왜 있는지 묻는 형이상학이나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를 묻는 철학적 인간학(막스 셸러), 혹은 물을 수 있는 것과 물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철학 훈련을 받지 못한 나로선 ‘철학‘을 논할 때면 꽤 강한 압박감을 느낀다. 워낙 재야의 고수들이 많고, 학문적 엄정함과 엄밀함을 추구하는 분야다 보니 벙벙하고 엉성하게 얘기하면 혼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린달까... 하지만 오류가 좀 있을지언정 자유롭게 철학을 얘기하고 향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긴 블로그니까 !!) 철학은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다. 그래서 철학(예술도 여기 포함되는 듯)은 병든 자가 하는 활동이라는 말도 있다(<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 관련 경우가 인용된다). 삶을 건강하게 충족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굳이 현상 이면의 본질이나 의미에 매달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철학함-예술함은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이성복의 유명한 시구를 빌려 보자면 모두 병들었으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 아픔을 감각하고 세계의 아픔을 사유하는 활동이랄까.


철학의 난점은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삶의 합치 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보통 철학의 쓸모를 논할 때 철학적 앎을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곤 한다. 철학은 현실과 유리된 이상ideal에 불과하다는 거다. 강민혁 또한 서평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적인 삶을 설명하려는 철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삶이 철학보다 앞서 가는 ‘제논의 역설‘ 같은 현상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정말 철학은 과시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일까. 더러운 현실을 지금 당장 직접 바꿀 순 없으니 아름다운 생각의 성체를 지으려는 중얼거림에 다름 없는가. 그래서 나는 철학이 앎-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방법 혹은 사유의 태도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철학자들의 ‘사랑론‘, ‘사랑의 철학‘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 연애‘에 실용적인 도움을 얻긴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연애 상담이 훨씬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 상대방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사랑관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기모순이 덜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랑 개념과 역할을 순응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주체적으로 정립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아마도... 분명히...


강민혁은 생애와 사상, 삶과 철학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서평 초반부에서 이렇게 적는다. 삶은 철학을 발명한다. 삶과 철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일상과 유리되어 있는 것 같은 고차원적 지성 활동인 ‘철학함’도 삶의 물질적 기반 위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삶에서 철학이 자연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철학적 사고를 하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 같고, 일상에서 흘러가는 사유를 철학적 형식으로 전환하는 일은 의식적으로 고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해 보여서다. 그렇지만 철학자의 삶에서 배태되지 않는 철학은 없다. 칸트가 늦잠 자고, 불규칙하게 살았더라면 그의 비판 철학은 없었을지도 모른다(혹은 지금과 모습이 꽤 달라졌을 지도 모르고). 고대 그리스 아테네, 18세기 프로이센의 예나, 19세기 말-20세기 초 빈, 20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등 도시라는 환경도 철학자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고. 근대 이후 철학이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닮는 전략을 통해 근대 학문으로서 요구되는 정합성, 체계성, 전문성, ‘과학성‘ 등을 충족시키고자 했다고 들었다(어제 동아리 모임에서 S님이 지적해준 내용). 강민혁도 주석에서 원래 철학자들은 외교관 등 다른 직업을 겸하면서 철학을 했는데 대학에 ‘철학과‘에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생기면서 전문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며 ‘논문‘을 생산하는 사람이 철학자가 된 변화를 지적한다. 어찌 보면 ‘문창과 교수‘ 출신 작가들에 대한 설명/비판과 되게 유사하다고 느꼈는데 이건 일단 넘어가기로... 그러다 보니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철학이 커다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 생물학에서 특정 유전자, 특정 세포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듯(그런 부분을 통해 ‘생명의 원리‘ 같은 전체 보편을 설명하는) 삶 바깥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세계 내에서 탐구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그러다 보니 전문가를 제외한 일반인에게 철학이 현실에 쓸모 없고,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 다른 하나는 철학의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적 글쓰기도 존재하지만 변증술-대화의 줄기도 존재하는데 후자가 거의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강민혁의 서평은 바로 이 변증술의 전통, 대화로써 철학을 하는 가치를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경유해 적극적으로 소환한다. 이런 변증술, 대화의 철학함은 소설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밀란 쿤데라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사실 한 편의 소설, 희곡처럼 재밌게 읽힌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헤르만 프랭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을 같이 읽으면 을매나 좋을까... (<최초의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도)


서평의 마지막 부분은 ‘진실을 말하기‘‘진실에 대한 용기‘를 논하는 파레시아로 채워진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예전에 약간 치졸한? 느낌의 변명으로 번역되곤 했던)은 파레시아의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엄청 의미심장해 보일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배경으로 철학자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12부작 드라마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서평을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외모와 성격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재밌더라. 센세들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달까... 한국 배우로 캐스팅을 하면 누가 어울리려나. 촬영 쉬는 시간에 하이데거 논문을 읽는다는 유태오 배우 말곤 딱히 떠오르지 않네...



p.s ‘철학자의 생애‘‘철학자 전기‘ 분야 하면 그린비의 인물 시리즈 ‘he-story‘, 고명섭의 ‘극장‘ 시리즈 정도가 떠오르는데 ‘철학자 전기‘도 재밌는 것 같다. 딱 들어맞는 예시는 아니지만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그랬고, 이상길의 <아틀라스의 발>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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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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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인류세’라는 말을 많이 썼다. 기후위기, 인간중심주의-종차별주의, 공장식 축산을 비롯해 동물에 대한 폭력과 착취,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재난, 말장난처럼 보이는 철학적 현학을 넘어선 ‘인간’ 주체 개념에 대한 강력한 도전… 일련의 문제의식을 한꺼번에 환기하기에 이만한 개념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인류세’가 뭔지 물어본다면, 특히 면접관이 ’인류세‘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답변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노벨상을 수상한 대기과학자 폴 크뤼천(과 한 분이 더 계시는데 이름을 못 외움…) 2000년대 초반(아니면 90년대 후반이었나?) 인류가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판단해 지질학적-지구적 단위의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된 범주. 홀로세 다음으로 지금은 인류세 시기를 살고 있다고 주장.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강조하려는 비판적인 의도가 있음. 막상 적어놓고 보니 평타는 친 건 같은데 아무튼 앞으로도 이 개념을 자주 사용하게 될 것 같으니 개념의 정확한 의미, 개념-담론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 학계의 수용 양상 등을 파악하고 싶어졌다.

알라딘에 ’인류세‘로 검색하면 인류세 자체를 다룬 책은 몇 보이지 않는다. 인류세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한 것 같은 책이 다수인 듯. 내 정보력으로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인류세 입문서-배경이 아니라 중심 소재로 인류세를 다루는 책-교유서가의 첫 단추 시리즈였다.

2016년이었나. 그때 알라딘인가 교보에서 옥스퍼드 출판사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원서 시리즈를 반값 할인 행사를 했다. 6권 정도 샀던 것 같다(철학, 과학철학 등등…) 그러던 어느 날, 교유서가에서 첫 단추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고, 옥스퍼드의 이 시리즈를 원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서와 번역본을 대조하며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얼마 못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옥스퍼드 책 또한 가족이 실수로(?) 충동적으로(?) 저지른 분서갱유의 대상이 되며 내 품을 떠났다(난 아직도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정말 사건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듯. 바디우적 의미의 사건…). 첫 단추 시리즈로 조금씩 모으고 있다. 사이먼 크리츨리의 ‘유럽 대륙철학’ 같이 자자를 보고 산 경우, ‘이빨’ 같이 제목-주제를 보고 산 경우, ‘홉스’‘마키아벨리’는 번역자를 보고 산 경우다. 이우창, 김민철, 조무원, 임동현 … 지성사 클럽 멤버들을 팔로우업하고 있다. 역자 목록에 신뢰감이 확 생겼다. 과학잡지 에피에서 인류세를 주제로 연재를 하고 계시는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의 박범순 교수님이라니! 공역자인 김용진 선생님 역시 현재 같은 연구센터에서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라고 하시니(역자 소개 참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라인업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부분은 인류세 시기의 기원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인류세의 기점을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보는 시각 외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보는 시각,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로 보는 관점 등이 존재했다. 농업혁명 가설은 근거가 빈약해서 충분히 설득력을 얻지 못한 모양새이긴 했다. 2030년, 2050년, 2100년 같은 (근)미래에 Unless 구문의 아포칼립스 서사가 존재한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하지 않아 해수면이 상승하면 …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명확하고 결국 국가, 국제 사회, 기업이 바뀌어야 하는데 녹색정치가 제도권 정치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난망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류세의 예술, 예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와 부분을 매개하고, 새로운 우정을 발명해내고, 공통적인 것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예술 말고 무엇이 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유물론 동아리에서 캐런 바라드 파트를 다뤘는데 발제를 맡은 Y님이 연극 코펜하겐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상우의 프리즘 등 텍스트들을 엮어 짜오신 모자이크 발제문이 정말 흥미로웠다. 양자물리학, 영화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책임과 응답, 간섭과 회절, 잠재적인 것에 잠재적으로 답하기, 우주를 중간에서 만나기 = 우주를 창조하기, 현상, 간-행intra-action(내부-작용)…

세미나 책인 [신유물론 입문] 파트에서 바라드가 가장 흥미로웠다. 마누엘 데란다, 제인 베넷, 로지 브라이도티까지 그동안 읽은 파트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의 계보 아래 있어서 그런지 잠재성, 생기, 조에 등 각기 다른 개념을 구사하지만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못했다(데란다는 정치적 입장이 나머지와 좀 다르다고 느끼긴 했는데 베넷과 브라이도티는 적어도 이 책 내에서는 동어반복적이라고까지 느껴졌다). 생물학이나 화학이 아니라 물리학, 닐스 보어의 물리-철학을 베이스로 해서 행위적 상대론을 주창하는데 이게 다른 존재론보다 더 와닿았달까. 표상 없는 실재론, 대상 없는 객관성, 물의를 빚는 우주까지 일독으로 소화하기 벅찬 밀도였고,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바라드가 얘기하는 현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치 양자 역학처럼 책을 읽는 도중에는 알 것 같았는데 덮고 나니까 알쏭달쏭해졌다…

이중슬릿 실험을 재해석하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현상의 차원에서 장치apparatus와 얽힘entanglement의 불확정성 원리로 풀어내고…. 릭 돌피언의 [신유물론]에 수록된 캐런 바라드 인터뷰를 보면 바라드는 페미니즘 수업에서 물리학을 가르친다고 한다. 따져 보면 철학적 베이스에서 동일성에 기반한, 로고스중심주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서양철학을 전복적으로 뒤짚는 페미니즘은 양자 역학과 정말 잘 통할 것 같다…


신유물론은 로지 브라이도티 같은 학자가 세기 말에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류세와 신유물론은 개념사의 시간적 층위를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 발명품인 셈이다. 유물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물질에 대한 사유를 새롭게 하는 실험과 인간이 지구의 생태 시스템을 바꿔 그에 대한 지질학적 연대의 명명을 요청하는 작업. 오늘의 소결. 해러웨이를 읽자. 사이보그 선언문 초반부를 읽었는데 정말 미친 텍스트인 것 같다. 대학원 1학기 때는 텍스트를 정말 1도 이해를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읽을 수 있다! 여전히 매우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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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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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를 읽고 : 적은 것이 더 총체적일 수 있는가

마음의 사회학’ 이론의 창시자 김홍중은 학계와 출판계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학자이자 작가다. 계간 『사회비평』과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경력은 그가 학자로서의 엄밀성과 작가로서의 미학성을 두루 겸비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 그가 『사회학적 파상력』 이후에 낸 단독 저서인 산문집 『은둔기계』가 단상 모음집이란 사실이 눈길을 끈다. 애초에 단상 형식으로 쓴 글을 모은 게 아니라 일반적인 산문으로 쓴 글들도 단상으로 변형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권의 책으로서 체계적 완결성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전작과 같이 일반적인 산문, 평론, 논문을 엮어 책을 내는 게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단상의 사회학적 글쓰기’를 실험했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이 두 가지 측면에서 유효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싶다. 하나는 김홍중의 기존 독자들이 단상으로 형식의 변화를 겪은 책에서 고유한 독서 체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짧은 호흡의 글로 요즘 트렌드에 익숙한 독자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단상의 사회학‘을 시도한 것일까. 작가의 대답은 소박하다. 프롤로그에서 예전부터 단상의 형식을 선호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단상 형식의 에세이는 파스칼, 몽테뉴, 니체, 에밀 시오랑 등 유구한 지성사적 계보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전대미문의 사회 변화에 따른 반응인 것처럼 보인다. 문체는 사유의 스타일이자 작가의 몸의 리듬에서 배태된 산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언택트 등 삶의 방식을 타율적·강제적으로 변화시켰던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서 쓴 「바이러스 기호학」은 『은둔기계』의 스타일을 예비하고 있다. 이렇게 작가 자신이 ‘은둔기계‘가 되어 읽고, 쓰고, 사는 과정을 기록한 결과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학은 사회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반 이론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상과 사회학은 양립 불가능한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한 파편에 대해 역설하며 적은 것이 더 총체적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발터 베냐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가 그러했듯 파편의 글쓰기인 단상은 모더니티를 포착하는 데 유용한 형식이 될 수 있다. 단상의 매력은 산문처럼 메시지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단절에서 비롯되는 “멈춤의 힘”에 있다고 역설한다. 산문적 리듬이 멈춘 자리에서 파편이 섬광처럼 말을 시작한다.

『은둔기계』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글쓰기를 위해 은둔에 대한 사유를 단상으로 풀어냈다. 은둔은 ‘생존’, ‘잔존’, ‘자기-삭감’, ‘물러남’,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자기-비움’, ‘파상’, ‘페이션시’, ‘케노시스’, ‘덜 존재하기’다. 은둔은 ‘거리의 생산’ 혹은 ‘간격의 조립’이다. ‘은둔기계’의 개념은 들뢰즈·과타리의 ‘욕망 기계’ 개념과 ‘탈주(도주)’ 개념을 연상시키고, 실제로 연관성이 높다. 은둔기계는 은둔을 실천하는 존재자를 비유하는 형상이다. 파국이 임박한 인류세의 문제 앞에 은둔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인류세에 맞서 봉기나 혁명 같은 급진적인 저항이 아닌 은둔이라니. 나이브하다 못해 탈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의 사회학‘ 이론 자체가 개인과 사회, 행위와 구조 등 사회학 내부의 이분법적 구분을 극복하기 위한 패러다임이었던 만큼, ‘은둔의 마음‘이 현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감안해 보자면 인류세는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락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직결되는 사항이기에 혹자는 인류세를 ‘자본세‘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은둔은 자본주의 사회가 유도하고 강제하는 ‘자기-채움‘, ‘자기-충족‘의 욕망에서 물러나 주체와 타자 사이에 거리를 생산하고, 간격을 조립하는 기술이다. 은둔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게끔 강제하는 현실에 거리를 두고, 다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실천이다. 은둔기계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이제껏 자연과 비인간에 행해졌던 폭력을 중단하고, 타자와 공생하고자 하는 주체성의 새로운 이름이 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한창이던 시기에 생태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은둔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학적 단상을 모은 책은 흔할 수 있으나 단상의 사회학적 글쓰기를 시도한 책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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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마민지 지음 / 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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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민지의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을 읽었다. EBS 다큐영화제 대상 수상작 [버블 패밀리]의 감독이 이런 제목으로 에세이를 썼다고 하니 북펀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 영화를 만들게 된 창작 배경과 만들고 난 후 뒷이야기 등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IMF 키즈라는 말이 있다. 1997-1998년 외환위기 당시 어린 아이(청소년을 포함)였던 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들이 성인이 되며 IMF라는 공통 기억을 공유하는 세대 집단을 이루면서 고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빌리티 연구자 안은별은 [IMF 키즈의 생애]라는 인터뷰집을 낸 바 있다. 책이 출간된 2017년의 분위기를 잠시 회상해보면 응답하라 시리즈로 대표되는 복고-레트로 열풍과 더불어 ‘9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하는 학술적, 역사적 질문이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때쯤 헬조선 담론이 유행하며 세대 논쟁, 세대론이 도마에 올랐던 것 같다. 특히 보수화된, 탈정치화된 청년 세대를 꾸짖는 586 정치인에 대한 분노와 환멸 같은 것들…. 안은별의 인터뷰집을 읽은지 오래된 터라 집필 의도, 기획 취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추측컨대 기성 세대에 의해 납작하게 재현되는 청년 세대의 의식 구조를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 같다. IMF 사태를 일종의 원체험으로 경험해서 어렸을 때부터 중산층에서 탈락하여 언제든지 가난해질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 살았다고, 그래서 국가-사회는 자신을 지켜주지 않으며 나-개인의 생존과 성공을 최우선시하는 생존주의, 서바이벌리즘이 시대의 마음이 되었다는 서술. 이런 서술 바깥에서 IMF 키즈들은 IMF 사태에 얽힌 자전적 생애사와 더불어 자신의 세대가 정치적으로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밀레니얼 세대의 감각을 갖고 안정적인 중산층이 되기 힘들 거란 비관적 인식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절망스럽게 자조하지 않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가 기억에 남는다. 여전히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민사고? 같은 지사고, 특목고를 나와 외국 유학을 다녀 온 게임업계? IT업계 종사자와 진보 정당과 보수 정당을 오가며 여성-워킹맘으로서 정당에서 일하셨던 정치계 종사자 분.

인터뷰이들은 80년대생이었다. 90년대생인 나로선 비슷한 세대로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크게는 10년 정도 시차가 있다 보니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았다. 중산층 가족의 해체, 경제적 충격파로 인한 부모의 트라우마, 이 트라우마가 자식에게 굴절된 형태로 전가되는 경험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탓에 경험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적었다.

동아리에서 문학과사회 하이픈 ‘다시 - 계급’을 읽은 이후로 가난에 대한 생각이 점점 늘고 있다. 대부분 청소년기까지, 혹은 이십 대 초반까지 감각했던 가난을 상대화해서 메타적으로 인지하는 거였다. 아파트와 비아파트, 유행하는 장난감이나 옷의 구매 여부, 패밀리 레스토랑, 바캉스 같은 중산층 외식 문화의 경험 여부(스키장, 리조트), 휴대폰이나 MP3 전자기기의 스펙, 그리고 책을 읽는 부모 혹은 서재가 있는 집, 부모님의 학력, 해외여행의 경험치 차이-’효도 관광‘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휴양지에 다녀오기도 하는. 대학 입학 이후로 사귄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 출신이었다. 그렇게 제한적인 계급/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며 축적된 경험의 확증 편향, 하비투스… 그걸 이제 다르게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마티 출판사의 on 시리즈로 ‘일인칭 가난’이란 책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가난을 재현할 수 있는가. 가난이 빈곤과 다르다고 했을 때, 그러니까 통계나 숫자 같은 데이터로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으로 설명되는 빈곤poverty이 아니라 자주 ‘불쌍함’으로 치환돼 값싼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가난poor(불쌍한 이란 뜻도 가지고 있는)을 어떻게 서사화할 수 있을까. 가난의 진정성을 따질 수 있다는, 크기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는 믿음 앞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한 말하기에 타자의 층위를 끌어들일 수 있는 다성적 말하기의 가능성.

동아리에서 가난이 정체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열성적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박혜진이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을 논하는 부분을 읽으며 나는 한 인물이 발전주의의 논리,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행복의 약속’) 일종의 탈주적 전략으로서 가난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긍정하고 있다고 읽었다. 과거에 노장 사상, 청빈 사상, 기독교? 카톨릭? 전통에서도 가난의 가치를 긍정하며 검소하지만 부족함이 없는 삶을 긍정했다고 알고 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낭만적 몽상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부분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앞으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질문.

가끔 기사에 네이버 프로그래머 초봉을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1인당 GDP 3만 불을 돌파한 경제 성장 부분을 여기서 체감할 수 있어서, 반대로 내 주변에서는 실질적 삶의 질(주거 비용, 물가 등등을 고려한)이 그대로이거나 심지어 더 하락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서 말이다.

마민지의 책을 읽고 복수의 독서 루트를 정리한 지도를 그려보고 싶어졌다.



-불평등과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키워드로 책을 꼽아본다면 전강수의 [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김수현의 [부동산과 정치] 등등등



-아파트 거주에 대한 사회학, 인류학적 접근, 아파트를 통해 바라 본 중산층 문화를 키워드로 꼽아본다면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 인류학자 정헌목의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이인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등등등



-건축 정책 및 도시 발전사의 관점으로 서울을 탐구한 책을 같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박정현의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송은영의 [서울 탄생기], 도시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3부작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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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 케이 모던 2
이인규 지음 / 마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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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를 읽었다. 이인규의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이하 ‘안녕‘)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어보진 못했다. 재건축으로 철거된 아파트에 대한 기록/아카이브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긴 했다. 꼭 둔촌주공아파트 거주민이 아니더라도 성장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에 대한 ‘장소 애착‘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안녕‘을 보며 장소적 기억, 어린 시절 이름 모를 동네 친구들과 뛰어 놀았던 놀이터, 경찰과 도둑 같은 게임을 하며 뛰어 다녔던 골목길 등 추억이 서린 장면들을 오랜만에 회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에 디지몬 어드벤처를 정주행했다. 7번째? 8번째 정도 되는 것 같고, 아마 마지막 정주행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시작은 중2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다음 블로그에 업로드된 디지몬 영상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1화를 클릭했고, 정신 차려 보니 54화까지 내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음악의 힘이 셌던 것 같다. 디지몬 어드벤처 오프닝 곡, 라벨의 볼레로, Power up, 엔딩 곡인 안녕 디지몬 등 음악이 흘러 나올 때면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고3 때까지 1년에 한 번씩 의례를 치르듯 디지몬을 정주행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깊어질수록 안온하고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재확인하는 데서 오는 위로가 컸던 것 같다. 그리고 디지몬 어드벤처의 메시지가 주는 울림도 적지 않았다. 용기, 우정, 사랑, 순수, 지식, 성실, 희망, 빛까지 각 ‘선택받은 아이들‘이 지닌 마음의 정수를 상징화한 문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문장이 빛나기 시작하면 문장의 힘으로 성숙기 디지몬은 완전체 디지몬으로 초진화를 한다)을 보며 내가 잃어버린 동심, 순수한 마음, 잊고 있었던 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에 디지몬을 보며 더 이상 마음 속에서 일련의 화학 작용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졸업이랄까. 이제 가상의 디지몬 세계에서 ‘선택받은 아이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안녕 디지몬. 친구들 모두 안녕.



이은규의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진행한 저자가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탐구를 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해 집필한 석사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기성 연구자들은 대체로 아파트를 획일화된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강제하는 주거 양식, 사는 곳living place이 아닌 사는 것[상품]이 된 부동산 투기의 도구 등으로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은규는 ‘아파트 키드‘로서 한국 사회에서 왜 아파트가 주거 양식의 지배종이 되었는지, 상품이 되었는지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꼼꼼히 밝히면서도 ‘사는 곳‘으로서 아파트가 어떤 장소였는지를 설명한다. 1부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부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살았을까? 3부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사라져갔을까? 이렇게 대단지의 생애라는 제목에 걸맞게 아파트의 생로(병?)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건축물의 죽음 충동에 의해 이윤을 창출하는 ‘재개발‘이다. 신문에서 문화/예술 부문만 챙겨 보고, 사회 면 정도만 드문드문 읽는 나로선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 사업이 얼마만큼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인지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이은규는 서문에서 이 책이 겨냥하는 표적이 이런 재개발 욕망이 야기하는 사회적 손실, (재)개발 연대의 힘 있는 자들만이 이윤을 획책하고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안기는 재개발의 오답 노트를 둔촌주공아파트의 사례를 통해 작성한다.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를 통해 단순히 ‘어떻게 하면 재건축사업에서 둔촌주공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질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문제가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원인과 문제가 일어난 과정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다.(‘들어가며‘ 중)



둔촌주공아파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단지로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된 곳인 것이다. 둔촌주공아파트의 대지면적은 약 62만 제곱미터로 단일 단지 기준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13)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세계를 만들었을까?’(19) 이는 표면적으로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서울시에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인 중산층 계층을 육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을 판별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근대화 시기 중산층은 아파트에 거주하며 차(그 유명한 포니 자동차)를 소유한 4인 가족을 지칭했다. 정부의 재원만으로 아파트를 충분히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에 민간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여들였다. 이들은 아파트 입주 희망자들에게 계약금 형태로 자본을 충당하여 건설 비용에 보탰고, 입주권을 따낸 이들은 여기에 웃돈을 덧붙여 되팔기도 했다고. 이는 마민지의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에서 상세히 소개되기도 한다.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구호를 외쳤던 발전국가 시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모두에게 ‘내집마련‘의 행복을 약속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 입주권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현금 지불 능력이 있던 계층(전문직 등),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공무원, 군인 등 특정 계층은 쉽게 부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었던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극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건이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이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1부를 읽으며 김정철이란 인물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김중업, 김수근 등 발전국가 시기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을 몇 알고 있었으나 김정철은 생소했다. 하지만 그가 건축신문을 발행하고, 젊은건축가상 제도를 제정, 운영하는 정림건축문화재단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건축계에서 김중업, 김수근 같은 건축가 위주의 담론이 형성된 반면 ‘대형 건축 조직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서술을 보며 기시감이 들었다. 국문학계 또한 작가, 작품 중심의 작가론, 작품론 연구 방법론이 지배적이었다가 제도, 매체 연구 등 새로운 방법론이 적용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철의 바람대로 둔촌주공은 ‘후세에 의해 평가’된다. 건축학자나 평론가 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이들에 의해 아파트에 대한 다른 평가와 이해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네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둔촌주공아파트가 낮은 밀도로 지어져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었고, 섬세하게 설계된 단지의 여러 요소 덕분에 장소에 대한 좋은 감각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계절마다, 구역마다 다른 모습이었던 수목들과 넓은 녹지, 놀이터와 휴게공간을 유연하게 연결하던 보행자 전용로 등 주민들이 사랑했던 공간들은 설계자들이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설계하고 실현한 것들이었다.


거주민들은 안락하고 살기 좋은 거주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이름 모를 설계자의 이상과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살기 좋은 집을 만들려는 마음이 정말로 살기 좋은 집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좋음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더 좋은 거주 환경을 고민하는 마음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69-70)



건축가는 아니지만 ‘건축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던 부분이다. 그리고 건축의 공공성,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실현하려면 시민으로서 좋은 건축을 바라보는 혜안, 좋은 건축 정책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판단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유현준 건축가가 한 말이 있다. 건축의 질이 향상되려면 시민들이 좋은 건축을 경험할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좋은 건축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키우면 좋은 건축이 많아질 수 있다고. ‘건축 문화‘을 가꾸는 일. 이는 건축가, 건축평론가 등 건축계 사람들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열린송현녹지광장‘은 정말 ‘잘 생긴‘ 장소라고 느꼈다. 항상 안국빌딩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지나갈 때마다 시야를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던 철제 막이 사라지니까 5분 동안의 산책이 훨씬 즐거워졌다. 이렇게 시민들이 공공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걷기 좋은 장소가 도시에 더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추가적으로 ‘빌거‘, ‘휴거‘ 등 거주지의 성격을 기준으로 차별적으로 구별 짓는 혐오 발언, 계층화된 주거의 구별 짓기 현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거대한 블록에 생활시설을 집중한 ’자체 완결적인 가구 단위 계획‘은 장단점이 확실했다. 단지 거주민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안심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네‘로 기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다는 장점에 반해, 단지의 경계를 따라 내부와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폐쇄적인 ’섬‘처럼 주변과 분리된다는 한계가 뚜렷했다. 이러한 ’반도시적 단지성‘은 근린주구론이 처음부터 비판받은 지점이었다. 근린주구론에서 물리적 범위를 한정하는 경계를 뚜렷이 한 이유는 근린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고 명확한 실체로서 인식되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로 인해 계급 및 인종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꾸준히 지적되었다. (50)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이 파트를 읽으며 인문적 지리학의 대표 사상가로 꼽히면 이-푸 투안의 저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토포필리아], [공간과 장소]를 인용해 이인규는 왜 사람들이 둔촌주공아파트을 그리워하며 기억하고 있는지, 그곳을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밝힌다.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이 있다. ‘어떤 장소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지리학자 이-푸 투안에 따르면, 토포필리아가 생겨나는 데에 특별한 랜드마크나 대단한 경험, 격정적인 감정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친근함과 편안함, 보살핌과 안전에 대한 확신, 소리와 맛에 대한 기억, 공동의 활동과 세월이 쌓아온 아늑하고 기쁜 추억으로도 깊은 잠재의식 같은“ 마음, 즉 ‘고요한 애착심’을 품을 수 있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거주한 이들이 보여준 장소에 대한 애착이 이와 비슷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친밀한 장소들과 우연히 마주하는 애틋한 경험들이 누적된 사랑의 감정이었다.


둔촌주공아파트 거주민들이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그곳이 그들의 ‘집’이자 ‘동네’였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는 거주민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자, 그 안에 함께 살아가는 가족 또는 이웃과 맺는 관계, 그 공간 자체와 맺는 관계를 포함하는 동네였다. 그리고 ‘완성형’으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크게 바뀌는 것 없이 ‘정지된 마을’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파트 단지의 숙명도 장소 애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는 이-푸 투안이 장소를 ”정지(pause)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한 것과 닿아 있다. 사람과 공간의 관계는 정지해 머무를 때 발생하며, 사람이 아무리 정지해 있다고 해도 공간이 계속 변한다면 그곳은 ‘장소’가 되지 못한다. (134-135)



장소 애착 때문이었을까. 6~7년 전 즈음에 13년 정도 살았던 동네에서 이사 갈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고작 버스로 20분 거리의 다른 동네로 이사 가는 거였는데도 그랬다. 초중고를 나온 동네를 떠난다는 사실을 급작스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전, 신도시를 이사 간 친구는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듯 번듯하고 깔끔한 아파트 단지 주변에 황량하고 사막한 신도시 특유의 인위성, 기계성에 힘들다고 일기에 쓴 적이 있다. 인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은, 시간의 켜가 쌓이지 않은 공간. 아직 장소가 되지 못한 공간.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망원동, 불광동 같은 동네가 좋더라. 성북구도 좋고... 그런 동네에서 살 수 있을까...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사라져갔을까



‘둔촌은 강동이 아닙니다!’라는 외침에는 자신의 집단을 인근 지역 사회와 구별 짓고, 결코 섞일 생각이 없음을 드러내는 폐쇄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근린주구를 추구하며 만들어진 대단지의 태생적 한계에, 지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집단권력의 부정적인 면이 겹쳐진 결과다. 게다가 재건축조합이라는 것은 지역에 발붙인 ‘거주’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구성되는 집단이다. 굳이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아도 조합원이 될 수 있기에 조합원들 사이에서 지역 사회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재건축 조합원들이 더 동질감을 느끼고 더 ‘쓸 만하다고’ 여기는 관계는 재건축·재개발을 추진 중인 다른 조합이다. 한국 사회에서 재건축은 처음부터 여러 조합이 연합한 거대 이익집단이 쟁취해낸 승리의 과정이자, 조합들이 결집할 때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학습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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