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난감

 

 

 

 

  건담기? 에반게리온? 한자 까막눈이 나에게 建談記는 어떤 힌트가 되지 못했기에 극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연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지구용사 선가드 등 로봇이 등장하는 만화영화’(그때 내겐 애니메이션이나 재패니메이션이란 개념이 없었기에)를 즐겨 보는 소년이었지만(그렇다고 웨딩 피치, 카드캡터 체리 등을 즐기지 아니 하지 않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테크트리를 타지 않았기에 로봇 및 건담과의 인연은 교복착용을 기점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 교복을 벗을 때쯤 보기 시작한 영화들에서 꾸준히 로봇들이 다시 출현하긴 했지만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로봇이나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로봇이 어렸을 때 양손에 쥐고 놀았던 건담들과 같은 로봇일 순 없었다.

 

 만화영화를 대신하여 장난감이 되어준 친구는 컴퓨터 게임이었다.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필두로 메이플스토리, 스타크래프트, 카트라이더, 웜즈 등 많은 게임을 체험했다. 생각해보면 내 순수한 자의가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시작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게임을 안 하면 대화에 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축구도 즐겼지만 아직 학원에 속박되기 전 학교가 끝나고, 주말에 CA 활동이 끝나고 PC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순서였기에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지언정 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극장 간 경험이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친척 고모), 괴물로 손에 꼽고, 중학생 때 학교 끝나고 학원가기 전까지 주어진 자유시간이 두 시간 남짓이었기에 게임과 나는 특별한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했던 평범한 남중생의 마음을 달래주는 단짝이 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에도 스타크래프트나 위닝일레븐 같은 게임을 하긴 했지만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 야자레짐의 마지막 세대였기에 다른 취미가 필요했다. 중3 겨울방학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읽었지만 정작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등장인물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감정들을 겪어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느낀 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으면서였다. 이후 세계문학전집이란 장르에 확실히 재미를 붙이면서 독서를 취미로 삼았다. 처음 맛을 '세계'문학으로 들여놔서 그런지 다른 독자들이 얘기하는 번역투의 어색함이나 낯섦에서 오는 어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오히려 (한국)'문학' 수업 시간에 만나는 텍스트들에 질려 있어 한국소설들에 손을 데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카뮈의 이방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권장도서'들을 '격파''정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만났고, 이를 필두로 김연수, 김영하, 박민규, 김애란 같은 젊은 작가, 한국의 대표 작가들과 만나며 한국문학과의 사귐이 시작되었다.

 

 문학은 언제 어디서나 책이란 매체만 있으면 놀 수 있었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 그것도 평소에 알지 못했던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자아와 내밀한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장난감으로서 합격점을 받았다. 문장들의 공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새로운 어휘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생각이 다른 궤적들을 그리며 지금까지 닿아본 적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사회라는 곳이 얼마나 중층적인 모순과 아이러니로 점철되어 있는지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가며 깨치면서 짐짓 다른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엿본 것 같아 우월감과 자만심에 살짝 도취되기도 하고, 거짓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 미움에 맞서 사랑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킨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렇게 읽고 쓰고, 생각하며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이어져 한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쩌다 보니 관심이 가지 않았던 근대문학의 선구자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어 문장들을 처음으로 써내려 갔던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색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찰나에 이상과 박태원이 21세기 미래의 청중들에게 발신하는 '건담'을 줄거리로 하는 <20세기 건담기>를 '얼굴책' 게시판에서 발견했고, 곧바로 같은 과 친구들을 단체 전자대화방에 초대해 날을 잡았다. 그런데 일이 생겨 결국 나는 9월 10일에 혼자 관람했고, 친구들은 9월 9일에 다 같이 모여 육회 비빔밥을 먹고, 연극을 보고 감상을 나눴다. 

 

 

 2 경성의 남자들    

 

 기차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지각하고 말았다. 그래도 요즘은 공연 시작 후 15분 후에 지각한 관객들을 위해 입장하는 시간을 갖고, 스크린을 통해 연극 실황을 생중계해줘서 대사 한 토씨 한 토씨 다 듣지는 못해도 대략적인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마이크 앞에 서서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 두 명이 만담을 떨고 있다. 스탠딩 코미디언을 연상시키는 이들은 다름 아닌 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구인회의 박태원과 이상. 점잖은 젠틀맨 분위기의 박태원과 약간 촐싹거리는 희극적인 캐릭터 이상은 책에서 읽고 상상했던 모습과 일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이상 역할의 배우를 이상이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러니'를 즐겨 사용하고, 언어유희를 즐겼던 이상이 실생활에서도 말장난(일종의 아재개그)을 남발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작가'(선생님)의 점잖고 무게감 있는 모습과 거리가 있는 게 '이상답다'는 게 조금씩 납득되기 시작했다.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긴 하지만 글을 쓰는 오늘 9월 17일 백남준 아트센터를 다녀와서 그런지

백남준과 이상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움과 권위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 예술이란 장난감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두 사람. 당대 누구보다도 전위적이고 모던한 감각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해받기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이해에 깔려 있는 동일성의 메커니즘을, 관습적인 사고방식과 타성에 젖은 감각에 균열을 내는 불편함을 조장하는 걸 자신의 미학적 윤리로 삼은 모더니스트들. 만약 이상이 식민지 경성이 아니라 동경이나 파리 같은 당대 문화예술의 중심지에서 활동했다면 많은 작품을 남기고, 당대에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칠흑과 같이 어두웠던 시기에 소원이었던 동경에 가서 옥사한 파란만장한 삶의 화룡정점을 찍으며 신화가 되지는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터그 김슬기 선생님이 지적하셨듯 이상이 왜 동경에 갔는지, 이상의 드라마틱한 최후에 대한 질문은 김연수의 <굳빠이 이상>에서도 제기된 바 있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로 독자들에게 남겨질 것 같다.

 

 

 사실 '건담'이라는 형식상 이 연극은 일반적인 연극의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국어시간에 배우는 발단 전개 절정 하강 대단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만한 갈등과 갈등의 해소가 작품의 척추를 이루는 모양새가 아니다. 마치 오늘날 팟캐스트 방송에서 책 좀 읽었다 하는 '먹물'들이 수다를 떨듯 박태원, 이상, 김유정, 구본웅, 그리고 이상의 제비다방에서 일한 바 있는 소년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케미를 빚어낸다. 유랑극단 느낌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문학'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이는 만담을 이어가는 남자들을 보면서(그렇다. 여성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리는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와 조선어가 혼재된 단어 뭉치들을 끝없이 쏟아내는 이상을 보며 '퀵마우스' '돌아이' 노홍철이 떠올랐고(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9월 9일에 노홍철 씨가 연극을 관람하러 왔다고 한다), 점잖게 중심을 잡아주면서도 여자 문제에 있어 서툴고 찌질한 모습을 노출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박태원은 유재석을, 겉으로 소심해보이지만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무려 '혈서'로 사랑을 구하다 퇴짜를 맞는 양가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초기 정형돈 캐릭터가 연상되기도 했다. 일부러 끼워맞춘 감도 있지만 어찌됐든 집단에서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상호보완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전체적인 조화-케미를 빚는데 정지용, 김기림, 김태환 또한 극화되었다면 어떤 캐릭터로 구인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상과 박태원이 술자리 등에서 만담 콤비처럼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하니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30년대 초반 제비다방으로, 흠 그러니까 오감도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1934년 즈음으로 가보고 싶다. 현재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 문단의 구라 3대장은 황석영, 성석제, 김영하 라고 하는데 한국(현대)문학사 야사에 술자리에서 문인들의 언행이 기록된다면 한국문학이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성기웅 연출가는 낭독극이 아니라 '연극'이기에 대사에 치우진 무게중심을 어떤 식으로 균형을 맞출지 고민한 결과 폐병에 걸린 이상과 김유정이 방에서 고통에 신음하여 처절하게 뒹구는 행동이라든지, 김유정과 이상이 각각 방과 감옥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모습들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생각하면 이상의 시나 박태원, 김유정 소설의 유명한 대목들이 인용될 법도 한데 연극은 글이 아닌 '말'에 집중해 식민지 시기 입말을 비롯한 소리들을 무대에 옮겨놓는 데 주력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소리의 정치>의 저자 이화진 선생님에게 자문을 많이 구했다 하고, 성기웅 연출가 자체가 엄청난 자료를 쌓아 놓고 고증에 심혈을 기울이는 성향이라 설명해주셔서 이렇게 역사극을 무대에 올리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그 노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메우기 위한 상상력의 고투가 필요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본 구보 씨 시리즈였는데 시리즈와 함께 해온 관객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해리포터나 비포 시리즈가 그러하듯 관객들이 구보와 이상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감각을 공유한다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문학천재들과 경성살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마음 속으로나마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서울이라는 곳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대사가 쫀득쫀득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사에도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소소한 재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라디오극을 만들 때 '수공업'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낸 온갖 효과음들을 보고 들을 때의 재미가 쏠쏠했고, 84년 '미래'를 예상해보는 구보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한강 변에서의 괴물의 출현을 예언하는 대목 등 빵빵 터질 수 있는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문학덕후들만이 웃을 수 있는 지점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와 같은 연극 및 문화콘텐츠- 장르 간 번역이 좀 더 활발하게 이뤄지길 소망하게 되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뮤지컬을 기대하고 있다.)

 

 

 연극의 영어 제목은 From the 20th century인데 20세기로부터 온 편지의 마지막 대목이 일제의 중일전쟁 및 총동원 체제하에서 소년이 자원입대를 하고, 김유정과 이상이 죽고, 박태원이 검열로 인해 창작활동은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번역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구본웅과 박태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 갈 길을 가는 장면인 걸 보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블랙리스트를 통해 예술가들의 입을 막으려 했던 국가권력의 횡포가 있었던 걸 보면 그때에 비해 우리가 얼마만큼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오늘날 예술가들의 지위는 또 어떠한가. 문학은 또 어떠한가. 20세기에 그들이 남긴 글에서, 그들이 했던 고뇌와 좌절, 꿈과 희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읽어내야 할까. 사실 이런 커다란 질문들 앞에서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세심하게 작품을 읽었더라면 좀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영화가 아니라 연극인지라 재관람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내게 <20세기 건담기>는 작품 속 인물들이 극화되어 노는 모습을 봤다는 데 만족감을 느껴야 하는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있어 <20세기 건담기>에서 얻은 최대의 수확은 김유정과 박태원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만약 문학에 관심이 없는 친구와 동행했다면 그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구인회 인물들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 궁금해진다.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가는 김에 김유정 문학관에 들려야겠다. 가는 길에 한컴 타자연습을 접했던 '점순이네 암탉'과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쓰여진 작품이라 외우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지 못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소리내어 읽어보리라. 이제는 <마의 산>과 같은 작품이 소설의 정수라는, 그래서 전반적으로 세계문학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한국근대소설이란 도식을 갖고 있지 않으니 한국어로 차려진 풍요로운 밥상을 맛있게 먹을 차례만 남아 있다.

(사진출처 : 두산아트센터)

p.s 더불어 <20세기 건담기>를 참고해 팟캐스트를 만들려는 계획을 다시 추진해볼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수원사람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수원에서 살게 될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골목골목을 누비고, 밤 8시가 넘어 캄캄해져 조급한 마음으로 가슴이 터져라 집까지 뛰어간 적이 있고, 문방구 앞에서 딱지, 미니카 등 모르는 아이들과 같이 놀고, 초3 때 비슷한 또래의 아이에게 '씨팔' '개새끼' 같은 욕을 처음 배웠고, 아빠 따라서 몇번이고 다녔던 숙지산(의 족구장), 팔달산에 올라가 아이들과 드래곤볼 상황극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 화서동, 인조잔디가 깔리기 전 흙바닥에서 점심시간이면, 심지어 쉬는 시간 10분에도 나가서 뛰어놀았던 율전초등학교, 성균관대를 가로질러 다녔던 20여분 정도의 정천중 통학길, 밤꽃 향기가 풍기는 구간이 있었던 50여분 정도의 동원고 통학길, 피씨방들, 친구네 아파트들, 인근에서 인조잔디가 가장 먼저 깔렸던 상률초등학교, 북수원도서관, 얘들과 가끔 가곤 했던 북수원 온천, 천천동의 학원가, 저녁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걸었던 화성행궁-초3?초4 때 참여했던 사생대회도 여기서 했었다, 고등학생까지 거의 유일한 영화관이었던 수원cgv, 양념감자(양파맛) 먹으려고 5살 정도였던 여동생 손을 잡고 갔던 화서시장의 롯데리아, 가족들과 운동하러, 자전거 타러 갔던 서호공원, 비행청소년을 만나 삥 뜯길 뻔했던 지동 시장,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만석 공원(고3 때 친구들이 비행청소년들에게 핸드폰과 MP3 등 전자기기를 다 뺏긴 바 있는), 광교산 보리밥, 막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 홍등가를 지나 1시간 동안 걸었던 새벽 길, 수원국제연극제를 보러 갔던 정자동의 SK아트리움, 이름만 들어본 파장동-우만동-고색동-오목천동-영화동... <문라이트>-한의원-나혜석거리를 만나봤던 인계동, 경기도문화의전당 공연을 보러 몇 번 방문한 적 있는 영통, 그리고 곧 열릴 수원재즈페스티벌을 구경하기 위해 최초로 방문하게 될 광교신도시. 

 

 20대 초반을 함께 한 대전이란 도시와의 추억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대전 엑스포 이응노미술관, 탈북다문화멘토링 친구와 함께 갔던 카이스트, 유성온천에서의 온천욕과 오모리 찌개, 대전 아트시네마-좋은 영화들을 많이 봤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사요나라, 안녕! 용문객잔, 미치광이 삐에로 등등등-, 선뜻 자신의 보금자리 한켠을 내줬던 후배의 자취방, 자동차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렸던 혜화문화관 옥상, 나만의 노래방이 되어주었던 용운터널, 복도훈 선생님의 강추로 먹게 된 농민순대, 교수님 차 타고 다녔던 원미냉면, 시 모임 '시시'에서 갔던 탄다 디비라- 대패삼겹살 집, 튀김소보로 성심당, 가끔 걷곤 했던 도시 대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에 지분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부암동, 숱하게 들렀던 국현미에서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빌 비올라의 <트리스탄의 승천>과 <불의 여인> 이때를 꼽을 것 같다, 시청 교동 전집, 광화문에서 세월호 천막과 탄핵 시위, 을지로 모듬순대, 지인의 옥상에서 올려다봤던 별들Estrella, 2010년 1월 뮤즈의 공연을 시작으로 몇 번 공연을 보러 갔던 올림픽공원, 2008년 내 생애 첫 콘서트였던 에이브릴 라빈 3집 내한공연을 봤던 악스홀(yes24 라이브홀), 국현미-서울시립미술관을 몰랐던 시절에 다녔던 한가람미술관, 청년 할인이 끝나기 전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예술의 전당, 이제 일산으로 이전하면서 갈 일이 없게 된 매봉역의 EBS 사옥에서 봤던 <스페이스 공감>-충격으로 따지면 잠비나이 1집 공연이 최고였지만 감동으로 따지면 누구를 꼽을 수 있으려나- 대학로에서 만나 성북천을 따라 고대 극회동아리 동방까지 갔던 밤 산책, 모이면 3~4차까지 가곤 했던 스무살의 술자리, 외대 역 근처에서 블로그 이웃들끼리의 회동(달팽이 님의 환대), 석계 역에서 먹었던 딱딱한 떡볶이와 곱창볶음, 날 좋은 날 걷기 좋았던 돌곶이 역에서 한예종 가는 길, 고대 생활도서관, 법학관 옥상에서 먹었던 피자, 맥주와 소시지가 맛있었던 독일 주택, 이제는 신촌에 사라지고 혜화에만 남은 도어즈, 이제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친구를 보러 들렀던 합주실, 알라딘 중고서점들, 이음책방, 종로서적이 들어서기 전에 애용했던 종각역 반디앤루니스, 세계적인 작가들과 석학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교보생명 23층 컨벤션홀, 가장 문학적인 체험을 했던 북촌 창우극장,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극장 위치를 찾지 못해 몇 번 표(생긴 표이긴 했지만)를 날렸던 대학로, 전국고등학교 독서감상문말하기 대회? 참석차 두 번 들린 바 있는 서초동, 들뢰즈 사후 20주기 학술행사 보러 처음 가봤던 서울대, 샤로수길 베트남 음식, 술 취해서 들어가 있었던 신촌의 어느 PC방 화장실- 알라딘 중고서점 대학로점 화장실 - 신촌 우드스탁 화장실 ... 종각? 종로 쪽 포장마차에서 외국인 한예종 영상원 교수랑 동국대? 영화과 교수랑 술 마시고 김승옥 서울 1964 겨울 얘기하다가 토함 - 첫 번째 구토부터 올해 삼일절 잭 다니엘 붓다가 한 구토까지... 조성룡 건축가와 함께 구경했던 선유도 공원, 신형철 평론가에게 싸인을 받았던 서촌 이상의 집, 김경주 시인을 처음 만났던 상수 이리 카페, 잠실 종합운동장, 삼각지 선방, 남산, 동국대 양 적고 맛 없었던 학식, 등록금 인하 현수막(2011), 아트하우스 모모 - 캐롤, 파우스트, 만신, 나의 시 나의 도시, 헤르보르 이야기, 타인의 삶, 공동정범, 낙원상가 앞 1500원? 2천원 짜리 국밥, 안암 참치무한리필, 학림다방, 압구정cgv 늑대아이 gv 이동진, 씨네큐브 미라클 여행기 허철(곧 만나게 될 김종관 정은채), 상상마당, 카페 꼼마, 돈키호테의 식탁, 명동역 씨네 라이브러리 외국영화잡지, 빨간책방 카페 이동진, 합정역 홈플러스, 인문카페 창비(합정 시절, 망원 시절), 사당 양꼬치, 구로cgv 베트남영화제, 광장시장 파전 떡갈비 족발?, 수유너머/수유너머104, 안국동 W스테이지 열린연단,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서촌 독서모임을 진행한 적 있는 한옥식 카페... 막차가 끊긴 사당, 막차가 끊긴 구로, 수원역, 병점역, 금정역? 여의도 KBS 탑밴드 로맨틱펀치 등등, 여의도 2만원 짜리 노래방, 신촌 찜질방, 용산 asus 서비스센터, 용산 아이파크 스타리그 4강전 이제동vs이영호, 이태원 Rabbit hole, 이태원 red rock 생맥주, 홍대 미대 실습실, 연대 도서관 대학생고전읽기 토론대회?, 굽은다리역, 노량진? 옥탑방 올리브, 불광역 혁신파크, 푸른역사아카데미, 통인시장 튀김떡볶이, 홍대 레드빅스페이스, 노랑통닭, 썬더치킨, 건대 석촌호수 슈퍼문, 아트앤스터디, 대안연구공동체, 명지대?, 중앙대, 한양대 레드벨벳?, 서강대 맑스코뮤날레, 성공회대 맑스코뮤날레, 서강대 카페 숨도, 산울림 소극장, 대학로 나온씨어터, 연우소극장, 명동프린스호텔 별관 황현산 조재룡 보들레르 말라르메 한용운, 대학로 예술가의 집 김중혁, 황정은, 오은, 박준, ......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추억-Adieu, Paradise. 서울아트시네마가 서울극장으로 이전하기 전, 낙원상가 4층에서 <우리들>을 보았다. 개봉했을 때 놓쳤으나 어떤 기획의 일환이었는지 몰라도 아트시네마에서 단발적으로 상영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마 일요일로 기억된다. 생각보다 극장에 빈 자리가 많아서 아쉬움이, 예상 외로 나이대가 있으신 분들이 많이 오셔서 놀라움이 일었다. 영화 상영 전 내 주변에 앉았던 관객들의 대화와 영화 상영 이후 엘리베이버에 동승한 중년 부부의 대화는 주로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와 공감으로 이뤄졌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질문의 책>에서 네루다가 던졌던 질문들을 알게 모르게 스스로에게 던지며, 최초의 순연한 마음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려 간지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한데 그 마음을 움직였을 때 오는 느낌이 너무 망연해서 설핏 설움이 닥쳤을 지도.

 14년에 아트시네마를 자주 찾았다. 14년 겨울에 불현듯 걸려온 전화를 끊지 못하고, 1시간 정도 통화를 하는 바람에 여차저차해서 공연 관련 멤버십에 가입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입선물 식으로 끊은 뮤지컬 <카르멘>은 성에 차지 않았고(바다 대신 차지연 이 카르멘으로 공연하는 분을 봤다면 조금이나마 만족도가 올라갔을 것 같지만), 후에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공연이 카르멘과 같은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2개월에 한 번씩 열리는 콘서트는 몇 번 가지 못했다. 박재범-그레이-로꼬, BMK, YB 정도가 생각나는데... 두 달에 한 번씩 스트레스 풀자는 심산으로 가입했으나 시간이 안 맞거나 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아 결과적으로 돈을 버렸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쌓였던 ...

 그나마 이벤트 식으로 연극, 영화, 전시 등의 티켓을 추첨을 통해 줬는데 아무래도 경쟁률이 낮아서 그런지 아트시네마에서 영화 볼 기회가 많았다. 아쉬운 건 1인 2매였으나 대부분 1매를 버렸다는 것. 매표소로 향하는 사람을 붙잡아 표를 줄까도 생각해봤지만 고작 해야 눈에 잘 띠는데 티켓을 올려놓고 온 게 전부였다. 미국으로 유학 간 Y와 <안드레이 류블료프>를 같이 본 기억(나는 GV까지 듣고, 그녀는 영화가 끝난 다음 가버린 기억), 순천에서 온 친구 J와 파졸리니의 <종이꽃> 단편(아마 제목이 종이꽃이었을 것이다. 로마? (혹은 파리)의 거리와 카스트로, 정치인들의 이미지가 몽타주되면서 낯선 감각들을 촉발시켰던)과 강도와 살인사건으로 당대 이탈리아 사회의 어두운 면을 풀어낸 장편을 같이 본 기억 등이 동반관람의 몇 안 되는 추억들이다.

<철의 꿈> <거미의 땅> 전위적인 한국의 다큐멘터리들도 좋았고, <바이 바이 몽키>(마코 페레리), <거울의 여자들>(요시다 기주) 같이 평생 이름 한 번 들어보기 힘든 영화를 보기도 했고, <솔라리스>를 바로 이 극장에서 봤으며,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GV로 정성일 평론가를 처음으로 영접했으며(질문해주신 분 중에서 영상원은 아니지만 한예종에 다니신다고 밝히신 분이 학교건물이 있던 터가 예전에 고문실로 쓰여서 그런지 땅을 파보면 유골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비록 나는 조는 바람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코언 형제의 <블러드 심플>을 보기 위해 모인 영화학도들, 영화인들 - 한예종 점퍼 등 -을 보며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각기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게 문학작품의 낭독이나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 모인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고, 극장에서만 두 번 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을 처음 본 극장이 이곳이었으며, 마이클 만의 <히트>를 틀 때 지금까지 극장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큰 음향으로 인해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으며(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수준... 영화를 보고 난 후 얼마간 귀가 멍멍하고, 이명 같은 게 들렸을 정도로. 사실 난 <히트>보다 <콜래트럴>을 더 좋아한다. 그래도 <히트>에 어렸을 때 재밌게 본 <세인트>의 주인공 발 킬머가 나와서 좋았다. 또 다른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기수 브라이언 드 팔마 최고작으로 나는 <스카페이스>를 꼽겠다. <언터쳐블>도 괜찮았지만. <미션 임파서블>을 다시 보면 순위에 변동이 있을 수도?!) 모두 낙원에서의 일이다. 왕빙과 더불어 끝까지 다 보는 게 도전이었던 자크 리베트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은 낙원인지, 서울극장인지 살짝 헷갈리는데 아마 낙원일듯. 중간에 가야 해서 그랬는지 가끔 의자들 옆 복도에 서서 영화를 보던 기억 또한 낙원 시절만의 전유물이다.

 

 

 서울에서 잠을 잔 적이 별로 없다. 날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첫 차 타고 집에 와서 잤으니까. 데이트는 서울에서 했지만, 사랑은 수원에서 나눴다. 아마 서울에서 살았다면, 서울에 내 집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있었다면 많이 달려졌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서울이란 무엇인가

 

 나는 수원사람이다. 그래도 24살 때까지 살았던 집이 성대역 5분 거리여서 지하철 타고 많이 돌아다녔다. 지하철에서 읽은 페이지수만 따져도 몇 십권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대구나 부산 사람처럼 맘 먹고 서울구경을 하는 여행자tourist는 아니지만 밤늦게 한강에서 운동을 하거나 홍대/상수/망원 쪽에 아침에 잠옷 차림으로 나와서 커피를 마시는 현지인 또한 아니다. 항상 막차시간을 의식해야 하고,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의 직선적인 동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非산책자. 강남이나 신촌에 가면 내가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는 외부인의 정서를 강하게 느낀다. 소위 '문화의 거리'로 조성된 번화가를 지날 때마다 이곳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적 수단이라 간주하게 된다. 그건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 받는 인상과 거의 동일한데 전반적으로 이런 장소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번화가의 스펙터클한 규모가 사람들을 '군중'으로 소외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번화가는 항상 최신의 새롭고 화려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기에 여기서 역사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지난한 일이다. 오사카 도톤보리를 갔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차이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미학화시키면서 예술의 타자성을 자본의 동일성으로 흡수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하지만(서동진 등) 도톤보리에서 내가 마주한 건 메트로폴리스의 번화가, 고유명사가 아닌 어떤 일반명사적 stereotype이었다. 차이, 타자, 나를 변화시킬 만한 낯선 경험에 경도되어 있는 그대로의 여행지를 보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본적인 것'이라 정체화된 기호에 대한 소비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인터넷쇼핑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기에 '여행의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걸 절감했다. 그건 고향에서, 실상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익숙하기만 한 곳에서 요구될 필요가 있는 사안이었다. 

 

 서울의 역사를 다룬 책에 관심이 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래 신간 목록에서 도시 인문학 혹은 인문지리학이란 카테고리로 분류될 만한 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산책자(만보객)의 시선으로 파리를 탐사했듯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를 비롯해 문학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서울을 탐사한 류신 교수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방민호 교수와 함께 걷는 문학도시 서울'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방민호 교수의 <서울 문학 기행>, (더러운 서울지상주의!!) 부산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부산은 넓다> 등 도시라는 풍부한 콘/텍스트에 주목하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 아닌 공간, 아니 공간space이라기보다 장소place에 주목하는 시선은 학계에서 '공간적 전회spatial turn'이라 불리는 흐름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 연대기적 서술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공간은 시-공간, 시간의 부산물 격으로 따라오는 일종의 배경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속성을 지니는 시간에 반기를 들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의 속살에 새겨진 문자를 읽어내는 데 퍽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못했지만 항상 중력을 매개로 공간의 피부인 땅과 함께 호흡했기 때문일 것이다.

  

 I SEOUL U. 서울을 고정된 실체로서 명사가 아닌 역동적인 행위성의 동사로 표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무슨 뜻인지 한번에 와닿지 않아 약간의 질타와 비판을 받은 슬로건이다. 나는 너를 서울한다. 나는 너에게 서울한다. 각자마다 정의가 다를 것이고, 이 해석의 자유와 다의성을 최대한 폭넓게 끌어안고자 하는 의지가 이 슬로건에는 내포되어 있다. 행정구역으로 경계가 확정되어 있는 지리적 공간으로서 서울이 아닌 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매개가 되어주었던 인문지리적 장소, 문화적 미디어로서 서울. 그 서울의 가장 깊은 내력을 살펴보기에 몇백 년전부터 국가의 중심적인 장소로 사용된 문화재를 다루는 이 책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2. 종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1권은 종묘를 표지로 삼고 있다. 덕수궁, 경복궁은 현대미술관 나들이 겸 자주 가는 데 반해 책에서 다룬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은 가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에 종묘하면 종묘제례악 같은 행사가 먼저 떠오르고, 평평한 공터가 뒤따라 연상되었다. 종묘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 종교행사가 이뤄진 장소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해서 종묘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원인을 따져 보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유교가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의 이미지보다 일상 생활에 스며 들어 있는 생활규범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긴 하지만 유교사원에 찾아가 절대자를 경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번 겨울에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숱하게 봤던 성당들은 아직까지 문화유산이나 관광지 이전에 종교기관으로 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종묘는 그렇지 못하다. 현재완료 진행형(?)과 과거완료의 차이랄까.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은 바르셀로나 도심 중심지에 위치해 멀리서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멋이 있지만 종묘의 경우 숲속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위치선정은 세속과의 단절을 통해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데 도움을 준다. 유교문화권 나라들 중에서도 종묘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멋이 있기에 '종묘 예찬'으로 책이 시작되는 것은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종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살펴보자.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p16

 

 이 종묘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건 70년대라고 하니 아직 우리에게 종묘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종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도록 하자.

 

 종묘를 종묘답게 담아낸 최초의 건축사진집은 사진작가 임응식의 <한국의 고건축>(광장 1977) 3권 종묘편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건축가 김원은 종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묘의 좁고 긴 평면 형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펼쳐진 조형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기단은 대문으로부터 점차 높아져서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 건물 역시 기품 있는 자세로 그 분위기의 주역이 된다. 이런 건축적 표현과 공간의 구성은 대단히 세련된 솜씨로 그 세련미는 겉으로 뛰어나게 돋보이기보다는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어서 그 공간적인 감동을 더욱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건축으로서 이런 정밀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조형의지의 발로이기보다는 영원에는 염원이 격조 높은 솜씨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빚어진 일품이다. 조형의지라는 것은 인간적인 한계를 갖지만 어떤 염원이 만든 작품은 그 한계를 초극한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p20

 

 이 설명을 읽었을 때 종묘는 서양의 고딕식 성당의 수직적 초월과 대비되는 수평적 초월, 하늘로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게 아니라 길게 뻗은 건물을 통해 땅과 하늘을 중간에서 매개하는 것 같은 안정감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종묘 정전의 본질은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고 한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p21

 

 동양적 미학을 논하면서 비움의 미학, 여백, 느림, 空 등이 자주 호명되곤 하는데 글을 보고 가을이나 겨울, 특히 눈 덮인 종묘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무도 발도장을 찍지 않아 굉장히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의 장막으로 덮여진 종묘. 살얼음판을 밟으며 나아가다가 풍덩! 빠져 침묵의 두께가 두터워지는 경험을 상상하게 된다.

 

 승효상이 본 월대. 건축가 승효상은 종묘의 박석을 두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p21

 

 정전 앞 월대.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넓은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이 월대가 있음으로 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더욱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p22

 

 <살롱안드로메다> 팟캐스트에서 불교도상학 편을 재밌게 들었다. 사찰을 좋아하는 나지만 불교건축과 미술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다시피했던 내게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해 따라가기가 어려웠지만 딱 하나 일주문이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를 역할을 하고, 바로 이 '문'을 넘어가는 의례적 실천을 통해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성과 속>에서 지적했듯) 속에서 성으로 진입하여 사찰에 당도하기 전까지 마음가짐을 바로 할 수 있는 준비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종묘 정전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월대가 일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나는 이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에서 그가 설계한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에 다녀왔다. 정말 좋았다) 또한 종묘 방문 당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따.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다 느낄 텐데."

 

 신문에서 박석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도 그는 성큼 내딛지 않았다. 안내원이 '올라가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니, 아직은"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큰며느리에게 말했다.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p25

 

 

   

종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 근거였다.

 (...)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의 [고공기]에서는 도읍(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고 했다. 이를 '좌묘우사'라 한다.

 사직에서 사는 토지의 신, 직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p28

 

 종묘가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확실하게 학습했다. 그렇다면 종묘를 지은 건 누구일까? 물론 왕의 명령이 하달되어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지었겠지만 정확히 어떤 왕에 의해 종묘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며 종묘의 면모를 일신했다. 태종은 일(-)자 형태의 긴 건물 양끝에 월랑을 달아 짧은 디귿 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p31

 

 이럴 때 보면 역시 윗대가리, 아니 우두머리, 아니 정치적 지도자를 잘 선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중국 황제는 어땠는지 그 사정을 모르겠으나 조선의 국왕 역시 만만찮은 중압감을 견뎌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와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군자,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과 같은 이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의 국왕들은 흡사 아이돌 연습생과 같이 강도 높은 트레이닝과 감시 속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다. 그 무게를 견디고 훈민정음과 장영실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을 꽃피우며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과 조선 제2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정조가 있었는가 하면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도세자와 권력다툼에 의해 독살로 희생된 이가 있었다. 경복궁과 같은 궁궐을 돌면서 거기서 살았던 왕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훌륭한 고궁 관람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좁게는 타인과, 넓게는 세상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보여주듯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첨예하고 치명적인 갈등을 권력들이 충돌하는 왕실의 이야기들이 보여주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유물, 화석이 아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교하며 겉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속내,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낸 바 있다. 왕뿐만 장희빈, 대장금, 허준 같은 이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 끄는 면이 있지만 말이다.

 

 태종은 종묘에 경건하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게 하기 위해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했따. 그 당시에 이처럼 건축 공간에 주변 환경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p32 태종 매우 칭찬해!

 

 유홍준 교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따라가고 있자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에서 열심히 해설을 듣고, 듣는 사람들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 가족성당에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해설사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경청을 하다가 해설사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은 분명 익숙한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 설명을 꼭 들어보고 싶은 경우가 아니면 잘 안 듣는 편인데 세계 각국의 언어로 인류의 유산이라 볼 수 있는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모양새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았던 덕택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귀동냥으로 잠깐잠깐 설명을 주워듣기도 했다. 특히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기계에서 나오는 영어해설이 띄엄띄엄 해석되었지만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는 현대미술에 다가갈 수 있는 해석적 발판들을 얻을 수 있어 그냥 내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상하는 주관주의적, 직관주의적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역시 공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속 얘기가 옆으로 새서 좀 그렇지만 한 가지만 더 얘기한다면 한가람미술관에서 어느 수집가의 컬렉션 전시에서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두 점 봤는데 다른 작품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나를 압도했던 포스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로만 채워진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다. 훨씬 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람한지 네 시간 여가 지난 시점이었기에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비슷한 류의 추상회화들을 많이 본 상태에서 마크 로스코 작품만의 본질에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읽은 잔상이 남아 있어 '마크 로스코'라는 표상 자체에 강렬하게 반응했던 한가람미술관 때에 비해 이미 그것을 영접한 바 있는 상태에서 순수한 미술품으로서, 색깔 덩어리로서 작품을 만났지만 그것에 조응할 만한 내면의 뭔가가 부재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문화재의 경우 정말 배경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순수하게 외형적인 모양새만 보는 게 커뮤니케이션의 전부였는데 그 조형적 형식에 깃든 정신적, 사상적 내용이라들지, 건축물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라들지, 콘텍스트가 풍부해지면 텍스트 자체도 좀 더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처음엔 백지를 채워나가는 상황이라 팍팍 채워지는 느낌이 있어 재밌기도 하고, 동시에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는 느낌이라 막막하기도 하지만 연습을 통해 심미안을 기르고, 예술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시작이 반이라는 긍정적 마인드로 앞으로 즐겁게 읽어나갈 생각을 해본다.

 

 다른 무엇보다 종묘에 대한 설명이 와닿고, 읽자마자 이해가 돼서 종묘만큼은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과 혼을 담은 신전이다. 그 신전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문화력에서 나온다.

 (...)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운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의 건축적 표현이다.

 이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끝을 짧은 월랑으로 마감하여 하나의 건축으로서 완결성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는 이 건축에 친근함을 가져다준다. 동서 월랑의 구조는 대칭이 아니다. 하나의 열린 공간이고 하나는 막힌 공간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p46

 

 하나 더,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 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p52

 

 이 글을 읽고 종묘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이가 있을까.

 

 답사기를 읽으며 든 생각 : 정조와 같은 왕들이나 문장가들이 지은 문장을 음미하는 재미는 탁월했다. '문화유산답사기'가 왜 스테디셀러로 세월을 이겨내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자의 박식함이 책 한 권을 어느 한 장르로 고정시킬 수 없는 종합교양서적, 르네상스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건축, 역사, 문화, 문학, 여행, 예술을 넘나들며 한 권 안에 녹여내는 내공하며, 이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꼼꼼히 정독해야 했지만 나처럼 이쪽에 문외한인 독자의 경우 초벌구이하듯 가볍게 넘겨보고, 직접 책에 소개된 장소에 가서 문화재 해설사의 해설을 듣거나 안내판을 읽고, 산책하면서 구경한 이후에 모르는 단어 사전으로 찾아보듯 답사기에서 궁금했던 부분을 찾아 읽는 것도 괜찮은 답사기 사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3 창덕궁

 

 

4 답사기를 기약하며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기를 좋아한다. <세계테마기행> 같은 여행 다큐멘터리를 통해 현지 모습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는 데서 오는 쾌락이 있지만 몇 장의 사진만 단서로 두고, 나머지 부분을 글을 통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오는 쾌락의 고유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각문화의 홍수 속에서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수많은 이미지들에 파묻혀 사는 오늘날 오로지 활자와의 교감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은 상상력의 이용과 발현이 그 어떤 화려하고 독창적인 상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응시와 수용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일임을 체험케 한다.

 그렇다고 책을 통한 상상에만 만족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화유산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덕궁 후원 혹은 창덕궁의 어느 부분을 자주 들릴 수 있음을 서울살이의 최대 즐거움으로 꼽기도 했다. 나 역시 최근 들어 기분이 내킬 때 수원 화성행궁을 찾곤 한다. 일상으로부터 한 발짝 비껴 서 있는 건축물과 조경이 빚어내는 다른 기분과 분위기가 있기에 그렇게 일상에 변주를 주고 싶을 때 산책장소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 선희>에 경복궁이 나오듯,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화성행궁 일대가 등장하여 가끔 마음 속으로 영화를 곱씹으며, 1부와 2부의 차이에 대해, '지금'와 '그때'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독서골든벨 준비를 위해 (정작 그 행사는 신종플루의 유행으로 취소되었지만. 그리고 소독기를 열심히 썼던 나는 신종플루에 걸렸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를 재밌게 읽었으면서 '알면 사랑한다'는 등식에 따라 생긴 내 고장, 내 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국뽕'은 좋은 것 같다. 전국 국토순례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식민지 시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군산이라든지, 작년에 최고의 기분을 선사해줬던 천년고도의 경주, 부석사, 낙산사, 겨울의 오대산 월정사, 해인사, 제주도 등등 여권을 들지 않고도 '멀리'/깊게 갈 수 있는 여행을 앞으로 많이 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담 : 한정판 (2disc)
이현주 감독, 이상희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작년에 인디스페이스에서 본 직후 작성한 메모. 올해 초 영상자료원에서 감독, 주연배우 두 분과 함께 GV 행사가 있음을 확인했으나 결국 가지 못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더불에 작년에 봤던 '독립'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은 영화. 웬만하면 예전에 쓴 글을 건드리지 않는 편인데 인스타그램에 직접 한 자 한 자 적느라 비문이나 눈 뜨고 봐주기 힘든 부분이 있어 손을 좀 봤다.

1 재작년 여름 어느 시인의 특강을 들었다. 시인이 출강을 나가는 예대에서 수업하는 방식과 같은지 다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뭔가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문장을 어떤 식으로 쓰라 일차원적으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지, 감각의 사용법과 시의 구성원리가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시인은 얘기들(학생들을 이렇게 부르신다)에게 연애를 권한다고 했다.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애인이 자주 바뀌는 사람을 지칭했는지,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만드는 소모적 관계양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을 지칭했는지 제3의 다른 무엇인지... 그때는 연애 잘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조차 안 잡혔는데 이제 좀 알 것 같다. 자기 욕망을 잘 알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 자기랑 잘 맞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사람, 잘 반하고 잘 거기서 빠져나오는 사람, 뭐 다 틀린 소리일지도 모르겠으나 내 생각은 그렇다. 연애를 잘한다는 것은 무튼 한 사람과 오래오래 잘 사귀는 것보단 다양한 사람과 사귀면서 자기를 알아가고 자기 욕망과 윤리적인 ㅡ 진실된 관계를 맺는 사람일 것 같다.

 

2 연애담에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눈에 띠었다. 연애 유경험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애'담'이라는 평가는 그만큼 영화가 연애의 보편적인 특질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이동진 평론가가 <캐롤>에 있어 루니 마라가 케이트 블란쳇에 끌리는 과정이 물리학적 법칙에 따른 역학적 운동인 것 같다는 인상을 표한 바 있듯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연애에는 뭔가 인간의 주관을 초과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캐롤> <연애담> 영화들을 한 줄에 놓고 보니 공통점이 드러났다. 개방적이고 능동적이고 화려한 이가 자기 삶에 손써볼 방법 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폭풍 같이 사랑에 빠져 열병을 앓다 이별을 경험하지만 이로 인해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는 주체화를 통해 <캐롤>, <연애담>에서처럼 자신을 버린 연인과 재회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사랑을 예감하게 만들고, 사랑이 회복되지 않더라도 우주적 충돌collision에 버금가는 만남의 파장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 축이 크게 이동하는 결과를 낳는 식이다. 세 영화를 바탕으로 사랑에 빠지는 공식을 추출해볼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상대적인 차이의 관계에 따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공식화한다면, 즉 성격 등 범주를 구분해 혈액형보다 좀 더 과학적인 연애학을 기술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 인간학이라면, 무엇보다 과학적인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잉여가 남는 사랑을 다루는 게 예술의 소명이라면 양운덕의 <사랑의 인문학>처럼 문학적 감수성과 미학적 통찰력을 갖춘 글이 뇌과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다른 분야보다 더 뛰어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언제나 패턴을 탈구축하는 사건적인 성격을 띠더라도 사랑을 더 잘하기 위해, 사랑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되어야 하고,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 이럴 때 <사랑의 단상>의 구절을 인용해주면 딱 좋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말고 아는 게 없으니... ㅠㅠ -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세 영화 모두 레즈비언 퀴어 ... )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세 영화의 관계적 양상-역학과 내가 경험했던 연애가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아델-테레즈(루니 마라)-윤주(이상희). 그중에서도 학교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의 인간관계도 겉으로 보기에 원만해 보이지만 어딘가 결정적인 하나가 빠져 무료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윤주. 나 또한 윤주처럼 관계에서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노력하면 될 거라는 순박한 믿음을 가진 미숙한 노동자. 하지만 연애에서 진심을 더 많이 보여준 사람이 더 다친다는 말이 있듯 연애에 있어 성실한 노동은 사랑의 수확으로 이어지지 않는 편이다. 사랑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의 열렬한 구애에 결국 월계수 나무가 되어버리는 선택을 한 다프네의 비극적인 일화처럼 노동과 교환의 원리를 초과하는 소비와 탕진이 지배하는 에로티즘의 세계에서 힘을 써야 할 때 쓸 줄 알고, 빼야 할 때 뺄 줄 아는 기술자나 다른 방식으로 힘을 다루는 예술가들이 우세종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성실한 노동자들끼리 만나거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확고하게 감정을 주는 이에게 끌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연애에 있어 권력 차이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면서 사랑의 유지를 위협하는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 있다>일 것으로 기억되는데 박준 시인은 마음들 사이 편차-권력 차이의 양상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를 소묘한 바 있는데 범박하게 말하면 처음에 감정의 편차가 존재하더라도 '썸'타는 과정에서 혹은 연애 초기에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야 행복하고 건강한 연애로 진입할 수 있는데 더 좋아하는 쪽과 덜 좋아하는 쪽의 불균형적 구도가 역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면 서로 힘들어지는 소모적인 관계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노력을 하면 될 거라 믿고 열심히 사랑을 퍼붓는 쪽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맺히는 건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순애보적 사랑의 투사라기보다 사랑을 구걸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로 비치는 걸인에 가까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상대에게 이별을 먼저 고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짓되고 위선적인 태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착취하게 되겠지...   

윤주는 자기 마음 전부를 지수에게 쏟으려 하지만 지수는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연애감정에 적절하게 반응한다. 지수가 감정을 장악하고 컨트롤하며 감정의 격류 위에서 서핑을 하는 격이라면 윤주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아이처럼 지수의 사랑을 갈구한다. 지수에게 윤주는 일상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이지만 윤주에게 지수는 전부다. 비대칭적 관계는 더 사랑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덜 사랑하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지수는 윤주가 채워줘야 할 마음의 몫까지 자기 것을 쏟아 부으며 힘들어하고, 윤주는 내려가지 않는 시소 위에서 권태를 느낀다. 연애 초기의 좋기만 한 순간이 지나가자 서로의 차이가 수면으로 부상하고 더 사랑하는 이는 고통이 자기의 몫임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의 가시화 자체는 관계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문제는 관계의 비대칭성이 적당한 수준일 때 이해와 타협을 통한 차이의 평화적 조정이 가능하지, 비대칭성이 심하면 차이는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다툼이나 한쪽의 희생이 강요된다. 이 비정한 파워 게임에서 역전의 순간, 밀당의 변증법적 운동, 상호배려가 수반되지 않으면 사랑은 점점 파괴적으로 바뀐다. 타인을 집착하고 소유하려 들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거나. 지수가 만취해 집에 들어온 다음날 윤주는 지수가 전날의 일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직감하지만 추궁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사랑에 자신의 전부를 내던졌지만 그럴수록 식어가는 지수의 마음에 상처받으며 만신창이가 된다.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온 윤주가 저렇게 태어나서 저렇게 살아온 지수와 사랑하면 다르게 사랑할순 없었을 거라고. 첫사랑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흑역사로 생명을 마감하듯 지수의 마음은 별다른 사건 없이 식고, 윤주는 다시 아이였던 때로 돌아간듯 엉엉 울고. 지수에게 윤주는 연애상대 중 하나,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대상 혹은 외로움을 달래고 즐거움을 주는 상대였지만 윤주에게 지수는 대문자 애인, 자신의 사랑을 총동원해 전면전을 치뤄야 하는 대상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고 여자는 사랑받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는데 윤주와 지수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윤주와 지수가 레즈비언 커플이란 점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내가 마음이 끌리는 부분은 '연알못'과 '연잘알'의 연애, 그리고 그 연애의 수많은 내용을 특정한 의도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배열해 '연애담'으로 서사화하는 방식이었다. 윤주는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불쑥 등장한 윤주를 앞에 두고 고뇌한다. 배우 이상희는 표정으로 언어화될 수 없는 복잡하고 격정적인 내면을 그려낸다. 느리지만 진득하고 우직하게 오래 머무르는 내향적 인간... 미련하지만 차분하고 깊은 사람. 영화 마지막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기만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는 윤주를 보며 그녀가 앞으로 더 좋은 사랑을 하고 더 좋은 연인이 될 거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지수처럼 감정을 잘 표현하고 많은 사람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적확하게 써내려갈 것 같았다

3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쓰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윤주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듯 나 또한 친구들과 통화를 하며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상황을 납득하고자 했다. 우리가 주고 받았던 모든 말과 행동,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끝마치고 나면 헤어지자라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 올라왔다. 단념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어떻게든 매달려서 붙잡아야 하는 게 아닌지. 단념할 때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봐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닌지, 이별통보의 인풋에 단념이란 아웃풋이 별다른 중간과정 없이 바로 산출되는 게 맞는 건지... 내가 보기에 애매모호한 말들을 상대방에게 해석해달라고 부탁하고, 네 생각은 네 한정적인 경험세계에 근거한 주관적이고 견해에 불과하다고 윽박 지르며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친구가 풀어준 문제의 풀이과정을 되뇌이며 ... 친구의 시각에 입각해 카톡 대화 내보내기를 통해 얻은 텍스트들을 다시 읽고, 기억을 소환해서 재판에 세우고,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날 사랑하긴 했었는지는 여부는 차치하고, 현재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사실로 구성하고, 지금까지 숱하게 해왔던 것처럼 이 또한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노력들을 수행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별에 대처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어야 하는지, 끝없이 찌질해지는 속마음을 토하듯 후련하게 까뒤집어야 하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람으로 사람을 잊어야 하는지, 자해나 자살 같은 생각이 병리적인 낭만성의 소산이라는 판단을 거부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 나만큼 아프게끔 상처를 줘야 하는지... 썼다. 적었다. 그러면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쓰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씀으로써 내가 노트북 화면에 글자들이 적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누구도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더 이상 마음을 내비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동굴에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근신하면 되니까. 내가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던 건 산문으로도 커버가 되었기 때문일까. 결국은 납득을 했기 때문일까, 납득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때 쓴 글을 다시 읽지 않았다. 읽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니까. 단지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기 위해, 고통을 멈추고 지연시키기 위해 쓴 글이었으니까 제 역할을 다해 명이 끊어진 셈이었다.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이 지나 만남을 가졌고, 대화를 나눴고, 헤어졌다. 이별이 모양새를 갖추고 완성된 기분이었다. 만나줘서 고마웠다. 나 또한 이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줘서.   ​

​권희철의 낭독으로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몇 번 들었다.

<이별의 능력>을 몇 번 읽는 동안 누가 낭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애담>을 보며 이별의 거푸집을 만들었던 것 같다. 사실 거기서 논리적인 완성은 끝났지만 '실감'이 필요했기에 '마지막'이란 기치를 내걸고 만남을 가졌다.

돈 키호테의 식탁 방문기. 단체손님을 제외하고 첫 손님이라 해서 엄청난 서비스를 받았다. 소주를 마시면 홍상수 영화 속 찌질남을 재현할 것 같아 두려웠는데 식당의 품격이 찌질함을 봉인시킨 것만 같다. 다행이고 다행이다.(2016/12/16)  

릿터 3호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랜선 ㅡ 자아. 블로그를 열심히 하던 시절 친구와 나누던 얘기에서 이미 나온 개념이었다. 망각될 권리,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 제기 ㅡ 환기한 데이터화된 기억의 무한복제 가능성... 리벤지 포르노가 끊임없이 웹하드에 올라오고, 피해 당사자가 업체에 문의해 삭제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의 반복, 악무한. 술 먹고 트위터에 쓴 글이 계속 올라오고 '실수' 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 실수가 미디어 인민재판을 통해 세속적 차원에서 죄로 격상되는 상황. 글자 하나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강해서 그동안 sns에 긴 글 쓰기를 주저했다. 줄창 일기와 편지만 쓰다가 지치고 심심할 무렵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아마 최종적으로 블로그에 정착하겠지만)

예전에 좋아했던 친구와 1년 4개월 만에 만났을 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에게 니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 내 얘기를 왜 많이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는 '선'을 지켜가며 얘기했고, 공동의 기억이다 보니 내 얘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네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녀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 실패해 테러에 가까운 폭로나 범죄행위로 이어지는 사례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고전적 테제를 바탕으로 생각을 펼쳐나가고 싶다.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한다 는 루만의 체계이론도 흥미로운 아이디어 박스이다. 오늘날 미디어 플랫폼, 거기에 따른 글쓰기 및 정보의 유통방식, 시공간의 재구성, 이미지와 영상언어의 패권적 지위... 연애담을 보고 든 생각은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였으나 역시 그건 힘들 것 같아 연애를 하게 된다면 잘하자 로 바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좀 더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갖는 것? 낯선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짝을 찾아 나설 것? 내 욕망 ㅡ 무의식에 대해 더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것? 미용과 운동에 신경 쓰는 것?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습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기회가 희소하게 찾아오고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어마어마한 비경제적인 게 연애 ㅡ 사랑 말고 또 있을까. 직장인의 연애와 대학생의 연애는 연륜이나 경험을 배제하고 시스템상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사치, 사치롭기에 자신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청춘의 사랑. 연애하는 동안 '그녀her'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역시 좋은 영화였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랑, '에로스의 종말', 부정과 타자성이 빈사상태에 이른 안전한 만족과 쾌락의 교환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시대의 사랑. 개인적으로 영화 그녀가 퀴어 버전으로 나왔다면 또 어땠을까 싶다. 암튼 개인적으로 연애담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보다 좋았다. 좀 더 담담하게 감정을 꼭꼭 담아놓은 영화. 근래 본 베드신 중에 거의 최고 수준의 에로티시즘이 넘실대는 영화. 감독의 차기작과 윤주 역의 이상희 씨의 다음 작품을 찾아볼 것이다... (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다른 나라 혹은 선진국에 가면 그 나라의 좋은 면이 부각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편파적 관점이랄까. 적어도 내게는 독일이 각계 각층 인사들이 롤모델로 꼽는 킹왕짱 나라로 지난 몇 년 동안 회자되었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은 독일 대학의 학비와 유학생에 대한 독일 정부의 대우를 높이 샀다. 아이를 낳았을 때 지원되는 생활비, 보모 는 처음 들었을 때 꽤 쇼킹하기까지 했다. 비정상회담의 다니엘을 통해 노잼 이미지가 굳어지긴 했지만 아무말대잔치와 어그로 키배로 얼룩진 온라인상에서도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합리적인 토론을 이어가는 성찰적 면모가 한국에 비해 두드러진다고 하니 역시 칸트의 나라-철학의 나라라 불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은 공무원 생활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번역가로서 삶을 개척한 배수아 의 도시로, 유럽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고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핫한 곳으로, 페이스북 포스팅에 따르면 성폭력 또한 제일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지인이 베를린에서 1년 정도 생활을 하면서 만든 팟캐스트를 통해 베를린이란 도시와 베를리너로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집값이 비싸져 다른 도시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은 베를린에서 프랑스인 룸메이트와 함께 지냈는데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며 클럽으로 출퇴근했던 그녀의 마음이 이제 조금 이해될 것 같다고, 자기도 또 한 번 기회가 된다면 혹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문화예술의 도시, 가장 리버럴한 도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글로벌한 공간, <생각은자유>에 그려진 베를린 또한 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2 연구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1년 동안 생활하게 된 극작가/교수와 배우 부부(아마 아내가 배우였던 걸로 기억). 전반적으로 연극은 이 여행-체류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외국에 나오자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좀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독일사회를 거울 삼아 한국사회를 바라보게 되는 구도는 내게 굉장히 익숙했다. 싱가포르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나가야만 내부가 보이는 안과 밖, 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적 운동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싱가포르에 있는 한 달 동안만큼은 한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치, 사회 면의 기사들이 알게 모르게 행사하던 중력으로부터 풀려나 부분적 무중력 상태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무관하다는 느낌 - 마치 이전에 신자유주의 사회가 각자도생하게 만듦으로써 개인으로부터 공동체적 감각을 박탈시킨다는 지적, 바로 상대방의 고통과 불행이 나와 '무관'하다는 감각을 만든다는 지적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세 번째 출국만에 1달이란 생활 리듬이 교체되는 기간 동안의 타지 생활을 통해 모국어-모국과 이어져 있던 심리적, 정신적 탯줄이 끊어진, 실은 끊어진 건 아니지만 너무 익숙해져 느껴지지 않았던 텐션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의식한 순간이었다. 어쨌든 나처럼 고국에 대한 관심에서 풀려나는 경우와 외국으로 유학 간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이 종종 보인다는 '애국심 포텐'이 터져 정신적 고아 상태를 상징적 아버지와의 유대를 통해 극복하는 경우 두 가지 유형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애국심 포텐'이라 희화화시킨 감이 있지만(사실 극중에서 한인협회 관련 이들을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감이 있다. 보수라기보다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국뽕으로 말이다.) 사실 공동체적 감각의 각성은 중요한 문제이다.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경계가 해체되고, '한민족' 감각이 피부에 뿌리내린 세대들이 다 가고 나면 어떤 구호와 논리와 감각으로 우리가 공동체임을 자임할 수 있을까, 연대할 수 있을까. 물론 아직까지 민족주의의 문화적 유전자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미가 보이지만 베를린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304켤레의 구두 퍼포먼스를 하고, 탄핵 정국에서 시위를 하는 등 이역만리의 타지에서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시민권 여부를 떠나서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했다손 치더라도) 공동체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공동체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 다르게 상상된 공동체가 어떻게 도래할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3 ​혹자는 이 연극이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쳤다고 평가했는데 나 또한 일기와 기사의 조각들을 이어붙인 에세이 혹은 다큐멘터리를 읽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연출가/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걸 일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서술한 감이 있어 좀 더 작가적 관점이 투영되어 입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았다. '생각은 자유' 구호가 결과적으로 너무 나이브하게 들렸달까. 그건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작가이자 시민으로서 개입하려는 연출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문매체에 기고를 하고, 퍼포먼스를 조직하고 등등) 한 발짝 뒤에 서서 관찰자의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였달까. 한마디로 일반적인 의미의 '연극적'이지 않은 연극이었다. 다큐멘터리 연극 장르를 표방했다고 하나 지식인의 고뇌를 바라보는 관객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니 수평적, 민주적인 소통이 어려웠다고 할까. 가장 민주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연극의 장점이 어떤 부분에서 발현되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는 시간이 처지고 지루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이렇게 극적 사건 없이 일정한 톤으로 이어지는 연극치고) 소소한 재미와 유머가 흘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지난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가 함께 지나온 자리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s 그러고 보니 베를린'자유'대학... 베를린이란 도시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