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수필/감상&비평 글을 올리면 현역 작가 분들이 멘토로서 피드백을 해주는 혜자로운 공간이다. '라떼는' 매주 장원을 뽑는 주장원 제도를 운영했었는데 현재는 주장원 없이 월장원만 간소화해서 운영하는 모양이다. 아마 많은 청소년들이 글을 혼자 쓸 거라 생각한다. 예중/예고에 진학하거나 사적으로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거나 과외를 받지 않는 이상 자신의 글을 봐줄 만한 문우, 선생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외로운 문학소년/소녀에게 글틴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과 비밀을 고백하는 고해성사의 장소이자 자신과 같이 글 쓰는 또래 친구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문학 '광장'이다.
내가 글틴에서 활동한 기간은 약 1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라떼는' 소설 부문은 무협소설을 쓰시는 '진산' 작가가 소설 멘토를, 유종인 시인이 시 멘토를 담당했던 걸로 기억한다. 추억여행 삼아 오랜만에 글틴 사이트에 접속해 내 10대 시절 발자취를 찾아봤다(아마 싸이월드에 박제된 흑역사를 보는 기분이 딱 이러려나). 비평/감상글과 시 부문에서 월장원을 한 번씩 수상했음을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으나 '중2병'에 '문학병' 말기라 진단받을 법한 서면 인터뷰를 보고 부끄러움에 호다닥 홈페이지를 종료했다.
월장원을 받을 당시 썼던 시의 소재가 바로 길고양이었다. 그즈음까지만 해도 도둑고양이와 길고양이가 함께 사용되었던 것 같다. 순간적으로 길냥이를 '도둑'이라 명명하는 인간주의적 시선에 낯선 이질감을 느껴서 아이디어를 착상했고, 문장력이나 이미지는 부족하지만 발상에 큰 점수를 받았던 것 같다.
현재 본가는 아파트이지만 빌라에서 오래 살았다. 2년마다 한 번씩 전세로 이사도 많이 다녔었고. 빌라 A, B, C동이 붙어 있는 구조였고, 입구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 주차장(이라 할 수 있는 공터)에 세워진 전신주 쪽이 쓰레기장이었다. 종량제 봉투에 담지 않은 쓰레기, 분리수거가 전혀 되지 않은 쓰레기, 물이 줄줄 흐르는 음식물쓰레기...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로 가장 큰 변화는 두 가지였다. 엘리베이터가 생겨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책 주문을 할 수 있게 된 것(빌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우리집은 4층이었다...), 그리고 쓰레기를 쾌적하고 깔끔하고 편리하게 버릴 수 있게 된 것.
그렇게 음식물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차장 쪽에 길냥이들이 많이 지나다녔고, 밤이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많이 났다. 당시에는 그게 고양이 울음소리인지 몰라 아기 울음소리인가 의심하고 걱정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TNR 수술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나는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왔던 사례처럼 길고양이를 학대하는 사건이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지 않길 기도했다. 그때 당시 내게 고양이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지만 종종 마음이 쓰이는 이웃 정도였다. 집사, 식빵 굽기, 뚱냥이, 치즈냥 등등 고양이 세계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이후 내 고양이관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사건은 팟캐스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창비에서 운영한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들었던 에피소드와 뒤섞였을 지도 모르겠다)에서 법학자 김두식 선생님이 황정은 소설가에게 문학-소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류의 묵직한 질문을 던지셨고, 황정은 소설가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는 웹툰작가 강풀의 사례를 들면서 세상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고 가시적인 파급력을 지닌 매체는 문학이 아닌 트위터다. 대신 소설은 가장 느리게, 그리고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식의 글쓰기이기에 소설만이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길고양이 급식소. 길고양이 보호소. 길고양이를 보호하고 구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느슨한 연대를 이뤄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종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기존 세계관의 논리로는 잘 해석되지 않는 낯선 언어들의 조합, 그래서 내 상식을 뒤흔들고 사고방식을 새롭게 갱신할 것을 촉구하는 언어, 이미 미래에 당도해 있는 자리에서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에게 보내는 시차의 언어. 이런 '사회운동'을 실천하는 '활동가'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니 이런 활동가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길고양이에게 급식을 주는 활동을 하는 그룹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고양이 임시보호를 맡거나 길고양이에 대한 독립잡지를 만드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길을 걷다가 고양이를 마주치면 고양이 생선가게 못 지나치듯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 가능하면 쓰다듬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평소에도 동물 영상을 시청하고, 주변 지인들과 공유하고, 동물을 키우고,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 처음에 나는 잠시 소외감이랄까, 남들이 가지고 있는 빛나는 뭔가가 내게 결여돼 있다는 결핍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동물-특히 고양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키워갔다. 그렇게 나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인류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대에는 '짬타이거'들이 여럿 거주하고 있다. 수송관 님이 특히 고양이에 진심이셔서 수송부에 캣 타워를 설치하고, 고양이들의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계신다. 얼마 전에 사람을 정말 잘 따르고, 애교가 넘쳐 흘렀던 냥이가 운명을 달리해 직접 땅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나도 그 냥이를 엄청 애정했던 터라 슬펐다. 점심을 먹고 잠시 햇볕을 쬐며 쉬고 있으면 어느샌가 곁에 다가와 배를 뒤집고 누워 뒹굴뒹굴 애교를 부렸던 기억, 내가 야간근무를 서는 동안 상황실까지 내려와 냥이를 안고 올라갔던 기억, 선임에게 '억까'를 당하고 닦이던 시절 냥이를 쓰다듬는 동안 구겨졌던 마음이 펴지는 마법을 경험했던 기억, 점호시간이었나 연병장에 집합해 있는데 고양이가 사열대에 등장해서 '씬스틸러' 역할을 하고, 그런 고양이를 내쫓지 않고 교감해주는 간부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마음이 녹았던 기억... 부대에 인간, 그중에서도 군인들만 존재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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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났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작가가 반려인으로, 활동가로 살아가며 해온 생각과 관찰을 담아낸 만화이다. 길고양이 매거진 <매거진 탁>에 연재된 만화를 텀블벅 펀딩을 통해 단행본으로 엮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은이 다니는 프롤로그에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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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났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왜 고양이가 길에 있는지 궁금해졌고, 자연스럽게 다른 비인간 동물도 보이기 시작했다. 만화가 된 그간의 생각과 관찰들을 편안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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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이 책은 길고양이와 함께 하는 일상의 풍경, 그 풍경에서 만난 고양이와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고양이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부드러게 녹여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책의 배면에 깔린 문제의식이 나이브하거나 물렁물렁한 건 아니다. 무무 편집장이 쓴 에필로그는 이런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좀 분량이 되지만 전문을 옮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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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고양이 전문 출판사 프레스탁의 첫 단행본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길을 집 삼아 살아가는 동네고양이가 주인공이다. 집고양이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지만, 길에 사는 동네고양이는 쉽게 혐오와 학대의 대상이 되어왔다. 길을 걷다 보면 마주치는 이 오래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우리는 대체로 모른다. 동네를 집 삼아 살아가는 동물을 수 도날드슨과 윌 킴리카는 "야생이지만 인간 정착지 중심에 사는" 경계동물이라고 칭했다. 경계동물은 집에서 함께 살거나 야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네이웃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만나고 지나치기에 때로는 우연한 만남으로 가족이나 이웃을 맺는다. 프레스탁의 에디터이자 이 책의 작가 다니도 그렇게 고양이를 알게 되었다. 고양이를 알아가면서 귀여움 외에도 고양이가 가진 깊고 넓은 결을 발견하고, 고양이, 그리고 동물권의 관점에서 동네고양이와 관계맺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평행세계를 상상하기도 하고, 날씨가 궂는 날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을 그린 다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동네를 산책하듯이 생각에 잠겼다가 새로운 고양이의 모습을 보았다가 멍 때리다가 어느새 경쾌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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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선의만으로는 길고양이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 나도 한 번 동네에서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려 시도했으나 30분 정도 동네를 배회하다가 깨달았다. 이곳에 고양이를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애초에 일회적으로 주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길고양이 네이버 카페 게시글에서 읽고 배웠다. 그나마 종종 오르는 광교산의 정상에서 급식소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아야만 동물이 먹고 살 수 있구나 싶어 씁쓸했던 적이 있다. 기후위기, 인류세, 동물권...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로 부상했다. 더 이상 지구에서 현생 인류만을 위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고양이라는 타자, 비인간 존재와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지 이제 정치의 차원에서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예전에 흥미로워 보여서 킵해둔 논문의 링크를 남겨두는 걸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한다.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29974?mode=f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