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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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이란 무엇인가

 

 나는 수원사람이다. 그래도 24살 때까지 살았던 집이 성대역 5분 거리여서 지하철 타고 많이 돌아다녔다. 지하철에서 읽은 페이지수만 따져도 몇 십권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대구나 부산 사람처럼 맘 먹고 서울구경을 하는 여행자tourist는 아니지만 밤늦게 한강에서 운동을 하거나 홍대/상수/망원 쪽에 아침에 잠옷 차림으로 나와서 커피를 마시는 현지인 또한 아니다. 항상 막차시간을 의식해야 하고, 지하철역에서 목적지까지의 직선적인 동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非산책자. 강남이나 신촌에 가면 내가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는 외부인의 정서를 강하게 느낀다. 소위 '문화의 거리'로 조성된 번화가를 지날 때마다 이곳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적 수단이라 간주하게 된다. 그건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 받는 인상과 거의 동일한데 전반적으로 이런 장소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번화가의 스펙터클한 규모가 사람들을 '군중'으로 소외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번화가는 항상 최신의 새롭고 화려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기에 여기서 역사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지난한 일이다. 오사카 도톤보리를 갔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차이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상품을 미학화시키면서 예술의 타자성을 자본의 동일성으로 흡수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하지만(서동진 등) 도톤보리에서 내가 마주한 건 메트로폴리스의 번화가, 고유명사가 아닌 어떤 일반명사적 stereotype이었다. 차이, 타자, 나를 변화시킬 만한 낯선 경험에 경도되어 있는 그대로의 여행지를 보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본적인 것'이라 정체화된 기호에 대한 소비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인터넷쇼핑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기에 '여행의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걸 절감했다. 그건 고향에서, 실상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익숙하기만 한 곳에서 요구될 필요가 있는 사안이었다. 

 

 서울의 역사를 다룬 책에 관심이 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래 신간 목록에서 도시 인문학 혹은 인문지리학이란 카테고리로 분류될 만한 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산책자(만보객)의 시선으로 파리를 탐사했듯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를 비롯해 문학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서울을 탐사한 류신 교수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방민호 교수와 함께 걷는 문학도시 서울'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방민호 교수의 <서울 문학 기행>, (더러운 서울지상주의!!) 부산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부산은 넓다> 등 도시라는 풍부한 콘/텍스트에 주목하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 아닌 공간, 아니 공간space이라기보다 장소place에 주목하는 시선은 학계에서 '공간적 전회spatial turn'이라 불리는 흐름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 연대기적 서술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공간은 시-공간, 시간의 부산물 격으로 따라오는 일종의 배경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속성을 지니는 시간에 반기를 들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의 속살에 새겨진 문자를 읽어내는 데 퍽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하지 않/못했지만 항상 중력을 매개로 공간의 피부인 땅과 함께 호흡했기 때문일 것이다.

  

 I SEOUL U. 서울을 고정된 실체로서 명사가 아닌 역동적인 행위성의 동사로 표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무슨 뜻인지 한번에 와닿지 않아 약간의 질타와 비판을 받은 슬로건이다. 나는 너를 서울한다. 나는 너에게 서울한다. 각자마다 정의가 다를 것이고, 이 해석의 자유와 다의성을 최대한 폭넓게 끌어안고자 하는 의지가 이 슬로건에는 내포되어 있다. 행정구역으로 경계가 확정되어 있는 지리적 공간으로서 서울이 아닌 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매개가 되어주었던 인문지리적 장소, 문화적 미디어로서 서울. 그 서울의 가장 깊은 내력을 살펴보기에 몇백 년전부터 국가의 중심적인 장소로 사용된 문화재를 다루는 이 책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2. 종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1권은 종묘를 표지로 삼고 있다. 덕수궁, 경복궁은 현대미술관 나들이 겸 자주 가는 데 반해 책에서 다룬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은 가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에 종묘하면 종묘제례악 같은 행사가 먼저 떠오르고, 평평한 공터가 뒤따라 연상되었다. 종묘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 종교행사가 이뤄진 장소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해서 종묘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원인을 따져 보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유교가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의 이미지보다 일상 생활에 스며 들어 있는 생활규범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긴 하지만 유교사원에 찾아가 절대자를 경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번 겨울에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숱하게 봤던 성당들은 아직까지 문화유산이나 관광지 이전에 종교기관으로 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종묘는 그렇지 못하다. 현재완료 진행형(?)과 과거완료의 차이랄까.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은 바르셀로나 도심 중심지에 위치해 멀리서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멋이 있지만 종묘의 경우 숲속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위치선정은 세속과의 단절을 통해 성스러운 분위기를 갖는 데 도움을 준다. 유교문화권 나라들 중에서도 종묘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멋이 있기에 '종묘 예찬'으로 책이 시작되는 것은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종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살펴보자.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p16

 

 이 종묘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건 70년대라고 하니 아직 우리에게 종묘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종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도록 하자.

 

 종묘를 종묘답게 담아낸 최초의 건축사진집은 사진작가 임응식의 <한국의 고건축>(광장 1977) 3권 종묘편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건축가 김원은 종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묘의 좁고 긴 평면 형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펼쳐진 조형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기단은 대문으로부터 점차 높아져서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 건물 역시 기품 있는 자세로 그 분위기의 주역이 된다. 이런 건축적 표현과 공간의 구성은 대단히 세련된 솜씨로 그 세련미는 겉으로 뛰어나게 돋보이기보다는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어서 그 공간적인 감동을 더욱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건축으로서 이런 정밀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조형의지의 발로이기보다는 영원에는 염원이 격조 높은 솜씨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빚어진 일품이다. 조형의지라는 것은 인간적인 한계를 갖지만 어떤 염원이 만든 작품은 그 한계를 초극한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p20

 

 이 설명을 읽었을 때 종묘는 서양의 고딕식 성당의 수직적 초월과 대비되는 수평적 초월, 하늘로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게 아니라 길게 뻗은 건물을 통해 땅과 하늘을 중간에서 매개하는 것 같은 안정감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 종묘 정전의 본질은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고 한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p21

 

 동양적 미학을 논하면서 비움의 미학, 여백, 느림, 空 등이 자주 호명되곤 하는데 글을 보고 가을이나 겨울, 특히 눈 덮인 종묘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무도 발도장을 찍지 않아 굉장히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의 장막으로 덮여진 종묘. 살얼음판을 밟으며 나아가다가 풍덩! 빠져 침묵의 두께가 두터워지는 경험을 상상하게 된다.

 

 승효상이 본 월대. 건축가 승효상은 종묘의 박석을 두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p21

 

 정전 앞 월대.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넓은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이 월대가 있음으로 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더욱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p22

 

 <살롱안드로메다> 팟캐스트에서 불교도상학 편을 재밌게 들었다. 사찰을 좋아하는 나지만 불교건축과 미술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다시피했던 내게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해 따라가기가 어려웠지만 딱 하나 일주문이 성과 속을 나누는 경계를 역할을 하고, 바로 이 '문'을 넘어가는 의례적 실천을 통해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성과 속>에서 지적했듯) 속에서 성으로 진입하여 사찰에 당도하기 전까지 마음가짐을 바로 할 수 있는 준비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종묘 정전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월대가 일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나는 이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에서 그가 설계한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에 다녀왔다. 정말 좋았다) 또한 종묘 방문 당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따.

 

 "15년 만에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군."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왜 아름다운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것처럼.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것을 다 느낄 텐데."

 

 신문에서 박석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도 그는 성큼 내딛지 않았다. 안내원이 '올라가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니, 아직은"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큰며느리에게 말했다.

 

 "이 아래 공간과 위의 공간은 전혀 다른 곳이란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즐기렴." p25

 

 

   

종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후손들은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확인하고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곧 왕이 왕일 수 있는 근거였다.

 (...)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의 [고공기]에서는 도읍(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고 했다. 이를 '좌묘우사'라 한다.

 사직에서 사는 토지의 신, 직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p28

 

 종묘가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확실하게 학습했다. 그렇다면 종묘를 지은 건 누구일까? 물론 왕의 명령이 하달되어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지었겠지만 정확히 어떤 왕에 의해 종묘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며 종묘의 면모를 일신했다. 태종은 일(-)자 형태의 긴 건물 양끝에 월랑을 달아 짧은 디귿 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p31

 

 이럴 때 보면 역시 윗대가리, 아니 우두머리, 아니 정치적 지도자를 잘 선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중국 황제는 어땠는지 그 사정을 모르겠으나 조선의 국왕 역시 만만찮은 중압감을 견뎌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와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군자,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과 같은 이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의 국왕들은 흡사 아이돌 연습생과 같이 강도 높은 트레이닝과 감시 속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다. 그 무게를 견디고 훈민정음과 장영실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을 꽃피우며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과 조선 제2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정조가 있었는가 하면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도세자와 권력다툼에 의해 독살로 희생된 이가 있었다. 경복궁과 같은 궁궐을 돌면서 거기서 살았던 왕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훌륭한 고궁 관람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좁게는 타인과, 넓게는 세상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보여주듯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첨예하고 치명적인 갈등을 권력들이 충돌하는 왕실의 이야기들이 보여주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유물, 화석이 아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교하며 겉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속내,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낸 바 있다. 왕뿐만 장희빈, 대장금, 허준 같은 이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 끄는 면이 있지만 말이다.

 

 태종은 종묘에 경건하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게 하기 위해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했따. 그 당시에 이처럼 건축 공간에 주변 환경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p32 태종 매우 칭찬해!

 

 유홍준 교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따라가고 있자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에서 열심히 해설을 듣고, 듣는 사람들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 가족성당에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해설사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경청을 하다가 해설사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은 분명 익숙한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 설명을 꼭 들어보고 싶은 경우가 아니면 잘 안 듣는 편인데 세계 각국의 언어로 인류의 유산이라 볼 수 있는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모양새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았던 덕택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귀동냥으로 잠깐잠깐 설명을 주워듣기도 했다. 특히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기계에서 나오는 영어해설이 띄엄띄엄 해석되었지만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는 현대미술에 다가갈 수 있는 해석적 발판들을 얻을 수 있어 그냥 내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상하는 주관주의적, 직관주의적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역시 공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속 얘기가 옆으로 새서 좀 그렇지만 한 가지만 더 얘기한다면 한가람미술관에서 어느 수집가의 컬렉션 전시에서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두 점 봤는데 다른 작품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나를 압도했던 포스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로만 채워진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다. 훨씬 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람한지 네 시간 여가 지난 시점이었기에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비슷한 류의 추상회화들을 많이 본 상태에서 마크 로스코 작품만의 본질에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읽은 잔상이 남아 있어 '마크 로스코'라는 표상 자체에 강렬하게 반응했던 한가람미술관 때에 비해 이미 그것을 영접한 바 있는 상태에서 순수한 미술품으로서, 색깔 덩어리로서 작품을 만났지만 그것에 조응할 만한 내면의 뭔가가 부재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문화재의 경우 정말 배경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순수하게 외형적인 모양새만 보는 게 커뮤니케이션의 전부였는데 그 조형적 형식에 깃든 정신적, 사상적 내용이라들지, 건축물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라들지, 콘텍스트가 풍부해지면 텍스트 자체도 좀 더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처음엔 백지를 채워나가는 상황이라 팍팍 채워지는 느낌이 있어 재밌기도 하고, 동시에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는 느낌이라 막막하기도 하지만 연습을 통해 심미안을 기르고, 예술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시작이 반이라는 긍정적 마인드로 앞으로 즐겁게 읽어나갈 생각을 해본다.

 

 다른 무엇보다 종묘에 대한 설명이 와닿고, 읽자마자 이해가 돼서 종묘만큼은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과 혼을 담은 신전이다. 그 신전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문화력에서 나온다.

 (...)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운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의 건축적 표현이다.

 이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끝을 짧은 월랑으로 마감하여 하나의 건축으로서 완결성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는 이 건축에 친근함을 가져다준다. 동서 월랑의 구조는 대칭이 아니다. 하나의 열린 공간이고 하나는 막힌 공간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p46

 

 하나 더,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 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p52

 

 이 글을 읽고 종묘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이가 있을까.

 

 답사기를 읽으며 든 생각 : 정조와 같은 왕들이나 문장가들이 지은 문장을 음미하는 재미는 탁월했다. '문화유산답사기'가 왜 스테디셀러로 세월을 이겨내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자의 박식함이 책 한 권을 어느 한 장르로 고정시킬 수 없는 종합교양서적, 르네상스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건축, 역사, 문화, 문학, 여행, 예술을 넘나들며 한 권 안에 녹여내는 내공하며, 이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꼼꼼히 정독해야 했지만 나처럼 이쪽에 문외한인 독자의 경우 초벌구이하듯 가볍게 넘겨보고, 직접 책에 소개된 장소에 가서 문화재 해설사의 해설을 듣거나 안내판을 읽고, 산책하면서 구경한 이후에 모르는 단어 사전으로 찾아보듯 답사기에서 궁금했던 부분을 찾아 읽는 것도 괜찮은 답사기 사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3 창덕궁

 

 

4 답사기를 기약하며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기를 좋아한다. <세계테마기행> 같은 여행 다큐멘터리를 통해 현지 모습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는 데서 오는 쾌락이 있지만 몇 장의 사진만 단서로 두고, 나머지 부분을 글을 통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오는 쾌락의 고유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각문화의 홍수 속에서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수많은 이미지들에 파묻혀 사는 오늘날 오로지 활자와의 교감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은 상상력의 이용과 발현이 그 어떤 화려하고 독창적인 상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응시와 수용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일임을 체험케 한다.

 그렇다고 책을 통한 상상에만 만족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화유산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덕궁 후원 혹은 창덕궁의 어느 부분을 자주 들릴 수 있음을 서울살이의 최대 즐거움으로 꼽기도 했다. 나 역시 최근 들어 기분이 내킬 때 수원 화성행궁을 찾곤 한다. 일상으로부터 한 발짝 비껴 서 있는 건축물과 조경이 빚어내는 다른 기분과 분위기가 있기에 그렇게 일상에 변주를 주고 싶을 때 산책장소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 선희>에 경복궁이 나오듯,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화성행궁 일대가 등장하여 가끔 마음 속으로 영화를 곱씹으며, 1부와 2부의 차이에 대해, '지금'와 '그때'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독서골든벨 준비를 위해 (정작 그 행사는 신종플루의 유행으로 취소되었지만. 그리고 소독기를 열심히 썼던 나는 신종플루에 걸렸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를 재밌게 읽었으면서 '알면 사랑한다'는 등식에 따라 생긴 내 고장, 내 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국뽕'은 좋은 것 같다. 전국 국토순례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식민지 시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군산이라든지, 작년에 최고의 기분을 선사해줬던 천년고도의 경주, 부석사, 낙산사, 겨울의 오대산 월정사, 해인사, 제주도 등등 여권을 들지 않고도 '멀리'/깊게 갈 수 있는 여행을 앞으로 많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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