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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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줄거리를 읽으며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김태우의 <폭격>과 허영철박건웅의 <어느 혁명가의 삶 1920~2010>, 최수철의 <거제, 포로들의 춤>을 합쳐 놓은 소설이겠구나. <폭격>은 북한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이 형성되는 데 있어 한국전쟁 시기 북한 인민들 전체를 항시적인 불안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폭격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창비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에서 김태우 선생님이 직접 출연하셔서 특강을 해준 적이 있다. 북한의 선제공격과 이승만의 한강다리 폭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개입, 휴전으로 이어지는 한국전쟁의 지배 서사 이면의 복합적인 역사적 진실들을 마주하고 싶은 독자 분들에게 적극 권하는 바이다. 북한에서 남과 북 모두에서 인민위원장을 지낸 허영철 선생의 삶을 그려낸 <어느 혁명가의 삶>(스포일러주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의 정찬우와 달리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했으며, 출소 이후의 삶까지 담아내고 있어 비교해서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거제, 포로들의 춤>은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긴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와 같이 실존인물의 수기 및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덧대 만들어졌으며 전쟁포로들의 처절한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곡진하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이상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직접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레퍼런스들인데 사실 어렸을 때 극장에서 본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사창작물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차라리 1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사창작물들을 접해본 경우가 많은 듯한데 특별히 내가 서구중심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거나 문화 사대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닌 듯하다. 국문학을 전공한 지라 수업시간에 1950년대 대표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전쟁의 참상을 절절하게 담아내고 있는 작품을 읽어본 바 있지만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고발하는 내용(‘휴머니즘’)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내용을 제외하고 나면 별다른 게 남지 않는 느낌이었다. 전쟁의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 상태에서 써내려간 작품들의 경우 역사와 적절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서술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전후의 트라우마를 녹여낸 <오발탄> 같은 작품이 내게는 흥미롭게 읽혔다. 약간의 선입견과 더불어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을 만나지 못해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책들로 퍼즐들을 맞춰나갔던 한국전쟁의 실상을 정찬우라는 인간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났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아는 만큼 재밌는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한 사람의 삶을 내밀하게 그려내는 문학은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매개하지 않고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진 게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의 디테일들이 첨가되었을 때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통과해낸 한 영혼을 더 뜨겁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최근 한반도의 봄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통일 글짓기 시간에만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통일의 꿈이 부풀고 있는 시점인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통일의 실감을 과거의 잊혀진 전쟁의 기억의 조각을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있어 우리와는 어떤 식으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지, ‘잊혀진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진실들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 고민하고, 충분히 기억되고 애도되지 못한 영들을 추모하는 일. 사실 이렇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소설의 인물과 진실된 소통을 하는 것이 소설을 읽는 체험이 줄 수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해보았다. 끝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작가의 말이었는데 인터넷 서점에 게재된 책 소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을 가져와봤다. 작가의 말이 그 어떤 서평보다 독서욕을 고취시킬 거란 생각에.

안재성의 한 마디
 
불행했던 우리 역사의 숨겨지거나 외면된 진실을 복원하고 비극적으로 숨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글 무당처럼 살아온 내게 정찬우의 증언은 흥미로웠다.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미시적으로 생생히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현대사 공부를 깊이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당대의 전설적 인물들이 조연처럼 잠깐씩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로서 이념 전쟁의 속죄양이 되어야 했던 정찬우라는 인물의 기구한 운명에도 동정이 갔다
내가 이전에 다룬 역사적 인물에는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가 여럿 있다. 그들은 전쟁을 반대해야 할 위치에 있었으나 막지 않았으며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정찬우를 비롯한 전쟁 참가자 대다수는 개전의 새벽까지도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정찬우의 수기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관념적인 작전명령과 실제 전선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 간의 괴리가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주며, 그의 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구상에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에 맞춰져 있다. 그의 수기에서 단순한 전쟁 체험기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소설화해 널리 알리고자 결심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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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선물상자 이벤트 해서 한 번 주문해봤더니 웬걸... 취저... 고퀄... 종류별로 모아보고 싶다 ㅠ 앞으로 책 선물은 알라딘 선물상자에 담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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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센스 - 뇌신경과학자의 감각 탐험기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9
마테오 파리넬라 지음, 황승구 옮김, 정수영 감수 / 푸른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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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감정‘에 대한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탐구들을 읽어가는 중입니다. 감정과 감각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감각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림과 함께 간단명료한 설명이 제시되니까 이해하기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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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더 홀리데이 wander holiday

 저... 할 말이 있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쫌 거북목이세요
 맞아요. 원래 좀 그런데 지금은 너무 추워 가지고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뭐 지적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못 보잖아요. 그래서 혹시라도 모를 수도 있으니까 알려드리려구.
 네, 괜찮아요. 
 
 이건 제가 신문 기사에서 본 거거든요. 올바른 걷기 자세에 대해 알려줬어요. 턱은 조금 당기고, 어깨는 쫙 펴고. 조금 부담스럽게 생각될 정도로 쫙이요. 특히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선 때문에 평소에 많이 움츠러 들어 있잖아요. 가슴은 쫙 펴고, 시선은 정면을 응시해야 해요. 조금 멀리 바라본다고 생각하고. 팔은 적당한 힘을 주어서 앞뒤로 흔들고, 걷을 때는 발바닥 뒷면부터 바닥에 닿도록. 평소에 이렇게 걷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걸음에 대한 인식을 머릿속에 갖고 있으면 그래도 도움이 되니까
 
 참고할게요. 
 
 바른 자세로 걷기만 해도 목이나 허리가 펴지고, 자세교정이 되면서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손목터널증후군 이런 걸 조심해야 되니까 평소에 관리 잘해야죠.  

요가를 꾸준히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저 그리고 헬스도 시작했어요. 원래 요가 하면 같이 할 수 있는 건데 지금까지 안 했거든요. 그래서 저번에 한 번 헬스를 했는데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원래 운동을 계속 하다 보면 운동을 해야지 오히려 피로가 풀리고 그러는데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하면 그게 그만큼 추가적인 피로로 쌓이니까. 꾸준히 하면 체력에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공부하는 데 체력이 중요하니까. 자전거 많이 타세요. 하체가 탄탄하면 몸 전체를 지탱해주면서 균형이 잡힐 거예요.

 저한테는 걷기가 되게 좋은 운동이라 하더라고요. 많이 걸으려고요.

 사실 제가 저번주에 연극을 봤거든요. 두산아트센터 리뷰어를 하고 있어서. 9월부터 12월까지 2편의 연극이랑 2번의 전시를 보고 리뷰를 써야 해요.  
 
 저번에 한 번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리뷰어 하신다고.

 아마 <20세기 건담기> 할 때 말씀드렸나봐요. 이상 좋아하시니까 연극 아마 재밌게 보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러게요. 이번에 보신 건  무슨 연극인데요?

  워킹 홀리데이라는 연극인데 우리가 아는 그 워킹 홀리데이가 아니라 wɔ:kɪŋ 걷기랑 홀리데이는 이게 분단을 소재로 한 거라 휴전을 휴일holiday라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음, 그렇구나.
 
 휴전한 이후의 나날들을 휴일이라 한 것 같아요. 파주에서 동해 바다까지 DMZ를 따라 걷는 내용이에요. 연극을 하기 전에 연극배우들이 직접 걸어간 걸 영상으로 찍어서 연극을 할 때 스크린에 영상을 띄워서 같이 보여줬어요. 저번에 얘기했던 영화 <와일드>처럼 계속 걸으면서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랄까.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것도 있지만 타인이나 역사에 새겨진 상처를 보듬어 나가는.  
 
 오, 재밌을 것 같은데요?!

 아, 예전에 들은 재미 있는 얘기가 있는데요. 프랑스에서인가 어느 나라는 청소년 범죄자들에게 몇 백 킬로인가를 걸으면 출소시켜주는 제도 같은 게 있대요.

 오, 그게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설명해주는 식인데 길가다 마주친 군인에 대해 얘기한다든지, 배우들이 군대에 있을 때 체험한 일들에 대해 얘기한다든지, 총 쏘는 걸 체험하면서 총구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표적으로 보인다던지 그런 얘기들을 쭉 하는데 사실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걷기에 대한 거였어요. 오래 걸으려면 제일 못 걷는 사람들이 가운데에 서야 한대요. 50분 걷고, 10분 정도 쉬어야 하고 쉴 때는 다리를 머리보다 높게 올리면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고요. 양말은 발가락 양말을 신는 게 좋고. 몇 겹씩 신어야 한대요. 여기서 상대방의 걸음걸이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게 제일 재밌었어요. 걸음걸이에 그 사람의 인격과 성격이 묻어난달까. 그 중 인물 누구는 아까 말한 올바른 걸음걸이에 가깝게 걷고, 누구는 발걸음이 되게 가벼운데 그러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고 안정감이 느껴지고. 누구는 탄탄한 하체를 바탕으로 앞으로 쭉쭉 걸어나가는데 거기서 남미의 춤 리듬이 연상되고. 그 장면을 본 이후로 길 가다가 마주친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더라구요.   
 
 스스로의 걸음걸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저는 정자세로 걸을 때도 있긴 한데 좀 바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돼서 그런지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요. 한 칸씩 올라가면 뭔가 엔진은 쌩쌩 돌아가는데 바퀴가 거기에 맞춰서 안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도 걸음걸이가 빠른 편인데 되게 빠르신 것 같아요.
 열심히 따라가느라고 그렇죠 !! 예전부터 되게 빠르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쫓아간 거였어요.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개인의 성향이 그런 건데요, 뭘.
 아니에요. 그건 제가 배려하고 맞출 수 있는 부분이니까. 다음부터 말씀해주세요. 
 걷기 좋아하세요? 산책 같은 거.
 좋아하긴 하는데 걷는 거 자체가 좋기보다는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풍경을 즐기려면 보통 천천히 걷지 않나요? 빨리 걸으면서 바뀌는 풍경을 보는 걸 좋아하는 건가요?
 맞아요.
 
 전에 건축신문에서 걷기와 도시를 주제로 한 글들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북촌-서촌 쪽부터 학교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조성할 거라는 얘기를 봤어요. 보통 서촌에서 부암동까지 1시간 정도 걸려서 몇 번 걸어가봤는데 지나가면서 보이는 풍경도 괜찮고, 차 소음도 다른 데보다 심하지 않아서 걸으면서 얘기하기 괜찮은 코스더라고요. 부암동은 워낙 조용하고 여유로운 동네니까. 괜찮은 카페들도 많고요. 나중에 시간되면 같이 가요.

 그래요.

2 산책하는 자의 다섯 가지 즐거움

 저는 산책을 좋아합니다. 목적지를 갖고 움직이는 '이동'이 아닌 걷기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을 둔 산책-
 VR 기술이 발달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흐르지 않는 영원의 시간에 갇혀 제자리에서 걷고 있는 느낌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분명 걸어서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데 나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없을 때 무슨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지, 어떤 기분에 사로잡힐지 ...
 예전에는 근처 호수공원 같은 곳도 가곤 했는데 요즘은 거의 학교 안에서만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밥 먹고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코스인데 풍경이 익숙해서 그런지 차분하게 저 자신에 집중하기가 편합니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가끔 생각이 멈춘 듯한 평온한 순간이 찾아올 때를 가장 좋아합니다. 예전에 니체에 대한 어느 책에서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평지를 산책하는 게 좋고, 생각이 막혀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에는 산을 올라가는 게 좋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평지 산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산행에서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겠지만 지형과 걷기 스타일에 따라 걷기의 다양한 변주가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1절에서 썼듯 좋아하는 사람과 걸으면 대화를 나누는 시간만한 게 세상에 또 없는 것 같습니다. 밥 먹으면서 여유롭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 신체적으로 에너지가 가라앉아서 그런지 대화에 온전히 집중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분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라앉다 보면 밤이나 새벽에 출몰하는 내면의 자아가 깨어나 대화의 흐름에 집중하는 걸 방해합니다. 대신 걸으면서 대화를 하면 몸에 기분 좋은 긴장이 유지되고, 두뇌회전도 뭔가 더 빠른 느낌이고, 대화가 좀 더 탄력적으로 굴러가는 느낌을 줍니다. 풍경이 즉각적으로 바뀌는 게 영향이 꽤 큰 것 같습니다. 누구와 어디서 함께 했는지, 어디서 누구와 함께 했는지 장소와 사람이 연결되어 기억에 남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친한 친구와 일요일에 동묘에서 옷 구경했던 게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어떤 친구와는 연남동 '연트럴파크'를 걸었던 기억이 가장 오래 남을 것 같고, 어떤 친구와는 건대 - 종합운동장 사이에 있는 공원이, 어떤 친구와는 부암동에서 서촌으로 오는 길이, 어떤 친구와는 성북천이, 어떤 친구와는 ... ...
 
 음악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음악은 기분과 정서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쳐 신체의 리듬을 바꾸는 역할을 하는데 가끔 데이빗 보위의 <Modern Love>를 켜놓고 <나쁜 피>의 드니 라방의 질주를 머릿속에 그리며 달리곤 합니다. 8월에 구례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에 한밤중의 터널에서 창문을 열고 <Heroes>를 열창했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잠깐 샛길로 따지자면 올해 9월에 책방 숨도에서 코스모스 책 모임을 하면서 <Life on Mars>를 듣고, 뤽 베송의 <발레리안> 초입부에 흘러나온 <Space oddity>에 소름 돋았던 기억, EIDF에서 데이비드 보위 다큐멘터리를 봤던 기억 등 데이비드 보위에 대한 추억들이 많이 쌓인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예정대로 그가 출연했더라면 어땠을지... 사이먼 크리츨리가 쓴 <데이비드 보위(그의 영향)>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위는 미지의 쾌락과 반짝이는 지성의 세계를 구현했다. 보위는 우리가 살고 있던 몹시 기분 나쁜 중산층 주택가에서 탈출할 길을 열어 주었다. 보위는 불만을 품은 사람, 자기 자신이 편안하지 않은 사람, 사회적으로 서투른 사람, 소외된 사람에게 가장 능란하게 말했다. 괴짜들, 괴물들, 아웃사이더들에게 말했고, 특별한 친밀함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환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내 경우에는, 44년 동안 계속된 사랑 이야기.” (pp.189-190)

 3. 워킹 홀리데이Walking Holiday 

 서설이 너무 길었네요. 연극 얘기를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DMZ 도보여행을 통해 분단을 얘기한다'

 작품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한 문장을 이보다 더 잘 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극적인 사건이나 서사가 두드러지는 작품과는 성격을 달리 합니다. 저번에 봤던 <생각은 자유>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적절한 명명인지 모르겠지만 에세이 연극이랄까요. 에세이가 사유와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 쓴 글쓰기 양식이라면 에세이 연극은 이 사유와 감정을 연극적 방법과 장치들을 활용하여 펼쳐 낸 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은 자유>가 연출가의 독일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바라본 한국사회에 대한 감정과 생각 들을 풀어냈듯, <워킹 홀리데이>는 DMZ 도보 여행을 바탕으로 걸으면서 분단 상황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풀어냅니다. <생각은 자유>가 독일이란 외부의 위치에서 조금 다른 각도로 한국을 바라보게끔 했다면, <워킹 홀리데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들의 도보여행에 동참하게끔 유도합니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인도인 럭키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인도 하면 '갠지스 강' '코끼리' '요가' '카레' '소' 등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친구들과의 여행을 통해 인도의 젊은 모습,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아마 그의 말에는 '실상'이란 말이 괄호쳐져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듯 북한 혹은 분단 하면 '탈북자' '김정은' '핵무기' 를 먼저 떠올리는 우리가 DMZ를 걸으며 분단을, 또 평화를 실감 있게 느끼고, 가상과 허상의 이미지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실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마 이 연극을 보고 나서 DMZ 도보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관객이 있다면 연출가의 입장에서 최고의 반응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도보여행으로 DMZ를 걸으며 분단상황을 생각하고 '체험'한다는 포맷은 자칫 잘못 하면 굉장히 평면적이고 단순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놉시스만 읽었을 때 사실 연극이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거든요. 현장에 직접 가봐야 역사를, 역사의 흔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메시지는 이미 역사책이나 하다 못해 유홍준 선생님의 답사기를 통해 익히 들어온 얘기인데 도보여행을 통해 분단상황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지 기대치가 높지 않았습니다. 물론 간단하고 익숙한 메시지더라도 이를 어떻게 새롭게 전달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술에 있어 창조는 마술과 달리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다기보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감각하고 해석하게 만드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를 테면 반전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은 수도 없이 생산되었지만 이들은 저마다의 접근방식을 취했습니다. 저쟁터에 카메라를 가져가 전투의 참혹한 광경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둔 방식이 있었고, 스펙터클한 전투를 배제한 채 전쟁터 뒤에 남겨진 일반 사람들에 주목해 전쟁상황이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내모는 상황을 조명하는 데 방점을 찍은 방식이 있었고, 지도자 급의 사람들의 고뇌에 초점을 맞춘 방식, 일반 서민들 중에서도 특히 이중, 삼중적으로 고통받았던 여성을 조명하는 방식, 전후에 상흔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비추는 방식 등등 대부분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전쟁의 잔혹함과 폭력성 앞에 참혹하게 뭉개진 삶/죽음을 포착하여 슬픔에 동화되게끔 비극적으로 연출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에서는 뭔가 새로운 게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 으로 연극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커다랗지 않은 화면에 배우들이 등장하여 걷기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걷다 보면 자기 자신이 소멸되는 느낌이 든다는, 그리하여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선우'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무대 위 연극과 다큐멘터리 영상이 함께 작품을 이끌어나갈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냥 다큐멘터리로 제작해도 되었을 것 같은데 이걸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워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지를 작품의 관전 포인트로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놀았던 놀이터를 닮은 흙 무대에 눈길이 갔습니다. DMZ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무대 역할을 하는 흙 위에서 모형을 통해 현실을 아날로그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이를 배우가 캠코더로 찍어서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연극이 다큐멘터리가 되고, 다큐멘터리가 연극이 되는 상황, 아니 그보다 녹화된 영상, 시시각각 스크린으로 송출되는 영상, 스크린을 거치지 않는 연기의 앙상블이 한편의 연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연극은 어떤 눈으로, 어떤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구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면 그저 명중시켜야 할 '표적'으로 인식되듯 '렌즈'와' '각도'에 따라 사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미디어에 의해 현실이 재편되고 재구성됨에 따라 인간의 지각방식과 환경 또한 달라진다는, '미디어는 메세지'라는 명제를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다른 시공간에 있는 사물들을 찍어 스크린에 '완성된' 영상을 띄워 보여줬더라면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줄어들었을 텐데  흙 위에 나무가 심어지고, 비닐을 깔아 강이 흐르기 시작하고, 북한군들이 묶는 모텔이 세우는 모습 등을 지켜보고, 그걸 캠코더로 찍어 화면에 띄운 모습과 비교해보면서 결국 이 모든 게 나의 인식/해석에 의해 완성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기승전칸트??).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분단 상황'을 실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북한 및 북핵 관련 이슈가 뜬다고 해서 현상의 갈등 너머 분단 상황, 모순의 본질까지 파고들어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그렇습니다.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듯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신호들일 뿐인데 더 이상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신체나 감정마저도 직접적으로 체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걷기를 통해 무뎌져 있는 신체의 감각을 일깨워 뭔가를 실감해낼 수 있을까요? 미디어와 하이테크가 일상에 점점 침투하고 융합되어 우리 몸 자체가 하나의 핫미디어가 되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이를 쿨미디어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요? 그래서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신체나 감각, 감정, 사유 를 지상으로 발 붙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실감났던 순간은 관객석 뒤에 서서 배우들이 무대에 세워진 표적을 향해 장난감 총을 발포할 때였습니다. 저는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발 쪽으로 비비탄 총알들이 통통 튀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친구에게 연극 설명을 해줄 때 이 총알이 열 마디 말 이상의 전달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배후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상상하니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비비탄의 매운 맛을 몸소 체험한 바 있거든요. 초등학생 때 딱지 치기, 미니카 경주 시합, 놀이터에서 놀기, 다양한 방식으로 날아봤지만 그중에는 장난감 총싸움도 있었습니다. 연극에서 사용되었던 소총보다는 주로 권총 형태의 총을 가지고 놀았었죠. 그걸 사람을 향해 발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 발사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발사했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쏜 총알에 맞아 누가 울거나 고통스러워 한 기억은 없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아빠와 놀다가 아빠에게 연극에서 사용된 소품과 거의 똑같은 소총으로 근거리에서 총알에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마 눈물이 고였을 것 같은데 울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라면 사내자식이 그 정도에 우냐며 다그칠 만한 분이었거든요. 총을 빼앗아서 갈겨줬어야 했는데...

 아직 실탄을 발포해본 적 없는 저로선 비비탄 총알이 발사되는 2분, 3분여의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진짜 총을 잡고 표적을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해서 총알을 발사해야 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명탐정코난 극장판 10기? 탐정들의 진혼가 에서 나온 대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총을 발사하는 순간 내 몸 속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일 겁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해 전술적 핵무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평화라는 게 존재론적으로 무엇인지 재정의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평화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건 평화가 단순히 육자회담에 참석하는 국가의 지도자들에 의해 법적으로 체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평화를 희망하는 시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잠시 워킹 홀리데이를 가져보면서 생각하고 느껴보는 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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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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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대한 2권의 책이 이후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연 중요한 저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분량 때문에 시도를 못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분량의 책이 나와서 독서욕을 마구 자극하네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와 같이 읽어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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